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s Life After Retirement RAW novel - Chapter 126
126화 큰 그림
진가객잔은 오늘도 한산했다.
워낙 촌마을에 있는 객잔이라 손님도 거의 안 오는데다, 그나마 가뭄에 콩 나듯 찾아오는 손님은 대부분 단골이었다.
객잔 내부를 쓸고 닦던 진노인이 손주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의 얼굴은 밝았다.
“현아. 점심은 오랜만에 어향육사 어떠냐?”
진노인은 최근 들어 웃는 일이 많아졌다.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했던 현이가, 최근 들어 몸 상태가 많이 좋아진 덕분이었다.
‘놀라울 정도로 좋아졌어. 현이가 이렇게 혈색이 좋았던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갑자기 현이의 몸 상태가 왜 좋아졌는지,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
바뀐 약재 덕분인가 싶어서 약방에 약재 값을 넉넉히 쥐어주었는데, 그 이야기를 들은 의원도 신기해할 따름이었다.
“거 참 신기하네요. 평범한 보약인데···.”
“허허. 몸에 맞는 약이 따로 있는 게지. 어쨌든 정말 고맙네. 고마워!”
혈색이 좋아진 현이 때문에 진노인은 요즘 입이 귀에 걸렸다.
자신은 그런 티를 별로 내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남궁현의 눈에는 그 모습이 다 보였다.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현은 괜히 할아버지에게 핀잔을 주었다.
“어향육사요? 그게 얼마짜린데 우리끼리 먹어요. 차라리 만들어서 손님한테 팔지.”
“어차피 손님도 없지 않느냐. 네 어미 패물 판 돈도 들어왔겠다. 우리도 오랜만에 몸보신 좀 하자꾸나.”
“나참. 그러려고 판 패물이 아닐 텐데···.”
현이가 입술을 삐죽였다. 그러나 그 입가에는 미소가 번져가고 있었다. 진노인과 마찬가지였다.
“하하! 너 먹일 영약은 오늘내일 중에 올 테니 걱정하지 말거라.”
“누가 걱정한데요.”
현은 자신의 몸을 내려봤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요 며칠, 아침마다 일어나면 그렇게 몸이 가뿐할 수가 없었다.
‘툭하면 찾아오던 오한이나 발열도 없고, 조금 움직인다고 금방 숨이 가빠지지도 않아.’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전부 당연한 일들이지만 남궁현에게는 놀라운 기적의 연속이었다.
‘건강하다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역시 밤마다 꾸는 꿈하고 관련이 있을까?’
사실 남궁현은 진노인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었다.
며칠 전부터 그녀는 밤마다 꿈을 꾸었다.
아니, 꿈이라기보다는 느낌에 가까운 것이었다.
마치 익숙한 누군가가 등 뒤에서 포근하게 안아주는 것만 같아서, 마냥 웅크리고 어리광을 부리고 싶은 기분.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면 몸이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을 진노인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정확하게 설명하기도 어려웠고, 이러다가 또 몸 상태가 나빠지면 할아버지가 실망할 것 같아서.
그리고···.
‘왠지 말하기가 부끄러워.’
남궁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할아버지. 저 이제 영약 같은 거 안 먹어도 될 것 같아요. 몸도 이제 별로 안 아프고···.”
그러나 진노인은 표정을 굳히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이럴 때만큼은 엄했다.
“그건 안 될 말이다. 이럴 때일수록 더 건강을 챙겨야지.”
“하지만···.”
“현아.”
그의 단호한 표정에 현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할아버지가 누구보다 자신을 위한다는 것을 알기에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알겠어요.”
“슬슬 배가 고프구나.”
“결국은 어향육사가 먹고 싶으시다는 거죠?”
“우리 손주가 해준 어향육사면 더 맛있게 먹을 수 있겠는걸.”
두 사람은 함께 식사를 준비했다.
현이 큼직한 솥 두개에 각각 소면을 삶고, 돼지고기를 볶았다. 다른 한쪽에서는 진노인이 능숙한 손놀림으로 야채를 다듬었다.
탁탁탁. 화르륵. 치이익-!
