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on Day 1 Mana Burst RAW novel - Chapter 10
10화 이무기(4)
주아라.
주양태 회장의 유일한 손녀로.
천무그룹 내에선 장손인 주태우 못지않게 큰 기대를 받고 있는 인물이었다.
이제 막 성년에 접어든 젊은 나이에도.
벌써 본인의 팀을 꾸려 각지의 던전과 게이트를 무서운 속도로 공략해 나가고 있는 천무가의 떠오르는 샛별.
“안 들렸니?”
“뭐가.”
“네가 건우를 이겼냐고. 방금 내가 너한테 물어봤던 건데.”
“알아.”
재차 확인하는 주아라에게 한 마디를 던진 현우는 다시금 바벨을 향해 손을 뻗어 데드 리프트를 시작했다.
‘주아라는 자존심이 강한 성격이다.’
이렇게 조금만 자극해주면.
쉽게 현우가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을 기회를 스스로 제공해줄 것이 분명했다.
“대답 안 해줄 거야?”
“굳이 해야 할 필요가 있나.”
틀린 말은 아니었다.
주아라는 뚱한 표정으로 현우를 봤다.
“원판 추가하게 비켜.”
“아니, 잠깐······.”
그러나 주아라의 반응은 아랑곳하지 않고.
현우는 척척 원판을 갈아 끼우더니. 다시금 데드 리프트를 시작했다. 짧은 심호흡과 함께 들리는 육중한 무게.
주아라는 인상을 찌푸렸다.
‘지가 보디빌더야 뭐야?’
우람한 근육질의 몸은 아니지만.
이제 막 성인이 된 나이라곤 믿기 어려울 정도로 균형 잡힌 단단한 근육, 현우가 힘을 줄 때마다 전신의 혈관이 도드라지게 드러났다.
이 모든 게 청금단과 신체단련실의 효능.
그리고 현우 본인이 수행하고 있는 무식할 정도로 빡빡한 트레이닝 방법 덕분에 만들어진 결과였으나.
오랜만에 본가에 돌아와서 처음으로 현우를 마주한 주아라가 그 사실을 알 턱이 없었다.
“그래도 예의가 있으면 대답은 해줘야지.”
“너도 알면서 물어보는 거잖아.”
퉁명스러운 한 마디.
주아라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설마, 이렇게까지 무시당할 줄은 몰랐다.
그녀 나름대로는 첫 만남인 만큼, 친근하게 다가가려고 노력했던 건데.
생각보다 차가운 태도에 주아라는 어금니를 꾸욱 깨물었다. 그녀의 두 눈에 쌍심지가 켜졌다. 현우가 바라던 그대로였다.
“그럼 대답은 필요 없어!”
사실 그녀의 목적도 질문 따위가 아니었다.
고작해야 일주일 만에 창천신공의 경지를 뛰어넘고, 주건우와 대련을 통해 실력까지 증명한 주현우라는 녀석이 궁금했을 뿐.
“대신 나랑 한판 붙자!”
“내가 왜?”
요구에 응할 이유가 없다.
현우는 들고 있던 바벨을 천천히 내려놓으며 주아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현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예전엔 딱히 신경 쓰지 않던 일이었지만.
회귀를 경험하고 두 번째 인생을 사는 현우의 입장에서 현재 주아라는 한참 어린 꼬맹이나 다름없었다.
“너, 언제 봤다고 반말이야?”
“뭐?”
주아라의 눈이 동그래졌다.
설마 이런 이야기를 할 줄은 몰랐던 걸까.
“나랑 동갑으로 알고 있는데. 아무리 그래도 초면에 대놓고 반말은 아니지.”
“그, 그건······.”
그녀는 황망한 눈빛이 되어 몇 번 입을 벙끗거리더니 이내 뾰로통한 표정으로 입술을 내밀었다.
“알겠어.”
“알겠어는 반말이고.”
“그럼 오케이야!”
