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 Man RAW novel - Chapter 590
상남자 590화
딱 분위기 보니, 유현 빼고는 다들 알고 있는 듯했다.
대리로 승진한 녀석이 뭐가 아쉬워서 갑자기 그만뒀을까?
“내가 과장 돼서 그러냐?”
유현이 대충 짐작한 바를 뱉자, 윤재일 대리가 눈을 껌뻑였다.
“어라? 아나 보네.”
“그냥.찍었어.말해 봐 봐.”
“음…….”
서창우 대리의 눈치를 살핀 슬쩍 윤재일 대리가 설명했다.
“아니, 그 녀석이 원래 널 라이벌로 생각했잖아.자기는 특진도 못했는데, 너는 더 높이 올라가니까 못 버틴 거지.”
“그랬구나.”
“오빠, 신경 꺼요.원래 현준이 오빠가 욕심이 좀 많았어요.”
진선미가 끼어들어 분위기를 환기시키려 했지만, 모른 척하긴 어려웠다.
유현의 뇌리엔 벌써 과거 치기 어린 동기에게 쏟아부었던 말이 떠올라 있었다.
-학연? 지연? 라인? 그딴 거 생각하지 말고, 회사가 필요로 할 수밖에 없을 만큼 실력을 쌓아.그럼 꺼지라고 해도 회사가 널 잡게 되어 있으니까.
그때 유현은 회사에 불평불만을 내뱉는 공현준 대리에게 노력을 강조했었다.
어떻게든 잘 보이기 위해서 무조건 더 잘하라고 그를 몰아세웠다.
당연히 맞다고 생각했던 그 말이, 지금은 사뭇 다르게 다가왔다.
실력을 쌓는다고 기회가 왔을까?
아닐 수 있다는 걸 아는 터라, 유현은 차마 어떤 답도 하지 못했다.
체념한 서창우 대리가 확인 사살을 해 줬다.
“그 녀석 근태 봤는데, 너무 야근이 많더라.아마 대기업 생활이랑 안 맞는다고 생각했을 거야.”
“아쉽긴 해요.걔 그래도 진짜 열심히 했거든요.”
변재승 대리의 말에 유현이 귀를 쫑긋했다.
“그래?”
“어.내가 업무는 몰라도, 걔가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 알잖아.어학부터 시작해서 영업, 마케팅 관련 교육들은 다 들었어.”
“그런 프로그램이 외부에 오픈됐어?”
“수박 겉핥기식이지만 있긴 하지.사실 우리 회사가 그런 업무 교육을 챙기진 않잖아.현준이도 꽤 실망했었어.”
변재승 대리의 말에서 유현이 문제로 삼았던 부분이 튀어나왔다.
회사에 교육팀이 엄연히 존재하지만, 정작 현업에 필요한 교육이 이뤄지지 않았다.
유현은 말이 나온 김에 자연스럽게 화두를 던졌다.
대상은 바뀌었지만, 내용을 전달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만약 제대로 된 교육 프로그램이 있었다면, 현준이의 퇴사를 막을 수 있었을까?”
“에이, 교육으로 어떻게 막아.”
윤재일 대리가 손사래를 치자, 변재승 대리가 반대 의견을 냈다.
“아니.난 가능했다고 봐.VOC 들어 보면 멘토, 멘티 교육이 제대로 안 되어서 업무에 고충을 겪는 경우가 많거든.현준이도 멘토 잘못 만나서 고생했던 거 다들 알잖아.”
“그랬다고 해도 잘 안 됐을 거야.보니까 현준이 녀석, 태도 때문에 팀에서 조금 찍힌 거 같더라고.”
다른 의견을 뱉은 서창우 대리에게 유현이 이유를 물었다.
“왜요?”
“불공정한 게 있어서 녀석이 몇 번 항의했나 봐.그게 어디 통해? 팀장이 좋게 안 본 거지.”
“그래도 승진은 시켜 줬네요.”
“원래라면 특진을 했어도 될 만큼 실적이 좋았어.찍혀서 그게 안 된 거고.”
“어디 팀장 무서워서 살겠나.”
툭하고 중얼거린 윤재일 대리의 말에, 유현이 짚었던 문제가 녹아 있었다.
보통 팀장 자리에 올라서면 내려오는 경우는 없다.
게다가 팀장은 팀원들의 포상과 승진을 결정짓는 막강한 인사권까지 쥐고 있다.
팀장에게 찍히면 회사 생활 꼬였다고 하는 게 틀린 말이 아니었다.
공현준도 같은 경우 아니었을까?
깊이 생각하던 유현은 다른 방향으로 질문을 던졌다.
“재일아, 불만 같은 건 너네 총무팀에서 받아 줘야 하는 거 아냐?”
“우리 팀? 뭐, 맞긴 한데 안 하고 있지.”
“왜?”