요리가 완성됨에 따라 맛있는 냄새가 객잔 바깥까지 솔솔 퍼져나갔다.
“그럼 먹어볼까.”
그들이 탁자 하나를 닦고 그 위에 완성된 요리를 올려놓기 시작할 때였다.
드르륵.
객잔의 유일한 투숙객이 방문을 열고 나왔다.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면서 말이다.
“흐아암-. 좋은 아침입니다.”
대인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걸어왔다. 그는 의자하나를 가져와 두 사람이 앉은 탁자 사이에 태연하게 끼어 앉았다.
“오. 어향육사네? 으음···.”
대인이 눈곱을 떼더니 젓가락으로 고기를 집어 날름 먹고는 감탄했다.
“크으. 맛있네. 현아. 죽엽청 한 병만.”
마침 자리에 앉으려던 현은 대인을 흘겨보더니 죽엽청 세 병을 들고 왔다. 각자 한 병이었다.
“형은 어떻게 밥 때만 되면 귀신같이 방 밖으로 나와요?”
대인은 코를 킁킁대며 말했다.
“네 할아버지가 만든 음식냄새가 워낙 좋아야지.”
“오늘은 제가 만든 거예요.”
“정말? 너도 제법이구나. 나중에 장가가면 마누라한테 사랑받겠어.”
“형은 게을러서 장가가면 마누라 엄청 고생시킬 것 같아요.”
며칠 새 꽤 친해진 두 사람이었다. 두 쌍의 젓가락이 같은 먹이를 노리는 두 마리의 매처럼 휙휙 움직였다.
“앗! 그건 나중에 먹으려고 골라둔 건데!”
대인이 얄밉게 고기를 우물거리며 말했다.
“전에 어떤 꼬맹이도 비슷한 말을 했었지. 그래서 내가 나중은 없다고, 맛있는 건 빨리 안 먹으면 다른 놈이 먹어버리는 게 인생이라는 걸 가르쳐줬어. 그 후로는 절대 같은 실수는 하지 않더군.”
“이상한 말로 멋있는 척하지 마요!”
“···꼬맹이는 사고 안치고 학교 잘 다니고 있으려나.”
진노인은 그런 광경마저 그저 흐뭇하게 바라보며 웃었다.
평범한 일상처럼, 세 사람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며 함께 식사를 했다.
활짝 열어 놓은 문과 창문으로 오후의 햇살이 비쳐들었다. 선선한 바람이 기분 좋게 머리카락을 스쳐갔다.
‘오늘도 어김없이 평화로운 하루네.’
대인은 몸도 마음도 절로 게을러지는 이곳 생활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오가는 사람도 거의 없고, 공기는 깨끗하고, 무엇보다 진노인과 현이의 요리솜씨는 절정고수 그 이상이었다.
세 사람은 객잔에 머문 며칠 동안 상당히 친해져서, 이제 사적인 이야기도 어느 정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그나저나 자네. 수련은 안하는 건가?”
“예? 수련이요?”
대인은 그게 새로운 음식메뉴냐는 듯한 표정으로 진노인을 바라봤다.
그 순간 진노인은 물론이고 남궁현도 혀를 찼다.
‘허어. 이 친구. 성격은 참 괜찮은데···.’
진노인은 아깝다는 표정으로 대인을 바라봤다.
그가 보기에 대인은 무림인치고는 너무 게을렀다. 자신만 해도 새벽같이 일어나서 운기행공을 하고, 뒷마당에 나가서 몸을 단련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런데 대인은 운기행공은커녕 뛰는 모습 한번을 본적이 없었다.
‘한 눈에 봐도 근골은 정말 좋은데···. 성실하게 수련만 해도 일류이상의 무인이 될 수 있을 텐데 말이야.’
진노인이 판단한 대인이 무공수위는 기껏해야 이류 수준이었다. 아마 검기도 발출하지 못할 것이다.
안타까운 마음에, 진노인은 평소라면 안할 잔소리를 했다.
“자네 근골은 보기 드물게 뛰어난 편이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열심히 수련하면 좋은 성과가 있을 게야.”
대인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젓가락은 쉬지 않고 움직였다.
“글쎄요. 무공수련은 지금도 충분히 하는 것 같은데.”