죽어도 존대는 하기 싫다는 눈빛.
분명 성인임에도 불구하고 천진한 모습에 현우는 헛웃음을 흘렸다.
“오케이는 반말이 아니긴 하네.”
“아무튼, 지금부터 나랑 한 판 붙어. 어차피 그렇게 움직이지도 않는 쇳덩이랑 씨름해봤자 재미도 없잖아.”
“재밌는데.”
거짓말은 아니었다.
이전 삶에선 좀처럼 사용해볼 기회도 없었던 천무가의 신체단련실이다.
고작 무거운 쇳덩이를 들고 운동하는 것만으로 신체능력과 창천신공을 동시에 단련하는 게 가능하니.
당연히 현우로서는 매 순간 자신의 성장을 체감하는 재미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너 진짜 이상한 녀석이구나.”
어이없다는 표정의 주아라.
그러나 그만큼, 그녀가 가진 현우에 대한 가벼운 궁금증은 짙은 호기심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러면 내기하자!”
“내기?”
현우의 눈이 반짝였다.
단순한 대련이 아닌, 무언가를 걸고 하는 내기라면 이야기가 180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드디어 말귀가 통하는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이기면 누나라고 불러. 앞으로 내가 묻는 말에도 꼬박꼬박 예의 있게 대답하고.”
“좋아.”
가슴팍을 내미는 녀석에겐 미안하지만.
주아라를 누나라고 부를 생각 따위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다만, 주아라에게 뜯어낼 내기의 보상에 관해서만 관심이 있을 뿐.
“내가 이기면 그 반지를 내놔.”
“이거?”
“그래 그거.”
현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주아라는 현우의 선택이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더 대단한 것도 많은데.”
고개를 갸웃하는 주아라.
“글쎄, 더 대단한 것도 많으면서 굳이 착용하고 있는 거라면.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인 것 같은데.”
“이건 그냥 기념품 같은 거야. D등급 짜리 아티팩트지만, 내가 처음으로 데뷔전을 치른 던전에서 드롭된 아이템이거든.”
희소가치가 그리 높진 않다.
희귀한 아티팩트를 산더미처럼 비고에 쌓아놓고 있는 천무가에서는 잡동사니 취급이나 당하면 다행일까.
‘당연히 알고 있지.’
그 아이템의 효과 또한 알고 있다.
본래 ‘세이렌의 둥지’를 공략하기로 예정되어 있던 것이 바로 주아라가 이끄는 공략팀이었으니까.
현재의 기록엔 없는 새로운 마족.
감미로운 노래를 통해 적을 현혹하고 환각을 보여주는 세이렌은, 이번에 발견된 ‘세이렌의 둥지’를 통해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마족이다.
‘예상하지 못한 마족의 등장으로 전멸한 공략팀에서. 유일하게 끝까지 생존해서 돌아온 사람이 주아라였다.’
그 구사일생의 비결이 바로 저 반지.
주변을 완벽한 무음 상태로 만드는 ‘쿠르스의 고리’의 효과 덕분이었다.
그러나 이미 현혹에 걸린 이들은 세이렌을 모조리 죽이기 전엔 되돌릴 방법이 없었고, 홀로 돌아온 그녀는 팀원을 잃었다는 죄책감에 한동안 활동을 멈춘다.
“무르기 없기다?”
현우는 그녀를 흘끗 보며 말했다.
어차피 주양태 회장의 결정에 따라 데뷔전이 치뤄질 ‘세이렌의 둥지’를 그녀의 팀이 공략하는 일도 없을 테니.
더 유용하게 사용할 기회를 가진 현우가 반지를 가져가는 편이 좋으리라.
“자신감이 엄청난데?”
주아라가 주먹을 눈높이로 치켜들었다.
그녀의 신체 주위의 마나가 빠른 속도로 일렁이며 창염으로 화해 피어올랐다.
“그런데 어떡하냐.”
