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een Psycho's British Empire RAW novel - Chapter (128)
128_네덜란드 독립 전쟁(5)
그 기상천외한 사건이 영국에 전해진 것은 3월 초 수요일.
일명 ‘재의 수요일’이라고 불리는 날이었다.
“망할, 주교의 감이 맞았군.”
나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넘기다가 멈칫했다.
아직도 머리에 남아있는 재가 거슬렸기 때문이다.
오늘은 재의 수요일.
죽음과 죄를 상징하는 기독교적 행사일이었다.
나는 아침부터 머리에 재를 뒤집어썼고, 주교의 축언을 들었다.
“재에서 났으니, 재로 돌아가리라.”
스티븐 주교는 그리 말하며 내 이마에 십자가를 그렸다.
재로 덧그려진 십자가였다.
‘전쟁과 죽음으로 가득 찬 이 시기에 재로 그린 십자가라니.’
내색하진 않았으나,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 내 직감이 맞아떨어진 것 아니겠나.
에스파냐에서 이런 어처구니없는 소식이 들어오다니.
“그러니까,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가 뭘 했다고?”
내가 확인차 되물었다.
“은행가들을 전부 불러 모아놓고 채무 불이행, 파산을 선언한 뒤 그들에게 국가 채권을 강제로 매입하게 했습니다.”
빚쟁이가 빚을 갚긴커녕 돈을 더 뜯어냈단 것인가.
그것참 뻔뻔하기도 하군.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언제나 그렇듯, 의원들은 에스파냐를 규탄했다.
“에스파냐를 믿고 돈을 빌려준 이들을 배반한 격 아닙니까! 앞으로 그 누구도 펠리페에게 돈을 빌려주려 하지 않을 겁니다.”
“이건 자충수입니다! 자본가들 전부를 적으로 돌리는 것과 다름없는 행위 아닙니까!”
“에스파냐 경제에도 심각한 타격이 올 텐데, 어째서 그런 짓을?”
나는 이번만큼은 그들의 아우성을 말리지 않았다.
내가 생각해도, 그들의 말에 틀린 점은 없었으니까.
나도 그들과 같은 생각을 했었다.
‘나라면 차라리 휴전 협정을 맺고 자본을 확보하려 했겠지.’
어딜 봐도 이게 더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다만, 펠리페는 나와 같은 성향의 사람이 아니었다.
“전쟁에서 이기기만 하면 전부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내가 입을 열고 말했다.
“펠리페는 태생부터 제국의 패자였고, 가장 강대한 제국의 오만한 후계자로 살아왔다. 그는 굽힐 줄 몰라. 대체 왜 그가 일반적인 사람처럼 생각할 거라고 여기는 건가?”
이건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펠리페를 너무 섣불리 재단했어. 그 또한 범인은 아닌데.`
나는 21세기에 태어나 자라왔다.
이 시대 사람들과 전혀 다른 환경에서 자랐기에, 그 사고방식도 다르다.
누군가는 나를 미친 사람으로 보지만, 나는 그런 방식으로 이 나라를 부흥시켰다.
펠리페는 16세기에 태어났으나, 평범히 자라지 않았다.
그는 날 때부터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의 주인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태생부터 지도자였으며, 굽힐 필요도, 포기할 필요도 없는 삶을 살았다.
그 누구와도 다른 특별한 환경에서 자랐으니, 사고방식도 다를 수밖에.
펠리페 역시 남들에게 쉽사리 이해받지 못할 사고를 하는 인물이었다.
우리가 이리 다르니, 내가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당연했다.
국가 파산 직후에 은행가 협박을 어떻게 예상할까.
`하지만, 이해하지 못한다면 경계해야 했어.`
내가 작게 입술을 깨물며 생각했다.
오만하게 다 아는 양 행동하고, 그를 낮잡아보았다.
덕분에 지금처럼 뼈저린 교훈을 얻게 되었다.
약간의 치욕감을 느끼며, 내가 말했다.
“이기면 모든 게 해결된다. 그게 펠리페가 아버지, 카를 5세에게 배운 삶의 방식이야. 패배하면 재기하기 어려워지더라도, 승리하면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겠지.”