“···무공수련에 충분히는 없다네.”
진노인이 드물게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은 정체를 숨기고 있다지만, 그 또한 절정고수에 이른 무인이었다. 무공을 대하는 태도가 진지할 수밖에 없었다.
“설령 초절정의 경지에 이르러 강기를 마음대로 내뿜을 수 있는 수준에 이르러도, 초식에 구애받지 않는 수준이라도 말이네. 그런 고수들도 머릿속으로는 쉬지 않고 심상훈련을 한다네. 하물며 자네 같은 이류···. 미안하네. 아직 젊은 무인들은 시간을 아껴가며 단련을 해야 해. 강호는 험난한 곳이야. 실력이 부족하면 언제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르는···.”
한참 열변을 토하던 진노인은 갑자기 민망한 듯 시선을 젓가락으로 향했다.
“크흠. 객잔이나 하는 노인네 주제에 주책을 떨었군. 미안하네.”
“다 맞는 말씀인데요 뭐.”
대인은 죽엽청을 자신의 잔에 따라 쭉 들이켰다. 여전히 태평한 모습에 진노인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어쨌든 내 말 흘려듣지 말게. 한때 무공 교두로 많은 젊은이를 가르쳐본 입장에서, 자네가 가진 자질이 아까워서 하는 말이니.”
그 순간, 진노인은 처음으로 대인의 진지한 눈빛을 보았다.
“방금 뭐라고요?”
“자네 자질이 아까워서···.”
“그게 아니라 그 전에. 예전에 무공교두셨다고요?”
진노인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신이 무슨 말실수를 했는지 되새기며 말했다.
“그랬지. 작은 무관이긴 했지만···.”
15년 전의 검황문은 쇠락하는 시기였지만, 결코 작은 무관은 아니었다.
‘당시에도 적어도 백대문파 안에는 들어가는 규모였지.’
진노인에겐 자부심이 있었다. 그는 수백 명 이상의 무사를 가르쳤던 무공교두였다.
비록 지금은 이렇게 거짓말을 해야 하지만···.
“···촌의 작은 무관이었네. 스무 명 정도 되는 아이들을 가르쳤었지.”
“그래요? 흐음···.”
물론 대인은 그의 거짓말에 숨겨진 진실을 알고 있었다.
‘검황문 출신 무공교두라. 길드 무공 선생님으로 데려갈까?’
“흐음···.”
대인은 눈을 가늘게 뜨고 진노인을 바라봤다. 그건 뭐랄까, 먹이를 노리는 매의 눈빛과 흡사했다.
“…왜 그렇게 날 보나?”
대인이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경력직으로 재취업할 생각 없으세요?”
“으음?”
대인은 본격적으로 찔러보기 시작했다.
“저희 백가검문에서 능력 있는 무공교두를 구하고 있거든요. 업계최고대우, 가족 같은 분위기, 정년퇴직도 없고, 4대 보험은 물론이고 자녀의 대학교육까지 책임지는···.”
그러나 진노인은 그 말을 다 듣기도 전에 고개를 저었다.
“뜻은 고맙지만 거절해야겠네. 이미 은퇴한지 오래된 몸이야. 실력도 다 녹슬었고···. 더 이상 그런 일을 할 만한 몸이 안 되네.”
‘거짓말.’
대인은 진노인의 말이 거짓말이라고 확신했다.
진노인은 매일 새벽, 저녁, 그리고 시간이 날 때마다 수련을 하고 있었다. 일흔에 가까운 나이인데도 단단한 근육과 손의 굳은살이 그것을 증명했다.
진노인이 사람 좋게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우린 며칠 내로 객잔을 정리하고 이사 갈 거라네. 저번에도 얘기했지만···. 자네도 이제 다른 객잔을 알아보게나.”
진노인은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오늘 내일 중으로 영약을 가진 상단이 도시에서 읍내로 올 것이다. 그걸 복용한 후, 두 사람은 혹시 모를 추격자들을 피해 새로운 은신처를 찾아 떠날 계획이었다.
대인도 자세히 묻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도 슬슬 다른 도시로 가야겠네요.”
“어디로 갈지는 정해뒀고?”
