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forge the Streak RAW novel - Chapter 113
연록흔 – 113화
“어떠냐, 록아?”
지신이 팔을 풀고 록흔을 지그시 들여다보았다.
“한기가…….”
록흔이 입술을 버긋지게 벌렸다. 소린도 해의도 바짝 긴장하여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때 아기 율이 우는 소리를 했다.
“점점 바래는 듯합니다.”
“정말이냐?”
지신이 눈을 바짝 가늘였다.
“예. 가분하고 다스하여…….”
호류무가 싱긋 웃었다. 제 피 내어 주고 그 낯이 맑기도 했다. 록흔은 율을 바짝 보듬었다. 이 상태면 여길 바로 나갈 수 있을 듯했다. 얼음싸라기 같은 것들이 핏줄에서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어허 이거, 힘을 키우려마 한 건 헛소린데. 호랑이 총각, 미안하게 됐네.”
“아닙니다.”
지신이 상그레 웃자, 호류무가 고개를 저었다. 귀에게 몸을 주고 사람에게는 힘을 주나, 그 중간계에 있는 것에게는 그저 보가 됐다. 인호에게는 사람보다 금수의 피가 더 많이 흐르는 모양, 그런즉슨 득이 된 것이다. 지신 또한 도박하듯 한 일이라 록흔이 도홍으로 화색이 도는 게 그저 다행스러웠다.
“피라 생각 말고 영약이라 여기려무나.”
“예, 폐하. 그리 생각하십시오.”
“그리하겠습니다. 무아야, 네가 베푼 것 잊지 않으마.”
록흔이 곧은 눈으로 보자, 호류무가 몸을 더욱 낮췄다. 금발이 차랑차랑 흘러내려 그녀의 발치를 덮었다.
“폐하께서 아니 찾아 주셨더라면 존재치도 않는 목숨이옵니다. 그런 말씀 마소서. 이 몸, 쓰일 곳 있어 기쁘옵나이다.”
마굴이라 하나 이들이 있어 두렵지 않았다. 록흔은 율을 고쳐 안으며 일어섰다. 공을 찾으면 바로 바깥, 그녀는 좌수를 크게 펼쳤다. 결계 깨뜨리면 사령들이 몰려들 터, 그들은 다시 태나려고 아기 율을 바랐다. 가장 순순하니 가장 위험했다.
파랏!
록흔이 대수삼 자락으로 싸 율이 돌돌 말렸다. 가슴을 가로질러 홀쳐 감아, 둘은 단단히 밀착됐다.
착.
록흔은 타니에 박힌 진주알을 뺐다. 무호에서 해미에게 얻은 것, 사념천에 담그자마자 흔적도 없이 녹아 버렸다. 지신도 소린도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이 안에 깃든 지 오래나 나가는 길에는 관심이 바이없었으니, 공이란 놈 존재조차 몰랐다.
“곧 저들이 들이닥칠 겁니다. 물러서 계세요.”
맵차게 떨어진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뒤에서 물이 시륵시륵 휘돌았다. 공은 본디 바다짐승이라 물을 몹시 좋아해 간기 밴 물이면 끌어낼 수 있었다. 먼젓번에는 록흔이 제 피를 풀었으나, 이번에는 빈주면 충분했다. 지하에서 핥은 것이야 담수가 전부, 할딱대며 기어올 터였다.
지이이익!
차아악!
착!
록흔이 손을 뻗어, 샘이 높다랗게 솟았다. 물보라 살천스레 일며 해수가 힘차게 분출했다. 그와 동시에 결계가 뚫려 사령들이 눈을 해뜩해뜩 뒤집었다. 고소한 아기 내와 더불어 산 것들의 체향이 환장하게 좋은 판, 귀들은 갈갈대고 꺽꺽대며 예서제서 발광했다. 그에 해의가 어깨를 옴쭉 떨고 소린이 눈께를 가렸다.
“록아, 조심하렴.”
지신이 이불 개키듯 천장에 벽에 바닥에 붙은 것들을 주욱 끌어당겨 털었다. 차곡차곡 접어 바로 그 품 안에 잠겨 사념천은 그저 샘이라 푸른빛도 보랏빛도 일절 없었다. 지신초가 몽땅 휩쓸려 들어가니 사령들이 당랑의 뒤를 쫓았다.
“사부님…….”
모시고 나가련다 말할 새도 없었다. 록흔은 오글오글 달려드는 것들을 쳐내고 또 쳐냈다. 호류무 역시 분투하는데 먼 데서 공허한 울림이 들려왔다.
“폐하, 저 소린…….”
“공이다.”
해의가 눈을 사분하게 들었다. 눈앞으로 점점 다가오는 것, 형태는 있으나 차지하는 공간은 바이없었다. 비었으니 구멍이라 불리는 듯, 놈은 투명하면서 검었다. 점점 다가올수록 귀의 눈은 어둡게 덮였다.
우우우우웅…….
우는 소리가 동굴을 지나는 바람인 양 공허했다.
차아악!
