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forge the Streak RAW novel - Chapter 96
연록흔 – 96화
천단에서 제를 지내고, 선황들을 모신 태묘전에 들러 예를 갖추고……. 복잡하고 길기만 한 의식들은 밤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연회는 아직 한참이지만 록흔은 이제 침전에 있었다. 하루가 어찌 지났는지, 이 순간도 꿈의 한 자락인 것만 같았다. 그녀는 자색 대수삼을 손끝으로 가만 쓸었다. 익숙한 제복은 간 곳 없으니 바뀐 현실이야말로 명명했다.
파팍!
팍!
폭죽이 작렬했다. 원창 너머, 묵천에 꽃잎이 흩날렸다. 주황, 연록, 노랑, 자청……. 불꽃은 흐드러지게 피어 연빛 눈 안에 담겼다. 밖은 흥성흥성한데 록흔에게는 주악 소리도 노랫소리도 아스라하기만 했다.
“힘들었지?”
가륜이 관을 벗기며, 록흔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아니…….”
고개를 젓는데, 없던 어리광이 솟았다. 록흔은 그예 고개를 사근사근 끄덕였다.
“조금이요. 하지만 저 혼자 그런 건 아니잖…….”
가륜이 훔켜 안아, 록흔은 바다 같은 품에 잠겼다.
“이제 살 것 같다.”
머리 위로 들리는 소리에 록흔은 눈을 감았다. 떨어진 시간 동안 그리움은 위로도 옆으로도 자란 모양, 그녀 역시 이만큼의 체향을 잊지 못했었다.
“어디, 뺨은 살이 좀 올랐고, 팔은…….”
가륜이 살피살피 어루만져, 록흔은 뺨이 붉었다.
“덥지 않나?”
“예……?”
예법이니 의식이니 따지다 보니 겹겹이 둘러 입은 게 많았다. 가륜이 앞섶을 그러잡아, 록흔은 더 붉게 익었다. 그녀는 연한 눈으로 그를 올려 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마주 닿는 시선에 웃음기가 많았다.
“엄동도 아니고, 두텁게도 입었군.”
“덥지는 않고…… 답답하기는 해요. 꼭 누에고치가 된 것 같아서…….”
“누에고치라, 그렇담 어서 우화(곤충의 번데기가 성충이 되는 일)를 시켜야겠군.”
가륜이 반죽 좋게 하는 말에 록흔은 살포시 웃었다.
“자꾸 웃고, 많이 먹고, 푹 자고……. 그래서 어서 건강해져라.”
보드란 뺨 위, 하얗게 팬 그 자리에 가륜이 입술을 댔다.
“예, 그럴게요.”
저로 인한 근심이 큼을 알았다. 찌우려 하시는 살은 죄 심장으로 몰리는 듯, 록흔은 제 안에 들은 게 버겁도록 커지는 것을 느꼈다. 심장은 나날이 그렇게 자랐다.
“록흔, 문향이 뭐라 생각되나?”
“향기를 맡음이…….”
가륜이 ‘정녕 그러하냐?’ 하는 빛으로 묻기에 록흔은 입술을 감물었다. 외숙이란 자가 저를 여인으로 보았다 하면 싫어하실 게 분명했다. 그녀는 그예 눈을 내리떴다.
“아마도.”
가륜이 붙잡아 록흔은 턱이 들렸다. 그 시선이 입술에 떨어져 그녀는 눈썹 끝을 파르르 떨고 말았다.
“입술에서 스미는 향이겠지.”
험히 뺏긴 입술이라 깨물리기까지 했었다. 록흔이 고개를 비틀자, 가륜이 바로 되잡았다.
“말해 봐라. 청죽원 대숲에서 만난 이후, 내겐 오롯이 너 하나였다만.”
그러면 은소현은 무엇인지요? 비록 말하지 않았으나 그 빛은 록흔의 눈에 그대로 나타났다. 그러나 가륜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다만 느릿하게 물을 뿐, 그 눈에 얼룩은 일점도 없었다.
“너는 어떠냐?”
“아시잖아요.”
“입술 앗긴 적도 없다?”
“……!”
“그럼 작약은 어떤가?”
작약을 취하고……. 산청이 입술을 뺏으며 했던 말이 이 순간 선연하게 돋았다. 어찌 아시는가? 록흔은 그예 굳어 버렸다.
“강제였다 할 텐가?”
“그건…….”
가륜이 그날에 씹혀 상처 난 자리를 짚었다. 록흔이 기억하기론 정확하게 같았다.
“폐…….”
갑작스레 목이 꺾였다. 록흔은 잡힌 대로 섭슬리고 입술을 거칠게 앗겼다. 아랫입술이 물리듯 빨려 그녀는 아린 신음을 토했다. 강압적인 입맞춤이 그날과 같았다. 혀가 엉겨 숨이 가쁘고, 입술이 아프게 쓸렸다.
“양에 안 찬다.”
