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datory Soul RAW novel - Chapter 46
-46-
흐릿한 하늘이 차가웠다. 금방 비가 쏟아질 것처럼 우중충하고 습한 공기가 텁텁하게 폐부를 채웠다.
음습한 회녹색으로 물든 숲은 어울리지 않게도 수십의 사람들로 북적였다. 왕태자의 사냥행렬이었다.
사냥개가 컹컹 짖으며 축축한 땅 위를 내달렸다. 종자들은 왕태자가 편히 사냥할 수 있도록 사냥감을 몰이해나갔다.
웨들턴 백작은 왕태자와 함께 나란히 말을 몰았다. 왕비의 친부인 그는 블레언이 세르디나를 위해 사냥을 간다는 말에 따라나섰다.
블레언은 그가 따라오든 말든 신경도 안 썼지만, 웨들턴 백작은 부지런히 달라붙어 말을 걸었다.
이런저런 화제가 오르내린 끝에, 백작은 드디어 제가 하고픈 말을 꺼냈다.
“……이번 국무회의에서 세제 개편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습니까.”
푸른 눈동자가 웨들턴 백작에게 향했다. 냉담한 눈빛에 백작은 움츠러들면서도 혀를 멈추지 않았다.
“레아 왕녀가 변경백의 반대도 무릅쓰고 추진하려는 듯한데, 막아야 한다고 생각을…….”
그러나 무표정하게 듣고 있던 블레언이 활을 들어올리자 스르륵 입을 닫았다. 백작의 눈동자가 요동쳤다.
다행히 블레언의 화살은 웨들턴 백작이 아닌, 저편의 수풀을 겨냥했다.
“…….”
블레언은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손등에 핏줄이 솟아나며 활시위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날카로운 화살촉 끝이 정확히 목표물을 겨눈 순간, 화살이 날아갔다.
바람을 갈라내는 매서운 소리 끝에 짐승의 단말마가 터졌다. 수풀 사이에 숨어있던 사슴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뭇가지처럼 거대한 뿔을 가진 수사슴이었다.
나뭇잎과 가지를 온통 헤집으면서 비틀거리던 사슴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고꾸라졌다. 둔중한 소리가 땅을 흔들었다.
목줄기가 꿰뚫린 사슴에게서는 더운 피가 흘러내렸다.
종자들이 재빠르게 달려 나와 사슴을 살폈다. 웨들턴 백작이 기뻐하며 외쳤다.
“훌륭하십니다, 저하!”
명사수라 불릴 만한 실력이었다. 단번에 사슴을 잡아낸 실력은 누구나 자랑스러워할 법하건만, 블레언은 표정 변화 없이 종자들에게 명령했다.
“왕비궁으로 보내거라.”
사슴의 사체가 번쩍 들려나갔다. 블레언의 시선이 바닥으로 향했다. 사슴이 죽은 자리는 핏물이 고여 검게 물들어있었다.
짐승의 피로 얼룩진 흙바닥을 응시하던 그가 느릿하게 말했다.
“야만족의 왕도 사냥을 좋아할지 궁금하군요.”
웨들턴 백작은 기다렸다는 듯 냉큼 답했다.
“좋아하지 않겠습니까? 태생이 천한 것들이니. 듣자하니 야만족은 변변한 사냥도구도 없이 맨손으로 짐승을 쫓는다 합니다.”
사냥감을 잡으면 이빨로 날것을 물어뜯는다고 들었다며, 웨들턴 백작은 흉을 보았다.
블레언이 던진 한마디에 열 마디, 스무 마디쯤 떠벌릴 때였다.
블레언이 처음으로 짤막히 웃었다. 입매를 비틀어 미소 지으며, 그가 말했다.
“함께 사냥을 하는 것도 괜찮겠습니다.”
* * *
노예상들의 일망타진은 에스티아뿐만 아니라, 대륙 곳곳에서 큰 화제가 되었다.