“네. 찾고 있던 물건이 어디 있는지 알아냈거든요.”
“그것 참 다행이로군.”
대인도 며칠 동안 한량처럼 놀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창천신검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해 여기저기 정보를 알아보러 다녔다.
그리고 생각보다 너무 쉽게 그 위치를 알아낼 수 있었다.
무림맹.
창천신검은 지금 무림맹에 보관 돼 있다고 했다.
‘문제는 그걸 어떻게 빼내느냐는 건데···.’
어디 있는지 위치를 알아내는데 오래 걸릴 거라는 예상과 달리, 위치는 금세 알아냈다.
그러나 문제는 무림맹에 보관 돼 있을 창천신검을 어떻게 빼내느냐는 것이었다.
‘잘못 건드렸다가는 뼈도 못 추릴 거란 말이지.’
철통같은 감시에, 곳곳에 숨어 있을 고수들에, 뭐가 나올지 모르는 기문진까지.
무림맹에 잠입하는 건 대인이라도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위험한 일이었다.
그리고 대인은 무공 때문에 목숨까지 걸고 싶지는 않았다.
‘뭔가 다른 방법이 있을 것 같은데···.’
최근 며칠은 그 방법을 궁리하는 시간이었다.
덕분에 지금은 대강의 큰 그림은 그렸다.
대인이 진노인의 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오늘이 어르신과 마시는 마지막 술이 될 수도 있겠네요.”
“허허. 그럴 수도 있겠군. 며칠 동안 술 친구해줘서 고마웠네.”
객잔 안으로 새로운 손님이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어이쿠. 맛있는 냄새가 나서 들어왔더니 벌써 한잔들 하시고 계시네.”
중년의 사내는 사냥꾼이었다.
가무잡잡한 피부에 두툼한 가죽옷. 등에는 활을 맸고, 허리춤에는 용도가 다른 칼을 다섯 자루나 차고 있었다.
그는 왼쪽 눈에 안대를 한 애꾸눈에, 걸을 때 발을 조금씩 저는 절름발이였다.
사내가 어깨에 둘러메고 온 노루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어르신. 이거 해체 좀 부탁드립니다.”
“자네도 참. 정육점 왕씨한테 가져가지 이걸 나한테 들고 오면 어쩌나?”
진노인은 투덜거리면서도 노루를 주방으로 옮겼다. 사냥꾼은 자연스럽게 의자하나를 끌고 와 탁자에 끼어 앉으며 말했다.
“왕씨 그 양반. 솔직히 실력이 형편없습니다. 어르신이 훨씬 낫지요. 고기도 좀 같이 구워 먹고요. 임소협. 자네는 객잔 밖에는 안 나가나?”
“주로 오후에 나가서 밤에 들어오는 편이라서요”
대인도 사냥꾼과 아는 체를 했다. 객잔에 머무르는 며칠 동안 알게 된, 몇 안 되는 얼굴이었다.
“양대협은 오늘은 일찍 오셨네요?”
양대협이라 불린 사냥꾼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클클 웃었다.
“대협은 무슨. 병신이 돼서 고향으로 돌아온 놈이.”
사내의 이름은 양춘삼이었다.
그는 이 마을에서 진노인과 가장 절친한 양노인의 조카로, 30년 전 돌림병이 돌았을 때 부모를 다 잃었다.
그 후 무림인이 되겠다고 마을을 뛰쳐나갔다가, 몇 달 전에야 고향으로 돌아온 사연 많은 사내였다.
진노인이 금방 노루 해체를 마치고 고기를 썰어와 구웠다.
치이익···.
고기 굽는 냄새가 객잔 바깥까지 진동했다.
노루고기를 안주 삼아, 객잔 안에서는 술판이 벌어졌다.
세 사내는 금방 분위기에 취했다.
“크하하! 내가 지금은 비록 병신이지만, 한때 하남의 섬전도하면 기녀들이 껌뻑 죽었다니까! 앵앵이 그년은 글쎄 나랑 야반도주를 하자고···.”