“윤리위원회가 있잖아.회사 내엔 진상 조사단도 있고.”
그룹 윤리위원회에 일개 개인이 연락할 방도 자체가 없었다.
진상 조사단은 그래도 여의도 센터에 있지만, 상황은 매한가지였다.
그들의 역할은 고충 청취가 아니라 문제 해결이었다.
“거기에 직원들이 불평불만을 할 수 있어?”
“좀 어렵긴 하지.그래도 어쩔 수 없어.”
윤재일 대리가 체념하듯 말하자, 진선미 대리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오빠, 총무팀에서 예전에 고충 내용 받는 거 하지 않았어요? 사보 촬영도 했던 거 같은데?”
“아, 그거? 잠깐 하다가 흐지부지됐어.”
“왜요?”
“내가 낸 아이디어라 계속하고 싶었는데, 위에서 업무 중복이니까 접으라고 하더라고.”
“업무 중복…….참 어이없는 말이네.”
유현의 눈엔 뻔한 조직 간 책임 미루기가 보였다.
코웃음 치는 유현에게 윤재일 대리가 팀을 대신해 변명했다.
“현준이 불만을 들어주는 부서가 있다 해도, 녀석은 퇴사했을 거야.”
“왜 그렇게 생각해?
“따지고 보면 걔가 너한테 열등감 느껴서 나간 거잖아.뻔히 네가 과장이고 자기가 대리인 거 아는데, 그걸 참을 수 있겠냐?”
“그걸 왜 못 참아요? 남 일인데?”
진선미 대리가 황당한 듯 묻자, 윤재일 대리가 둘러댔다.
“남자의 자존심, 뭐 그런 게 있나 보지.”
“참 이상하네.”
유현 역시 진선미 대리처럼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건 회사 내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문제다.
불만을 전혀 내색하지 않던 김호성 대리의 속이 곪은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 정도로 지금의 호칭 체계엔 문제가 많았다.
문제점을 빠르게 되짚은 유현이 생각했던 바를 꺼냈다.
“결국 날 부를 때 과장이라고 불러야 돼서 그런 거 아냐?”
“그렇긴 하지.”
“그럼 호칭을 빼 버리는 건 어떨까?”
“엥? 그럼 이름을 불러?”
“아니.직급을 통일화 하는 거지.”
놀라 묻는 윤재일 대리에게 유현이 정확한 설명을 덧붙였다.
그러자 듣고 있던 서창우 대리가 반박 의견을 냈다.
“나도 직급 통일화를 고민 안 해 본 건 아닌데, 괜히 말했다가 혼만 났어.”
“왜요? 외국에선 다 그렇게 하잖아요.”
“유현아, 생각해 봐.우린 이미 여러 업체랑 연락할 때 직급 보면서 판단하잖아.그게 아니고서야 이메일로 상대 경력을 어떻게 알아.”
“직급 하나로 상대를 판단하는 게 더 문제죠.”
직급으로 상대를 평가하니, 일부 회사는 입사하자마자 대리 호칭을 붙여 버렸다.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직급을 올리는 것도 다반사였다.
중소기업만 그런 게 아니라 일부 중견기업과 대기업도 이런 편법을 썼다.
참 쓸데없는 짓을 국가 단위에서 하고 있는 셈이다.
“원론적으론 그렇지.근데 다른 회사는 다 쓰고 있잖아.직급을 어떻게 통일할까? 다 부장이라고 하면 의사소통이 되겠어?”
“아예 다른 걸로 바꾸는 것도 방법입니다.”
“좋아.나도 거기까지 갔었어.근데 어디서 막힌 줄 알아?”
“어디요?”
“가장 큰 건, 직급 문제가 그룹 전체와 연결됐다는 거야.자회사만 바꿀 수가 없어.”
일개 인사팀 직원이 그룹에 닿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서창우 대리 입장에선 대번에 포기할 만했다.
유현은 역으로 그에게 질문했다.
“그룹 통째로 바꾸면 가능하다는 거죠?”
“그렇지.회사에서 그럴 리가 없겠지만.”
“왜 안 된다고 생각해요?”
“윗사람들이 볼 땐 직급이 있는 게 편하잖아.근데 직원들을 위해서 그걸 바꾸려고 하겠어?”
“업무 로스가 발생되는데 바꿔야죠.그냥 두기엔 부작용이 너무 큽니다.”
유현의 목소리 톤이 높아지자, 서창우 대리가 양 손바닥을 앞으로 뻗었다.
“워워.진정해.동기 모임에서 이럴 건 아닌 거 같다.”
“네.제가 조금 흥분했습니다.”
“유현아, 현준이 때문이라면 신경 꺼.그 녀석은 이미 퇴사했어.”
“현준이 때문이 아니에요.그냥 제2의 현준이 같은 사태를 막고 싶은 겁니다.”
“…….”
