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datory Soul RAW novel - Chapter 37
-37-
“…….”
이샤칸은 잠깐 레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얼마간 입술을 다물고 있다가,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말문을 열었다.
“……네가 주인이라고?”
그는 바닥에 떨어진 검은 가면을 보았다가, 다시 레아를 바라보았다.
가로로 길게 찢어진 눈매에 담긴 빛이 사나웠다. 금안의 동공이 느릿하게 좁아졌다.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해줘야겠는데, 레아.”
조심스럽게 숨을 들이마셨다. 긴장감에 굳어진 몸은 호흡조차 자유롭지 못했다. 피부에 따끔따끔한 감각이 들었다.
레아는 입술을 벌렸다. 그러나 벌어진 입술에선 아무 소리도 새어나오지 않았다. 말을 하고 싶은데 할 수가 없었다.
“……하아.”
이샤칸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레아를 번쩍 안아들었다. 안락의자에 앉은 그는 레아를 제 무릎 위에 앉히곤 손으로 뺨을 감쌌다.
쿠르칸 특유의 높은 체온이 얼어붙은 뺨을 따뜻하게 녹여주었다. 칼날 같던 기세를 누그러뜨린 이샤칸이 부드럽게 속삭였다.
“내가 과했군.”
그제야 숨통이 트였다. 레아는 눈을 질끈 감고 숨을 몰아쉬었다. 여태 그가 저를 얼마나 다정하게 대해준 것인지 실감났다.
다듬지 않고 그대로 드러낸 본성은 짐승의 발톱처럼 날카로웠다. 다른 이들이 이샤칸을 대할 때 심하게 겁내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어째서 그렇게 두려워하는 것인지, 방금 조금이나마 느낀 것 같았다.
“네가 그런 사람이 아니란 것을 알고 있어.”
레아는 눈을 깜빡였다. 그의 말이 어떠한 경험에 근거한 발언처럼 느껴졌다.
단순히 레아가 쿠르칸 노예들을 탈출시켜줬음을 알고 말하는 것보다는, 좀 더 확신에 찬 말이었다.
“오늘 약간……. 조절이 잘 안 되는 날인지라. 이제 괜찮은가.”
그가 손가락으로 뺨을 문지르며 묻는 말에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얼어붙었던 몸이 풀리며 드디어 이샤칸이 원하는 설명을 해줄 수 있었다.
오래전부터 레아는 노예상들을 박멸하기 위해 애써왔다.
하지만 단속과 소탕, 검거를 아무리 반복해도 노예는 사라지지 않았다. 하나씩 자잘하게 잡아들이는 정도로는 끝을 볼 수 없었다.
근본적인 문제를 뜯어고치지 않는 이상 해결되지 않을 문제였다.
레아는 노예에 대한 수요는 절대 없어지지 않으리라 판단했다.
에스티아 왕실이 노예의 수요자인 귀족이나 부유한 상인들을 강하게 제재할 힘도 없었다.
남은 방법은 공급 자체를 차단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말이 쉽지, 결국 노예상들과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는 소리였다.
노예상들은 온갖 곳에 뇌물을 뿌려서 뒷배를 만들고, 벌어들인 돈으로 실력 좋은 용병들을 사다가 두르고 다녔다.
평범한 방법으로 그들을 꺾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직접 노예상이 되었다?”
“손님으로는 얻어낼 수 있는 정보에 한계가 있으니까. 거짓으로 상단을 하나 세워서…….”
몇 년 동안 가짜 상단을 운영하며 실제로 노예를 거래했다. 용병들에게 사들인 노예를 경매장에다 팔고, 다시 낙찰 받는 식이었다.
사들인 노예들은 비밀리에 외국으로 탈출시켜주었다.
그렇게 노예상들 사이에서 이름을 알린 다음, 레아 쪽 상단이 고위 관직에서 일하는 거물귀족을 뒷배로 두고 있는 것처럼 꾸몄다.
단속 정보 등을 미리 알려주며 오랜 시간 동안 조금씩 신뢰를 얻어내다가, 노예상들을 연합시켜 대형 경매를 열도록 유도하는 데까지 이른 것이다.