물기둥이 빈 구멍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쿠륵쿠륵!
공은 물을 잘도 먹었다. 접때처럼 사념천을 바닥낼 듯 마시고 또 마셨다. 해미의 눈물이 단 모양, 놈은 벌컥벌컥 들이켰다.
“이제 빛을 쬐러 가렴.”
사념천, 물에 생각이 스며 그리 불렸다. 록흔이 나직하게 하는 소리에 공이 몸을 크게 한 번 틀었다.
“살갗이 따끔할 만치, 혹양 내리쬐는 곳으로 가자꾸나.”
우우우우웅!
“그래, 햇발 아래로.”
우우웅!
마굴 안에서 공은 항시 목말라 죽기 직전이었다. 지은 죄는 알려진 바 없으나 먼 옛적부터 그러했다 한다. 하여 물 베푼 이의 말을 들으니 은인을 위해 빛이 향하는 곳으로 제 몸을 박아 넣었다. 그것이 바로 바깥으로의 출로, 이것이 두 번째였다. 놈 역시 록흔을 기억하는 듯 길둥그런 몸을 한 번 더 꿈틀댔다. 칠실인 양 어두운 공간이 그 움직임에 다르르 떨렸다.
갸갸각!
갸갹!
사령들이 날뛰었다. 공은 왔으되 그게 끝은 아니었다. 빛발 찾아 지하를 헤매는 동안, 발부리로 팔꿈치로 그 그악스런 것들이 붙어 다녔다.
칠석에 내리는 비는 이 안에도 있었다. 록흔이 흐느끼며 하는 말을 가륜은 가슴으로 들었다. 가조, 은소현, 장월한, 남대균, 곽우안, 문창, 마상여, 묘매, 주융……. 무엇을 해도 아내가 겪은 것 모두를 돌이킬 수 없었다. 하여 결코 용서하지 않을 터였다. 그는 턱을 으득 비틀었다. 거듭 죽이고 또 죽여 부관하고 참시할지언정, 그래도 한없이 부족했다. 격노는 야멸쳐 봉안이 서느렇게 번득였다.
“밖으로 나왔을 때…….”
록흔이 잠긴 소리로 속삭였다. 이미 칼탕질 당한 심장이었다. 가륜은 이를 윽물었다. 심화는 그 안에서 계속해서 돋았다. 달래려는 마음 충분히 아나, 마음칼은 이미 날파랍게 서 있었다.
“…….”
그때 잃었다 여겼던 것, 작금에 잃을 뻔한 이유를 알게 된 것, 분노를 쏟을 곳이 생겼으니 천지차이였다. 가륜은 뒤끓는 속을 주체할 수 없었다. 심장이 살천스레 뛰어 이대로 폭주할 듯했다.
“폐하…….”
속삼임은 연삽했다. 록흔이 고개를 살폿 들어, 가륜이 깊게 팬 눈으로 응시했다.
슥.
록흔이 가륜의 눈언저리를 손끝으로 쓸었다.
“다시 만나 뵈면…… 수도 없이 그렸지만…….”
연빛 눈이 일렁였다. 갈쌍대 금세 또 흐를 듯했다.
“몹시 사위셔서……”
이리 마주 보고 있는 지금도 가륜은 믿을 수가 없었다. 몽마가 꿈을 훔쳐 놀리는 것은 아닌가? 일순, 가슴이 내려앉았다. 이내 검남빛 눈이 흐려졌다. 그는 꿈인 듯 고운 그림자를 담뿍 움켜쥐었다.
차락.
흉갑과 배갑을 연결한 가죽 끈이 풀렸다. 그리고 먹장삼이 거칠게 흘러내렸다. 개갑이 바닥에 떨어져 쇠미늘이 철럭철럭 부딪쳤다. 그러나 록흔은 미동 없이 있었다. 하얗게 드러난 가슴 위로 가륜이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애참함에 눈을 감았다.
“…….”
심장 소리였다. 잊지 못해 그리던 체향이었다. 이제야 실감이 났다. 아내가 돌아왔음이, 살아있음이. 가륜은 눈을 조프렸다. 그리고 록흔을 훔켜 안았다.
“그런 고초를…… 그예 허언이었다.”
인 듯 안은 듯 고이 품어, 항시 곱다운 봄으로 있도록……. 가륜은 입귀를 어그러뜨렸다. 아내로 맞으며 품었던 말들이 모두 헛되게 닿았다. 마굴에서 아이를 낳았으니 그 참혹함이 얼마며 설움이 얼마인가? 그는 거친 숨을 잇새로 물었다.
“견딜…… 만했어요.”
록흔은 흐느낌을 부러 깨물었다.
“그들 모두, 도륙할 터.”
금침 위에서도 힘든 것이 산고였다. 허나 록흔은 흙바닥에서 도움 주는 이 없이 홀로 견뎠다. 사령들이 오글오글 달라붙었을 터. 생각만으로도 가륜은 피가 끓었다. 야멸친 그 눈이 날캄했다.