내 말에 겁쟁이 윌리엄 피터가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그는 절대 패배하지 않을 준비가 돼 있을 겁니다. 그런 자신이 있으니 저리 나온 거겠지요.”
물론 맞는 말이었으나, 쓸데없이 사기를 깎는다.
내가 부러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세상 어느 지도자가 패배하리라 생각하며 전쟁에 임하겠나? 그러나 그들 중 반절은 패배한다네.”
피터가 지지 않고 말했다.
“네덜란드에서 적의 공제가 더 심각해질 것입니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래, 얼마 안 가 그리되겠지.”
“그렇게 되면, 가까스로 확보한 영토를 잃게 될 것이고요.”
나는 회의실 벽에 걸린 지도를 바라보았다.
네덜란드의 전선 상황을 표기해둔 지도였다.
한때는 에스파냐에 모든 땅이 먹힐 뻔했으나,
모리스코의 반란 소식이 들어온 이후에는 상황이 좀 변했다.
사기가 오른 네덜란드 독립군이 혼란에 빠진 에스파냐군을 습격해 쭉 치고 올라가, 가까스로 비등비등한 형세를 만든 지도.
이 정도 형세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피땀을 흘렸던가.
그런데 적의 공세가 격화되면, 상황은 원상복구 될 터.
“그렇게 두진 않을 것이네.”
내가 단단히 선언했다. 왕답게.
“나는 아직도 에스파냐에 패배하리란 생각은 들지 않아.”
확신 서린 목소리는 다행히도 효과가 있었나 보다.
한 의원이 반색하며 내게 물었다.
“혹시 어떤 계획이 있으신 겁니까?”
“아! 에스파냐 내부 자본가들의 불만을 이용하신다던가?”
“아니, 그런 것은 아니네.”
안타깝지만, 그건 이 전쟁이 마무리된 뒤에야 쓸만한 패로 변모할 것이다.
“내가 노리는 것은 바로 놈들의 식량 위기라네.”
“아, 그렇군요!”
네덜란드에 원정하러 온 에스파냐 군대.
막대한 병력은, 그대로 먹여야 할 입이 된다.
그리고 그들은 보급이 턱없이 부족한 상태였다.
“내 듣기론 식량 보급 문제로 알바로 제독과 알바 공작이 이미 여러 차례 갈등을 빚었다고 하더군.”
“저 역시 들었습니다. 제독은 식량 조달을 위해 전선에 제때 도달하지도 못하는 상황이라고 하던걸요.”
“그래, 그리고 그 위기는 오늘을 기점으로 한층 심해질 터.”
내가 가볍게 내 이마를 두드리며 말했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생각해보게.”
나와 의원들의 이마엔 재로 그려진 십자가가 있었다.
그걸 상기한 의원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렇군요. 오늘이 바로 재의 수요일, 사순절의 시작입니다.”
사순절은 중요한 행사였다.
이 시기엔 어떠한 육류의 섭취도 금지되며,
단백질을 얻기 위해선 생선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청어의 소비가 급증하고 값이 폭등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네덜란드에선 특히나 식량을 구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기, 물론 차고 넘치는 것이 청어겠지만, 에스파냐 군대는 이 청어를 결코 쉽게 건드리지 못할 것이야.”
점령지의 민심을 관리하기 위해서도 그렇지만,
더욱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그 자존심 강하고 오만한 황제, 펠리페가 약속하지 않았나. 항복한 지역의 청어 판매를 그의 이름으로 보장하겠다고.”
펠리페가 네덜란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서 꺼내놓은 패.
그걸 에스파냐군이 멋대로 뒤엎을 수는 없다.
“아마 최악의 상황이 닥치지 않는 한, 에스파냐군은 그 청어를 건드리지 못할 것이야.”
그러나 내 말에도 겁쟁이 윌리엄 피터는 여전히 미심쩍은 기색이었다.
“하지만 그 최악의 상황이 오겠습니까?”
“음?”
“아니, 에스파냐가 일시적으로나마 재정 위기를 해결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비싼 돈을 치르더라도 육상 보급을 시도할 텐데요.”