다만 이번 대형 경매는 연합으로 만들어진 것이기에, 레아를 포함한 여러 노예상들이 공동 소유주였다.
“신뢰를 얻었다곤 하지만 완전히 믿지 않아. 의심 많은 자들이라서 서로를 감시하는 일이 심해.”
그 때문에 공동 소유주 중 하나라고 하더라도 엄중한 출입 절차를 거치는 등, 절대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쿠르칸을 거래한 경우도 있나?”
“늙고 병든 이들뿐이었어. 젊고 건강한 쿠르칸을 사들이기에는 자금이 부족하기도 했고…….
그리 많은 수는 아니지만, 다들 안전하게 보호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이샤칸은 레아에게 구출한 쿠르칸들을 넘겨 달라 하지 않았다. 다만 미묘한 웃음을 머금으며 물어볼 뿐이었다.
“네가 제시할 협상의 패가 이것인가.”
레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것만으론 수가 부족할 것 같아서 근래 쿠르칸을 대거 사들였고, 오늘 경매에서도 빼돌릴 생각이었다.
전후사정을 알게 된 이샤칸이 헛웃음을 흘렸다.
“정말이지……. 에스티아 왕실이 아직 망하지 않고 버티는 이유가 있었어.”
그는 눈매를 찌푸리며 말했다.
“그거 알아? 노예상 하나가 우리보다 번번이 한 발 앞서더군. 꽤나 실력 있는 놈이라 생각하여 추격했는데……. 그게 너였다니.”
어이없다는 말투에서 진심이 뚝뚝 묻어났다. 사실 이샤칸이 쿠르칸들을 구출하리라는 예상을 했기에, 더욱 빠르게 움직이기도 했다.
그를 방해해야 레아가 가진 패가 더욱 커질 테니까.
하지만 이것까진 말하지 않았다.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었다. 아직 협상은 시작조차 하지 않았고, 숨길 수 있는 건 최대한 숨겨야 했다.
레아는 그에게 나직이 속삭였다.
“만날 줄 몰랐어.”
쿠르칸들이 경매에 끼어들 수 있으리란 예상은 했지만, 레아는 경매 직전에 빠져나갈 계획이었기 때문에 마주칠 일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게다가 기껏해야 손님으로 잠입할 줄 알았지, 이렇게 대놓고 노예상을 찾아올 줄이야…….
“대체 어떻게 들어온 거야.”
삼엄한 경비를 뚫고 여기까지 들키지 않고 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많이 놀랐다고 말하니 이샤칸은 피식 웃었다.
“글쎄. 아무리 그래도 나보다 놀랐겠어?”
그 말을 끝으로 방 안에는 잠시 적막이 흘렀다. 레아는 뒤늦게 이샤칸의 무릎 위에 너무 오랫동안 앉아있었음을 자각했다.
그와 살을 붙이고 있는 일이 익숙해져서 이상한 줄도 몰랐다.
내려갈까 싶어 몸을 꿈지럭대는데, 허리에 휘감긴 이샤칸의 팔뚝은 풀릴 기미조차 없었다. 그가 느릿하게 시선을 맞춰왔다.
“일전에 내가 물었던 것.”
가라앉은 저음이 들리자마자 시선은 갈피를 잃었다. 헤매던 시선은 곧장 붙잡혔다. 이샤칸은 턱을 붙잡아 올려 저를 보도록 했다.
“생각해봤나? 답하지 않고 도망쳤잖아.”
이상한 일이었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날 신경 쓰지 말고 내버려두라고 해야 했다. 그러나 선뜻 말이 나오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주저 없이 말했을 텐데, 목에 뭐가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쉽사리 뱉어낼 수 없었다.
입을 꼭 다물고 있자, 단단한 엄지가 입술을 슬슬 문질렀다. 이샤칸은 코끝을 스치듯 부비며 속삭였다.
“넌 좀 더 책임감 없이 살 필요가 있어.”
“…….”
