Predatory Soul RAW novel - Chapter 142
-142-
날이 어두웠다. 먹구름이 해를 가린 탓이었다. 빛이 들지 않는 하늘은 우중충하고 흐려서, 땅 위의 모든 것들이 회색빛으로 칙칙하게 가라앉았다.
야외식장을 화려하게 꾸민 생화와 비단장식, 금과 보석들은 제 빛을 발하지 못하고 어그러졌다.
결혼식을 치르기에는 너무나 우울한 날씨였다. 그리고 오늘 신부로서 만인의 앞에 나서게 될 레아 또한 끝없이 기분이 곤두박질 쳐있었다.
무표정하게 거울을 바라보고 있는 레아에게는 수십의 사람들이 달라붙어 있었다. 치장을 마무리 짓는 왕녀궁의 시녀들부터 드레스를 마지막으로 점검하는 재단사들까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달라붙은 이들 때문에 손가락 하나 마음대로 까닥할 수가 없었다.
수많은 이들 사이에 갇혀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답답했다. 숨 쉴 틈도 없이 허리를 꽉 조인 코르셋이나, 어제부터 물 한 모금 제대로 마시지 못했다는 것쯤은 아무렇지 않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거울에 비친 신부는 아름다웠다. 그녀가 입은 새하얀 웨딩드레스는 티끌 한 점 없이 깨끗해서, 아주 작은 먼지라도 묻을까 두려울 정도였다. 흰 레이스와 작은 수정 따위로 눈부시게 장식된 천을 멍하니 바라보던 레아는 불쑥 구토감이 치밀었다.
깨끗하고 완벽한 드레스를 갈가리 찢어버리고, 보란 듯이 침을 뱉어주고 싶었다. 충동을 참기 위해 주먹을 움켜쥐니, 손톱을 다듬고 있던 시녀가 곧장 주의를 주었다.
초야 때 남편의 피부에 상처 입히는 일이 없도록 손톱을 짧게 다듬는 것이었다. 손톱 정리를 끝낸 시녀는 섬세한 레이스로 짜인 장갑을 레아의 손에 씌우고, 잠시 빼놓고 있었던 결혼반지를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머리에 면사포를 씌우던 때였다. 부산하게 움직이던 시녀들이 일제히 멈췄다. 결혼식 전까지 신성하게 지켜져야 할 신부의 공간에 등장한 침입자 탓이었다.
말끔한 정장을 입은 블레언은 구둣발로 방 안에 들어섰다. 결혼식 전에 신부 얼굴을 보면 불운해진다는 풍습이 존재하건만, 별로 개의치 않는 듯했다. 그런 것을 신경 쓰기에는 이미 너무나 많은 일들을 겪은 탓이리라.
“다 나가.”
블레언은 방 안의 사람들을 죄다 내쫓았다. 단 둘만이 남았지만, 그는 레아에게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문가에 기대어 바라볼 뿐이었다.
“…….”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블레언은 인형으로 만들어버린 후 레아를 찾지 않았다. 한동안 계속 내버려두기만 하다가 처음으로 보는 것이었다.
그는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레아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얼마간 무표정하게 보다가 그대로 되돌아 나갔다. 어떤 행동도, 어떤 말도 하지 않고서 말이다.
무슨 뜻으로 저를 찾아왔는지 알 수 없었다. 레아는 굳이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것까지 생각하기엔 눈앞에 닥친 일들이 너무 많았다.
식 직전, 레아는 시녀들을 전부 물리고 미리 숨겨두었던 묘약을 꺼냈다. 작은 유리병에 담긴 검은색 액체를 입 안에 머금고 빈 병은 다시 숨겨두었다. 그리고 결혼식장으로 향했다.
시녀 여럿이 드레스자락이 구겨지지 않도록 뒤를 받쳐 들고 따라왔다. 야외에 꾸며진 식장은 더없이 사치스럽고 화려했다.