“침수는, 수라는, 제대로…….”
록흔이 가는 손으로 가륜의 얼굴을 쓸고 머리칼을 어루만졌다. 손끝 떨리는 만큼 아깝고 안쓰러우니, 안팎이 일심이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그러잡아 입술을 댔다.
“너 잃고, 사는 게 아무 의미 없었다.”
“흐윽…….”
“고맙다, 이리 살아 줘서.”
절대 앞서가지 마라, 너 없이 지옥이니……. 가륜이 눈으로 사린 말에 록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립고 그리우매 다시 뵈리라는 그 마음이 버팀목이었다. 봇물 터지듯 이는 마음이 그녀의 눈을 입술을 채웠다.
“사…… 사랑해요.”
록흔이 한숨인 양 잔약하게 토한 말에 가륜은 눈이 짙게 갈앉았다. 다시는 듣지 못할 거라 여겼던 것, 더 이상 제 몫은 아니라 치웠던 것. 일시에 그 마음에 살던 나무가 죽었다 되살았다.
“……사랑한다.”
가륜은 록흔을 더욱 가깝게 끌어당겼다. 바듯하게 안았어도 두려움은 남아 있었다. 그는 동그랗게 벗겨진 어깨를 쓸다 눈썹을 찌푸렸다. 자신은 아직 개갑을 입은 채였다. 아니나 다를까, 아내의 가슴이 철갑에 쏠려 발긋발긋했다. 이내 수은 입힌 갑엽이 찰캉여, 명광개가 침상 위로 무겁게 떨어졌다.
“폐하, 여기가…….”
우완이 붉었다. 록흔이 상처를 살피는데 눈 곁으로 낯익은 것이 스쳤다. 검게 말라붙은 것을 보니 한 옷만 오래도록 입은 듯, 그 가슴팍에 혈룡표장이 달렸다. 홍인전 침방에 걸렸던 것, 그 눈도 몸피도 전장에 쪄들어 그전처럼 새뜻하지는 않았다.
“네 피로 붉어 네 향이 배어, 이것 외엔 남겨진 게 없었다.”
가륜이 빛접게 웃는데, 록흔은 마주 웃을 수가 없었다. 가슴이 조여 또 눈이 아슴아슴했다.
“아무리 그래도…….”
“깁 따위에 의지하는 마음, 넌 알 필요 없다.”
“……계속 입으셨어요?”
“세탁 시엔 따로 떼어 다른 옷에 달았지. 그래도 이게 있으면……, 네 곁에 있는 것 같았다.”
소천은 태산 같으시니 저런 애달픔 바이 모르셨을 터. 록흔은 눈을 사분히 치올렸다. 일순, 그자들이 행한 짓이 선연히 볼가졌다. 제게 한 것은 차치하고 그 나머지는 결코 용서할 수 없었다.
“모두 갚을 터, 격노치 마라.”
“아니요, 폐하.”
록흔이 아미를 찡그렸다. 그에 여윈 뺨 위로 우물이 깊게 팼다.
“폐하이시기 전에 가군이시니, 예서 무를 수는 없어요.”
“전장에라도 나가겠단 건가? 록흔…….”
창졸간에 벗긴 것, 개갑이었다. 작금 록흔의 팔에 먹빛으로 걸쳐진 건 장삼이었다. 가륜은 눈을 가늘였다. 간의대부가 며칠 전부터 하던 말이 일시에 돋았다. 먹장삼 휘날리며 바람인 양 싸운다 하던가? 의병 중에 갸륵한 자 있으니 전후에 행상(상을 줌)하시라 간했었다.
“네가 숙률인가?”
숙률 유귀. 없을 유, 그림자 귀. 결국은 무영랑과 같은 뜻이었다.
“산후 겨우 두 달이다. 너 어찌……!”
“전장 따라 내려오다 자연히 그리되었어요.”
아니다. 가륜은 단정했다. 작금, 아내는 마음칼 세우면 물리지 않는 무관이었다.
“동 트면 폐하 곁에 있겠어요.”
가륜은 눈을 가늘였다. 한증은 사위었다 하지만 아직은 모를 일, 게다가 산후에 더 얇아진 몸이었다. 록흔이 올곧게 올려 봐, 그는 눈시울을 더욱 좁혔다.
“안 된다 하면?”
“마굴에서 결심한 게 있어요.”
이율배반이어니 곱고도 미웠다. 가륜은 록흔의 턱을 들어 올렸다. 이내 두 시선이 섭슬렸다. 그것은 곧고 또 연했다.
“소천 계신 곳이면 따르겠노라, 먼발치서 기다리는 건 이제 하지 않을 거라고……. 가군께서 말씀하셨지요, 인생은 짧다고.”
록흔은 눈으로 많은 말을 하고 있었다. 갈쌍여 일렁이면서도 제 뜻은 꺾지 않았다. 고집통, 고집통이……. 이 고집조차 다시 보니 기뻤다. 가륜은 아내의 뺨을 그러잡았다. 잃을 뻔했던 이, 아니 잃었다 여겨 심장이 발겨졌던, 그리 소중한 이였다.