여태껏 대화에서 꺼낸 화두를 따지면 여기 있는 모두가 방관자였다.
제약은 있지만, 바꿀 수 있는 여지는 충분히 있다는 걸 모두 알았다.
총무팀이면서 직원들을 살피지 못했던 윤재일 대리가 물었다.
“동기 모임 자리에서 하는 말치곤 너무 진지한데?”
“동기 모임이라서 할 수 있는 이야기야.여기 인사, 총무, 교육, 홍보 부서가 다 있잖아.”
“그렇게 거창하게 말해도, 우리끼리 할 수 있는 게 없어.”
서창우 대리의 말이 보통의 경우라면 틀린 게 아니었다.
하지만 여기에 유현이 포함되면 어떨까?
유현이 앞뒤 말을 자른 채 바로 물었다.
“만약 바꿔 볼 수 있다면 해 보실래요?”
“뭐, 나쁠 건 없지.근데 아까 말했듯이…….”
서창우 대리가 제약 사항을 들먹이려는 사이, 유현은 동기들을 살폈다.
지금까지의 대화를 미뤄 보면, 다들 속으론 변화를 갈망하고 있었다.
단지 여러 제약 조건들 때문에 못하고 있었을 뿐이다.
이 사실이 동기들의 시선으로 문제점을 확인하러 온 유현의 계획을 바꿨다.
유현은 말을 끝낸 서창우 대리에게 대뜸 물었다.
“그래서 제약만 걷어내면 할 수 있다는 거죠?”
“이론적으로 가능은 하지.검토해 본 내용도 있고.근데 그게 어려울 거야.”
“그럼 됐습니다.나머진 저만 믿으세요.”
시원하게 답한 유현이 빙긋 웃었다.
뜻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동기들이 눈을 껌뻑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회사 개혁의 선봉에 서게 될 거라는 걸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날 동기 모임은 꽤 훈훈한 분위기로 끝이 났다.
언제나 그렇듯 시작할 땐 어색함이 있었지만, 헤어질 땐 또 죽고 못 사는 사이가 됐다.
유현의 어깨에 팔을 두른 윤재일 대리가 큰 소리를 떵떵 쳤다.
“유현아, 동기 좋다는 게 뭐야.말만 해.내가 다 들어줄게.”
“진짜지? 나 꼭 기억한다.”
“날 뭐로 보고.너가 전화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달려갈게.”
윤재일 대리만 이런 게 아니었다.
다른 동기들도 차례로 동기애를 약속했다.
“오빠, 저도 부탁하신 거 바로 들어줄게요!”
“그래.뭔지 몰라도 유현이 네게 도움이 된다니까 좋네.”
“유현아, 기대해.내 노하우가 잔뜩 든 교육안을 보낼 테니까.”
술에 취해 흘려들을 줄 알았더니, 다들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피식 웃은 유현이 동기들을 보며 엄지를 내밀어 보였다.
“역시 동기가 최고네.”
동기애가 말만이 아니라는 건 얼마 지나지 않아 확인할 수 있었다.
모니터에 띄운 자료를 살펴보던 유현에게 권세중 대리가 물었다.
“웬 사보?”
“사내 혁신 활동 했던 내용들 다 모은 거야.이거 봐 봐.기억나지?”
유현이 화면에 뜬 3년 전 사보 내용을 가리키자, 권세중 대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소리함.복도에 잠깐 달려 있었잖아.바로 흐지부지됐지만.”
“여기 보면 그렇게 흐지부지된 게 한두 개가 아냐.”
“그래도 나름 직원들을 위한 활동은 많이 했었구나.”
진선미 대리가 보낸 사보 정리 내용 안에는 괜찮은 활동이 꽤 있었다.
직원들의 고충을 받는 소리함.
조직 간 이동을 지원하는 잡 로테이션 제도.
실리콘 밸리 사례를 기반으로 한 수평적 조직 전개 운동.
공정한 평가를 위한 인사 혁신안 등.
유현의 고민과 닿아 있는 부분을, 누군가 이미 제안했었다.
그래서 유현은 더 안타까운 마음이었다.
“그럼 뭐해.단지 홍보용으로 쓰고 치웠는데.”
“설마 기사만 달랑 내보내려고 그랬겠어? 그만큼 윗선에서 지원이 없었던 거겠지.”
“맞는 말이야.근데 내 생각엔 직원들의 관심도 부족했어.당장 우리만 봐도 소리함 같은 걸 써 본 적이 없잖아.”
3년 전, 총무팀에서 제안했던 소리함은 군대의 소원 수리함과 비슷했다.
고충을 듣고 그걸 해결해 주겠다는 취지였지만, 제보자의 신변 보호와 불만 처리 방식 등이 명확하지 않은 게 문제였다.
문제를 인식하면 개선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하는데, 다들 바쁘다는 핑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고 치부해 버린 결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