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on Day 1 Mana Burst RAW novel - Chapter 153
153화 환상(3)
“저건···.”
류한나가 중얼거렸다.
‘밤의 악마’가 넝쿨을 움직이고 있었다. 곧, 훤히 드러나 있던 녀석의 맥동하는 붉은 기관이 넝쿨 속으로 감추어졌다.
“영악한 녀석이네.”
네크로맨서가 가볍게 혀를 찼다.
역시나 약점을 훤히 드러냈다고 생각한 것은 착각이었다. 녀석은 그들을 환상에 빠뜨리기 위해. 마치 식충 식물처럼 유인을 했을 뿐이었다.
“저 뿌리들, 쉽게 부서지지는 않을 거야. 척 봐도 내구력이 장난이 아닌 것 같거든. 이거, 정면에서 상대하는 건 그냥 포기하고. 다른 방법을 강구하는 편이 좋아 보이는데.”
“달리 방법이 있겠습니까.”
류한나가 물었지만 네크로맨서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로서도 당장 뾰족한 수를 떠올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없는 모양이군요.”
“내가 무슨 자판기도 아니고. 누르면 뚝딱 답이 나올 리가 있냐구. 그리고 애초에 이건 그냥 탐색전에 불과했어. 너희 두 사람이 환상에만 당하지 않았더라도···.”
“물론, 제 부족함은 인정합니다. 그로 인해 예상 밖의 사태가 벌어졌다는 점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습니다.”
류한나는 흘끔 현우 쪽을 보았다.
지금까지 그는 침묵을 고수하고 있었다. 아니, 이쪽으로는 시선조차 돌리지 않고. 무언가를 생각하는 눈빛으로 쭉 ‘밤의 악마’를 응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잘잘못을 문제 삼기 이전에. 당장 당면한 문제에 대한 대책을 생각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건··· 그렇지.”
“만약 지금 당장 뾰족한 수가 없다면. 여기서 더 이상 예상 밖의 사태가 발생하기 전에, 잠시 뒤로 물러나 전략을 새롭게 세우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일 겁니다.”
현우가 그 이야기를 듣지 못했을 리는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렇다 할 반응 없이 가만히 응시하는 시선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잠깐, 너도 뭐라고 말 좀 해봐.”
툭툭, 현우의 어깨를 건드리는 네크로맨서.
그제야 현우는 그들을 향해 돌아섰다.
그런데 그의 눈빛에는 영문을 알 수 없는 확신의 빛이 서려 있었다. 그건 분명 계획이 있는 사람의 눈빛이었다.
“방법은 있어.”
불쑥 현우가 입을 열었다.
단순히 말만 꺼낸 것이 아니었다. 그 한 마디와 동시에 현우는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의 걸음이 향한 곳은 여전히 열려 있던 페일 라이더의 탑승구. 밖에서는 서늘하고 거센 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으나. 현우의 몸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현우는 그 너머에서 서서히 움직이고 있는 넝쿨의 집합체···. ‘밤의 악마’를 날카로운 시선으로 응시했다.
“방법이라면···.”
네크로맨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방법이 있다면 환영할 일이겠지만. 지금 그녀는 뭔가 묘하게 좋지 않은 예감을 느끼고 있었다.
“아예 안쪽에서부터 녀석을 공략해버리는 거다. 어차피 저 붉은 기관이 본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추측에 불과할 테니까.”
“응?”
그게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네크로맨서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니까.”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이해한 바가 맞다면, 현우가 꺼내든 방법은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시도해볼 만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다시 저 녀석의 환상 속으로 들어가겠다. 지금 네가 말한 방법이라는 게. 혹시라도 그런 종류의 무식하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방법은 아니겠지?”
“정확해.”
깔끔한 확언.
네크로맨서는 다시 한 번 묻고 싶은 마음에 입이 근질거렸지만. 대신 그냥 질끈 두 눈을 내리감아버렸다.