에스티아가 노예 거래의 중심지였기 때문이었다. 공급이 뚝 끊기면서 쿠르칸 노예의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더 이상 레아의 선에서 접근할 수 없는 가격이 되어버린지라, 운영하던 노예상단은 처분하고 다른 쪽으로 자금을 돌렸다.
귀족들은 쿠르칸이 에스티아에서 활개를 친다며 불만을 표했다. 그러나 이번 일에 대해 함부로 입을 열지는 못했다.
노예가 불법이기도 하고, 그들의 주머니를 두둑하게 채워주던 노예상들은 이미 저세상으로 떠났으니 굳이 섣부르게 나설 이유가 없는 탓이었다.
쿠르칸을 혐오하는 오베르데 변경백이 다음 국무회의에서 귀족들을 대표하여 항의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는 했다.
그 정도 항의는 레아도 적당히 받아줄 생각이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깨끗하게 넘어간다면, 그것이 더 이상할 터였다.
다만 변경백이 쿠르칸과의 협상을 훼방 놓으려고 단단히 벼르고 있어서 문제였다.
그가 변방에서 군사를 움직여 쿠르칸과 분쟁을 일으키려 한다는 말까지 있었다. 어떻게든 해결을 봐야 했다.
본의 아니게 대모험 활극을 겪게 된 발테인 궁정백은 그만 살이 쏙 빠졌다.
눈 밑이 거뭇해진 그는 자신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단 한 마디로 설명했다.
“당분간 고기를 못 먹을 것 같습니다……. 특히 날것은 절대로…….”
그리고 열렬한 쿠르칸 화친주의자가 되었다. 레아는 그의 노고를 치하하며 며칠 쉴 수 있도록 휴가를 내어주었다.
협상의 패로 내세울 쿠르칸 인질은 굳이 늘리지 않고 지금 그대로 유지하기로 했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쿠르칸의 왕으로서, 이샤칸은 자신이 다스리는 나라에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다.
쿠르칸 노예를 방치했던 선왕과 달리 직접 나서는 모습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만일 레아가 단 한 명의 쿠르칸을 데리고 있었어도, 이샤칸은 협상에 응했으리라.
물론 겨우 이것만으로 화친까지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 정도로는 그를 움직일 수 없었다.
레아는 협상을 뒤집어놓을 만한 마지막 패를 고심하고 또 고심했다.
협상을 준비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없건만, 다른 쪽에도 레아가 신경 써야 할 일들이 넘쳐났다.
근래 왕녀궁의 분위기가 좋지 않은 것도 한몫했다.
자색 비단 드레스를 세르디나가 훔쳐간 사건이 일어난 뒤, 레아는 범인을 색출하지 말고 덮으라고 멜리사 백작부인에게 일러놓았다.
하지만 왕녀궁의 시녀들은 서로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녀들이 레아를 각별하게 따르는 탓에, 더욱 범인을 괘씸하게 여기고 찾아내려 했다.
시녀들끼리 은근하게 날 선 눈빛과 뾰족한 목소리가 오가는 일들이 잦아졌다.
상황이 좀 더 진행되어서 누군가 범인으로 지목된다면 레아가 개입해야 할 것 같았다.
그것도 신경 쓰이지만, 사실 레아를 가장 괴롭히는 것은 시녀들 간의 알력이 아니었다.
-왕비가 도마리던데.
이샤칸이 무심하게 던진 말에 레아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었다. 그는 충격에 휩싸여 굳어버린 레아를 보며 슬쩍 웃었다.
-더 알고 싶어?
멍하니 있던 레아는 황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들고 있던 찻잔을 거의 엎지를 뻔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샤칸은 레아의 속을 뒤집어놓았다.
-다음에 단둘이 만나면 알려주도록 하지.
아연히 입을 벌린 레아에게 그는 몹시 당연하단 듯이 말했다.
-이런 핑계라도 있어야 나를 만나줄 것 아닌가.
