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datory Soul RAW novel - Chapter 86
-86-
머릿속으로 날짜를 셈해본 레아는 깜짝 놀랐다. 몇 주 남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샤칸에게 결혼식을 빨리 하고 싶다고 졸랐더니, 정말 그렇게 해준 것이다.
막상 날짜가 잡히니 기분이 이상했다. 싫은 건 절대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새롭게 닥쳐올 변화가 아주 조금 두려운 것 같았다.
싱숭생숭한 레아에게 뮤라는 바지런히 음식을 덜어서 쟁반에 얹어주며 말했다.
“다들 결혼식 준비로 부산하답니다. 레아 님도 그동안 바지런히 체력을 길러두셔야 해요.”
뮤라는 말하는 동시에 레아가 어떤 음식을 잘 먹는지 기민하게 살피고, 시녀들을 진두지휘하여 그와 비슷한 종류의 음식을 레아의 쟁반에 배치했다.
“저녁에는 치료를 위해 모르가 님에게 다녀오셔야 합니다.”
그녀가 놓아주는 대로 먹다 보니 맛이 괜찮아서, 레아는 무심결에 평소보다 많이 먹고 있었다.
특히 레아가 얼마나 먹었는지 생각하지 못하도록 대화로 정신을 쏙 빼놓는 기술이 아주 훌륭했다.
이샤칸이 보았다면 박수를 쳐줬을 만한 실력이었다.
“그리고 쿠르칸어는 제가 가르쳐드릴 예정입니다. 언어학을 배웠으니, 레아 님께 부족함 없이 알려드릴 수 있을 겁니다.”
레아는 먹고 있던 음식을 삼키고 그녀에게 말했다.
“선발전에서 승리했다면 무위도 상당할 텐데, 언어학까지 능통하다니……. 뮤라는 대단하구나.”
레아의 말에 뮤라의 눈이 등잔만 하게 커졌다. 칭찬을 들은 그녀는 흥분한 듯 얼굴이 빨개졌다.
“그럼요!”
그리고 한껏 도취된 표정으로 외쳤다.
“저는…… 똑똑하거든요……!”
그 모습을 보며 레아는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왠지 하반과 잘 어울리는 성격인 것 같았다.
아침식사를 끝낸 후에는 후식으로 꿀을 탄 차를 마셨다. 과식을 해서 약간 더부룩한 속에 따뜻한 차는 딱 적절한 후식이었다.
뮤라는 차를 마시면서 다른 간식도 먹어주길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더 먹으면 배가 터질 것 같아서 그러지는 못했다.
후식까지 끝낸 후에는 왕궁으로 돌아가기 위해 간단히 치장했다.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씻고 옷을 갈아입는데, 다들 손재주가 무척 좋았다.
레아에게 어울리는 옷 여러 벌을 가져와서 슥슥 갖다대보곤 가장 최상의 옷을 골라 입혔다.
시녀들이 치장을 해주는 동안, 레아는 쿠르칸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보았다.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역시 왕궁 업무였다. 정치나 재무 쪽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에스티아 왕실에서 늘 하던 일이었으니, 쿠르칸에서도 적응하면 능숙하게 해낼 터였다.
하지만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샤칸의 신부로 사막에 왔으나, 그래도 이방인이었다.
낯선 존재가 너무 급하게 섞여들면 반감이 들 수도 있었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니, 반려의식을 치르고 정식으로 왕비가 된 다음부터 조금씩 일을 시작해도 늦지 않을 터였다.
그 전에 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나 생각해보던 레아는 문득 입술을 깨물었다.
“…….”
아주 옅어진 쇠사슬 소리가 귓가에 희미하게 흩어졌다. 사라지지 않고 끈덕지게 제 존재를 알리는 소리는 지긋지긋했다.
그때마다 꿈같은 행복이 부서지고, 다시 어둠 속으로 끌려가게 될까 봐 겁내는 스스로도 싫었다.
이샤칸이 옳았다. 끝나지 않는 불안감은 근원을 뿌리 뽑아야 없어질 터였다.
