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sing my Fiancè with Money RAW novel - Chapter (13)
4장
***
만개한 장미가 지천에 깔렸다. 양옆으로 장미 관목이 심겼고, 그 길 끄트머리에 돔을 지탱하는 흰 기둥 두 개가 있었다. 분홍색 장미가 기둥을 타고 올라가 흰 지붕 위까지 두툼하게 덮은 모양새였다.
돔 아래에는 원형 테이블이 하나 있었다. 테이블을 중앙에 두고 여인들이 앉았는데, 그 중심에 스텔라가 자리했다.
오늘 모임은 정기적으로 열리는 스텔라 델로타의 티파티였다. 초대받은 이들은 전부 결혼하지 않은 영애들로, 백작 신분 이하로 구성되었다.
모두가 모이자, 뒤에 서 있던 고용인이 물을 따라주었다. 찻잔에 들어있던 말린 장미가 천천히 피어나기 시작했다. 황홀한 광경에 모두가 감탄할 때, 스텔라가 입을 열었다.
“이번에 신제품으로 내놓을 장미 차예요.”
“향이 정말 좋아요.”
“색감도 예뻐요.”
다들 한 마디씩 칭찬을 늘어놓았다. 그녀들의 말에 스텔라가 미소 지었다.
스텔라는 신제품을 출시하기 전에 가까운 이들을 초대해, 시음회를 열곤 했다. 항상 칭찬뿐이어서 참고할 만한 의견은 딱히 없었지만, 마음의 위안 정도는 되었다.
시음이 끝나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화제가 정해지자 다들 이야기꽃을 피웠다. 혼기가 꽉 찬 영애들이다 보니 주로 연인이나 결혼이 화제였다. 한 자작영애가 한숨을 푹 내쉬며 입을 열었다.
“이번에 혼담이 들어왔는데 고민이에요. 나쁘지 않은 조건이지만, 그래도 아쉬워서…….”
신세 한탄하는 척하지만 은근한 자랑이 느껴졌다. 다들 모른 척하며 그래도 부럽다는 말을 건넸다.
한창 서로의 약혼자 이야기를 하던 중, 한 영애가 스텔라에게 슬쩍 말을 걸었다.
“델로타 님께서는 정말 좋으시겠어요. 곧 공작부인이 되시잖아요.”
다들 부러움 가득한 눈빛으로 스텔라를 바라보았다. 스텔라는 재력이라면 남부러울 것 없는 델로타 가문의 외동딸인 데다가 결혼을 통한 신분 상승까지 앞두고 있었다.
비록 소공자의 평판이 좋지 않았지만, 권력을 거머쥘 수 있다면 늙은 귀족의 재취 자리까지 마다하지 않을 이들이 수두룩했다.
스텔라 또한 그런 부류였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기꺼이 불구덩이에 뛰어들 수 있었다. 그녀는 평생 자신이 발버둥 쳐도 거머쥘 수 없는 권력을 가지기 위해 카르한을 선택했다.
“아직 약혼식도 치르지 못했는걸요.”
스텔라는 남색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나름대로 겸손을 떨어 보았다.
“그래도 두 분 자주 만나시죠?”
“궁금해요. 이야기 좀 들려주세요.”
스텔라는 손도 대지 않은 다과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사실 딱히 해줄 이야기가 없었다. 카르한과 제대로 된 데이트를 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집안끼리 약혼 이야기가 오가고 있을 뿐, 아직은 남이나 마찬가지였다. 다들 결혼식까지 정해진 줄 알고 있지만, 실상은 자신이 일방적으로 그를 쫓아다니는 입장인 것이다.
심지어 황궁 연회 이후로 만난 적이 없었다. 인상을 찌푸린 카르한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라서 당분간 찾아가는 걸 자제하는 중이었다. 자세한 사정을 말해줄 수 없었기에, 스텔라는 거짓말을 섞어서 얼버무렸다.
“대체로 집에서 만남을 가지고 있어요. 소문 때문에 피곤해서요.”
다들 카르한의 소문을 한 번쯤 들은 바가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소공자께서 무서운 분이라고는 하지만, 원래 그런 분이 연인에게는 다정하지요.”
“맞아요. 얼마 전에 제가 읽었던 소설에서도 그런 남자 주인공이 나왔어요.”