붉게 부푼 입술 위로 떨어지는 속삭임이 거칠었다. 일순, 록흔은 가륜의 가슴을 밀어냈다. ‘거듭 씹혔군.’ 하던 말이 귓전에 바로 들렸다. 그 눈빛을 이제야 알 듯했다.
“폐하, 설마…….”
“그래, 나였다.”
“어찌…….”
“왕산청의 목소리를 빌렸지. 의외로 재미나더라만.”
“그럼 그때, 이미 아셨습니까?”
가륜은 가타부타 말없이 빙긋 웃기만 했다. 그날 하늘호수에서 들었던 얇은 음이 그것이었던가? 록흔이 열없이 보는데, 또 다른 말이 돋아 들렸다. 광세전에서 소단이 했던 말이었다.
“설마, 구란에서…….”
록흔이 일렁이는 눈으로 쳐다보자, 가륜이 그녀를 다시 껴안았다.
“잘 들어.”
가륜이 귓전에 하는 말에 록흔은 굳어 버렸다. 담담한 어투나 그 안에 담긴 건 진실, 그는 더하려도 보태려도 하지 않았다. 뵈지 않으나 그 눈이 무거우리라, 뉘든 하기 쉬운 말이 아니었다. 그녀는 눈을 감아 버렸다.
“……모르고 있겠지요?”
“그런 것 같다.”
은소현이 포태한 밤, 가륜은 산청인 체 꾸며 은상에 있었다. 록흔은 태아의 아비가 뉘인지 묻지 않았다. 이미 알겠기에 저를 감싼 품에 깊게 잠겼다.
“그동안 속을 태웠겠지.”
록흔은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 아니라 속이지는 않았었다. 이 곁에 머물고자 참았을 뿐이다.
“인녕전 건과 가름하느라 바로 말하지 못했다. 그러다…….”
무상피 건으로 이어지고, 록흔이 예기치 않게 크게 상하고, 한 달간 떨어져 지내고…… 그동안 일이 많기도 했다. 가륜은 록흔을 아스러지게 안았다. 한 손에 잠기는 어깨가 몹시 잔약했다. 그는 꺾으면 부러질 것 같은 연약함을 천천히 쓸었다.
“너처럼 티 없었으면 좋으련만.”
“더는 말씀 안 하셔도 돼요.”
“비로소, 무거운 짐을 던 듯하다.”
일찍이 이리 고운 이 얻을 줄 알았다면, 연한 마음에 구김 갈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오만하여 사랑 따위 알 바 없다 여겼더니……. 가륜은 록흔의 머리칼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그녀의 향기에 침잠했다.
“폐하…….”
부르는 소리가 보드레했다. 가륜이 바로 내려 보니 록흔이 입술을 달싹이고 있었다. 일렁이는 눈이 어여뻐 그는 말없이 응시했다. 그러자 그녀가 귓불까지 붉히더니 한 번 더 더듬거렸다.
“우화를…….”
연빛 눈이 찰람댔다.
다악.
가륜은 광포히 솟구치는 것을 가슴 밑으로 단단히 다져 놓았다. 너는 이다지도……. 속말이래도 말문이 막혔다. 가슴이 부듯해, 그만큼의 힘으로 여린 어깨를 그러잡았다.
사락.
록흔이 몸을 일으켜 가륜의 어깨에 팔을 짚었다. 떨림 같은 한숨 뒤에 연향 머금어 붉은 입술이 그의 이마에 닿았다. 눈꺼풀에 뺨에 입술에 스미는 것은 햇솜 같은 다사함이었다.
“좋은 아내가 되고픈데, 부족함이 많아서…….”
입술에 닿는 소리는 그 자체가 감미(단맛)였다.
“좀 느리더라도…… 기다려 주세요.”
“아름다운 황후님, 얼마든지.”
감정이 복받쳐 목이 잠겼다. 가륜은 검남빛으로 갈앉아, 자신의 눈에 록흔을 가득 담았다.
“그러면 폐하, 잠시…….”
록흔이 일어서 폐슬의 옥들이 맑은 소리를 깨뜨렸다. 가륜은 잡아채지 않고 우선은 보기만 했다. 달빛을 등지고서, 그녀는 머리칼을 늘어뜨리고 깁을 풀어 자삼을 벗었다. 비단 스치매, 미향이 은은히 떠돌았다. 교인이래도 믿을 터,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웠다.
사랏.
끈을 푸는 손이 잗다랗게 떨렸다. 수줍어 그런지 동그란 귓불까지 사랑스럽게 익은 참, 지켜보자니 절로 끓었다. 가륜은 표한하게 일어서 록흔 곁에 섰다. 깊게 팬 눈이 무섭도록 이글댔다. 막 두 번째 적의가 흘러내렸을 때였다.
“제가 할게요.”
가륜이 바짝 다가서 록흔이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세 번째로 입은 것은 옥의, 그 빛이 연푸르렀다. 목선이 다소 깊어 곱다란 쇄골도 비치고 설백빛 가슴께도 조금은 보였다. 드러날수록 짙어지는 향에 그는 입귀를 실긋 비틀었다.