비릿한 미소를 짓는 주아라.
그녀는 벌써 승리를 확신하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자신만만한 눈빛으로 현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있으면 누나라고 불러야 할 텐데.”
***
30초 정도가 지났을까.
“······아?”
우두커니 서 있는 주현우를 보다가.
주아라는 입에서 멍청한 소리를 흘렸다.
어느새 그녀는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턱을 강하게 얻어맞았던 탓일까.
머리가 얼얼하고 귀에서 이명이 울렸다.
현우는 주아라를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이맘때 같은 항렬에서 주태우에 이어 두 번째로 촉망받는 인재였는데. 실제로는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건가.’
솔직히 약간 실망했다.
주아라는 단 세 합을 버티지 못했다.
호기롭게 덤볐던 것치고는 굉장히 부끄러운 결과라고 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약한데.”
“뭐라고!”
현우의 말에 주아라가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빽 고함을 지르며 현우를 날카로운 눈으로 노려봤다.
“느낀 그대로를 말했을 뿐이야.”
사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주아라는 절대 약한 편은 아니었다.
나이는 이제 막 스물.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천신공은 3성의 경지에 이르렀고. 17세에 데뷔전으로 첫 D급 던전을 홀로 공략한 이후. 벌써 창천무도 제3초식까지 익혔다.
가히 천재라는 말이 아깝지 않은 수준.
그러나 정작 현우의 입장에서 보면. 주아라의 모든 움직임은 경험이 한참 모자란 애송이에 불과했다.
내지르는 주먹과 발을 피하고.
보이는 틈을 향해서 적당히 힘을 조절한 주먹을 꽂아 넣는다. 그저 그것만으로 지금의 주아라를 상대하기엔 충분했다.
지난 대련과는 달리.
보는 사람도 없으니. 딱히 과시할 이유도 없었다. 괜히 승부를 질질 끄는 것보단 이렇게 깔끔하게 끝내는 게 나으리라.
“고작 세 합도 못 버텼잖아.”
“그, 그건 네가 턱을 쳐서 그런 거야!”
“네가 먼저 대련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나는 이런 대련에서 쳐도 되는 부위를 구별해가면서 싸울 정도로 여유롭지 않아서.”
“이익······!”
주아라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패배의 부끄러움도 있겠지만.
솔직히 현우의 말에 반박할 수 있는 논리가 전혀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억울하면 한 판 더 해보던가.”
“이씨, 됐어.”
주아라는 새침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리 승부욕이 강하다곤 해도.
그녀가 바보가 아닌 이상, 방금 전의 대련을 통해서 현우와의 수준 차이를 여실히 체감했다.
지금 그녀로서는 현우를 상대할 수 없다.
‘불과 몇 주 전만 해도 창천신공 입문조차 못했던 녀석이라고 들었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강해.’
현우를 바라보는 주아라의 눈이 빛났다.
그녀는 사고전환이 빠른 편이었다. 당장 이기는 게 불가능하다면, 일단은 자신의 것으로 만들면 된다.
“너 말이야.”
주아라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내 팀으로 들어올 생각은 없어?”
“내가?”
“응, 데뷔전 끝나면 바로.”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이야 단 세 합을 버티지 못했지만, 앞으로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네가 가진 힘과 내 추진력이 합쳐진다고 생각해봐. 얼마 안 가서 태우 오빠 이상으로 큰 영향력을 가진 팀이 될 거라니까.”
“딱히 내가 이득 볼 건 없는 것 같은데.”
어깨를 으쓱한 현우.
어차피 주아라와 팀을 이루지 않아도.
그렇게 되는 건 현우에겐 시간문제였다.
“나라는 울타리가 생기는 거지. 안 그래도 영미 고모가 널 그렇게 견제한다던데. 어때, 나쁜 선택은 아니잖아?”
“울타리가 필요할 정도로 약하진 않아서.”
