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ferences for possessed people RAW novel - Chapter (104)
104화
✠나흘 뒤 열린 재판은 정의를 훌륭히 구현했다.
피고인들이 고문 때문에 쏟아낸 자백은 논외로 치더라도, 악마와 계약한 증표인 금화가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로 존재한 덕분이었다.
찬영 기사단은 죄가 없다며 발뺌하지 못했다. 폐인이 된 렉토 부단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동시에 테실리드가 안고 있던 ‘성검을 믿고 혼자 던전에 진입했다가 버스트를 일으켰다’라는 불명예스러운 혐의도 벗겨졌다.
다만 이 과정에는 약간의 진통이 있었다.
찬영 기사단은 자기들만 죽을 수는 없다고 여겼는지, 아니면 복음성부의 사주를 받았는지 테실리드의 혐의에 대해 끝까지 물고 늘어지려 했다.
그들은 고신 때문에 너덜너덜한 몸을 하고서도 광적으로 주장했다.
“테, 테실리드 아르젠트가 혼자 던전 버스트를 일으켰습니다!”
“맞습니다! 신께 맹세코 이것은 진실입니다!”
이미 이단 행위에 대해 죄가 인정된 이들이 신을 입에 올리는 상황은 우습기 짝이 없었다.
공개 재판장 여기저기서 혀 차는 소리와 실소가 터져 나왔다.
“테실리드 경, 반박하시겠습니까?”
재판관을 맡은 추기경이 ‘미친놈들의 헛소리 때문에 빡쳤을 테니 맘껏 욕해보거라’라는 자비로운 느낌으로 테실리드에게 발언권을 주었을 때였다.
“……아뇨.”
우리! 고구마패스가! 고구마를! 먹였다!
극장 박스석처럼 생긴 비밀 공간에서 몰래 지켜보고 있던 나는 어이가 없었다.
여기서 침묵한다고? 없던 오해도 생길 상황이다.
아니나 다를까, 참관하던 사람들이 동요하면서 만들어내는 웅성거림이 점점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뒤로 돌렸다. 시선이 닿은 곳에는 클로비스가 반듯이 시립해 있었다.
“제가 부탁드렸던 증인은요?”
“헤스티오 사제와 이페일 경이 데리고 올 겁니다.”
때마침 장내에 정숙을 명한 재판관이 증인을 출석시켰다.
시골에서 갓 상경한 듯한 모습의 세 사람이 자기소개를 했다.
“크, 크흠. 그린월 마을의 촌장, 데니스 브람이라 합니다. ……이렇게 하면 되는 거 맞재?”
“예, 촌장님 잘하셨구먼요. 저는 부녀회장 조안 라일이어요.”
“처, 청년회장! 데온 릭스터! 인사 박습니다!”
던전 버스트가 일어났던 그린월 마을의 주민들이었다. 그들을 알아본 찬영 기사단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어, 어떻게……!”
“버, 버스트가 일어났는데 새, 생존자라고……?”
순수한 의문은 아니었다. 찬영 기사단 입장에서 그들은 죽어야만 하는 이들이었으니까.
증언이 시작되었다.
“예, 예. 추기경님. 그날 있었던 일은 죄다 기억합니다. 죽을 뻔한 날이었으니께요. 아침 일찍 성기사님들이 마을을 가로질러서 산에 올라갔죠.”
“아이고, 저 억수로 잘생긴 은발 성기사님을 여기서 또 보네예. 저 은발 성기사님 때문에 그날 아침부터 부녀회에서 난리가 났구먼요.”
“예? 성기사님이 혼자 산에 올라갔냐고요? 아뇨, 던전까지 다 함께 들어갔습니다. 임신한 아내 줄 산딸기를 따러 갔다가 본 것이라 확실합니다!”
테실리드가 홀로 던전에 먼저 들어갔다는 찬영 기사단의 주장이 거짓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테실리드는 순조롭게 명예 회복을 할 수 있었다.
역시 목마른 자가 직접 사이다 뚜껑을 따야 하는 법이다.
여섯 명의 찬영 기사단은 이단자가 으레 그렇듯 화형이 선고되었다.
장내에 한참 동안 죄인들의 절규가 메아리쳤다.
내가 멀리서 테실리드의 수갑이 풀리는 것을 지켜볼 때였다.
클로비스의 음성이 들려왔다.
“예하, 내일이 맥추절입니다. 준비는 잘 되어가십니까?”
“준비랄 것이 있나요. 들어갈 때 경의 에스코트만 받으면 그만인 것을요.”
“들어갈 때 말이군요. 그럼 나갈 때는 다른 계획이 있으신지요?”