“도대체 무슨 법도가…….”
옷은 더 있었다. 가륜은 그예 성마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소매가 좁고 가슴 앞에 띠를 동여맨 도홍빛 반비, 그 아래로 보얀 둔덕이 감질나게 숨어 있었다. 다 풀어내려면 아직 먼 듯, 깁마다 얇아 그마나 록흔이 크게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결국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좁다란 끈을 잡아챘다.
스릇.
반비가 하르르 떨어졌다. 싸고 또 싼 듯, 록흔이 말한 것처럼 누에고치였다. 가륜은 거듭 벗겨냈다. 그녀 주위로 깁들이 안개처럼 흘렀다.
“폐하, 이건 제가…… 매듭이 좀 복잡해서…….”
산해가 입혀 주면서 절대 폐하께서 푸시지 못하도록 하라 했던 것이다. 그니 고향에서는 초야에 반드시 치르는 전통이라는데, 록흔은 왜인지 이유는 잘 몰랐다. 서모가 여러 번 다짐하기에 따를 뿐, 그녀는 두 손을 목 뒤로 돌렸다. 설의는 안개처럼 흐리마리해 입지 않은 듯 얇았다. 끈 역시 있는 듯 없는 듯 연하고 매끄러웠다. 보얀 손끝에 가느다란 것이 홀보드르르 감겼다.
“…….”
록흔이 만작대는 것은 설순, 이른바 신부의 실띠였다. 어미가 딸에게 묶어 주며 금실지락을 빌어주는 것인데, 신랑이 풀면 동티가 난다는 속설이 있었다. 풍습이야 어찌 됐든 가륜은 작금 눈이 몹시 짙었다. 하얀 손이 보드랍게 나울대면, 동그랗게 솟은 가슴이 탐스럽게 출렁댔다. 그럴 적마다 얇은 깁에 도홍빛 유두가 언뜻언뜻 스쳤다. 고혹 그 자체라 사내라면 뉘든 참기 힘듦이었다.
사락사락.
비단 끈 스치는 소리에 가륜은 날이 섰다. 그렇다고 해서 잡아챌 수는 없었다. 하여 록흔이 아미를 찡그리며 몰두하는 걸 지켜보기만 했다.
사락.
보드란 살갗, 그 위로 깁이 미끄러지는 소리란 비할 데 없이 연약했다. 록흔이 바로 그러잡아 가슴을 가리는 걸, 가륜이 맵차게 들어 안아 버렸다. 그의 눈은 거칠고 그녀의 눈은 몹시 습했다.
“아아…….”
등에 금침이 닿은 건 순간, 록흔은 가슴이 베어 물렸다. 가륜이 머금어 빨아 능사(명주실로 짠 얇고 성긴 비단)는 녹은 듯 뵈지 않았다. 달보드레한 무엇인 듯 그는 격하게 그녀를 탐했다. 그에 그녀는 붉은 입술만 버긋지게 열었다.
“…….”
소리 따위 잇새로 끊었다. 가륜은 입귀를 어그러뜨리며 록흔의 손을 그러쥐었다. 다섯씩 깍지 끼어 옴쭉도 못하게 눌러 그녀를 금침에 갈앉혔다.
“가…….”
검남빛 동공이 날캄하게 찢겼다. 가륜은 록흔이 혀 아래로 감춘 말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녀에게 지아비로 불리어 심장이 저릿했다. 그는 그녀의 허리를 붙잡았다. 그리고 가분하게 들어 올렸다.
“가…… 군…….”
가륜은 가쁜 속삭임까지 빨아들였다. 이제는 정녕 아내라 그에게 속했다. 그는 짙붉은 입술을 뜨겁게 삼켰다. 그녀가 울든 가락거리든, 더욱 깊다랗게 파고들었다.
***
장성지악, 여월루. 기루답게 이름은 아름다우나 속은 추악하기 그지없었다. 술맛 좋고 기녀들이 벌이는 방사 또한 제일이라 오입질 좀 한다 하면 뉘든 한 번은 거쳐 가는 곳, 어디든 여기처럼 색스럽지 않으니 난봉꾼들에게는 그야말로 지상낙원이었다.
“황제 폐하께 경배!”
“아름다우신 황후 폐하께도 한 잔!”
어느 날은 흐린 날씨가, 어느 날은 맑은 날씨가 이유였다. 이 밤에는 국혼이 술잔을 드는 목적, 주객들은 흠뻑 취해 제가 마시는지 붓는지도 알지 못했다.
‘흠, 매상이 짭짤하겠어.’