“협상도 너밖에 관심이 없는 것 같던데. 왜 그렇게 왕실에 얽매여있지.”
도망가버려, 레아. 전부 내던지고 자유로워지면 되잖아.
살살 꼬여내는 말이 어찌나 달콤한지, 말린 대추야자를 꿀에 찍어도 이만하진 않을 것 같았다.
레아는 제 어깨를 짓누른 무게에 대해 생각했다. 자신이 선택한 자유는 죽음이었다.
허나 그곳은 왕녀의 책무를 마무리 지은 후에 다다를 종착지였다.
이샤칸은 그 모든 것을 전부 내던지라 말했다. 심지어 제가 책임져주겠다고 했다.
자꾸만 저를 파고들어 엉망으로 헤집는 남자에게, 레아는 힘없이 질문했다.
“……나한테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야.”
“몸정인 것으로 해둘까.”
잊지 않고 갚아주는 말이 얄미웠다. 눈에 힘을 주는 레아를 보며 이샤칸은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이 잦아든 후에는 다시 침묵이 흘렀다.
가만히 들여다보던 시선이 레아의 입술로 향했다.
아까부터 입술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엄지에 힘이 들어갔다. 손끝이 입 속으로 살짝 파고들었다.
혀가 닿을 것만 같아서 안으로 감추다가, 실수로 스치듯 핥았다. 긴장한 나머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저를 바라보는 금안이 일렁였다. 문득 오늘따라 이샤칸의 눈빛이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다.
딱 집어 말할 수는 없으나, 묘하게 평소와 달랐다.
이샤칸이 얼굴을 느릿하게 붙여왔다. 엄지가 입술을 누르며 안으로 천천히 밀려들어왔다. 그가 눈매를 가늘게 접어 웃으며 속삭였다.
“그거 알아? 오늘 보름인데…….”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레아는 놀라서 얼른 몸을 뒤로 물렸다. 게닌이 발테인 궁정백의 멱살을 잡고 서있었다.
게닌은 입을 쩍 벌렸다.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레아를 삿대질했다.
그리고 함께 등장한 궁정백은 이샤칸과 레아가 야릇한 분위기로 붙어있는 것을 보고 기겁했다.
그가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는 사이, 게닌의 뒤편에서 누군가 고개를 내밀었다.
“으악!”
그 또한 레아를 보자마자 놀라서 팔짝 뛰었다. 귀여운 외모의 쿠르칸 남자는 일전에 레아를 왕궁으로 데려다줬던 이였다.
그가 입을 떡 벌리고서 중얼거렸다.
“이게 무슨……. 왕녀님께서 왜 여기에……?”
이샤칸이 살짝 불만스럽게 혀를 찼다. 남자는 다급하게 뛰어 들어왔다.
그리고 이샤칸이 무슨 역병이라도 되는 듯 마구 잡아당겨 레아에게서 떼어놓았다.
“자제력이 좋으시다면서요!”
“그러게. 잘 안 되네.”
이샤칸은 레아를 무릎에서 내려놓으며 태연히 답했다.
“내가 거짓말을 한 것 같군, 하반.”
하반이라 불린 남자는 조마조마한 얼굴로 레아에게 질문했다.
“이샤칸 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그냥 오늘 보름이라는 말밖에는…….”
레아가 얼떨결에 답하고 나니, 그는 분통을 터뜨렸다.
“아주 대놓고 수작을 부리셨잖습니까!”
게닌도 꼭 부여잡고 있던 발테인 궁정백의 멱살을 놓고 슬금슬금 다가왔다.
그러더니 이샤칸의 눈에 보이지 않도록, 아주 조심스럽게 레아를 끌어당겨 제 뒤로 숨겼다.
아직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레아에게 게닌이 자못 심각하게 속삭였다.
“쿠르칸들 사이에서는 보름날을 언급하는 것이 성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네?”
“보름달 뜨는 날이…….”
그녀는 발테인 궁정백을 슬쩍 보더니, 목소리를 좀 더 낮추어 속삭였다.
“발정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