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 Man RAW novel - Chapter 15
상남자 15화
호기심이 동한 터라 바로 전화를 했고, 그와의 대화를 통해 군대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막사 뒤 헬스장에서 음료수 마시던 거 생각나지?
“생각나지요.자판기에 얼음 나오는 거 들어왔다고 신기해서 계속 뽑아 먹었잖아요.”
-내가 너한테 가위바위보 진 것만 생각하면 아직도 억울하다니까.
뭐가 그리 억울한지 모르겠지만, 이런 식으로 추억을 공유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났다.
오늘 하루 참 신기한 날이다.
막 말을 튼 학교 후배와 단둘이 식사를 하고 커피까지 마시지 않나, 기억에도 가물가물한 군대 선임과는 30분을 넘게 통화했다.
회사 사람도 아니고, 잘 보여야 하는 사람들도 아닌데 이런 식으로 시간을 쓰는 건 유현의 인생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왜 사람들이 불필요해 보이는 수다를 그렇게 떠는지 알 것 같았다.
-그래.그날 저녁에 찐하게 한잔하자.
“오케이요.”
그렇게 통화는 끝났다.
정현우부터 박영훈까지, 새로운 인연들이 유현의 삶과 함께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것 역시 다르게 살고자 하는 유현의 날갯짓이 벌써 삶을 바꾸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은은한 분위기가 도는 공간에서 중년의 유현이 허리를 숙여 잔을 받고 있었다.
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유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축하합니다, 한 부사장.아니, 이제 한유현 사장이라 불러야겠네.
-감사합니다, 회장님.
-감사는 내가 해야지.그때 한 사장이 내가 내민 손을 잡아 준 덕분에 이 자리에 있으니까.
-…….
더 빨리 성공하기 위해 선택한 길이었고, 그런 유현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유력한 첫째를 밀어내며 한참이나 어린 셋째 아들이 한성이란 거대 그룹의 회장 자리에 오른 것이다.
덕분에 유현은 승자의 편에 서 많은 걸 누렸지만, 과거 유현과 함께했던 사람들은 패자가 되어 씁쓸하게 돌아가야 했다.
그 이후, 새로 취임한 회장 아래에서 유현은 몇 차례 냉혹한 의사 결정을 내려야 했다.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지만 그 또한 회사를 위한 길이라 생각했다.
아무리 후회하지 않는다고 자위를 해도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이런 마음을 들킬 수는 없는 노릇.
유현은 빠르게 가면을 쓰며 입가에 웃음을 지었다.
-제가 뭘 한 게 있겠습니까.다 회장님의 공덕입니다.
-하하하, 한 사장에게 그런 말 들으니 기분이 좋네.오늘 마음껏 마십시다.기쁜 날 아닙니까.
-네, 회장님.
술잔을 넘기려던 순간, 유리잔에 담긴 술이 일렁거리며 그 위로 뭔가 떠올랐다.
권세중의 영정사진, 울부짖는 가족들, 힘들어하던 옛 동료들의 얼굴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놀란 유현은 들고 있던 잔을 떨어뜨렸다.
마치 슬로모션처럼 움직이는 상황 속에서 회장의 표정이 들어왔다.
입은 웃고 있는데, 눈은 독사처럼 차가운 이질적인 모습이다.
소름이 돋음과 동시에 잔이 바닥면에 닿았다.
쨍그랑.
“헉!”
화들짝 놀라 눈을 뜬 유현은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좁은 자취방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꿈인가?”
며칠이나 지났다고 지금의 현실에 몸이 적응했나 보다.
수십 년의 기억을 그냥 꿈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걸 보니 말이다.
어떤 게 꿈이고 현실인지 아직도 머릿속이 뒤죽박죽 엉켰다.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고 몸을 일으킨 유현은 찬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그제야 머리가 조금 맑아졌다.
“하…….다행인 거지?”
혼잣말을 내뱉은 유현은 시계를 바라봤다.
새벽 5시 30분.
언제나처럼 일어나는 시간이다.
예전의 습관대로 움직이는 몸이 괜히 원망스럽다.
자연스럽게 달리러 나갈 채비를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엔 헛웃음마저 나왔다.
어쩌겠나.
답답한데 뛰기라도 해야지.
결국 유현은 밖을 나섰다.
20년간 체력을 키우기 위해 유지했던 습관은 바뀌지 않았지만 달라진 점은 많다.
늘 밟던 한강 길이 아닌 하천 길을 달리고 있었다거나, 눈 뜨면 먹던 홍삼을 먹지 않는단 것 같은 소소한 변화가 아니다.
우선, 몸이 무척이나 가벼워졌다.
돌아온 후 처음 달리길 시작했을 때는 오히려 둔해 보였는데 금세 몸이 적응했고, 지금은 20대의 체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었다.
확실히 젊음이 깡패라는 말이 실감이 났다.