진파루는 은으로 빚은 주판알을 튕기다, 물 담배를 한 모금 빨았다. 희부연 연기 새로 눈 벌건 사내들이 보였다. 집에서 아내가 울든 아이가 울든 상관없을 것들, 반라의 무희에 홀려 채 비지 않은 술병을 치워도 몰랐다. 호궁 소리가 제법 애절했다. 그 선율 따라서 무희가 는실난실 엉덩이를 돌렸다. 어느 순간, 농염하게 부푼 가슴에 걸렸던 천이 스륵 미끄러졌다. 예서제서 육향이 진하게 피어올랐다.
차라라랑!
붉은 주렴 걷혀 사내 둘이 들어섰다. 하나는 은안의 미부요, 다른 하나는 울툭불툭한 험한이었다. 진파루가 진즉부터 기다리던 이들이었다.
“어서 오세요. 제가 모시겠습니다.”
진파루가 춤을 추듯 나긋나긋 앞서 걷자, 사내들이 그 뒤를 따랐다. 기루 주인이야 술이나 진탕 팔고 매음굴만 잘 다스리면 될 일, 있어도 크게 있는 사정이야 물을 바가 아니었다. 그녀는 호기심을 속눈썹 아래로 감추고 계단을 오르고 또 복도를 따라 걸었다.
“이 방입니다.”
문은 피처럼 짙붉었다. 그 앞에서 셋은 잠시 멈춰 섰다.
타락.
험한이 내미는 은괴가 묵직했다. 진파루는 상긋 웃으며 옷소매에 넣었다.
“필요한 건, 금루를 당겨 불러 주세요.”
“됐다. 이것저것 들인다 드나들지나 마라.”
“예.”
탁!
문 하나로 갈려, 밖에 선 자는 돌아서고 안에 있던 자들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늦으셨소.”
“일이 좀 있었거든.”
주융은 탁자에 모인 이들을 휘 둘러보았다. 그러다 어느 곳에 이르러 은안이 대번에 가늘어졌다.
“저들도 껴드나?”
가조가 뒤를 돌아보더니 비릿하게 웃었다.
“아아, 그렇게 됐소이다.”
“어찌해서?”
주융이 눈시울을 더욱 좁혔다. 시선이 살천스레 꽂힌 곳은 구석진 자리, 너울로 온몸을 감싼 여인 둘이 있었다.
“저리 몸을 사리고서 무슨 일을 도모하나?”
일순, 너울이 파르르 떨렸다. 검은빛이든 초록빛이든 주융의 말이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제법 도움이 되실 겁니다. 우리가 범접 못할 곳도 분명 있잖습니까? 그리고 뜻 또한 확고하신 분들이고요.”
초로의 사내가 가조 대신 껴들었다. 늘어진 턱에 기름기가 제법 두터워 관직깨나 높은 듯했다. 깜냥에 위장한다 하였으나 본디 흐르는 태까지 감출 수는 없는 것, 주융은 대강 짐작하고 고개만 까닥했다.
“그럼, 대충 소개를 해 봅시다. 이쪽은 재력으로 도와주실 것이고…….”
가조가 가리킨 대로 주융은 시선을 옮겼다. 턱이 파르란 애송이였다. 그 입성에서 돈 냄새가 폴폴 풍겼다.
“여기 선생께선 손을 보태실 테고.”
떨어뜨려 깨뜨린 돌멩이처럼 생김부터 모가 많은 자였다. 살집 없고 눈이 예리해, 주융이 바라봐도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이쪽은 도력인가 보군.”
젊은 도사는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아름다웠다. 다만 눈빛이 사악하게 어두워 서글서글한 외양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아아, 보수만 확실하면. 성심껏 해 볼 생각입니다.”
도사가 빈정대자, 가조가 빙긋 웃었다. 서로 속속들이 아는 듯 교환하는 시선이 각별했다.
“계집이든 돈이든 뉘 목이든, 도사께선 걱정하지 마시오.”
“셋 다 좋군. 하하하.”
젊은 놈이 웃어젖히매, 오악관 끝자락이 다르르 떨렸다.
“자, 앉으시죠.”
가조가 권해 주융이 탁자 정중앙을 차지하고 앉았다. 그리고 바로 뒤로 상허가 시립하고 앞으로 옆으로 사내 넷과 여인 둘이 둘러앉았다.
“목적하는 바 서로 상통할 터, 전력을 다하시오.”
주융이 입을 열자, 가조가 비릿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렴요. 여기 앉은 이상 목을 걸어야지요.”
“뭐 고기가 상당히 크니, 위험부담은 감수할 작정입니다.”
“대충이란 생각, 저희 역시 없습니다.”
이 입 저 입 열려, 여인들까지 한 소리 보탰다.
“그대들은?”
깨뜨린 돌 같은 자, 턱이 푸른 자, 도사랍시고 교만 떠는 자…… 주융은 대꾸 없는 그 셋을 야멸치게 훑어봤다. 우선은 한배를 탔으나 이합집산은 유동적이었다. 뉘가 변심해 비수를 들이댈지 모르니, 제 등은 제가 챙겨야 옳을 터. 주융은 이들 중 그 뉘도 온전하게 믿지 않았다.