“예전에 그리했듯?”
“예. 아니 된다 하셔도…….”
아내의 눈물 너머로 헤어져서 두 달 여,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었다. 같은 마음일 터. 가륜은 입매를 단단히 굳혔다. 차라리 뵈는 곳에 두는 것이 나을 듯했다. 닿지 않는 곳에서 근심하느니, 이리해야지 싶었다.
“좋다.”
의외로운 대답이라 록흔은 눈썹 끝을 떨었다.
“단, 태화성에 돌아가면 요치부터 하자. 산후 몸조리도 그렇고, 한사 또한…….”
괜찮다, 아무렇잖다 말하려다 록흔은 고개를 끄덕였다.
“…….”
“…….”
바라보는 눈이 깊어 록흔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소천께서 입술대로 덧그려, 그 깊은 시선에 갈앉았다. 평주로 떠나시기 전, 그때와 같은 빛이라 그녀는 저도 몰래 입술을 살폿 떨었다.
사락.
가륜이 록흔의 입술을 머금었다. 바람이 닿은 듯 상량하고 얇았다. 예 있다는 걸 확인하는 양, 그는 그렇게 천천히 쓸었다. 그에 그녀는 보드라이 부풀어 도홍으로 만개했다.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들을 수 있으니, 그간의 슬픔일랑 시나브로 녹았다.
창천 위로 초엽 위로 실바람이 뵈지 않는 금을 그었다. 새로운 날이 밝아 황룡과 남연은 지안평원에서 대치했다. 푸른 기와 붉은 기가 서로를 할퀼 듯 날리니 바람 소리 외에 하늘과 땅 사이에 선 모든 것이 무음이었다. 비로소 적장 주융이 모습을 드러내매, 전황은 급변했다. 햇발 아래서 명호가 파르라니 반작였다.
퍼럭퍼럭!
펄럭펄럭!
깃발이 나부끼어 황룡이 승천하고 주작이 비상했다.
파랏!
만 단위로 구성된 대규모 방진에 선두는 노병 및 궁전수가 전위에는 기병들이 늘어선 참, 본대와 후위로 늘어선 군도들 모두 눈빛이 오달지고 어깨가 실팍했다. 그 가슴마다 박힌 호심에 햇발이 현란하게 깨지니, 황룡군은 천군인 양 위용스러웠다.
타닥타닥!
탁탁!
준마를 좨쳐 앞으로 나선 이들 모두 빛접었다. 신화 속의 영웅도 저리 어연번듯하지는 않을 터. 그 둘은 훤칠하고 또 장했다.
“그간 격조했소.”
주융이 먼저 운을 뗐다. 은빛 눈에는 구김이 일절 없었다. 그 뒤로 남연군이 버티고 서서 제 수장을 받쳤다.
“뉘가 잔부끄럼이 많더군.”
가륜이 칼빛으로 웃었다. 그에 주융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간 뵈지 않더라는 소리, 명백한 비꼼이었다.
“아무렴 궁(왕)부터 행마할까?”
“월경은 서슴지 않더니, 의외잖나?”
설전 또한 녹록찮았다. 드넓은 벌판 위, 둘의 거리가 썩 가깝지 않은데도 서로 야멸스레 치는 소리가 지척인 듯싶었다. 황룡군도 남연군도 제자리서 각자의 무기를 바투잡고 있을 뿐, 뉘도 입을 열지 않았다.
타각.
탁.
황룡의 황제와 남연의 천하병마원수, 뚫듯이 보는 시선이 맵차고 날카로웠다.
“용과 주작이 붙으면 뉘가 이기겠나?”
“우문이로군.”
가륜이 입귀를 실긋 틀었다. 조소가 어려 검남빛 눈이 서느랬다.
“빈작(참새)께선 부리가 젤인 모양이지?”
카아아악!
주작도가 짙붉게 발도했다. 화룽화룽 인 불꽃에 그슬려 바람마저 화락화락 탔다. 그에 혈룡이 검파 안에서 포효했다. 그러나 가륜은 발검하지 않았다. 입귀만 조금 어그러뜨렸을 뿐, 미동은 일절 없었다. 그는 사금파리 같은 시선으로 적을 좨쳐 보았다. 결코 가깝지 않은 거리나, 목전인 듯싶었다.
“비듬한 것이 둘이면 세상이 시끄럽지. 명세제, 검과 도로써 겨룸이 어떠한가?”
“그것보다는.”
혈룡이 비로소 놓여났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가륜이 짓눌러 대지에 반쯤 잠겼다. 검날 아래서 땅이 되게 패는 걸 주융은 지켜보았다. 싸우지 않겠단 소리는 아닌 듯, 저편에서 가륜은 날캄하고 또 표표했다.
“기접이 나을 듯하다.”
탁!
가장 높다랗게 선 군기가 공중으로 솟구쳤다. 그리고 가륜의 손아귀에 들어와 감겼다. 삼십 척 하늘 위, 황룡은 그 주인을 닮아 야멸치게 펄럭였다.