레아는 줄지어 앉아있는 하객들을 바라보았다. 새로운 부부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하객들은 식장을 꾸민 장식들과 다름없었다. 전부 똑같이 활짝 웃으며, 태엽을 감아놓은 인형처럼 박수를 쏟아냈다.
악단이 연주하는 음악을 들으며 레아는 새하얀 비단을 깔아놓은 길 끝에 자리했다. 옅은 분홍색과 흰색 리시안셔스를 섞어 만든 부케를 손에 쥐고, 고운 면사포를 덮어쓴 채였다.
블레언은 이미 길의 끝에 주례와 함께 서있었다. 박수와 환호에 파묻힌 레아는 느리게 걸음을 옮겼다.
발을 내딛을 때마다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절벽 끄트머리로 걸어가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교만했을지도 몰랐다. 주술의 일부를 끊어내고, 기억의 파편을 되찾으면서 당연히 남은 주술 또한 풀어낼 수 있으리라 자신했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이니 해낼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여전히 기억의 파편만이 부스러기처럼 머릿속을 굴러다닐 뿐이었다. 레아는 장밋빛으로 곱게 칠해놓은 입술을 말아 물었다.
기억을 되찾아 이샤칸 앞에서 당당해지고 싶다는 마음이 이리도 큰 욕심이었을까. 결국 아무 기억도 찾지 못하고, 그냥 이렇게…….
하객들의 가장 앞자리에 앉은 세르디나가 보였다. 그녀는 두꺼운 화장으로 병색을 감추고, 딱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새 신부 못잖은 화려한 드레스와 장신구로 치장했으나, 눈빛에 서린 악독한 기운은 그녀의 주변을 어둑하게 만들었다.
세르디나가 날카로운 눈으로 레아를 훑어 내렸다. 샅샅이 뜯어보는 시선에 레아는 조용히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그리고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끝끝내 기억을 찾지 못했으나, 아직 해야 할 일들이 남아있었다. 왕궁 사람들만이라도 반드시 주술에서 풀어내야 했다.
주례의 앞에 선 레아는 블레언과 마주 보았다. 고리타분한 주례사를 듣고, 에스티아의 전통에 맞춰서 주례가 건넨 술잔을 받아들었다. 술을 반씩 나눠 마시며 부부의 연을 맺는 의식이었다.
레아는 술을 마시는 척하며 입 안에 머금고 있던 묘약을 몰래 뱉어냈다. 검은색 액체는 백포도주 속으로 흔적도 없이 섞여서 사라졌다.
블레언은 레아가 건넨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성질부리듯 벌컥벌컥 들이켠 그가 빈 술잔을 내던졌다. 결혼식을 치르는 신랑이라곤 믿기지 않는 태도였다.
그러나 아무도 그 사실에 놀라지 않았다. 하객들은 짜 맞춘 듯 방긋방긋 웃기만 했다. 수염이 성성한 주례 또한 인자하게 웃으며 마지막 맹세의 말을 질문했다.
“블레언 드 에스티아. 눈앞의 연인을 영원히 사랑하리라 맹세하겠습니까?”
블레언은 설핏 미소 지었다. 머릿속으로 어떤 결론을 내린 것처럼 비틀린 웃음을 그리며 답했다.
“맹세합니다.”
대답을 들은 주례는 이제 레아를 돌아보았다.
“레아 드 에스티아.”
남편이 될 사람과 똑같은 성을 가진 신부임에도, 늙은 주례는 아무런 의문을 느끼지 못하고 질문했다.
“눈앞의 연인을 영원히 사랑하리라 맹세하겠습니까?”
레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길어지는 침묵에 식장이 술렁였다. 기계처럼 박수하고 환호하던 하객들조차도 주춤할 만큼 강력한 이질감이었다.
입술을 단단히 다문 채 블레언을 보았다. 그의 푸른색 눈동자가 잘게 물결쳤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바라보는 사이, 식장의 웅성거림은 고조에 치달았다.
아주 느릿하게, 레아는 결혼반지를 빼냈다. 그리고 블레언에게 집어던졌다. 가슴팍을 툭 맞고 떨어진 결혼반지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블레언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너…….”