“걱정 마시죠. 끌려온 자리가 아니니.”
도사놈이 입귀를 치올리며 이기죽댔다.
“좋소. 그러면.”
주융이 고갯짓을 하자, 가조가 둥그렇게 만 것을 기다랗게 폈다. 탁자 위에 놓인 것으로 모두의 시선이 살천스레 떨어졌다.
“이 지점에서…….”
바야흐로 야합의 밤, 눈도 귀도 한곳으로만 열렸다. 입은 여럿이나 말하는 이는 하나, 방금 전의 여유로움은 뉘에게도 없었다. 저 바깥은 달떴으나, 이 안은 무섭도록 갈앉았다. 이이나 저이나 나지는 건 짙은 그늘뿐, 달 이울어 밤 깊어도 하나같이 꼿꼿했다. 도모하는 것이 몹시 높다래, 회합 끝나도록 진파루가 자랑하는 고급술도 보배진미도 손은 일점도 타지 않았다.
***
“폐하, 그때…….”
록흔이 아직 열이 가시지 않은 눈으로 가륜을 올려 보았다. 거칠게 안겨 뺨은 우련 붉고, 머리칼은 침상 위로 어깨 위로 연하게 휘늘어졌다. 몹시 흐트러졌어도 그녀는 곱다웠다.
“처음 뵈었을 때.”
숨이 가쁜 듯, 말끝이 불안스레 떨렸다. 가륜은 록흔의 연한 입술을 선 그대로 덧그려 만졌다. 이대로 가둬도 좋으련만. 제 이기심이 역해 그는 입귀를 실긋 치올렸다.
“왜 그런 모습으로…….”
“천녀 말이로군.”
가륜이 서늘히 웃더니 윗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팔을 괴고 록흔을 내려 보았다.
“왜, 궁금한가?”
“가슴에 얼음가시인 양 박히신 듯해서……. 폐하, 제게라도 나눠 주시면…….”
찰나, 가륜은 가슴이 받혔다. 심장이 잡혀 비틀어진대도 이렇진 않을 듯. 록흔이 눈으로써 하는 말에 심통은 더 심해졌다. 보듬어 드리고픈, 녹여 드리고픈……. 걱정 담긴 그 눈이 사랑스러워 피가 험히 끓었다. 그예 그는 한숨 같은 신음을 흘렸다.
“그래, 바로 봤다. 어릴 적부터…….”
가륜에게 삶은 아리따운 그 무엇이 아니었다. 황량한 전장이어니, 아비의 관심도 어미의 사랑도 일절 몰랐다. 뉘 있어 그리 아귀처럼 살까? 떠올리매 고소가 절로 나왔다. 아비는 어미를 겁략하고, 어미는 그 아비를 증오하니……. 어미의 일념이란 제 아들이 황제가 되는 것뿐이었다. 그런즉슨 일찍부터 들은 말이란 게 ‘황제가 될 몸으로서……’로 시작되는 질책이 대부분, 다스한 품은 그의 몫이 아니었다.
“그런 사내애니, 정이란 건 이모님과 누님이 아니면 무언지도 몰랐을 거다.”
서느렇게 닿는 말에 록흔은 눈귀를 애참하게 일그러뜨렸다.
“두 살 위였던 누님은 어머니를 그대로 닮아서, 그자가 꽤나 귀여워했었다. 더 살았더라면…….”
가륜이 사린 말을 록흔은 그저 알았다. 가광이라면 의붓딸을 유린하고도 남았을 터. 그녀는 참혹한 마음에 입술을 단단히 감물었다.
“어머니 돌아가시고, 한 달도 채 못 돼 마혜가 황후위에 올랐다. 제일 먼저 한 일이란 게 동궁에 자객을 보낸 것인데…….”
가륜이 피긋 웃었다.
“그거 아나? 그때는 그 여자가 버거웠었다. 날고 긴다 해도 애는 애였으니까.”
이분도 어릴 적에는 그저 어리셨을까? 록흔은 눈시울을 붉혔다. 지금 이 순간, 어조 거칠고 눈빛 건조한데도……. 그녀는 눈물 많고 겁 많은 소년이 가슴에 담겼다. 사실이 아닐 텐데도 가슴이 아렸다. 애잔한 마음에 맑진 눈이 찰람대고 또 일렁였다.
“그 밤에 내관이고 궁녀고 온전치 못했다.”
“…….”
“동궁의 목을 내놓으라 외치는데, 그때 이모님께서 내 옷을 누님에게…….”
가륜이 턱을 으득 당기더니 말을 잠시 끊었다. 록흔은 제가 우는 지도 몰랐다. 눈물 산연해 뺨이 젖은 채, 그녀는 오롯이 그만을 응시했다.
“그 뜻 번히 알면서도 누님은 따르셨지. 맑진 눈으로 곱다시, 아무 일 없다는 듯 안온하게 내게 미소 지으시고…….”