화제는 금방 연애 소설로 옮겨갔다. 스텔라는 관심 없는 척하면서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다른 이들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사실 그녀도 연애 소설에 푹 빠져 있었다. 열심히 살을 뺀 까닭도, 즐겨 보던 소설의 여자 주인공 영향 때문이었다. 특히 요즘 가장 즐겨 읽는 소설은 나쁜 남자를 길들이는 여자 주인공의 이야기였다.
누구도 감당하지 못하는 나쁜 남자. 잘생겼지만 아무에게도 마음을 내어주지 않는 성격 파탄자. 그리고 남자 주인공을 유일하게 길들이는 여자 주인공.
처음 그 소설을 읽었을 때, 스텔라는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울고 웃다가 나중에는 자신과 카르한을 대입했다. 카르한이 저를 밀어내거나, 무뚝뚝하게 구는 모습조차 하나의 시련이라고 생각하면 괜히 더 타올랐다.
비록 지금은 소설 속 남자 주인공처럼 차갑고 나쁜 남자지만, 카르한을 함락시키는 것은 결국 자신이 될 것이다.
“아참……. 얼마 전에…….”
한 영애가 별생각 없이 입을 열었다가 아차 하고 다급히 다물었다. 그 모습에 스텔라가 물었다.
“얼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나요?”
머뭇거리던 그녀가 스텔라의 시선을 받고 마지못해서 입을 열었다.
“며칠 전에 제가 번화가에 나갈 일이 있었거든요. 거기서 우연히 에반테온 소공자를 봤는데…….”
그녀는 말하다 말고 스텔라의 눈치를 보았다. 계속 말해보라는 듯 스텔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행이 있더라고요.”
“비서 아닌가요?”
카르한이 비서인지 보좌관인지 모를 남자를 데리고 다니는 것은 제법 유명했다. 용기 내서 카르한에게 말을 걸려 했던 이들도 그 남자 때문에 포기하곤 했다.
“아니에요. 되게 가까이 붙어서 걷고 있었는데…….”
“그래서 누군데요?”
스텔라가 참지 못하고 재촉했다. 말해도 되나 망설이던 그녀는 결국 저질러버렸다.
“일리아 블로든 님이셨어요.”
쨍그랑, 하고 티스푼이 떨어졌다. 스텔라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입술을 벌렸다.
그 얄미운 계집애와 에반테온이 같이 걷고 있었다고……?
바들바들 떨던 스텔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뒤에 서 있던 고용인에게 소리쳤다.
“에반테온 저택으로 가야겠어. 당장 마차 불러!”
***
카르한과 만나기로 약속한 날이 왔다. 화장대 앞에 앉은 일리아는 며칠 전 리하트와의 만남을 떠올렸다.
마지막에 자리를 뜨려고 할 때, 리하트는 소리 지르더니 저를 붙잡으려 들었다. 하지만 일리아에게는 훌륭한 호위 기사가 둘이나 있었다.
프란체와 말렉에게 저지당한 리하트는 분을 못 이겨 난동을 피웠다. 그러다 가게 주인이 경비대를 부른다고 하자, 겨우 잠잠해졌다. 일리아는 그 틈을 타 집으로 돌아왔다.
하고 싶은 말은 다 했으니, 앞으로 둘이서 따로 만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제부터 그가 파혼을 동의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만들어야 했다.
치장이 끝나고, 일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마워.”
“잘 다녀오세요, 아가씨.”
고용인들이 웃으며 일리아를 배웅해주었다. 침실을 빠져나와 복도를 걷던 일리아는 잠시 멈춰 섰다. 복도 중앙, 빛이 드는 창가에 반짝거리는 금발의 남자가 서 있었다. 오라버니인 헤인리였다.
“오라버니?”
일리아의 부름에 헤인리가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일리아는 그쪽으로 걸어가며 물었다.
“지금 출근하실 시간 아닌가요?”
“휴가다.”
쌀쌀맞은 대답이 돌아왔다. 헤인리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멈춰 선 일리아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 또한 일리아를 마주 보았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어색함이 흘러나왔다. 단둘이 대화를 나눴던 날 후로 마주칠 일이 거의 없었다.
“외출하려는 모양이지?”
“네, 에반테온 소공자를 만나려고요.”