클로비스의 시선이 테실리드에게 머무는 것이 보인다. 생각하는 바가 뻔했다.
응, 그거 아니야.
그러니까 괜히 동생 질투할 생각 하지 마라, 제발.
“나갈 때는 에스코트가 필요 없는 몸이 될 텐데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성녀의 의전은 왕국으로 치면 공녀와 같습니다. 공식 석상에서는 필히 에스코트를 받으셔야 합니다.”
“보통의 성녀라면 그렇겠지요.”
성녀에도 급이 있다. 그리고 나는 전설급이다.
“저는 주교 서품뿐만 아니라 직책 서임까지 받을 거예요.”
“……그 말씀은, 설마.”
흔들리는 눈빛을 보아하니, 내가 성황청의 규율을 이용해 뭘 하려는지 눈치챈 모양이다.
“당신은 성황청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겁니까?”
나는 대답 없이 웃기만 했다.
안 알려주지.✠다음 날, 대망의 맥추절이 도래했다. 클로비스의 권한으로 나는 귀빈용 숙소를 배정받았다.
그곳에서 아침 일찍 눈을 뜨자마자 목욕재계를 하고 준비에 힘썼다.[‘세계를 구축하는 언령’이 당신의 성녀 데뷔를 무척 기대합니다.]언령님은 반대했던 게 무색하게도 지금 가장 신이 나신 듯했다.[‘영혼을 심판하는 천칭’이 ‘세계를 구축하는 언령’의 태세 전환을 놀립니다.] [‘세계를 구축하는 언령’이 조용히 하라고 눈에 힘을 줍니다.] [‘창조경제 관리자’가 솔직히 기대되는 건 사실이라고 합니다.] [‘만상의 혼돈을 감시하는 눈동자’가 동의의 눈빛을 보냅니다.] [‘균형을 조율하는 독설가’가 동의의 침묵을 합니다.]빙의 관리국 신님들의 기대에 부응해야지.
나는 사첼백을 뒤적여 커다란 상자를 꺼냈다. 오늘 할 일에 꼭 필요한 중요한 아이템이다.
사르락사르락……. 방 안에 천 스치는 소리가 한참 울리다가 멈췄다.[‘세계를 구축하는 언령’이 밀려오는 감동을 만끽합니다.]✠맥추절(麥秋節)이란 밀과 보리의 수확을 감사하는 6월의 축일 중 하나로, 이때 성황청에서는 보리 한 줌씩을 태워 바치는 제를 올린다.
의식은 성화대가 위치한 중정(中庭)에서 진행되었다.
교황을 시작으로 추기경을 거쳐 일반 사제들까지, 의전 서열 순서대로 나와 제단에 올랐다.
그저 약간의 곡물을 불 속에 털어 넣는 행위에 불과하기에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만 예외가 있었다.
성배 모양의 거대한 성화대는 상시 푸른 불꽃이 타오르는데, 제를 올리는 사람에 따라 간혹 불꽃의 크기나 색깔이 변하는 경우가 있었다.
교단에서는 불꽃이 밝고 커질수록 상서로운 징조라 여겼다.
주교들의 제가 끝나고 기사와 사제의 차례가 되었다. 성검의 주인인 테실리드는 그들 중 첫 번째 순서였다.
“…….”
낱알 한 줌을 손에 쥔 그는 생각했다.
이번이 몇 번째일까.
그는 회귀자였기에 앞으로 일어날 일을 잘 알았다.
회귀 후 처음으로 맞이하는 맥추절에는 항상 테실리드를 위한 유치한 괴롭힘이 안배되어 있었다.
그가 성화 속에 보리 낱알을 털어 넣기 무섭게 거대한 불꽃은 하찮은 모닥불로 크기를 줄일 것이다.
그리고 이를 본 복음성부 측 인사들은 수선을 떨어대며 그가 교리를 어겨 ‘엄격한 질서와 선’의 노여움을 산 것이 아니냐며 수군거린다.
그들은 테실리드의 행실과 태도를 시시콜콜하게 꼬투리 잡기에 열을 올리고, 급기야 제단은 그를 모욕하기 위한 청문회장으로 탈바꿈한다.
“……아아.”
정말이지, 지긋지긋하다.
“테실리드 형제?”
“…….”
“크흠, 형제? 제를 올리셔야죠.”
“…….”
의식의 집전을 맡은 주교가 넌지시 재촉했다.
테실리드는 그의 얼굴을 잠시간 고요히 응시하다가 천천히 제단 위로 걸음을 옮겼다.
거대한 성화대 앞에 섰다.
