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 Man RAW novel - Chapter 41
상남자 41화
툭.
짧은 연습을 끝낸 후 유현이 링에서 내려오자 관장은 등을 때리며 격려했다.
“유현아, 좋았어.어째 갈수록 느는 거 같다?”
“감사합니다.”
“관장님, 저는요?”
박영훈의 질문에 관장이 냉소를 머금었다.
“영훈이 넌 인마, 더 굴러야 해.대체 링 위에서 실수 한 게 몇 개냐?”
“그건 유현이가…….”
“변명은 됐고.유현아, 자.”
박영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관장이 그의 말을 잘랐다.
그러곤 유현에겐 따뜻한 미소와 함께 음료수를 건넸다.
당연히 박영훈의 반발이 이어졌다.
“관장님, 왜 유현이만 줘요.”
“너도 실력 늘면 줄게.”
음료수를 받은 유현이 피식 웃었다.
관장이 등 뒤로 박영훈의 몫을 숨기고 있는 게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진짜 원년 멤버 너무 괄시…….”
“뭐?”
관장의 손에서 음료수가 하나 튀어나오자 박영훈은 하던 말을 재빨리 주워 담았다.
“아뇨.역시 좋으신 관장님이라고요.헤헤.”
이 또한 꽤 익숙한 풍경이었다.
그때, 유현과 처음 스파링했던 오정욱이 크게 소리쳤다.
“자자, 그러지 말고 먹고들 합시다.”
“벌써 왔어?”
“그럼요.서비스 군만두도 왔습니다!”
“오오, 고량주도 있네?”
운동하고 난 후 체육관 바닥에 둘러앉아 이렇게 배달음식을 먹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제는 익숙해져서 당연하게 느껴지는 일상이다.
“유현아, 넌 좀 많이 먹어라.배가 너무 홀쭉해.”
“매일 땀 흘리는데 살 빠지는 게 당연한 거죠.”
“그럼 영훈이는?”
관장의 팩트 폭격에 짜장면을 먹던 박영훈이 멈칫하며 이리저리 눈알을 굴렸다.
“먹지 말까요?”
“이놈 얼굴 보게.이러다 잘하면 한 대 치겠다?”
관장이 상체를 까딱까딱하며 도발하자 박영훈은 급히 정색했다.
“식사나 하시죠.”
“푸하하하.”
도란도란 둘러앉은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고, 유현도 따라 웃었다.
과거엔 이런 모습 상상이나 해 봤을까?
결단코 그런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제 이곳은 유현의 일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되었다.
함께하는 사람들도 다 마찬가지다.
어떻게 이렇게 모았는지 하나같이 정 많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자, 유현아.단무지도 올려서 먹어.”
“감사합니다.”
특히 하나하나 챙겨 주는 관장이 고마웠다.
그가 붙잡지 않았다면 유현은 이 좋은 곳을 모른 채 살았을 터였다.
그러니 절로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도움이 될 만한 게 없을까?’
빠르게 주변을 살피던 유현이 물었다.
“관장님, 관원 수도 늘어나는데 계속 수기로 명부 관리하실 거예요?”
“어.귀찮아서.”
“이참에 시스템 하나 갖추는 게 어떠세요?”
“에이, 그런 걸로 돈 버릴 필요 뭐 있어.”
유현의 생각은 달랐다.
회사 회의실이야 서로 수기를 해도 별 상관이 없었다지만, 체육관의 경우는 다르다.
회비도 관리해야 하고, 사람마다 레벨에 맞게 프로그램도 따로 관리해야 한다.
지금이야 괜찮을 수도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힘들 수밖에 없었다.
가만히 듣던 막 프로에 데뷔한 김태수가 말했다.
“처음에 했었는데 그 업체는 영 별로더라고.아, 관장님.다른 곳도 알아보셨었죠?”
“그놈들은 더 사기꾼들이었지.”
“두 배를 불렀었나? 하여튼 걔네들은 너무 비쌌어.관리비를 또 따로 줘야 되고.무엇보다 믿을 수가 없어서 말이야.왜? 아는 곳 있어?”
김태수가 관장의 구체적인 마음을 대신 전해 줬다.
결국 돈과 신용이 문제였다.
그런 거라면?
유현이 박영훈을 힐끔 봤다.
“우린 금융 전문가가 있지 않습니까.”
“나?”
박영훈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입을 벙긋 거렸다.
펀드 매니저랑 체육관 전자 시스템이랑 대체 무슨 상관이 있냐는 듯한 눈치다.
유현이 말했다.
“형한테 잘나가는 자영업자 고객들 많다며.그중 체육관 사람도 있지 않아?”
“있긴 하지.”
“그 사람들한테 물어보면 되겠네.증명된 업체들 리스트만 알아도 비교해 보기 좋잖아.”