헤인리의 눈이 가늘어졌다. 일리아는 뒤늦게 헤인리에게만 카르한에 대해서 말해주지 않은 것을 깨달았다.
“아, 그게…….”
간단히 설명해주려는데, 그가 무심히 대답했다.
“부모님께 대충 들었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헤인리 혼자 소외감을 느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안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는데, 은테 안경 너머로 차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일리아는 입술 안쪽을 지그시 깨물었다. 카르한과 연애한다고 했을 때, 부모님의 반응은 썩 좋지 않았다. 카르한을 둘러싼 소문들이 워낙 좋지 않았으니 말이다. 아마 헤인리 또한 부모님과 비슷한 생각일 터였다.
“오라버니, 혹시…… 나중에 둘이서 식사할 수 있을까요?”
헤인리가 일리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함께 식사하면서 자세히 말씀드리고 싶어서요. 아니면 잠시 차라도…….”
일리아는 나름대로 용기를 냈다. 저 때문에 관계가 틀어졌으니, 원래대로 되돌리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었다.
“알겠다. 시간을 비워놓도록 하지.”
대답을 들은 일리아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거절당할까 싶어서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잠깐의 침묵이 내려앉고, 일리아가 물었다.
“약속 시간에 늦을 것 같으니 이만 가봐도 될까요?”
헤인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먼저 자리를 뜨려고 하자, 헤인리가 일리아를 불러 세웠다. 그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냉랭한 어투로 말했다.
“오늘 오후에 비가 온다더군. 괜히 고용인들 번거롭게 하지 말고 우산 가져가거라.”
“우산 챙겨 갈게요. 고마워요.”
일리아가 먼저 걸음을 뗐다. 헤인리는 우두커니 서서 일리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일리아가 완전히 사라졌을 때, 그가 머리를 쓸어 올렸다.
“하아…….”
깊은 한숨이 저도 모르게 터져 나왔다. 일리아와 대화하면서 자꾸만 쌀쌀맞은 말투가 튀어나왔다. 오랫동안 굳어진 버릇 때문에 살가운 말을 건네기가 쉽지 않았다.
헤인리는 제 말투가 얼마나 날카롭고 차가운지 알고 있었다. 자신과 대화를 나누다가 눈물을 흘린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그래도 일리아에게만은 다정한 오빠였는데 사이가 틀어진 후로는 남과 다를 바 없었다. 일리아도 내색하진 않았으나, 아마 상처 입었을 터였다.
“좀 더 솔직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혼잣말을 중얼거린 그는 천천히 창밖을 내다보았다. 현관 앞에서 일리아가 막 마차에 올라타고 있었다. 헤인리는 그 광경을 물끄러미 보다가, 곧바로 고용인 하나를 붙들고 말했다.
“지금 외출할 테니, 바로 마차를 준비해라.”
***
마차를 타고 저택을 빠져나온 일리아는 번화가에 도착했다. 골목 어귀에 마차를 세워놓고 오르골 가게로 걸어가던 일리아는 엄청나게 긴 줄을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뭐지……?”
뭔가 신제품이 나왔나? 그것도 아니면 한정판매로 물건이 풀리기라도 했나?
일리아는 강을 거스르는 연어처럼 줄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수많은 사람을 지나친 일리아는 잠깐 멈춰 섰다. 줄의 근원지는 바로 일리아의 오르골 가게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엄청나게 한적했는데?’
갑자기 대박이 터진 이유를, 사장인 일리아 혼자만 몰랐다. 당황한 일리아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아무나 붙잡고 물었다.
“왜 다들 줄을 서고 있는 거죠?”
그러자 젊은 남성이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아, 그게…… 이번에 인기 배우가 오르골에 반지를 넣어서 청혼했거든요. 소문이 쫙 나서 오르골이 청혼 필수품이 되었어요.”
‘고작 그런 이유로?’
하필이면 지금 오르골이 인기 제품이 되다니. 언젠가는 이렇게 될 줄 알았지만, 예상보다 너무 빨랐다. 일리아는 점점 길어지는 줄을 확인했다.
수도에서 오르골만 취급하는 가게는 많지 않았다. 그리고 이번 달은 청혼하기 좋은 기념일이 끼어 있었다. 유명인이 하면 꼭 따라 해야 하는 제국민들의 심리까지 맞물려 이런 기현상을 불러일으킨 것이었다.