“순서를 바꾸자는 거군.”
“궁극이잖나.”
위우우웅!
깃대가 창천을 기세 좋게 뚫었다. 높다랗게 솟구쳐 일점에서 멈추더니 날파랍게 떨어졌다.
투그르.
기간은 정확히 양군의 한가운데에 내리꽂혔다.
“어차피 노리는 바, 앗아 봐라.”
“그러면?”
“승군이라 불리겠지.”
가륜이 입아귀를 비틀고 상량하게 웃었다.
“좋다.”
칠월 열닷새, 백중. 지옥문이 열린다는 날이었다. 주융은 주작기를 훔켜잡았다. 전란의 와중에 그 안으로 휩쓸린 자 숱할 터. 붉은 기가 바람에 크게 수수러졌다. 제 산하고 제 백성이니 더는 깎지 않는다라……. 그는 눈귀를 바특하게 좁혔다. 명세제는 적이로되 훌륭했다. 그런즉슨 지르밟는 수밖에 없었다.
파랏!
착.
황룡기 옆에 주작기가 바로 가서 박혔다.
“맨손으로 싸울 텐가?”
“글쎄, 빈작에 맞는 것으로.”
가륜이 턱짓하자, 군교 하나가 제 이랑도를 받쳐 올렸다. 일순, 주융의 눈귀가 살천스레 찢겼다. 모멸이되 되돌리면 될 터. 그 역시 주작을 거둬, 상허가 들고 있던 대도를 바로 건넸다.
“무운건투!”
황룡군이 커다랗게 외쳤다. 함성 높아지매, 그들의 극존이 비긋이 웃었다.
“필승전멸!”
남연군이 질세라 되받아쳤다. 그 소리가 일파만파로 퍼져 초목이 다르르 떨렸다.
두두두두!
두두두!
지축이 크게 울렸다. 바야흐로 수장수영, 솔혁이었다.
차앙!
착!
도와 도, 외날끼리 부딪치매 불꽃이 커다랗게 일었다. 최초의 일합, 굵다란 팔마다 힘줄이 올올이 일어섰다.
“명세제, 생지옥이었나?”
주융이 칼날 바로 뒤에서 은안을 번득였다.
철럭!
가륜이 입귀를 비틀며 대도를 쳐냈다.
“너 역시 어느 정도 알잖나, 라딤하르 읊은 후부터 말이지.”
“그런!”
“음심은 벽해에서 접어야 옳았다.”
차악!
텅!
이합, 대도가 하늘을 긁고 아래로 떨어졌다. 이내 이랑도가 세 날을 번득이며 날파랍게 날았다. 서슬퍼런 바람에 황룡기와 주작기가 엎치락뒤치락 엉겨 붙었다.
“허세 떨지 마라! 네 아낸 이미 가졌으니, 이 땅만 남았다. 연은…….”
챠앙!
일순, 이랑도가 주융의 목줄을 벨 듯 다가들었다. 도첨이 그 끝을 파르랗게 반득였다.
탁.
주융은 가까스로 막아 냈다. 삼합이었다.
“연은 죽지 않았다. 상심했겠지만…….”
“이미 안다. 다만!”
가륜이 눈으로 좨쳐 주융은 잠시 아연해졌다. 놈이 알 리 없다, 그 생각이 일시에 크게 돋았다.
“그리 부르니 역겹군.”
“네 아내는 지아비를 잘못 만났다. 나완 삼생지연(부부간의 인연)이니 몽중에서 이미…….”
몽중지연, 남연의 전승 따위 가륜도 익히 알았다. 찰나, 이자로 인해 록흔이 겪은 고초가 선연히 볼가졌다. 그는 눈을 가늘이고 도를 바투 쥐었다.
스이익!
철컹!
이랑도 날캄한 끝이 주융의 면구를 두 쪽으로 갈랐다.
“산지옥, 제대로 보여 주지!”
가륜이 차게 뱉었다. 그 눈시울이 꼿꼿했다.
차앙!
타앗!
사합, 서로 억세게 드밀어 말발굽 아래의 땅이 깊게 팼다.
“하압!”
다시 오합, 주융이 일갈하니 명호의 물이 날렸다. 도파 잡은 팔뚝에는 힘줄이 불거지고, 마주 보는 눈에는 살기가 흘렀다. 용호상박이어니, 뉘든 눈을 크게 뜨고 숨소리를 죽였다.
두두웅.
두웅!
둥!
북소리가 점점 빨라졌다. 황룡이 푸르게 날고 주작이 붉게 날아, 지켜보는 이마다 손에 땀이 절로 났다.
채앵!
육합, 도첨에서 불꽃이 튀었다. 가륜도 주융도 한 치의 빈틈없이 서로를 몰아붙였다.
팍!
파앗!
칠합! 둘이 붙었다 떨어지기를 반복하니 천지가 크게 울었다. 대도가 크게 휘둘러져, 이랑도가 받아쳐 바람까지 끊어 냈다.