이때껏 그 뉘에게도 아프다 하신 적 없었을 터. 찢긴 가슴은 뉘에게도 보이시지 않았을 터. 가슴속 깊이, 록흔은 발겨졌다. 이해한다, 아파 말라…… 그런 말 따위 할 수 없었다. 그 아니면 뉘도 모를 것이니, 다만 그 대신 그녀가 울었다.
사락.
가륜이 록흔을 끌어안았다. 그녀가 우는 만큼 그는 가슴이 젖었다. 되게 얼었던 것이 녹아내리는 듯 축축했다. 그는 하던 말을 계속 이어 나갔다.
“이모님께 그리 못한다 했었다. 정신이 들었을 땐…….”
가륜에게 그날은 어제이언 듯 오늘이언 듯 선명했다.
“이미 태화성 밖, 곁에는 좌중랑장의 아비가 있었다. 후에 전해들은 바…….”
이어지는 서술에 록흔은 눈을 감아 버렸다. 소혜황녀가 제 아우인 양 꾸며 자결하자, 정란부인이 그 뒤를 따랐다. 시신이 남아 모든 게 탄로 나면 질자의 도타 길이 고달프겠기에, 그 이모는 마지막 안간힘으로 춘궁에 불을 놓았다 했다. 그리하여 세상에서 동궁은 그예 묻혔다. 지옥이란 사후에 가는 것이 아니니, 록흔은 저러한 삶이 잔독하게 아팠다. 우중에 연꽃인 양, 그녀는 함빡 젖었다. 산연히 흐르는 눈물이 그대로 가륜에게 스몄다.
“태화성이 전부였던 내게 강호는…… 세상은…….”
가륜은 록흔을 아스러지게 안았다.
“알던 것의 태반이 거짓, 세상은 미쳐 있었다. 상처 입고 굶주리는 이 하많고, 억울하게 목숨 앗기는 이 또한 하많아…… 그악스레 독해졌다, 그리하여 얼음이라던가?”
말할수록 안에 든 것이 얼녹았다. 가륜은 저 대신으로 슬픔이 완연한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젖은 눈귀를 가만 쓸었다. 이토록 다스한 이, 아내였다. 마음이 절로 무름해져 그는 가느다란 몸피를 바투 당겨 안았다.
“까라질라, 그만 울어.”
“아직 그대로신데, 잔독하고 깊어서…….”
록흔이 울먹여 가륜은 입귀를 어그러뜨렸다. 지금처럼 무름해진 것, 적이 보면 환장하고 달려들 터. 그러나 이 앞에서만큼은 그저 사내이길 바랐다.
“폐하, 이 밤만…… 어린 폐하를 위해서…….”
“그래…….”
고맙다는 말, 가륜은 록흔의 정수리에 토했다. 그리고 그녀를 바짝 죄어 안았다. 그 눈매 부드러우니 연연히 담긴 것은 사랑빛이었다.
“흐윽…….”
록흔이 흐느껴 우느라 잗다랗게 떨었다. 가륜은 그녀의 가냘픈 어깨를 단단히 보듬었다. 그리고 등을 토닥였다.
“울보 황후님.”
“흑…….”
전에는 꼭꼭 덮어 함부로 들치지 못하던 것들이 작금은 그예 드러났다. 저 아니면 누님은 성혼하여 한 사내의 지어미가 되었겠지, 이모님 또한 곱게 늙으셔서……. 애잔한 마음이 일어 가륜은 록흔의 뺨에 자신의 얼굴을 댔다. 혈육을 모두 앗겼지만, 이제는 그녀가 있었다. 예서부터 시작하면 될 것이다. 그는 그렇게 스스로 다독였다.
“록흔, 눈빛 맑은 아이, 낳아 주겠나?”
“…….”
록흔은 목이 메여 고개만 끄덕였다. 설움 같은 건 모르게, 정에 주리지도 않고, 밝은 세상에서 티 없이…… 그런 아이, 이 품에 안겨 드리고 싶었다.
“몇이나?”
“폐…… 하께서…….”
록흔이 울음 묻은 소리로 속삭이며 가륜을 올려 봤다. 그에 가랑가랑 괸 눈물이 똑 떨어졌다.
“……?”
가륜은 눈으로 물었다. 록흔이 코끝이 발개 울음 참는 것이 마냥 어여뻐 들여다보기만 했다.
“주시는 대로.”
어언간, 눈 밑이 보드랍게 닦였다. 록흔은 눈을 사분 들었다. 가륜이 손끝으로 입술로 어루만져, 섧던 것이 잠시 말랐다.
“큰일이잖나. 탕감 안 되는 빚에, 내가 안겨 줄 아이들에…….”
놀리는 말인데 어투가 진지했다. 가륜이 빛접게 미소 지어, 록흔은 온몸이 도홍이었다.
“네가 걱정이다.”
어깨에 깊이 팬 자리, 거듭 붉어진 흉터에 가륜이 입술을 댔다.
“그만 아파라.”