줄을 둘러보던 일리아의 시선이 잠깐 멎었다. 빽빽하게 늘어선 줄 사이로 머리 하나 더 큰 남자가 서 있었다. 카르한이었다.
‘아니, 왜 저기 서 있어.’
일리아는 곧바로 그쪽으로 걸어갔다. 왠지 카르한의 앞뒤로만 줄 간격이 느슨해 보였다.
“카르한. 여기서 뭐 해요.”
일리아의 부름에 카르한이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가게 안에서 만나기로 해서…….”
일리아는 이 와중에 착실하게 줄을 선 카르한에게 현실을 알려주었다.
“일정 변경이에요. 지금 들어갔다간 압사할지도 몰라요. 자리를 옮기는 게 좋겠어요.”
일리아의 말에 그가 줄에서 이탈했다. 그러자 개미 떼처럼 줄이 다시 빽빽해졌다.
일리아는 조금 측은한 얼굴로 가게 입구를 바라보았다. 왠지 새로 뽑은 직원의 비명이 여기까지 들려오는 듯했다. 아무래도 월급을 많이 올려줘야 할 것 같았다. 이 유행이 오래간다면 새 직원도 고용해야 할 테고 말이다.
일단 두 사람은 오르골 가게 반경을 벗어났다. 꾸역꾸역 밀려드는 인파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조금 한적한 곳까지 나온 일리아는 바로 사과했다.
“미안해요. 갑자기 이렇게 사람이 몰릴 줄은 몰라서…….”
“괜찮습니다.”
카르한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래도 그 짧은 시간 동안 일리아의 재물운에 적응한 듯했다.
“당신 보좌관은요?”
“영애와 길이 엇갈릴까 봐 잠깐 주위를 둘러보러 갔습니다.”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일리아는 멈칫했다. 그의 큼직한 손에 들린 분홍색 책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저번에 일리아가 구입해서 떠넘긴 책이었다. 일리아의 시선을 눈치챈 카르한이 입을 열었다.
“……요즘 계속 읽고 있습니다.”
“좋은 자세예요.”
책으로 배우는 연애도 쓸모가 있을 터였다. 특히 요즘 가장 잘 팔리는 책이라고 하니 성과가 있을지도 몰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카르한의 보좌관인 테시온이 합류했다. 그는 어마어마한 줄에서 겨우 탈출했는지 진이 다 빠진 모습이었다.
“……운이 좋다고 하시더니, 사실이었군요.”
테시온이 땀을 훔치며 말했다. 저번에 약속 장소가 갑자기 재개발 구역으로 지정된 것은 단순한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한적하던 오르골 가게가 문전성시를 이루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고작 두 번째 만남인데 연속으로 이런 일이 생긴 것이다.
“다음 약속 장소는 저희 쪽에서 마련하겠습니다.”
“그게 낫겠어요.”
테시온의 말에 동의한 일리아는 고개를 돌려 카르한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물건은 가지고 왔어요?”
저번 만남 때, 일리아는 최근 구입한 것 중에서 가장 쓸모없는 물건을 가지고 오라 말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카르한은 착실하게 그 말을 따랐다.
카르한이 조심스레 물건을 꺼냈다. 포장조차 뜯지 않은 작은 상자였다.
“언제 샀어요?”
“……일주일 정도 되었습니다.”
“좋아요. 기간도 적당하네요.”
카르한은 이걸로 무엇을 하는지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일리아는 설명해주는 대신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사납게 치켜 올라간 눈매 안에 저를 신뢰하는 눈동자가 보였다. 그것을 확인한 일리아는 옅게 미소 지었다.
사실 처음에는 적당히 그의 고민을 들어주고, 리하트를 떨쳐낼 생각만 가득했다. 하지만 지금은 진심으로 카르한을 도와주고 싶었다.
자신감 없는 모습이나, 남의 눈치를 보는 것도. 의견을 내세울 줄 모르고, 타인을 우선시하느라 저 자신을 소홀히 하는 것도 전부 바꿔놓고 싶었다.