채챙!
갑엽이 철럭거렸다.
챡!
팔합째, 이랑도가 주융의 옆구리를 찢었다. 미늘을 엮은 가죽 끈이 힘없이 째져, 그새로 피가 붉게 돋았다.
“……!”
주융은 그 눈이 살기등등했다. 칼로써 겨뤄 누구에게 상해 본 적 없는 터라 작금에 은안에서 불티가 탁탁 일었다. 대도 끝에서 칼바람이 기인해 명광개에 호심이 깊게 긁혔다. 그에 가륜이 눈을 조프리며 이랑도를 크게 휘돌렸다. 월영이 지르밟아 흙이 벌겋게 깨져, 그 주위는 푸름이 일절 없었다. 도로써 도를 치고, 도로써 도를 막아, 예서제서 보는 눈마다 아득했다. 찰나에 두 인영이 떨어져 서로를 향해 다시 달리니 질풍인 양 노도인 양 표한하고 날파랬다.
차앙!
구합, 신영이 섭슬려 힘이 폭렬했다. 가깝게 섰던 이들이 견디지 못하고 나자빠졌다. 피를 한 움큼씩 토해 입가마다 짙붉었다.
“하앗!”
주융이 크게 내지르며 공중으로 솟구쳤다. 가륜 역시 창천에 올라 흑점으로 졸아들었다. 까마득히 먼빛이라 아래에 선 사람은 고개만 젖혔다. 쇳소리도 아스라해 사위는 그저 괴괴했다.
둑.
투둑.
벌건 것이 떨어졌다. 철엽이 뒤덮인 것, 어깻죽지부터 온전히 잘린 팔이었다.
파악!
대도가 곤두박질쳤다. 다름 아닌 팔이 떨어진 자리, 벌겋게 을크러진 손등을 찍어 눌렀다.
탁.
철퍽!
가륜이 가분히 내려서고, 주융이 구겨지듯 떨어졌다.
“크윽.”
찬란한 은안은 핏물에 덮여 한쪽만 온전했다. 길게 베어 왼쪽 눈썹부터 콧잔등까지 선혈이 진득하게 흘렀다.
차앗.
두 기가 동시에 뽑혔다.
퍼럭퍼럭!
투둑!
황룡기는 되돌려지고, 주작기는 기간이 자끈 부러졌다.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세, 만만세!”
환호성이 이매, 명호의 수면에 물둘레가 수도 없이 생겼다. 그러나 남연 쪽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가륜이 두 동강 난 것을 주융의 발치에 내던지자, 함성은 더욱 커졌다. 용위군 너머로 대황룡기가 찬연히 푸르렀다.
“적게 보고 적게 가지려면.”
가륜이 뱉듯 하는 말에 주융이 가락댔다. 숨쉬기도 버거운 듯, 그 입귀가 발발 떨렸다.
“이쯤이 좋을 터. 안 그런가, 주융?”
주융은 우완과 좌안을 잃었다. 피가 흘러 얼굴을 가리고 온몸을 적셨다.
“전하!”
상허가 지척에서 부르짖었다. 그에 주융이 남은 손을 쳐들었다. 그리고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왜 죽이지 않는가?”
“그럴 작정이었다만.”
가륜이 턱으로 한곳을 가리켰다. 장령 하나가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있었다. 핏물 어린 시야로 아슴아슴 보다 주융은 한 눈을 지릅떴다. 다가오는 이,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연! 어찌……!”
진묵빛 장삼에 개갑을 걸쳤으나 분명 연이었다. 주융은 이를 지르물었다. 산지옥이라던가? 명세제가 한 말을 알 것 같았다. 사랑하는 여인에게 이런 모습 봬주니 그것이 바로 굴욕, 그는 제 모습이 비참하고 또 참담했다.
“연이라 불리는 것, 소천께만 가합니다.”
록흔이 맑진 눈으로 차분히 하는 말이 주융에게는 이랑도 끝보다 더 날캄했다.
“남연의 주작으로 족하였으면 이런 날 없었겠지요. 다른 것은 다 차치하고…….”
보얀 손 안에서 혈룡이 포효했다. 주융은 그 붉은빛을 고운 낯을 아연히 보았다. 혼절할 듯 고통은 극심하나 이를 사리물며 참았다. 이대로 연 앞에서 볼썽사납게 쓰러질 수는 없었다.
“소천께…….”
록흔이 불러 가륜이 혈룡검을 받아 들었다. 그녀는 검을 넘기자마자 다시 주융에게 시선을 돌렸다.
“행한 일은 없었던 듯 접을 수가 없습니다.”
올곧고 드맑아 더 고왔다. 바라보매 주융은 가슴이 찢기는 것만 같았다.
“분명 은소현 처소에…… 어찌 된 거요?”
“뉘가 뉠 속였든 알 바 아니지요. 부왕의 목숨을 갈아 도모한 것이 고작 이러하니, 어찌 동맹만 탓하겠습니까?”