그때였다. 뿔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화려하고 우아한 금관악기들로 잔잔히 연주되던 악단의 음악과는 현저하게 다른, 적나라하고 야만적인 소리였다. 칼로 깊게 베어내듯, 뿔나팔은 한 차례 기다랗게 울렸다. 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찢어지는 비명이 솟구쳤다.
“아아아악!!”
서로 돌아보며 당황해하던 하객들은 전부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혼식장 주변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빼들었다. 식장의 입구에서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야만족! 야만족이다!!”
잘 차려입은 신사숙녀와 은빛 갑주의 기사들 사이로 이질적인 존재들이 뛰어들었다. 가벼운 갑옷을 입은 그들은 짐승과 같이 날렵하게 결혼식장 안으로 파고들었다. 검과 검이 부닥치는 쇳소리가 퍼지고, 순백의 비단길 위로 붉은 핏물이 흩뿌려졌다.
점점이 흐트러진 핏방울이 하얀 천에 깊숙하게 배어들었다. 무엇으로도 지워지지 않을 것처럼 붉게 박혀든 핏물이었다.
죽음의 공포에 절규하는 하객들의 비명이 귓가를 따갑게 두드렸다. 결혼식장을 어여쁘게 꾸며놓았던 생화와 리본 장식은 흙발에 무참히 짓밟혔다.
모든 아름다운 것이 망쳐지는 순간 속에서 레아는 그를 찾아냈다. 피에 젖은 남자는 핏물이 툭툭 떨어지는 검을 들고 있었다.
그가 선명한 금색 눈으로 레아를 꿰뚫어보았다. 화살을 맞은 것처럼 심장 위에 불같은 통증이 일었다. 잿더미로 스러지는 듯한 고통과 함께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솜털 하나까지 쭈뼛하게 솟아오르는 섬뜩함은 여태껏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거대한 기시감이었다. 레아는 숨을 멈췄다. 피에 젖은 평원의 억새풀이 떠올랐다.
그때도 그랬다. 그는 무법한 약탈자와 같은 모습을 하고서 레아를 찾아왔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며 체념하던 순간에…….
남자는 레아의 인생을 망가뜨렸다.
왕녀로서 살아온 평생을 어그러뜨리고,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해주었다. 레아는 그의 손아래에서 부서지고, 또한 새롭게 태어났다.
지금도 그러했다. 정교하게 쌓아올린 인형의 집을 무너뜨리고, 꼭두각시처럼 실에 얽매여있던 레아를 난도질했다.
레아를 망가뜨린 이는 느릿하게 입술을 움직였다. 그가 이름을 불렀다.
“레아.”
그 순간, 레아는 문을 열었다. 몹시 기묘한 감각이었다. 손에 피가 나도록 잡아당기고 두드려도 열리지 않던 자물쇠와 쇠문은 저절로 녹슬고 삭아 스러졌다.
열쇠 따위, 애초부터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모든 기억의 주인은 레아였기에.
“이리 와, 레아.”
이샤칸이 재차 레아를 불렀다. 초조함이 섞인 목소리였다. 미동조차 않고 쳐다보기만 하는 레아의 모습에 두려워하고 있었다.
혹시나 세르디나의 농간에 휘말려 인형이 되어버린 것은 아닌지, 또다시 자신을 잊어버린 것은 아닌지.
그는 괴롭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요구했다.
“제발…….”
더 이상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레아는 곧장 그에게 달려갔다. 드레스가 무거운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뛰어갔다.
그리고 레아가 품에 안기는 순간, 이샤칸은 눈을 질끈 감았다. 하얀 드레스가 핏물에 온통 젖어들었다. 붉게 번져나가는 얼룩은 선명했다. 맞닿은 흉곽이 크게 부풀어 오르고, 이내 느리게 가라앉았다. 그가 더운 숨을 뱉어냈다.
“……내 신부.”
레아는 이샤칸의 신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