“싫다면 나도 강요할 생각은 없어. 그래도 혹시, 나중에 마음 바뀌면 언제든지 연락해줘. 너라면 무조건 환영이니까.”
그리고······.
그녀는 오른손의 반지를 뺐다.
“자, 약속했던 거.”
주아라는 미련 없이 반지를 내밀었다.
희소가치가 떨어지는 물건이라 그렇기도 하겠지만, 원래 이런 부분에선 상당히 시원시원한 성격인 녀석이었다.
“참.”
그대로 신체단련실을 나가려던 주아라는 뭔가를 떠올렸다는 듯이 걸음을 멈추고 현우를 돌아봤다.
“너, 이번 데뷔전에서 너무 방심하진 마. 대련이 아니라 던전 공략인 만큼. 마음 놓고 있다간 선수를 뺏길 수도 있을걸.”
“내가?”
현우는 픽 웃으며 대꾸했다.
걱정이야 고맙지만 그럴 일은 없다.
“또 한 번 내기해도 좋아.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지면. 그땐 널 누나라고 불러줄게.”
“······자신감 하나는 굉장하네.”
“이건 자신감이 아니야.”
지금 이 감정은 다르다.
자신감은 불확실한 일에나 가지는 것.
“확신이지.”
***
그렇게 시간은 흘러······.
주양태 회장이 제시한 한 달이라는 기간이 모두 지나고, 드디어 현우는 데뷔전을 위해 강릉으로 향했다.
“제가 특별한 정보를 제공해 드릴 수는 없지만. 해안 절벽에 생성된 던전인 만큼 해양 관련 마족들이 출몰할 겁니다.”
첫 실전을 치르는 현우가 걱정됐는지.
강릉으로 향하는 내내 류한나는 답지 않게 말이 많아진 편이었다.
“모두의 예상과는 다르게.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은 새로운 종류의 마족이 등장할 가능성은요?”
“으음······.”
한나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전혀 없다곤 하기 어렵지만, 그렇다고 그 가능성이 있다고 확실하게 말하기도 어려울 정도이기 때문이었다.
“D급 던전에서 신규 마족이 발견된 사례는 지난 20년간 전혀 없었습니다. 가능성이 극히 낮다고 보는 편이 좋을 거라고 말씀드려야 할 것 같군요.”
“아예 없다곤 보긴 어렵다는 거군요.”
“가능성 하나만을 놓고 보면 그렇습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한나.
매사에 조심스러운 태도를 가진 그녀조차 신규 마족이 발견될 거라는 가능성엔 낙관적인 견해를 보였다.
‘그러니 피해가 클 수밖에.’
사실 이건 오늘 ‘세이렌의 둥지’ 던전에서 벌어질 이변 하나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었다.
천무그룹을 비롯해서.
작금의 헌터 사회는 변화에 둔해졌다.
매 순간에 생존이 달려있던 과거와 달리.
던전과 게이트에 대한 대책.
그리고 헌터와 같은 새로운 질서가 제대로 자리 잡은 후로는 눈에 띄게 안정된 일상을 보낼 수 있게 되었으니까.
다니엘을 비롯해 배신자 세 가문은.
오래전부터 안정되고 둔감해진 사회와 천무그룹의 의표를 찌를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도착한 모양입니다.”
어느새 멈춰선 리무진.
현우는 창밖의 풍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누가 봐도 관광지는 아니군.’
도로가 이어져 있지도 않은 해안 절벽.
흔히 상상하는 것처럼.
깎아지른 기암들이 즐비한 광경은 아니었지만, 사람의 접근을 쉽게 허용할 것 같은 풍경 역시 아니었다.
현우는 리무진의 문을 열고 내렸다.
약간은 서늘하고 소금기를 품은 바람이 뺨을 스치며 지나갔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걱정하실 거 없어요.”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하는 한나.
현우는 그녀를 향해 씩 웃어 보였다.
“최선의 준비는 이미 끝났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