다른 이가 뱉었다면 목을 치련다 벼를 터. 록흔이 하는 말 마디마디가 연심으로 그대로 뱄다. 이 지경이 되었어도 포기할 수 없으니 정녕 사랑이었다. 주융은 피침을 아프게 삼켰다. 저를 보는 눈이 저리 맑고 잔잔하니 속이 더 뒤끓었다.
“예서 퇴경하면 다시…….”
“무뢰배 취급 마오, 이 마음은 값싸지 않았으니!”
주융이 록흔의 말을 야멸치게 막자, 가륜이 눈귀를 실긋 비틀었다.
“사랑했단 말 따위 그 입으로 쏟지 마라.”
가륜이 살천스레 뱉어, 주융이 눈시울을 실룩거렸다.
“다만, 늦게 만나진 것뿐이다.”
“연이란 것 얼키설키 얽혔대도. 주융, 착각 마라. 네 몫은 바이없다.”
“명세제, 결코…….”
이대로 물러서지 않으련다. 주융은 뒷말을 잇새로 씹었다. 하나가 남았는데 무엇을 도모하지 못할까? 갖고픈 것을 목전에서 앗기는 판이라 투지가 일시에 올올이 일어섰다. 죽어 무간지옥에 떨어질지언정 결코 물러서지 않을 터. 그는 될 수 있는 한 몸을 곧게 폈다. 그때였다. 뉜가 남연 쪽에서 와랑와랑 크게 외쳤다.
사악.
록흔이 발도했다. 일시에 곧은 기가 파르랗게 흘렀다.
“이리 대군이 모였는데, 솔혁 한 번으로 끝을 내면 먼 길 온 보람이 없잖으냐!”
탐족이었다. 커다랗고 그악스레 험하니 사람이라기보다는 괴물, 야차를 그대로 닮았다.
“스가로군. 네가 셋짼가?”
주융은 믿을 수가 없었다. 여인이어서 아름답고, 여인이라서 더 빛접었다.
“너, 형님들을……. 그럼, 네가!”
“유란 놈도 진이란 놈도, 그럭저럭 안다.”
“뭣이! 그럼 네가 무영랑인가, 아니면 숙률 유귀인가?”
“뭐라 불리든 하나지.”
주융은 상허가 아뢰던 것이 떠올랐다. 눈은 흐린데 경탄은 또릿했다. 그는 쓰러지기 일보 직전임에도 록흔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핏물 새로 보아도 그녀는 어연번듯이 아름다웠다.
“오냐! 잘됐다. 솔혁 따위 알 게 무언가?”
스라문이 언월도를 높이 들고 남연군을 돌아봤다.
“남연군! 사내꼭지라면 뉘든 봐라, 너희 주군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이대로 기 앗겼다 물러설 테냐?”
방패 소리가 듣그럽게 돋았다. 쳐부수자, 이겨라, 스라문이 선동하자, 남연군이 우르르 끓었다.
“아니오!”
“복수를!”
격양된 외침이 예서제서 터졌다.
“전군 진격!”
스라문이 뱃구레로부터 외치자, 남연군이 와 하고 답했다.
카으으응!
혈룡이 핏빛으로 효포했다. 그에 백효기가 부월을 높이 들고 진격령을 내렸다.
“총진공!”
용위군이 대오를 맞춰 앞으로 나아갔다. 수장을 잃은 남연, 스라문이 있으나 그리 큰 위협은 아니었다.
“록흔.”
“예, 폐하.”
가륜이 월영에 올라 록흔에게 손을 내밀었다.
“크윽!”
두 사람이 멀어지매 주융은 비로소 무릎을 꺾고 주저앉았다. 그에 상허가 바로 다가와 부축했다.
부우우우…….
둥, 둥, 둥!
“와아아아!”
팟, 팟, 파앗!
“도륙하라!”
“노병 앞으로!”
주융에게는 모든 게 흐릿하게 들렸다.
퍼럭퍼럭!
붉은 눈 새로 대패가 휘날리는 게 보였다. 일월의 승룡과 강룡이 비상하니, 그게 바로 명세제의 위용이었다. 그 드높음에 주융은 가물가물한 정신으로도 이를 갈았다.
“전하, 전하!”
“상허, 나는 이대로…….”
“견디셔야 합니다.”
“이대로…… 기필코…….”
전사(전쟁의 역사)상 황룡에는 대첩으로 남연에는 대패로 남은 전투어니, 풀빛이 붉어지도록 쇳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지안평원 위 명호 호반에서 양국이 격전하여 탐족 출신 적장 스라문은 명세제에게 삼합 만에 목숨을 앗기고, 적장 여럿이 의병 숙률 유귀에게 생획 당했다. 백효기 휘하 군도들이 분투하여 남연은 전사자가 십만이요, 부상자가 삼십만이 넘었다. 이름하야 호반대첩, 명일 새벽녘까지 늑탈의 무리들은 타국 땅에서 생을 마쳤다.
계명성이 걸렸네.
