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datory Soul RAW novel - Chapter 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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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가는 뻑뻑한 눈을 끔뻑였다. 요 며칠 거의 밤을 새우다시피 했다. 저뿐만이 아니라, 쿠르칸의 주술사들은 전부 똑같은 상태였다.
눈을 감아도 잠이 오질 않았다. 이번에는 반드시 해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모르가는 잔뜩 인상을 쓰고서 냄비 안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는 검은 묘약을 노려보았다.
모래시계의 모래알이 끝까지 다 떨어진 것을 확인한 후에 다음 재료를 집어넣었다. 추를 얹은 저울에 무게를 재가며 재료를 전부 넣었을 때였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모르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샤칸 님!”
이샤칸이 작은 유리병을 툭 던졌다. 모르가가 유리병을 받아들자, 그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레아가 보낸 선물.”
“……!”
모르가는 황급히 유리병 안을 확인했다. 짧은 은빛 머리카락이 한 가닥 들어있었다. 그 개자식의 머리카락이었다.
곧장 머리카락을 꺼내 냄비 속에 집어넣었다. 부글거리던 액체는 찰나 화려한 금빛을 띠었다가, 다시금 검은빛으로 물들었다.
액체의 색깔이 바뀌는 것을 확인한 이샤칸이 슬렁슬렁 다가오며 물었다.
“그것이면 되었나.”
“충분합니다. 그리고…….”
모르가는 이샤칸에게 단도를 내밀었다. 단도를 받아든 이샤칸은 익숙하게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그리고 팔뚝 위를 천천히 그어냈다. 은색 칼날 끝을 따라서 붉은 선이 생겨났다.
모르가는 넓은 수반을 아래에 받쳤다. 팔뚝을 타고 추락한 핏방울이 은색 수반 위에 점점이 찍혔다.
과거 이샤칸이 만들라 명한 물건은 현재 거의 완성단계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것을 만들기 위해서는 이샤칸의 피가 필수적이었다. 특히 제작을 마무리 짓는 단계에서는 상당량의 피가 필요했다.
채혈 양이 제법 되어서 체력적으로 힘들 텐데도, 그는 별다른 티를 내지 않았다. 핏물이 잘 나오는지 확인한 후에 모르가에게 다른 쪽 손을 까닥일 뿐이었다.
모르가는 그에게 얼른 불을 붙인 담뱃대를 내밀었다. 이샤칸은 담뱃대를 받아들고 천천히 연기를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담뱃대를 문 입매가 느른했다.
평온하게 흩어지는 회색빛 연기 아래로 핏방울이 뚝뚝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눈을 반쯤 내리깔고 있던 이샤칸이 문득 입을 열었다.
“주술이 깨지는 순간에 사용하면 가장 좋다고 했었나.”
“예. 주술의 반작용은 주술사에게 상당한 충격을 주는 일인지라……. 그때 사용하시면 가장 효력이 클 것입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이샤칸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약초를 피우는 그를 보며 모르가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간 이샤칸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소농장을 떠난 시나엘 남작부인은 이샤칸의 주도 아래 왕녀궁 시녀들을 하나씩 만나고 있었다.
혹시나 시나엘 남작부인의 존재가 시녀들에게 걸린 주술을 흔드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싶어서였다.
명백한 증거물은 주술을 흔들기 좋은 단초가 되었다. 레아가 그녀를 만나고 소농장의 권리 증서를 보면서 주술이 흔들렸던 것처럼 말이다.
뚜렷한 성과를 거둬내지는 못했지만, 시나엘 남작부인은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매달렸다. 발각되면 위험해질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레아를 위해 목숨을 걸었다.
오베르데 변경백과 웨들턴 백작 또한 결혼식 때 한 역할씩 맡을 예정이었다. 가장 처음 변경백에게 접근했을 때, 이샤칸은 일전에 그가 레아와 주고받았던 서신을 증거로 내밀었다.
이샤칸에 의해 납치당하고, 레아에게 협박당해 에스티아 내부 상황을 빼돌려 전하던 서신이었다.
기억에 존재하지 않는 서신이 등장하자 오베르데 변경백은 크게 당황했고, 주술이 흔들리는 계기가 되었다. 하여 웨들턴 백작과 함께 쿠르칸을 돕기로 한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적절한 협박이 섞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모든 것을 끝내기 위해, 레아는 왕궁으로 돌아갔다.
결혼식 전까지 남은 기억을 찾고, 왕궁 사람들을 주술에서 풀어내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모르가에게 두 가지를 요구했다.
강한 환각을 일으킬 수 있는 묘약과 주술을 일시적으로 막아줄 수 있는 도구였다.
대비, 세르디나는 한계를 넘어선 힘을 지니며 현저히 불안정해진 상태였다. 레아는 대비의 눈을 잠시 가리고, 속임수를 숨겨놓을 수 있는 빈틈을 만들어내길 원했다.
모르가는 최선을 다해 레아가 원하는 것들을 만들어주었다. 허나 확신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한없이 불확실했다. 에스티아의 왕녀가 기억을 되찾고 쿠르칸의 왕비로 되돌아올지, 블레언과 세르디나를 제대로 속일 수 있을지…….
하지만 레아는 직접 격류 속으로 몸을 던졌다. 그리고 이샤칸 또한 기꺼이 그녀를 따라 뛰어들었다. 몰아치는 풍랑에 무엇이 있을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그러나 과정이 어떻게 흘러가든 결과는 같으리라. 레아가 어떤 상태이든 간에, 이샤칸은 결혼식 날 반려를 되찾아갈 것이었다.