절대 카르한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착한 성품으로 살아남기에 이 세상이 너무 험악할 뿐이다. 만만하게 보이는 순간 가진 걸 전부 빼앗기고 물어뜯길 것이다. 그러니 호구 잡힐지도 모를 성격은 고칠 필요가 있었다.
“지금까지 제가 지켜본 당신은 자신감이 많이 부족해요.”
일리아의 솔직한 말에도 카르한은 묵묵했다. 본인도 많이 느끼고 있는 듯했다.
“이제 의견은 조금씩 낼 수 있으니까 이번에는 자신감을 키워볼 거예요.”
다들 의아한 표정으로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아직까지 무엇을 하려는지 감을 잡지 못한 듯했다.
일리아는 카르한에 손에 들린 상자를 힐끗 보며 말했다.
“그거 환불하러 가요.”
카르한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이렇게나 동요한 모습은 처음 보았다. 그런 카르한을 대신하여 테시온이 나섰다.
“환불이라니……. 카르한 님께서는 그런 거 못하십니다.”
“못하면 되게 해야죠.”
일리아가 단호하게 말하자, 테시온은 스르륵 입을 다물었다.
지금까지 지켜본 결과, 카르한은 폐 끼치는 것을 극도로 꺼려했다. 정당한 요구조차 하지 못했다. 일리아는 그가 자신감을 키우면 지금처럼 휘둘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떤 식으로 자신감을 심어줄지 고민하던 끝에, 일리아는 환불을 택했다. 일리아 본인은 환불할 일이 없어서 잘 모르겠으나, 주변 사람들이 말하기를 환불은 무척이나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 하였다.
“정말 못하겠으면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강제로 떠밀고 싶지는 않거든요.”
흔들리는 푸른색 눈동자에 일리아의 얼굴이 가득 담겼다. 부드러운 금발에 가만히 있어도 호감을 부르는 선한 인상이었다. 겉모습만 보고 무섭다고 오해를 사는 카르한과 너무나 달랐다.
그러나 일리아는 남들과 달리 언제나 곧은 시선으로 카르한을 마주했다. 유일하게 진짜 자신을 봐주는 일리아의 얼굴이 실망으로 물드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마침내 눈동자의 떨림이 멎었다.
“해보겠습니다.”
조용히 내뱉은 말에 테시온이 놀라서 카르한을 올려다보았다. 그럼에도 카르한은 말을 번복하지 않았다.
“좋아요. 그럼 바로 가볼까요?”
앞장 선 카르한을 따라 걸었다. 가게 앞에 도착한 일리아는 간판을 보고 잠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환불한다던 가게가 우리 가게였네…….’
신발을 취급하는 곳으로, 블로든 가문 소유의 가게였다.
“그 물건 뭐예요? 왜 환불하는 건지 물어봐도 될까요?”
일리아는 뒤늦게 환불 사유를 물어보았다. 손님의 불만 정도는 알아둘 필요성이 있었다.
“신발인데, 치수가 맞지 않아서…….”
“아하.”
물건에 하자가 있는 건 아니었구나. 그렇게 생각하던 일리아는 멈칫했다. 카르한의 손에 들린 상자는 누가 봐도 그의 발 크기보다 작았다.
도대체 얼마나 작은 걸로 산 거야……? 일리아가 상자와 카르한을 번갈아 보자, 그가 시무룩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디자인이 마음에 들어서 보다가 이보다 큰 치수가 없다고 해서…….”
그래서 얼떨결에 샀다고 그가 말했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지? 보통 신어보지 않나?’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의 전적을 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아마 점원의 능수능란한 말발에 ‘어어……’ 하다가 덜컥 구매까지 이어졌으리라.
그래도 다행이라면 블로든 가문 소유의 가게들은 전부 점원 교육을 철저히 한다는 점이었다. 막무가내로 환불이 안 된다고 우기지는 않을 터였다.
카르한이 홀로 가게에 들어가기 전, 일리아가 조언했다.
“당신, 당황하면 인상 쓰는 버릇이 있어요. 표정 관리에 애써 봐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하고 싶은 말을 미리 정리하고 들어가면 도움이 될 거예요.”
카르한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평소에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편인데도 티가 조금 났다. 카르한은 삐걱거리는 걸음으로 가게로 향했다.
“…….”
가게 입구에서 멈춰 선 카르한이 고개를 돌려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왠지 말려주기를 바라는 눈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