“그럴까? 하긴, 몇 군데만 찔러 봐도 가격 훅 떨어뜨릴 수 있겠네.”
그 말을 듣던 관장이 인상을 쓰며 물었다.
“영훈이 넌 그런 이야기를 왜 이제 하냐?”
“네? 저야 뭐 생각을 못 했죠.”
“자식! 네가 그렇게 쓸모 있는 놈이었어?”
“아, 감사합…….”
관장의 반전 있는 칭찬에 박영훈의 입꼬리가 올라갈 때였다.
관장은 그의 앞에 놓여 있던 탕수육 접시를 유현 쪽으로 스윽 옮겼다.
그러곤 공을 다 유현에게 돌렸다.
“유현아, 탕수육도 많이 먹어.다 네 덕분이야.”
“영훈이 형이 하는 건데요, 뭘.”
“아냐.저놈은 내버려뒀으면 절대 할 놈이 아니야.”
그 모습에 박영훈이 발끈했다.
“관장님! 일은 제가 하는데 왜 유현만 챙겨 주는 거예요?”
“인마, 넌 곧 프로 데뷔할 몸 아니냐.”
“프로요?”
“그래.마냥 살찐 채로 있을 거야?”
“당연히 아니죠.열심히 하겠습니다!”
괜히 관장이 아니었다.
관원 하나를 어르고 달래는 데 정말 선수였다.
거기에 관장의 마지막 말이 결정타였다.
“시간이 아주 많이 걸리겠지만.”
“푸하하하!”
관장의 중얼거림에 사람들은 배를 잡고 웃었다.
이렇게 땀을 흘리고 먹고 웃고 떠들고.
이 모든 것이 이제 유현에게 너무 소중했다.
다음 날 아침.
한 남자가 박승우 대리를 불렀다.
2파트 소속의 황동식 대리였다.
입사 연차상 선배이기도 했다.
“박 대리, 혹시 격주 보고 회의실 예약했어?”
“아! 맞다!”
“야, 그걸 안 하면 어떻게 해.내가 휴가면 부간사인 네가 해야지.”
팀에 간사란 게 있다.
주된 업무 외에 팀을 돌아가게 하는 데 필요한 일을 서로 나눠서 했다.
황동식 대리의 간사는 ‘회의 담당’으로 팀의 전반적인 회의를 챙기는 역할을 한다.
그가 없을 때 백업 멤버가 바로 박승우 대리였다.
하지만 박승우 대리는 갑작스러운 보고 준비 때문에 워낙 정신이 없던 터라 챙기지 못했다.
안색이 파리해진 이유도 그 때문이다.
“죄송합니다.지금 바로 할게요.”
“늦었어.이미 예약 다 찼을 거야.”
한 달 주기로 회의실 예약 주기가 새롭게 갱신된다.
개별 회의 같은 건 얼마든 협의로 바꿀 수 있지만, 팀 정기 회의체는 미리 다 선점을 해 놓아야 한다.
팀원이 다 들어갈 수 있는 큰 회의실로 예약을 해야 하는데 이게 금방 차 버리기 때문이다.
황동식 대리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매만졌다.
괜히 회의실 예약 미리 못 해 놨다고 팀장에게 욕먹을 걸 생각하니 머리가 아팠다.
그때 얼른 끼어든 유현이 박승우 대리에게 말했다.
“예약했습니다.”
“뭐?”
“목요일 중 회의실에 오후 4시 맞죠? 격주에 맞춰 시간 예약을 해 놓았습니다.”
“언제?”
박승우 대리가 황당한 듯 물었다.
“어제요.박 대리님이 이번 목요일 격주 보고라고 하셔서요.”
“…….”
“오오, 역시 박 대리.신입 잘 이용했네.잘했어.”
황동식 대리가 엄지를 내밀자 황당함에 눈만 껌뻑거리던 박승우 대리는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아냐.됐어.고마워.유현 씨도 고마워요.”
툭툭.
늘 까칠하던 황동식 대리에게 눈웃음까지 받았다.
박승우 대리는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격주 보고가 있다고는 말해 주긴 했던 것 같긴 한데…….’
아무리 개떡 같은 말을 찰떡같이 알아듣더라도 그렇지, 거기서 회의실을 예약할 생각을 한다고?
이게 센스만으로 가능한 일인가?
고개를 돌리자 모르겠단 듯 어깨를 으쓱이는 유현이 보였다.
예쁜 놈.
이 녀석을 보고 있자니 계속 웃음이 난다.
“고맙다.이 똘똘한 녀석.”
“대리님, 설마 안으려는 겁니까?”
“왜 그래.남자끼리 어때서.”
“저, 남자 안 좋아합니다.”
유현은 가볍게 의자를 뒤로 물려 피했다.