생각에 빠져있던 모르가는 수반 바닥이 핏물로 찰랑이는 것을 보고 정신 차렸다. 그가 황급히 천으로 지혈을 시작했다. 잔뜩 긴장한 모르가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내가 하지.”
이샤칸은 직접 천을 누르며 지혈했다. 신체능력이 뛰어난 쿠르칸 중에서도 가장 월등한 변이종이었다. 천을 물들이던 핏물은 금세 멎어버렸다.
모르가는 깨끗한 붕대를 꺼내 이샤칸의 팔뚝을 단단히 감았다. 재떨이에 얹어놓았던 담뱃대를 집어든 그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이샤칸은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뒤편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던 하반과 게닌이 문을 양옆으로 열어주었다.
“도마리들이 찾아왔습니다.”
게닌의 보고에 이샤칸이 픽 웃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들어볼까.”
계단 아래편, 여관 일 층에 수십 명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이샤칸은 그들을 보며 느리게 연기를 뱉었다.
긴 담뱃대를 손에 들고 한참 내려다보던 이샤칸이 입을 열었다.
“결정을 내린 것인가.”
이샤칸의 말에 가장 앞에 무릎 꿇고 있던 늙은 도마리가 고개를 조아렸다.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레아에게 머리카락의 색을 바꾸는 묘약을 건넸던 여인이었다. 이샤칸은 그녀를 물끄러미 보며 말했다.
“전부 모이지는 않았군.”
“여전히 세르디나를 따르는 자들도 있으나 극히 일부입니다. 그들은…….”
그녀는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쿠르칸의 왕께서 원하시는 대로 처분하십시오.”
* * *
왕궁으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레아가 가장 걱정한 것은 역시 블레언이었다. 그는 절대로 자신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을 터였다.
하여 그가 손을 대기 전에, 먼저 가졌다고 착각할 수 있도록 만들기로 결심했다. 환각을 일으키는 약물을 먹인 것이다.
레아는 블레언 몰래 술잔에 묘약을 집어넣었다. 묘약을 마신 블레언은 그날 밤 레아와 성교를 나누는 환각을 보게 되었다.
환각에 취해 홀로 침대에서 헐떡이는 블레언의 옆에서 숨죽이고 있다가, 그가 완전히 약에 취했을 즈음 조심스럽게 접근해 머리카락을 한 가닥 뽑아냈다.
그렇게 얻어낸 머리카락은 작은 유리병에 넣어 왕녀궁 창문턱에 올려놓았다. 유리병은 다음 날 사라졌다. 그리고 며칠 뒤 검은색 액체가 담겨서 되돌아왔다. 가장 마지막에 쓰일 것이었다. 레아는 유리병을 소중히 숨겨놓았다.
블레언은 빠르게 환각에 취해갔다. 매일매일 함께 식사하며 지속적으로 묘약을 먹인 덕분이었다. 환상 속의 레아와 현실의 레아에게 괴리감을 느끼던 블레언은 기어코 예상했던 대로 행동했다. 레아를 인형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블레언에게 끌려가 대비궁에 갇힌 레아는 세르디나를 다시 만났다. 그녀는 형편없이 망가져있었다. 퀭한 얼굴에 남은 것은 형형하게 번들거리는 눈빛뿐이었다. 그날, 레아는 인형이 될 뻔한 위기를 넘겼다.
-배 속에 품으신 아이가 변이종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모험입니다.
일시적으로 주술을 막아낼 수 있는 도구를 만들어주며, 모르가는 그렇게 말했다. 세르디나가 불안정하다고는 하나, 여전히 강한 힘을 가진 존재였다. 모르가는 세르디나의 주술을 완전히 막아낼 수 없었다.
허나 레아가 이샤칸의 피를 이은 아이를 품고 있기 때문에 상황이 달라졌다. 도구로 보조를 해준다면, 배 속의 아기가 강력한 주술 방해 역할을 해낼 수 있으리라 판단한 것이다.
다만 도구를 지속적으로 몸에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왕궁으로 돌아가면 시녀들이 치장을 담당할 테니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계속 가지고 다닐 수 있는 단 하나의 물건이 있었다.
“…….”
레아는 손가락에 낀 결혼반지를 바라보았다. 자수정과 금강석이 빛을 받아 영롱하게 반짝였다. 블레언이 선물했고, 이샤칸이 되돌려준 결혼반지는 도구로서 제 역할을 훌륭하게 해냈다. 일회성의 소모를 다했으니, 이제부터는 레아 혼자서 헤쳐 나가야 했다.
마지막으로 주어진 기회였다. 기억의 조각을 찾기 위해서, 레아는 부지런히 왕궁을 돌아다녔다.
어떻게든 기억을 돌려놓고 싶었다. 하지만 기시감이 느껴지는 장소를 찾아가도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일전에는 부서진 기억이라도 단편적이나마 생각났건만, 이제는 그마저 없었다.
모든 것을 준비해놓았으나, 정작 가장 중요한 기억을 찾지 못한 레아는 갈수록 마음이 초조해졌다. 그러나 꽉 틀어 막힌 것처럼 무엇도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레아는 기억을 되찾지 못한 채 결혼식을 맞이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