레아는 말문이 막혔다. 그가 속내를 정확히 꿰뚫어보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여관을 벗어나면, 이제 개인적으로 만나는 일은 절대 없을 거라 다짐하고 있었다.
마지막 밀회라고 혼자 못 박고 도망칠 준비를 끝냈건만, 이샤칸은 레아의 도주로를 아예 틀어막아버렸다.
레아는 차마 더 묻지도 못하고 그대로 왕궁에 돌아왔다.
이샤칸이 거짓말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협상과 엮인 문제도 아니고, 겨우 이런 걸로 장난칠 이는 아니었다.
최근 쿠르칸이 집시들을 쫓고 있었다는 사실은 발언의 신빙성에 더욱 무게를 실어주었다.
집시는 쿠르칸과 다를 바 없이 천하게 여겨지는 존재였다. 귀족들은 집시와 밤을 보내더라도, 그들을 부인으로 맞아들이진 않았다.
비유하자면 쿠르칸 부인을 두는 것과 같았다.
그런데 만일 세르디나가 진실로 집시라면…….
에스티아 왕실은 완전히 뒤집어질 것이다. 왕태자인 블레언 또한 집시의 피를 이었으니, 그의 왕위계승권이 온당한지에 관해서도 난리가 나리라.
허나 절대 섣부르게 건드릴 일이 아니었다. 레아는 이샤칸에게서 좀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 보류해놓기로 결론 내렸다.
그럼에도 번뜩번뜩 생각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어서, 떠오를 때마다 저도 모르게 골몰하곤 했다.
오늘도 외출 준비를 하면서 세르디나에 대해 생각했다.
왕녀궁을 나서서 목적지까지 산책 삼아 천천히 걸으면서도 그녀가 집시라는 가정 아래, 여태 벌어졌던 사건들을 맞춰보며 비교해보았다.
“왕녀님. 정말 만나실 겁니까?”
뒤따르던 멜리사 백작부인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세르디나 생각에 푹 빠져있던 레아는 조금 늦게 답했다.
“……그래야죠.”
“그자가 또 무슨 짓을 할까 봐 심려되어 그렇습니다.”
“아니에요. 그러지 못할 거예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레아는 그녀에게 어리광부리듯 말했다.
“부인이 근처에 함께 있어줘요.”
“당연한 말씀을 하십니다.”
두 눈 크게 뜨고 있겠다며, 멜리사 백작부인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레아는 작게 웃으며 그녀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오늘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다. 왕녀궁의 시녀들을 전부 신뢰할 수가 없는 상황이라, 레아는 멜리사 백작부인만 데리고 길을 나섰다.
레아가 향한 곳은 입궁한 귀족들이 모이는 본궁이었다. 왕녀를 본 귀족들이 여기저기서 인사를 해왔다.
그들의 인사를 받아주며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까 입궁을 했다고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중정의 회랑에서 다른 귀족들과 떠들고 있는 남자를 찾아낼 수 있었다.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여러 귀족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남자는 흘긋 이쪽을 돌아보았다가 눈을 부릅떴다.
가만히 그를 향해 걸어갔다. 레아가 한 발자국씩 다가올수록, 남자의 표정은 몽롱해져갔다. 그는 꿈을 꾸는 듯 레아를 바라보았다.
레아가 남자의 앞에 멈춰 섰는데도, 왕녀에 대한 예를 갖출 생각도 못 하곤 넋 놓고 바라보았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라, 주변에 있던 다른 귀족들도 비슷한 표정이었다.
아마 레아가 먼저 남자를 찾은 일은 처음이라 그런 듯했다. 레아는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바쁘신가요?”
그는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얼굴로 쳐다보다가 더듬더듬 답했다.
“아, 아니, 바쁘지 않습니다…….”
천지가 개벽한 듯 충격 받은 남자에게, 레아는 조용히 말했다.
“그럼 잠시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요, 오베르데 변경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