이후 사무실 분위기는 더더욱 화기애애해졌다.
특히 박승우 대리 얼굴이 따스한 봄바람이었다.
“뭐 해? 아직도 교재 봐? 모르겠는 거 있으면 물어.다 알려 줄 테니까.”
“네.그럴게요.”
박승우 대리가 옆자리에 앉은 유현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바쁠 텐데 아직도 기분이 좋은지 유현에게 뭐라도 알려 주고 싶은 모양이다.
굳이 그 마음 깨뜨리고 싶지 않아서 유현은 고개를 끄덕여 줬다.
그런데 자꾸 히죽거리며 쳐다보는 게 좀 부담스럽다.
그러면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뭐라도 알려 주고 싶은데…….”
사실 신입사원에게 주어진 일은 별것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에게 당장 일을 던져 줄 수도 없었다.
대신 뭐라도 시키려면 붙어서 일을 가르쳐야 하는데 그것 나름대로 또 시간을 소모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신입사원에게 6개월의 OJT(직무교육) 기간이 존재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물론 바쁘면 OJT 기간이고 자시고 필요 없지만 말이다.
박승우 대리는 계속 유현이 눈에 밟혔다.
주섬주섬.
급기야 자신의 노트와 명함첩을 꺼내 들었다.
빼곡히 찬 노트엔 박승우 대리의 노력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명함첩엔 단순히 업체나 다른 사업부, 다른 팀의 명함뿐만 아니라 그 사람들의 특징과 주의할 점까지 쓰여 있었다.
결코 누굴 보여 주기 위해 만든 자료가 절대 아니다.
과거 유현도 보지 못한 자료였다.
박승우 대리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노트와 명함첩을 건넸다.
“이거 보고 공부해.영업 비밀 주는 거니까 내 말 잘 들어야 된다.”
“감사합니다.”
유현의 진심 어린 대답이 기분 좋은지 박승우 대리는 선심 쓰듯 말했다.
“기왕 주는 거 화끈하게 줘야지.내 컴퓨터로 접속해 봐.공유 걸어 줄 테니까.”
“네.”
“역시 한 번에 알아듣네.똘똘한 자식.”
박승우 대리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사내 인터넷을 통해 박승우 대리 컴퓨터로 접속하니, 업무 폴더가 있었다.
엄청난 용량이다.
아직 클라우드 컴퓨터의 개념이 들어서지 않은 시기라 개인 컴퓨터에 모든 자료를 취합하곤 했다.
특히 박승우 대리는 일단 다 모으고 보는 주의였다.
폴더 트리만 따라가 봐도 꽤나 공들여 정리된 게 눈에 보였다.
이걸 다 줬다?
통일된 양식이 아닌 자신만의 양식으로 정리된 자료들이다.
심지어 방금 전까지 정리하던 담당 보고용 보고서까지 들어 있다.
‘시장 조사, 업체 리스트, 전시회 분석 자료, 기술 보고서, 사업 계획서…….’
폴더 이름 앞엔 번호를 달아 한눈에 보기 좋게 차례로 정렬되어 있었다.
세부 폴더는 연도별로 정리되어 있었다.
열어 보는 데만 만 하루가 걸릴 정도의 분량이었다.
그만큼 유현에게 주고 싶은 마음이 컸으리라.
유현은 진심으로 고마웠다.
진심은 아부도 자연스럽게 만든다.
“역시 멋진 선배님이십니다.”
“하하하, 그거 다 보려면 일 년은 걸릴 거야.그냥 그런 게 있구나, 생각해.”
“네.제가 커피 쏠게요.”
“에이, 치사하게 후배에게 얻어먹을 수 있나.보고만 끝나고 내가 거하게 한턱 쏠게.”
박승우 대리가 잔뜩 호기를 부렸다.
기분 좋은 미소를 지은 유현은 복사 중인 모니터를 바라봤다.
훤히 트인 공간에 새 폴더들이 하나둘씩 들어오고 있었다.
그중 파일 하나를 열어 봤다.
이걸 다 보는데 1년이라고?
내심 웃음이 났다.
다른 사람이라면 엄두도 못 내겠지만 유현은 다르다.
실제 일을 한 경험이 있는 데다가, 시야가 파트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니라 그룹 전체를 향하고 있었다.
보고서의 첫째 장만 띄워 봐도 전체 내용이 예상되었다.
한성전자만의 보고서 스타일이 확실히 몸에 밴 까닭이었다.
이제야 기억이 좀 선명해진 기분이 들었다.
유현이 기억을 재구성해 기록한 연대표는 아무래도 유현의 성과 위주로 써 내려간 부분이 있었다.
이번 연도, 그리고 작성 중인 내년도 사업 계획서를 보고, 진행 중인 프로젝트들을 확인해 보니 전체적인 윤곽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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