그리고 가장 큰 변화 중 하나.
“헥헥.형, 같이 뛰어요.”
혼자가 아니라 같이 달리는 사람이 생겼단 점이다.
유현은 늘 혼자인 게 편했다.
어떤 선택을 하든 가장 빠르고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마음은 혼자인 걸 더 선호했다.
하지만 이젠 변할 생각이다.
예전 같은 공허한 삶을 원했던 게 아니었기에 유현은 속도를 늦춰 정현우의 발걸음에 맞췄다.
“넌 체력 좀 길러야겠다.이렇게 회사 가면 기력 달려서 일 못 해.”
“헉헉.형은 정말 회사 다녀본 사람 같아요.”
“그냥 그렇단 거지.좀 쉬었다 갈까?”
“네.헥헥.”
땀에 흠뻑 젖은 정현우는 벤치 위에 올려진 플라스틱 물통을 들었다.
덜덜 떨리는 손이 그의 체력이 바닥났음을 보여 줬다.
유현이 피식 웃은 그 순간, 미끈거리는 정현우의 손이 눈에 들어왔다.
‘떨어진다.’
팽창된 손목 근육, 벌어진 손가락, 움찔거리는 어깨의 전조 증상과 함께 물통이 그의 손에서 멀어졌다.
“어, 어, 어어.”
다시 잡으려고 허둥지둥대지만 잡을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물통이 바닥에 닿으려는 순간 예상하고 먼저 가 있던 유현의 발등이 그 아래를 받쳤다.
떨어지는 속도에 맞게 발을 내리며 발끝을 들자 발목과 발등 사이에 정확하게 물통이 끼었다.
유현은 가볍게 차올린 물통을 잡은 후 다시 정현우에게 건넸다.
“자, 꽉 잡고 마셔.괜히 손 떨지 말고.”
“네? 아, 네…….”
정현우는 어안이 벙벙한 눈치다.
물을 마신 그는 아직도 놀란 게 진정되지 않는 듯 말까지 더듬었다.
“어, 어떻게 그걸 받아요.형 운동 신경이 너무 좋은 거 아니에요.”
“무슨.떨어지는 걸 봐서 그렇지.”
“진짜 달리는 것도 그렇고.대단하세요.진짜진짜 짱.짱.”
엄지까지 치켜들며 말을 멈추지 않는다.
달리는 건 정말 아무것도 아닌데.
정현우는 확실히 좀 오버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건 그렇고.
‘운동 신경이 더 좋아진 건가?’
젊은 몸인 만큼 체력과 근력이 좋은 건 당연지사였다.
그런데 뭔가 달랐다.
일전에 자해공갈단을 대할 때가 생각났다.
뭐지?
아직 정확한 실체는 알기 힘들었다.
어쨌든 몸까지 가벼우니 어떤 운동을 해도 잘할 수 있을 것 같단 자신감이 들었다.
‘뭘 한번 배워 볼까?’
문득 달리기 말고 다른 운동도 해 볼까 하는 생각도 든다.
면접 발표까지 2주, 신입사원 연수까지 한 달 정도의 시간이 있으니 천천히 찾아봐도 좋을 것 같다.
운동이 끝난 후.
유현은 정현우를 데리고 국밥집에 갔다.
정현우는 아직도 유현을 향해 존경을 가득 담은 눈빛을 보내는 중이었다.
“형, 진짜 형은 너무 멋있게 사는 거 같아요.학교에서도 그렇고.”
“뭐가.”
그럴 리가.
혼자 다녔는데 좋게 보일 일도 없었다.
“형, 경영전략 과제 발표했을 때 진짜 멋있었거든요.교수님 질문에 아무도 대답 못 하는데 형은 다 해내더라고요.사실 그때부터 친해지고 싶었었는데.헤헤.”
“그랬나?”
솔직히 잘 기억나진 않는다.
학교에서의 기억은 그저 열심히 했던 것밖엔 없다.
아마 저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면 임기응변으로 상황을 헤쳐 나간 듯했다.
회사 발표 때처럼 말이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있는데 식사가 나왔다.
“국밥 나왔습니다.”
“이모님, 감사합니다.너무 배고팠거든요.엄청 맛있을 거 같아요.”
“호호호, 젊은 총각이 말도 참 예쁘게 하네.맛있게들 들어요.”
정현우의 인사에 국밥을 나르던 아주머니는 환한 웃음으로 답했다.
유현은 만나는 사람마다 살갑게 말하는 정현우를 신기하게 쳐다봤다.
표정과 행동엔 가식이 하나 없다.
몸에 착 달라붙는 옷을 입은 것처럼 사람들을 살갑게 대하는 게 자연스럽다.
심지어 처음 보는 사람들조차도 정현우 앞에선 웃는다.