그간 우리 영국과 네덜란드는 해상 수송로를 완전히 막고, 네덜란드로 향하는 에스파냐의 보급을 끊어왔다.
에스파냐군의 식량 위기는 그렇게 만들어진 것인데, 육로로 식량을 보급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게 불가능해진다는 것이다.
“프랑스나 독일에 비싼 수수료를 문다면, 그들은 아마 식량 보급을 도울 것입니다.”
일리 있는 말이었다.
프랑스는 이 전쟁에 미온적이었고,
독일은 어쨌거나 에스파냐의 동맹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정도는 나도 계산했다.
“당연히 식량 위기만으로 적군을 무너뜨릴 수는 없지. 하지만, 이 식량 위기가 적을 뒤흔들 좋은 미끼가 되는 건 사실이야.”
내가 덧붙였다.
“그리고, 그 기간은 그대의 말대로 얼마 되지 않을 것이네.”
네덜란드에서 극단적으로 식량 보급이 어려운 것은 지금부터 40일간 이어질 사순절 기간뿐.
육로 보급이 시작될 가능성을 고려해도 그 40일 정도다.
“그러니 기회는 한 번뿐이야. 그리고, 이번 승리를 위해선 나 또한 무언가를 희생해야 할 테지.”
“희생, 말입니까?”
“그래.”
이미 각오했음에도, 희생이란 말이 무겁게 다가왔다.
이마에 그려진 재의 십자가가 욱신거리는 것도 같았다.
그러나 이 전쟁에 걸린 것이 너무나 많았으니,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나는 희생시킬 것을 정했다.”
그게 군주의 책임이었기에 그렇게 했다.
무거운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나는 천천히 작전을 설명했다.
듣고 있던 이들의 얼굴도 굳어갔으나,
이내 하나둘 고개를 끄덕였다.
“자책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폐하. 폐하께서 말씀하신 작전은 분명 가장 적은 피가 흐르는 길입니다.”
“정말 그러면 좋으련만.”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서신을 작성했다.
내가 계획한 이 작전을 책임져줄 사람.
내가 결정한 그 인물은 바로, 호킨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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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회의실의 문이 부서질 듯 흔들렸다.
거칠게 문을 연 알바로 제독이 소리쳤다.
“내가 본국으로 가면, 반드시 폐하께 그대의 이기적인 태도를 고발할 것이오!”
알바 공작은 미동조차 하지 않고 태연히 말했다.
“마음대로 해보시오. 무슨 말을 해도, 나는 내 병사들에게 먹일 밀 한 톨도 그대에게 양보하지 않을 것이오.”
제독은 씩씩대며 회의실 밖으로 나섰으나,
그 마음은 어둡기 그지없었다.
실은 그 역시 공작의 태도를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었다.
‘제기랄, 빌어먹을 식량 부족.’
현재 에스파냐군은 식량이 크게 부족했다.
알바 공작 역시 넉넉하지 않아, 제 사비를 털어 어떻게든 병사들을 먹이고 입히며 부하들의 이탈을 막는 판이었다.
그리고 해군의 상황은 알바 공작보다도 더욱 열약했다.
“어떻게든 식량 보급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알바로 제독이 소리 내어 말했으나,
그런다고 해결책이 나타나지는 않았다.
네덜란드 내부 약탈은 곤란했다.
빠르게 마무리해야 할 전쟁인데,
그들에게 괜한 반감을 심어줘선 안 된다.
그렇다면 인접한 프랑스는 어떨까?
아니, 이것은 더욱 최악의 생각이다.
아직 프랑스는 이 전쟁에 미온적이었다.
참전하지 않은 나라를 쓸데없이 건드릴 필요가 없다.
역시 가장 좋은 것은 인접한 적국인 영국인데···.
‘아니, 내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가.’
알바로 제독은 문득 헛웃음을 터뜨렸다.
자랑스러운 지브롤터의 군주인 자신이 마치 추잡한 바르바리 해적처럼 약탈질 궁리나 하고 있다니.
제독은 자신에게 환멸을 느꼈다.
한편으론, 자신에게 그런 생각을 하게 한 에스파냐의 처참한 보급 사정에도 환멸이 느껴졌다.
‘사실, 내가 약탈을 하려 해도 실행은 불가능했겠지만.’