에스티아가 사라지기 전까진, 자신은 평생 쇠사슬에 묶여있으리라.
그래도 예전만큼 겁나진 않았다. 레아는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았다.
쿠르칸의 옷을 입은 제 모습을 한참 바라본 후에 결연히 입을 열었다.
“혹시 오늘 에스티아 정벌과 관련하여 회의가 있을까?”
바지런히 움직이던 시녀들이 일순 멈칫했다. 레아가 에스티아의 왕녀였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가 없으니 그런 것이었다. 뮤라가 나서서 대답했다.
“오후에 군사회의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나도 회의에 참석하고 싶은데. 그래도 되는지 허락을…….”
“허락이라뇨!”
뮤라가 파드득 소리쳤다. 팔짝거리는 그녀의 모습이 하반과 똑같아서, 레아는 잠시 웃었다.
“감히 누가 허락을 내리겠습니까? 사막에서 레아 님이 하지 못하시는 일은 없습니다.”
미리 말만 전해놓겠다며 뮤라가 말했다. 레아는 괜스레 혼자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이럴 때마다 어쩐지 속이 간질거렸다.
왕실과 귀족들 사이에서 치이고 시달리며 눈치 보던 에스티아와 달리, 이곳 쿠르칸에서는 레아가 가장 우선이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사실이 항상 어색했다.
그만큼 더 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치장을 마친 레아는 의욕적으로 말했다.
“깃펜과 종이를 가져다줄래? 종이는 한…… 이 정도 크기는 되었으면 좋겠는데.”
곧장 탁자 위에 커다란 종이와 깃펜이 놓였다. 레아는 깃펜을 들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종이 위에 슥슥 그림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 * *
군사회의가 열린다는 회의장은 레아가 처음 가보는 장소였다. 왕궁이 넓어서 아직 침실 근처도 다 못 둘러본 상황이었다.
언젠가 날 잡고 왕궁 탐방을 한번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레아는 시녀들과 함께 회의장 앞에 다다랐다.
회의장 앞에는 날씬한 체구의 남자가 안절부절못하며 서있었다. 혼자서 부산스럽게 굴던 그는 레아 쪽을 돌아보고는 흠칫했다.
“레아 님!”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레아의 뒤편에 서있는 뮤라를 보고 흠칫한 것이었다. 뮤라는 하반을 향해 말없이 샐쭉 웃어 보였다.
그리곤 레아를 위해 거대한 회의장의 문짝을 한 손으로 열어주었다.
“저희들은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다녀오셔요, 레아 님.”
하반은 슬쩍 레아를 뒤따라 들어가려 했으나, 뮤라에게 답삭 붙들렸다.
하반이 살려달라는 듯이 레아를 바라보았지만, 부부 사이 일에 함부로 끼어들 수는 없어서 모른 척했다.
돌돌 말아놓은 종이를 품에 안고, 레아는 작게 심호흡한 뒤에 회의장 안으로 들어섰다.
안에는 쿠르칸들이 여럿 모여 있었다. 각 부족들의 수장이었다.
기다란 흑단나무 탁자에 둘러앉은 그들은 레아가 들어서자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일하게 일어나지 않은 이는 가장 안쪽에 앉아있는 이샤칸이었다. 그는 입에 물고 있던 담뱃대를 느릿하게 내려놓으며 웃었다.
“레아.”
레아는 망설임 없이 곧장 그를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옆자리에 앉자마자, 이샤칸은 기다렸다는 듯 레아의 뺨에 입을 맞췄다.
부족장들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진 것을 확인한 레아는 이샤칸을 살짝 밀어내고 자세를 바로 했다.
색채 또렷한 눈동자들은 박제라도 된 것처럼 레아를 쳐다보고 있었다. 처음으로 보는 것이니 신기한 모양이었다.
구면인 모르가만 고개를 까닥하며 아는 체해 보였다.
약간 부담스러운 시선들 속에서 레아는 가져온 종이를 탁자 위에 펼쳤다.