누가 보면 마치 오랜 인연처럼 느껴질 정도로 금세 사람들과 어울리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유현과는 완전히 다른 유형의 사람이다.
‘내가 멋있게 살았다고?’
치열하게 앞만 보고 달린 삶이 멋있었다고 생각되진 않는다.
지나간 자리엔 풀 한 포기 남지 않는 성공의 길을 다시 가 보고 싶진 않다.
오히려 사람들과 어울리며 행복한 웃음을 주는 정현우가 더 멋있는 삶을 살고 있다고 유현은 생각했다.
“형, 맛있게 드세요.헤헤.”
“그래, 맛있게 먹어.”
유현은 빙긋 웃는 정현우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힌트를 얻은 것 같다.
돌아온 유현은 컴퓨터 앞에 앉아 습관처럼 뉴스를 살폈다.
태블릿이 아닌 두꺼운 모니터가 앞에 있었다.
게다가 머신에서 내린 커피가 아닌 냉수가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지만 상관없었다.
뉴스를 살피는 진중한 모습은 이전과 전혀 다를 바 없다.
쏟아져 나오는 뉴스, 그중 특히 IT 관련 뉴스를 보며 과거로 돌아왔음을 다시 한번 느낀다.
공룡처럼 큰 기업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지금은 뉴스에도 잘 나오지 않는 기업들이 세계 정상 자리를 노리게 된다.
일 년이 하루같이 급변하는 전자 산업의 중심에 유현이 있었다.
조금이라도 뒤처지면 도태된단 불안감이 늘 그를 사로잡곤 했다.
무겁게 올려진 짐을 내려놓고 싶었던 건 아니다.
오히려 더 욕심이 났고, 자꾸 더 많은 걸 원하게 되었다.
돌이켜 보면 아무것도 아닌데…….
문득 옛 생각이 든 유현은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중독에 걸린 과거를 답습하지 않기 위함이다.
“조금 더 여유 있게.”
유현은 최면을 걸듯 자신에게 되뇌었지만 눈길은 모니터를 향했다.
이런 걸 보면 습관이라는 게 참 무섭다.
“에휴.”
유현이 모니터 화면을 끈 순간이었다.
지이이잉.
책상에 놓인 휴대폰이 울렸고 동시에 유현의 몸이 움찔했다.
‘회장님?’
이 시간에 전화할 사람은 회장밖에 없기 때문이다.
순간 꿈에서 본 그의 모습이 떠오르며 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
폴더폰을 집어 들고서야 또 습관처럼 과거 기억을 떠올렸단 걸 안 유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커다란 화면이 아닌 작은 LCD 창엔 발신인의 이름으로 ‘아버지’가 떠 있었다.
-일어났냐?
“그럼요.당연하죠.식사는 하셨어요?”
-그래.먹었다.
아버지가 왜 아침부터 전화를?
많이 가까워지긴 했지만 먼저 전화하는 법은 없던 탓에 걱정이 앞섰다.
잠시 뜸을 들이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더욱 불안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현아, 고맙다.
“네?”
-우상건설 말이다.
“아.그거요?”
그제야 아버지의 연락이 이해됐다.
아버지는 흥분된 기분을 애써 참고 말을 이었다.
-자세히 알아보니 문제가 좀 있는 것 같더구나.그래서 안 하기로 했어.
“다행이네요.”
유현이 한 거라곤 넌지시 문제점을 말해 준 것밖엔 없었다.
그걸로 고마워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어진 아버지의 말에서 유현은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변화된 유현의 태도가 아버지까지 변화시켰다.
-그간 너무 초초했던 것 같아.그런데 네 덕분에 여유를 찾을 수 있었구나.고맙다.
“아녜요, 아버지.저도 너무 감사합니다.”
몇 번씩 서로 고맙단 말을 주고받으며 전화를 끊었다.
유현은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아버지에게 아침에 전화를 받아 본 적이 없을뿐더러, 고맙단 이야기도 들어 본 적 없던 탓이다.
“이게 또 이렇게 되네.”
작은 변화가 유현의 삶 전체를 바꿔 가고 있었다.
가슴이.
가슴이.
뛴다.
“좋아.”
아버지와의 통화를 통해 긍정적인 자신감을 얻었다.
유현은 조금 더 적극적으로 달라지기로 마음먹었다.
정현우가 했던 것처럼 가족, 친구뿐만 아니라 스치는 사람들에게도 더 살갑게 다가가기로 생각했다.
좀 더 친절히 인사하고, 관심을 두고, 감사를 표했다.
일련의 과정이 쉬워 보이지만 유현에게는 쉽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지금까지 형성된 개인주의 기반의 가치관을 거스르며 노력하는 일이었으니까.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라는 생각이 든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점차 변화하는 주변을 보며 유현은 깨달았다.
먼저 마음을 열고 다가가자, 보이지 않던 관계까지 풍성해진단 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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