“···미친.”
미친 것이 분명하다.
대체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미 한 번 환상을 극복했다고 해서. 또 다시 극복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심지어 간접적으로 외신의 힘을 다룰 수 있는 네크로맨서, 그녀조차 겨우 저항에 성공하지 않았던가.
“그럼 이쪽은 부탁한다.”
“부탁이라니?”
“내가 안쪽을 헤집어 놓는 동안, 저 녀석이 가만히 있으리란 보장은 없으니까. 누군가는 여기서 대비를 하는 편이 좋겠지.”
그건 틀린 구석이 없는 말이었지만.
결국, 일방적으로 자신이 생각한 계획을 실행에 옮기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아니, 잠깐···.”
“그럼 간다.”
네크로맨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현우는 바로 페일 라이더의 탑승구에서 몸을 날렸다.
“야!”
직후 뒤통수에서 네크로맨서의 고함이 들렸지만. 그것도 잠시 현우가 낙하하는 속도에 맞춰서 빠르게 멀어졌다.
물론, 이 계획에 한 가지 커다란 결점이 있다는 것쯤은 현우도 알고 있었다. 바로 녀석이 현우에게 반응하지 않는 것.
‘미끼를 물 수 밖에 없을 거다.’
하지만 현우 역시.
녀석이 다시금 환상을 사용할 거라는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정확한 까닭이야 지금은 알지 못하나.
왠지 모르게 녀석은 현우의 신화(神火)에 반응하는 모습을 보였고. 그걸 이용하여 녀석의 환상을 한 번 휘저어 놓기도 했으니.
이렇게 대놓고 들이댄다면, 반드시 다시 반응할 것이다.
그리고···.
그 예측은 정확하게 적중했다.
그그그─
덩굴이 뒤틀리며 다시금 그 안에 숨겨져 있던 붉은 기관을 드러냈다. 곧, 맥동하는 붉은 기관에서 이쪽을 향해 기이한 파장이 뿜어져 나왔다.
그게 무엇인지 안다.
환상 속으로 사람을 끌어들이는 전조 증상. 이번에 현우는 처음부터 그 이질적인 힘에 저항하지 않았다.
“그래, 와라.”
다만 미소를 지었을 뿐.
다시 환상 속으로···.
현우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몸을 던졌다.
***
고오오─
귓가에 바람이 스친다.
아니, 자세히 들어보면 그건 바람 소리가 아니었다. 마치 빨리 감기를 누른 영상처럼. 수많은 소리들이 귓가를 빠른 속도로 스쳐 지나가는 소리였다.
현우는 천천히 눈을 떴다.
방금 경험한 것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 그러나 이미 처음부터 환상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들어왔기 때문일까.
이곳은 무엇 하나 제대로 정형화된 것이 없는 세계였다.
실시간으로 티비의 채널을 빠르게 바꾸는 것처럼. 휙휙, 딛고 있는 지면과 보이는 풍경을 포함한 모든 것들이 고정되지 않고 변화하고 있었다.
‘일단, 제대로 들어오긴 했군.’
환상 속으로···.
생각했던 것보다는 간단했다.
하지만 ‘밤의 악마’를 공략하는 것은 이제부터가 진짜다.
빠르게 뒤바뀌는 주변.
이걸 보고 있자니 조금 어지러워지는 것 같았다. 아니, 그건 착각이 아니었다. 공간의 변화가 그의 정신을 현혹하듯 뒤흔들고 있었다.
“···흠.”
감각이 점점 몽롱해진다.
하지만 현우의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 또렷하게 깨어 있었고. 녀석이 펼치는 환상 따위에 현혹되지 않을 자신 또한 확고했다.
녀석 또한 그걸 모르지 않는 듯.
마구잡이로 뒤바뀌는 주변의 흐름이 훨씬 빨라졌다. 잠깐 정신을 놓으면, 유속이 빠른 강에 몸을 던진 것 마냥. 한 없이 그 흐름 속으로 휩쓸릴게 분명했다.