어서 그가 음모에 빠지길 기대하는 추악한 시선들이 등에 꽂혔다.
과거 한때에는 피하거나 벗어나려고 부단한 노력을 했었다.
매 회차마다 방식을 바꾸어 대응해 보았고, 개중에는 꽤 유의미한 성과를 거둔 것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귀찮았다.
파스슷. 테실리드는 곡식 한 줌을 집어 던지듯 불꽃에 털어 넣었다.
그의 모든 회차를 통틀어 가장 무성의하고도 무방비하게 맞이하는 제였다.
그 순간이었다.
푸시시식.
‘……이건 좀 새로운걸.’
성화대의 푸른 불꽃이 완전히 꺼져 버렸다.
뒤로 고개를 돌리자 음모를 꾸민 주체들마저 당황한 표정을 짓는 것이 보였다.
“아, 아니, 이게 무슨 일…….”
“저걸 꺼뜨리면 어떡하자는…….”
200년 전, 성녀가 불을 붙인 이후로 폭우와 폭설 속에서도 유지해 왔던 성화의 불꽃이었다.
그걸 꺼뜨려 하찮은 회색 연기 한 줄기로 만들 생각은 그들에게도 없었을 것이다.
문제가 커졌다.
이제 진상이 밝혀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음모의 주체들은 더더욱 테실리드를 탓하며 죄를 뒤집어씌워야 했다. 정신을 차린 자들이 목청껏 외치기 시작했다.
“이럴 수가! 성검의 주인이 푸른 성화를 꺼뜨리다니!”
“신께서 테실리드 경의 제를 받기를 거부하셨어!”
“테실리드 경,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엄격한 질서와 선’의 노여움을 사다니요!”
“왜 말씀을 못 하십니까? 설마 부끄러운 죄라도 지은 것입니까?”
여기서부터는 똑같았다. 그의 눈에서 빛이 거멓게 죽어갔다.
지겹다, 정말로.
까마득한 오래전부터 그는 너무나 지겨웠다.
“하아아…….”
마른 손이 얼굴 반쪽을 감쌌다. 아름다운 이목구비가 차분히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지긋지긋한 회귀를 끊어내고 싶은데 이 미움받는 영혼에게는 죽음이라는 안식도 허락되지 않았다.
그는 ‘질서와 선’이 내린 사명의 노예일 뿐이었다.
누가 좀 구해줬으면. 이 지독한 권태와 공허함으로부터.
누가, 제발 좀. 미치기 전에!
그때였다.
“성화의 불꽃은 다시 붙이면 그만 아닌가요.”
“……!”
목소리가 들린 순간 모두가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돌렸다.
“헉!”
“허, 허억…….”
이목의 집중은 신음을 동반했다. 압도적인 신성력이 일대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지가 낮은 성기사와 사제는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주교급 이상의 인사들은 고목처럼 버텨냈으나 현 상황에 대한 충격은 별개였다.
“누, 누구…….”
깜빡임조차 잊은 그들의 눈에 중정을 가로지르며 걸어오는 여성이 비쳤다.
자박자박.
그녀는 여신같이 우아한 순백의 드레스와 군주처럼 위엄 있는 망토를 두르고서, 성기사의 에스코트를 받고 있었다.
평범한 걸음인데도 이상하리만치 매력과 기품이 느껴져 보는 이를 설레게 했다.
거기에 쉽게 범접하기 힘든 분위기가 더해져, 그녀가 코앞을 지나쳐도 누구 하나 말을 걸지 못했다.
신비롭고 낯선 여성의 모습에서 얻어낼 수 있는 정보는 없었다.
교인들의 시선이 그녀에게서 살짝 비켜, 옆에서 에스코트하고 있는 장신의 남성을 향했다.
“크, 클로비스 경……?”
“성녀 수색대장이 데려온 여자라 함은…….”
“서, 설마……!”
혼란한 의혹이 중정 전역에 퍼져 나가던 때였다.
화르르륵!
농도 짙은 신성력에 의해 성화대에서 저절로 발화가 일어났다. 성녀의 푸른 불꽃이 소생했다.
“…….”
테실리드는 점차 가까워져 오는 그녀를 홀린 듯이 보았다.
아일렛은 어느 순간 걸음을 멈추고 클로비스에게 에스코트 받던 손을 거두었다.
하얀 손이 보리 자루에서 이삭 한 줌을 쥐었다.
그녀는 홀로 단상에 올라 마침내 테실리드와 눈을 맞추었다.
“테실리드 경, 다시 해보세요.”
“…….”
“자, 어서.”
빙의자를 위한 특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