어떤 목적으로 군사회의에 참석하고 싶다고 했는지 말로 장황하게 설명하기보다는, 일단 보여주고 시작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도르륵 펼쳐지는 종이를 호기심 가득하게 들여다보던 쿠르칸들은 대번에 표정이 진지해졌다.
종이에는 복잡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에스티아 왕궁 지도였다. 레아는 손으로 지도 위를 짚으며 말했다.
“내가 직접 그린 것인데.”
하얀 손가락이 왕궁 구석구석을 짚어나가기 시작했다.
“여기 별도로 채색된 곳은 전부 왕족들에게만 구전되는 비밀통로야. 이곳과 이곳, 그리고 이곳은 왕비와 왕태자도 모르는 통로이고…….”
바쁘게 하나씩 짚어나가며 왕궁에 진입할 경우 가장 최적인 경로를 예시 삼아 알려주었다.
각 궁마다 시녀들이 언제부터 일과를 시작하는지, 어느 시간대에 어느 곳이 인적 없이 조용한지 등등도 전부 말했다.
“물론 나는 군사적인 부분은 잘 알지 못하니, 어디까지나 이런 식으로 하면 어떨까 제안하는 것이고.”
레아의 손가락이 건물 내부를 벗어나 바깥을 하나씩 짚어나가기 시작했다.
“에스티아의 경비는 기본적으로 다섯 가지 체제를 바탕으로 순환해가면서 사용해.
약 이 주간은 동일 체제를 유지하니, 하루 정도만 관찰하면 다섯 가지 중 어느 것인지 파악할 수 있을 거야.”
주기적으로 바뀌는 경비 체제를 구별하는 법이며 경비대 위치까지 최대한 자세히 설명했다.
“정벌 시기는 어찌 의논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사견을 내어보자면, 장례식 이후가 좋을 것 같긴 해.”
장례식 때 모든 귀족들이 모여들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휘하의 기사와 사병을 끌고 올 테니, 수도에 병력이 가장 많이 집중되는 시기였다.
장례식이 끝나고 어수선한 틈을 타서 치고 들어가면 가장 좋을 터였다.
“그리고 소수 인원으로 왕궁을 점령한다는 계획이라면, 수도 근교에 숨어있을 만한 장소를 제공해줄 수 있어.”
쿠르칸들은 상당히 눈에 띄는 생김새이기 때문에 몸을 숨기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경비가 허술한 빈민가라면 이야기가 다를 터였다.
빈민가 근처에 레아가 사놓은 저택들이 있었다.
노예상 일을 하면서 사두었던 것인데, 본래는 왕녀궁 시녀들이 처분하여 재산으로 삼도록 나눠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레아는 죽지 못했고, 유언장도 집행되지 않았을 터였다. 저택은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
“그곳을 근거지로 삼는 게 어떨까하고, 필요하다면 쿠르칸 노예들로 위장해서 진입하는 것도 도와줄 수 있어.”
거침없이 죽죽 말해나가던 레아는 잠시 숨을 몰아쉬었다.
“우선 당장 생각나는 것들 위주로 말해보았는데……. 혹시 에스티아에 관해서 더 필요한 정보가 있다면 말해줘.”
평생을 헌신해왔기에 누구보다 에스티아를 잘 알고 있었다. 입만 벌린 채 듣고 있는 쿠르칸들 앞에서, 레아는 등을 곧게 세우며 말했다.
“전부 다 기억하고 있으니.”
회의장은 침묵에 잠겼다. 조용한 정적 속에서 레아는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대신 최대한 왕국민들에게 피해가 없기를 부탁하고 싶고, 그리고…….”
살며시 이샤칸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에스티아에 새로운 통치자를 두는 것인지, 아니면 쿠르칸에 완전히 속하게 되는 것인지…….”
“새로운 왕을 만들 거야, 레아.”
이샤칸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의 눈에는 잔뜩 웃음기가 배어있었다.
“왕위를 잇게 할 사람도 이미 정해져 있지.”
심장이 덜컥였다. 레아는 떨리는 목소리로 질문했다.
“누구를……?”
레아와 시선을 맞춘 채, 이샤칸은 단 한 마디만을 뱉었다.
“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