한 걸음.
현우는 앞으로 나아갔다. 그게 물리적인 이동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다. 다만, 그런 행위를 통해서 조금씩 녀석의 영향력에서 벗어난다는 암시를 스스로에게 줄 뿐이다.
그리고 곧···.
폭포 속으로 몸을 던진 것과 같이.
수많은 종류의 환상들이 현우에게 쉼 없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 모든 것들이 너무 달콤하고 손에 쥐고 싶은 것들이었다.
얼굴도 알지 못하는 부모님이 살아 있는 환상. 혹은, 블랙 가문과 다니엘 블랙을 성공적으로 토벌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 환상 등.
자신이 한 번쯤은 바라고 상상해보았던 모든 가능성들이. 눈앞에서 생생한 현실처럼 점멸했다.
‘환상···.’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자신의 곁을 스쳐가는 환상들이 정말 말 그대로의 환상에 불과한 걸까. 엄밀히 따지면 이건, 생각이라기보다는 아주 작은 의심의 불씨였다.
가능성.
이건 단순히 녀석이 만들어낸 환상이 아니라. 존재하는 수많은 가능성을 재현해 놓은 것은 아닐까.
녀석이 진짜 외신의 편린이라면···.
그것 또한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이미 자신을 아자토스의 편린이라고 밝혔던 그 녀석 역시, 비슷한 결과를 만들어내지 않았던가.
이내 현우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이렇게 수많은 환상 속.
녀석의 진짜 본체가 과연 어디에 숨어 있을 것인가. 자신이 잠식되기 전에 그것을 먼저 찾아내는 거다.
외유내강이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밤의 악마’의 경우는 아예 반대. 그러니까 외강내유라는 말이 어울리겠지. 녀석의 가드가 단단할수록, 그건 그 속의 내용물이 유약하다는 반증이나 다름없다.
적어도 현우는 그렇게 확신했다.
‘그렇다면.’
가능성은 금방 좁혀진다.
사실, 조금만 생각해봐도 그리 어려운 문제는 아니었다. 역지사지의 입장으로 보면, 녀석에게 열려 있는 선택의 폭은 그리 넓지 않았으니까.
달콤한 환상들이 눈앞을 가리고 있기에 그 사실은 더욱 명백했다.
녀석은 가장 발견하기 힘든 곳.
다시 말해서 이 모든 ‘환상’의 주체인 현우의 입장에서. 가장 들어다보고 싶지 않은 곳에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현우는 이미 의념을 통해 이 환상 전체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설령, 환상이 세찬 폭포 줄기처럼 흐르며 변화하고 있을 지라도. 그 사이에서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짚어내는 것이란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거기군.”
이내, 현우는 손을 뻗었고.
스치듯 빠르게 흘러내리던 환상이 일순 정지했다.
곧, 그 너머에서 현우는 예상했던 그대로 가장 보고 싶지 않았던 광경과 마주할 수 있었다.
붉게 물든 하늘.
그리고 타오르는 도시, 서울.
서울 방어전.
그 끔찍한 현장 속으로.
현우는 제 몸과 의식을 밀어 넣었다.
***
한편···.
현실에 남겨진 세 사람은 잠시 할 말을 잃고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하.”
가장 먼저 입을 연 이는 네크로맨서였다.
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이미 저 아래쪽을 향해 작은 점이 되어 사라져가는 현우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용사님이···.”
황망한 표정.
성녀, 아그네스 그레고리오가 중얼거렸다. 미처 말리거나 설득할 새도 없이. 눈앞에서 순식간에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왜, 말리지 않은 겁니까.”
그녀는 네크로맨서를 향해 말했다.
그러나 네크로맨서 역시,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향해 양손을 들어 보일 뿐이었다.
“내가 대체 무슨 수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일단 막고. 차분히 계획을 논의해보았어야 합니다. 이건, 너무 용사님 혼자에게만 위험을 감당하게 하는 겁니다.”