“예.”
날 밝으면 접납(접견)할 터, 혜덕에게도 만혁에게도 물을 것이 많았다. 가륜은 록흔에게 팔을 내어주고, 그녀 위에 포단을 덮었다.
“바스러지겠군.”
희춘당에서 록흔을 잃을 뻔했다. 저는 모르나 그리 위독했었다. 가륜은 연한 머리칼을 거듭 쓸었다. 그리고 그 위에 입술을 댔다.
“자도록 노력해 볼 테니, 록흔…….”
가륜이 바투 당겨 안아, 록흔은 그 품에서 두 눈을 감았다. 안 그래도 혼곤해 갈앉던 참, 숨소리가 점점 연해졌다.
“해지면 으레 밤이니.”
매일 안겠다는 말. 가륜이 귀를 긁듯 속삭여 록흔은 고개를 가만가만 끄덕였다. 그녀가 미소 지으매, 울어 부운 눈시울이 곱다랗게 휘어졌다.
***
사악.
종잇장 날리는 소리가 경쾌했다. 하준은 오랜만에 웃음빛이었다. 장령으로 모셨던 나날이 복이었으니, 그는 이제는 황후로서 서궤에 앉은 상관을 낙낙한 낯으로 올려 보았다.
“왜 거절하고?”
천생 어여쁘신 분, 그러나 하준에게는 저런 덤덤한 말투가 더 정다웠다. 어언간 그는 사글사글하게 웃었다.
“아깝다. 폐하께 호분중랑장으로 적격이라 말씀드렸는데.”
록흔이 고개를 반긋하게 들었다. 미소 어려 연빛 눈이 드맑았다.
“추거해 주셔서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하지만 제가 모신 그분 따르려면 턱없이 부족합니다. 폐하, 예도 아니고요.”
“겸손이야, 그건.”
“이렇게 가끔 뵈올 수도 있으니, 그냥 빈자리로 남아 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현재 호분위는 수장이 없었다. 하준이 대리로 모든 일을 처리하는 참, 곤란한 것은 없으나 그 자리를 노리는 자는 많았다. 부접 또한 접두 없이 돌아가 유장이 빈자리를 대신 메웠다. 그들 역시 록흔을 항시 빈 곳에 두고 보는 듯했다.
“나도 반갑긴 한데, 호분중랑장으로서 보면 더 좋겠군.”
“폐, 폐하께옵서도…….”
장령이란 말이 혀에 익어 폐하라는 말이 조금은 딱딱하게 나왔다. 하준이 저도 몰래 미간을 찌푸리는 걸, 록흔은 웃으며 보았다. 자신 역시 이런 말투가 더 편하니 이나저나 비듬한 듯싶었다.
“부접들은 여전한가?”
“예, 본디 그렇듯 닿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어깨가 다소 처진 것을 빼면…….”
저 역시 그러하다 말하고 싶은 걸 하준은 간신히 눌렀다. 일신보다 수하를 챙기는 상관이란 흔치 않으니, 저 아래서 있을 때가 문득문득 그리웠다. 목숨 빚을 졌는지라 그 마음은 더 컸다.
“상한 곳은 이제 괜찮고?”
하준 또한 동시에게 많이 상했었다. 록흔이 걱정을 보태 하는 말에 그는 그만 눈시울이 붉어져 고개를 내저었다.
“장령…… 폐하께서, 외려 저 때문에…….”
“아니, 그런 소리 마라.”
록흔이 상그레 웃어, 하준은 고개를 깊다랗게 숙였다. 어디에 계시든 장령이신 분, 어디든 좇고 따를 터. 충심이란 항시 같았다.
“호분위 건은 이제 거의 갈무리됐지 싶은데…….”
“아, 제가……. 폐하, 여기 이것을.”
황상께서 긍가(허락)하신 것은 호분위 업무의 인수인계, 그 안에 부접의 것은 일절 포함되지 않았다. 하준은 다소 조마거리는 심정으로 유장이 보낸 것을 서궤 위에 올렸다. 실종된 이들에 관한 서류라 꽤나 두껍다랬다.
스윽.
첫 장이 넘어가고 그다음 장이 넘어갔다. 어느 한자리서, 록흔의 눈이 멈췄다. 그녀가 깊게 보기에 하준은 조심스레 사뢔 올렸다.
“폐하, 혹여라도 황제 폐하께서…….”
“걱정 마라, 감춰 두고 조심해서 볼 테니.”
“예, 폐하.”
황상께서 아시면 진노하실 게 번했다. 저를 위함이 아니라 장령을 위함이라, 하준은 눈빛이 무거웠다.
“폐하, 안색이 좋잖으신데. 희춘당에서 입으신 부상이 여전하신 건지요?”
“아니, 그건 나았는데 어릴 적에 잘못 먹은 게 좀 있어서. 이것저것 하고 있으니 대수롭잖은…….”