저 별 스러지면
내 님 눈 뜨실까?
그립고 보고파서
만 리 길 왔건만
내 님 주무시네.
동녘이 밝아지면,
저 별 스러지면
날 보아주실까?
조급한 마음자락,
하늘을 뒤덮으니
계명성이 사라지네.
-은록선 중, 파효지가-
***
홍인전은 비어지고 이제 인화전이 황후전이 됐다. 금일이 황상께서 개선하시고 승하하신 줄만 알았던 황후께서도 함께 돌아오시는 날이라 태화성의 모두가 몹시 분주하고 또 달떠 있었다. 신상궁 역시 바쁜 참, 그 와중에 아랫것들 모르게 눈물을 짬짬이 찍어냈다. 금침을 매만지고 휘장을 다듬고, 매양 동동대도 가슴은 그리 우둔거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막 거울을 닦던 차, 신상궁은 경면에 비친 금안에 우뚝 멈췄다.
“편찮으셨다고요?”
“호류위사님.”
신상궁은 나중에야 제 몸에 혈고가 들어갔었다는 것을 알았다. 머릿속에 박힌 것을 빼낼 때 그녀는 고초를 크게 치렀다. 죽음에 가까운 고통이었던지라 동그랗던 얼굴이 지금은 홀쭉했다. 석 달 만에 만나는 이가 그저 반가워 그녀는 고개를 깊다랗게 숙였다.
“위독하셨다 들었습니다.”
“아닙니다. 이제 괜찮습니다. 헌데…….”
신상궁은 호분위사 뒤에 선 낯선 부인을 보고 고개를 갸울였다. 분명 초면인데 왠지 그 인상이 낯익었다.
“국대부인 되십니다.”
호류무가 빙긋 웃으며 하는 말에 신상궁은 바로 엎드렸다. 눈에 익음이 아마도 상전을 닮아서였던 모양, 그녀는 몸 둘 바를 몰랐다.
“국대부인을 뵈옵니다.”
“일어서세요. 그간 고생 많았다 들었습니다.”
“황송합니다.”
신상궁이 몸을 세우자마자, 뵈지 않던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두 손을 뻗었다. 강보 안에 든 아기씨는 공주마마가 틀림없었다.
“공주마마…….”
산해가 안겨 주어 신상궁이 조심스레 받았다. 달님처럼 어여쁘시고 꽃님처럼 어여쁘시니, 바라보는 눈이 절로 습해졌다. 처음 나신 날부터 모셨어야 하거늘 모든 게 죄스럽기만 했다. 더불어 상전 생각에 눈가가 더 물러졌다.
“국대부인, 황후 폐하께옵서는 어찌 지내셨는지요?”
신상궁이 눈물바람하며 묻는데 산해가 그 머리 너머를 보고 살포시 미소 지었다.
“직접 여쭈면 어떨까요?”
“예…… 폐…….”
신상궁은 가슴이 턱 막혀 더는 말을 못했다. 막 시집오셨을 때 그때처럼 고우시니, 등하하셨다 애통해하던 것이 먼일만 같았다. 그저 꿈만 같아 그녀는 눈물 어린 눈으로 상전을 보았다.
“무사해서 다행이다.”
록흔이 차분히 하는 말에 신상궁은 두 뺨이 함빡 젖었다.
“폐하…….”
“울지 마라. 율이 우지(울보) 상궁이라 하면 어쩌려고?”
“이리 계시니, 소인 그저 감개무량하옵니다.”
록흔 역시 이런 날이 꿈인 듯싶었다. 마굴에서 혼자 몸부림칠 때는 요원하기만 했는데, 험한 나날이야말로 지나니 옛일이었다. 그녀는 율을 들여다보았다. 오늘로써 백일, 아기는 외조모의 품에서 도담도담 자라 있었다.
“아아앙.”
율이 록흔을 향해 작고 통통한 손을 한껏 폈다. 어미라는 것을 아는지 맑은 눈이 반드르르했다.
“아가, 오랜만이지.”
록흔이 연삽하게 속삭이자, 율이 방긋 웃었다. 품에 안아 들자 아기는 옹알이를 했다. 왜 이제 왔느냐 묻는 것 같아 그녀는 눈을 조프렸다. 두 달여 가까이 떨어졌던 듯, 그녀는 딸애의 연한 뺨에 얼굴을 댔다.
“오옹.”
조산하여 젖도 제대로 물리지 못하고 소천 찾아 간다 하여 모질게 떼어 놓았었다. 상황이 어찌 된지 몰라 행한 일이나 아이에게는 미안키만 했다. 록흔은 강보 위로 딸애를 다독다독 다독였다.
“어머니, 잠시 볕 좀 쐬고 올게요.”
“그러셔요. 가군께서 곧 오신댔으니 예 있을게요.”
록흔의 눈이 갈쌍해, 산해 역시 절로 그리됐다.
“그럼, 폐하. 제가 모시겠습니다.”
호류무가 바로 나서, 록흔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바로 앞인 걸.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