“글쎄···.”
고개를 갸웃하는 네크로맨서.
그녀는 아그네스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었다.
“차라리 이게 나을 지도 몰라.”
“···예?”
“그대로 떨어져 지면에 충돌한다고 해도. 저 녀석은 아마 생채기 하나 없이 무사할 거야.”
그건···.
아주 납득이 가지 않는 정도의 주장은 아니었다. 주현우라면 충분히 가능할 거라 두 사람 또한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으니까.
“거기다가 이미 너희 둘은 저 ‘밤의 악마’가 보여주는 환상에 취약하다는 것이 증명 되었는데. 차라리 여긴 내게 맡기고 혼자 상대하는 편이 저 녀석한테도 유리하겠지.”
아주 조금 돌려 말했지만.
그녀의 말은 아그네스와 류한나, 두 사람이 짐덩어리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쩌억.
차원 쐐기 주변을 휘감고 있던 덩굴이 다시 한 번 벌어지기 시작했다. 녀석이 무언가를 준비한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일단, 우리부터 신경 쓰는 게 좋을 걸.”
그녀의 말대로 벌어진 덩굴의 틈새에서 무언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말을 꺼낸 네크로맨서뿐만 아니라 류한나와 아그네스, 두 사람 또한 그것이 무엇인지. 그리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
“···골렘?”
류한나가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냥 평범한 골렘은 아니었다. 얽히고설킨 덩굴로 이어진 날개를 가지고 있는 목재 골렘들이 열린 틈새에서 차례대로 날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그냥 조무래기들일 뿐이야.”
네크로맨서가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수는 꽤나 많아 보이지만, 저런 수준의 마족이라면 페일 라이더의 포격만으로 어렵지 않게 쓸어버릴 수 있다.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현우가 있을 때의 이야기.
페일 라이더의 운용에는 막대한 양의 마나가 요구된다.
네크로맨서는 모르겠지만, 지금 두 사람의 수준으로는 전체 포격을 고작해야 서너 번 사용하는 것이 한계다.
‘적확한 타이밍을 노려야해.’
류한나는 눈을 얇게 뜨며 골렘 무리와의 거리를 가늠했다.
페일 라이더의 화력은 충분하다.
하지만 이곳에서 녀석들을 단번에 제거하지 못한다면, 흩어져서 매우 귀찮게 변할 지도 모른다.
“그냥 이대로 쭈욱 뒤로 빠지는 방법도 있어. 그럼 괜히 힘을 뺄 필요도 없고. 가장 안전한 방법이기도 하지.”
가벼운 목소리로 말하는 네크로맨서.
류한나는 그녀를 향해 대답 대신 눈썹을 찡그려보였다. 저 아래에 주현우가 있을 텐데. 여기서 물러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농담이야. 농담.”
말은 그런 식으로 했지만, 그대로 진심은 아니었던 건지. 그녀는 이윽고 입을 삐죽 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애초에 걱정할 것도 없기는 해.”
끔찍할 정도로 짙은 사기(死氣)가 그녀를 중심으로 퍼져나왔다. 하지만 다른 것이라면 몰라도 상대는 골렘이다.
어떻게 보면 죽음을 다루는 네크로맨서와 대척점에 서 있는, 영혼 없는 마족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
그러나 네크로맨서는 자신만만한 태도를 고수했다. 이미 그녀에게 있어 생사의 개념은 큰 문제가 아니게 된지 오래였기 때문이었다.
“저 정도는 별거 아니거든.”
이윽고, 검푸른 사기가 일렁이며 거대한 손의 형상을 취했고. 골렘 무리를 그대로 움켜쥐어 터트리기라도 하려는 듯, 활짝 펼쳐지기 시작했다.
‘···의념인가?’
류한나는 놀라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형체로 화한 죽음이.
이들의 눈앞에서 움직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