록흔은 말끝을 흐렸다. 청심을 자균일 때 먹었으니 더 두렵다 했던가? 풋과일이 토사곽란을 일으키듯 덜 익은 게 해악이 더 많을 것이라고도 하셨다. 혜덕이 걱정을 보탠 터라 요즈음 가륜은 눈이 날카로웠다. 록흔 자신에게 비밀에 부쳐 하지 않은 말이 있는 듯한데 좀처럼 들을 수가 없었다. 만혁 또한 같이 근심하더니 인월에서 알아보겠노라 말하고 엊그제 돌아갔다.
“그 책은……. 폐하, 무엇을 필사하시는지요?”
“불의 서, 스승께서 배움 주신 책인데, 쓰기가 만만찮다.”
동렬이란 부제가 활활 타오르는 듯해 하준은 눈을 지릅뜨고 보았다.
“열다섯 중 이제 세 번째를 막 끝냈거든.”
하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떠올려보니 장령께서 한증이 있으셨던 것도 같았다.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안색이 가끔 푸릇할 때가 있어 부접과도 걱정했던 바. 추측컨대, 저 안에는 한사(차가운 기운)를 누르는 내용이 담긴 듯싶었다.
“폐하, 항시 강녕하셔야 합니다.”
전에 하준이 전서 끝에 덧붙였던 말이라, 록흔은 입귀를 부드럽게 늘였다. 연하고 맑진 눈에 담긴 동인(눈동자에 비치어 나타난 사람의 형상)은 우직스러웠다.
“부접들이 사뢰길, 결코 무리 마시라 했습니다.”
“알았다.”
록흔이 다짐하여 하준을 안심시키는데, 태황태후 납신다는 소리가 문 너머에서 돋아 들렸다.
“폐하, 저는 그만.”
“그래, 또 보자.”
문 열리고 인혜태후가 들어섰다. 하준이 극진히 예를 갖추고 물러나가자마자, 록흔은 서궤에서 일어서 시할머니를 맞았다. 부접 관련 서류나 동렬은 서랍 안에 감춘 뒤였다.
“할머님, 찾아뵈려 했사온데, 이리 오셔서 부끄럽습니다.”
“황후, 무슨 말씀을. 나 좋아 다니는 것인데 개의치 말아요. 그래, 어디 좀 봅시다.”
태후가 록흔의 두 손을 잡더니 눈귀를 인자하게 접었다. 반달눈이 낙낙하니 정다웠다.
“다치신 건 좀 어떠시오?”
“괜찮습니다. 제가 변변찮아서, 할머님께 걱정을 끼…….”
“아니, 아니요.”
록흔은 태후가 막아 말을 더 잇지 못했다.
“이 늙은이는 걱정하는 걸 아주 좋아한다오. 게다가 어여쁘신 황후 아니오. 열 일 제치고 살피고 챙기고 싶답니다.”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라 태후는 진심으로 손부가 어여뻤다. 황후 맞은 후에 황상께서 더 강건해지신 참, 기력만 딸리지 않으면 업어 주고 싶을 정도로 고왔다.
“그래, 무얼 하시었소?”
“할머님, 제가 규방일은 서툴러서……. 서책을 좀 보았습니다.”
“그러실 것 없어요. 황성 내에 밥 짓고 옷 짓는 이가 얼마나 많습니까? 황후께서 하시지 않아도 걱정 없지요.”
록흔이 뺨을 붉히며 하는 말을 태후는 흔연스레 받아쳤다. 황상께서 호분중랑장을 황후로 들이겠다 하셨을 때 크게 놀라긴 했으나, 지금으로써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희춘당 일로 크게 질린 터라, 연약하여 밟히는 것보다는 낫지 싶었다. 손부가 이리 어여쁘고 연삽하니 아끼고픈 마음뿐이었다.
“이 할미가 소싯적에…… 강호에 한번 가 봤으면 하고 생각했다오. 꿈이었지.”
태후가 꿈꾸듯 눈을 부풀리기에 록흔은 방긋이 웃었다. 이내 해사한 뺨이 우묵하게 팼다.
“그 넓고 푸름을 잘 아실 터니, 예서 지내시는 게 갑갑키도 할 거요. 황후, 아니 그런가요?”
그렇다, 그렇지 않다, 록흔은 대답치 않았다. 그저 물기 많은 눈으로 살폿 미소 지었다.
“황후, 나하고 잠깐 바람 좀 쐬지 않으려오?”
“예, 할머님.”
“아이고, 참 시원시원하시오.”
태후가 록흔의 손을 도닥였다. 여염집 할머니인 양, 그니는 소탈하고 또 담박했다.
“그런데 말이오.”
갑작스레 태후가 목소리를 낮춰, 록흔은 눈을 반긋 들었다.
“황상께는 비밀입니다. 아셨지요?”
“예, 할머님.”
장난꾸러기 아이처럼 태후는 그 미소가 해맑았다. 그니가 동그란 눈으로 보기에 록흔은 고개까지 끄덕이며 약언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