영국 해군이 멀찍이서 에스파냐 해군을 감시하고 있었다.
벌써 몇 주 째 멀리서 그들의 움직임을 살피는 모습이었다.
그들도 에스파냐의 영국 본토 침략을 경계하는 것 같았다.
영국 해군은 일종의 벽을 형성해 에스파냐 함선이 영국 인근으로 접근하는 것을 막으려 했다.
“어쩔 수 없군. 브뤼셀 쪽으로 내려가 보지. 그쪽엔 아직 식량 사정에 여유가 있을지도 모르니.”
제독이 한숨을 쉬며 부하들에게 출항을 명령하던 그때.
갑판의 병사 하나가 긴급히 외쳤다.
“제독님! 영국 함선이 저희에게 다가옵니다!”
“뭐?”
공격인가!
제독이 깜짝 놀라 갑판에 섰다.
그러나, 보이는 광경은 그의 생각과 달랐다.
“잠깐, 지금 다가오는 함선이 한 척뿐인 건가?”
“그런 것 같습니다. 항복을 하려는 걸까요? 아니면 협상?”
그러나 다음 순간,
다가오는 함선은 포격을 발사해 그들의 생각을 깨뜨렸다.
물론, 멀리서 쏘아진 초라한 포격은 에스파냐 함선 근처에도 접근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지금 설마, 저 한 척이 우리 해군 전체에 덤비는 건가?”
“그, 그런 것 같은데요?”
어처구니가 없는 광경이었다.
보아하니 저 함선의 독단이었는지,
영국 함선들은 크게 동요해 벽에도 구멍이 뚫렸다.
“이리 노골적인 허점이라니, 혹시 함정은 아닌가?”
아니, 함정이 틀림없었다.
전선에서 저리 허술한 움직임을 보일 리 없지 않나.
“그렇지만, 저 함선의 깃발을 보십시오. 그러면 설명이 되는 것 같지 않습니까?”
“응? 내가 영국 해군 깃발을 어찌 알아본다고···.”
그러나 제독은 그 깃발을 알아보았다.
“잠깐, 저건 그 애송이의 깃발이잖아? 분명 호킨스였나 하는.”
“공적에 눈이 멀어 칼레 해전 때도 포위망에 균열을 만들었던 지휘관입니다. 저희에게 지칠 줄 모르고 덤비던 호전적인 놈이기도 하고요.”
자신이라면 틀림없이 죽였으리라 생각했던 어설픈 지휘관.
그 지휘관이 독단으로 공격을 시도한다?
그렇다면 얘기가 달랐다.
‘공적에 눈이 먼 놈이다. 몇 주간 이어진 포위에 싫증을 내고 독단적인 공격을 시도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어!’
어쨌거나 이것은 기회였다.
급박한 식량 사정을 해결할 수 있는 기회.
제독은 의심을 버리고 부하들을 향해 외쳤다.
“돛을 펼쳐라! 전력으로 항해한다!”
상대 전함의 돌발 행동으로 만들어진 균열.
그 균열을 돌파해, 영국 본토를 공격하는 것이다.
“속도를 올려라!”
곧, 알바로 제독의 계획은 멋지게 먹혀들었다.
그들은 칼레에서처럼 가로막은 영국 해선을 뚫어버렸다.
그리고는 영국 본토를 향해 속력을 높였다.
“저 호킨스라는 청년은 이 에스파냐를 돕는 첩자가 분명하군!”
포위망을 뚫을 때까지만 해도 일말의 의심을 버리지 못한 제독이었으나, 포위망을 뚫은 뒤에는 달랐다.
그는 입이 찢어지라 웃으며 멍청한 적군의 애송이를 축복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포위망을 뚫은 이상 그들 에스파냐 해군이 영국의 해안선을 약탈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 아닌가.
대체 어느 미친 군주가 자국 해안선의 위협을 용인할까.
“부디 관대하신 영국의 여왕께서 저 젊은이를 오래도록 살려두길 기도하지!”
제독은 신바람을 내며 항해를 이어갔다.
급한 식량 상황으로 시야가 좁아진 채,
정면만을 보고 끝없이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