술이 들어가자 양춘삼이 과거의 무용담을 늘어놓았다. 죽엽청을 거의 병째로 들이부으면서도 그는 취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그 새하얀 젖가슴이 말이다. 보들보들~한 것이 천상의 감촉이 따로 없어요. 그 아래 계곡은 또 얼마나 무성한지···.”
“······.”
이야기를 듣는 남궁현의 얼굴이 점점 붉게 물들었다. 그 모습을 본 양춘삼이 짓궂게 웃었다.
“이 녀석 보게. 사내자식이 이런 얘기에 얼굴이나 붉히고···. 어디 고추도 커졌는지 볼까?”
양춘삼이 바지사이로 손을 뻗으려 하자 남궁현이 질겁하며 손을 쳐냈다.
“하지 마세요!”
그리고는 잽싸게 일어나 주방으로 달려가 버렸다. 양춘삼이 그 모습을 보고 자지러지게 웃었다.
“크하하하! 저놈 바지가 불룩해졌다는데 내 전낭을 걸지!”
진노인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남궁현에게 남자 옷을 입히고, 남자처럼 키운 것은 그였다.
“적당히 하게. 아직 어린 아이가 아닌가.”
양춘삼은 한참을 더 낄낄거리더니 겨우 웃음을 멈췄다.
“크흐흡···. 아, 예. 크흐흐!”
양춘삼은 짓궂기는 해도 나쁜 사내는 아니었다.
대인이 오기 전에는 진노인의 유일한 술동무였고, 비교적 최근의 무림소식을 전해주기도 했다.
‘조금 상스러운 면이 있기는 해도, 거친 무림을 겪다보면 이 정도는 양반이지.’
그때 대인이 양춘삼에게 물었다.
“양대협. 하남에서 활동하셨으면 무림맹에도 아는 사람이 좀 있으세요?”
“무림맹? 그야 없지는 않은데···. 그건 왜?”
대인이 능글맞게 웃으며 양춘삼의 잔에 술을 가득 채웠다.
“무림맹에 갈 일이 있어서요. 맹에 아는 분이 계시면 소개장을 좀 써주실 수 있을까 해서···. 부탁 좀 드려도 될까요?”
“그, 뭐, 소개장 정도야···.”
갑자기 양삼춘이 자신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본 진노인은 웃음을 꾹 참았다.
‘이런 시골이라서 허풍을 떤 것이지. 양춘삼은 아마 무림맹에 들어가 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과연 양춘삼이 곤란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기 시작했다.
“···하하. 동생이 원한다면 당연히 써줘야지. 그런데 그 친구들이 아직 무림맹에 있을지 모르겠는데···. 내가 하남을 떠난 지 꽤 오래 돼서 말이야···.”
대인도 눈치껏 부탁을 취소했다.
“생각해보니 무리한 부탁을 드리는 게 예의가 아니네요. 못 들은 걸로 해주세요.”
“아니 뭐 무리라기보다는···. 하하하! 동생 잔이 비었네. 일단 한잔 받으라고!”
세 사내는 주거니 받거니 노루고기를 안주삼아 술잔을 비웠다.
그들은 퍽 친하게 어울렸다. 성격도, 나이대도, 목적도 다르지만, 심심한 촌마을에서 술잔을 나누며 금세 친해졌다.
객잔으로 또 다른 손님이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진가야!”
비명처럼 소리를 지르며 들어온 사람은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다.
“양형. 무슨 일이오?”
“으음? 숙부님?”
진노인과 양춘삼이 동시에 돌아보며 말했다. 얼굴이 사색이 된 노인은, 마을에서 진노인과 가장 절친한 양노인이었다.
“지금 난리가 났다! 산적 놈들이 읍내로 오던 상단을 털었어!”
그 말에 진노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 순간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하나였다.
“우리 현이한테 줄 영약은?”
양노인이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치며 말했다.
“이 놈아 지금 영약이 문제냐! 상단에 싣고 오던 물건이 몽땅 털렸단 말이다! 사람도 죽었어!”
그리고 양노인이 한숨을 쉬며 작게 말을 이었다.
“이번에 오는 상단에 비싼 영약이 들어있다는 것을, 놈들이 어떻게 알아 낸 모양이다.”
“······.”
진노인의 표정이 굳었다. 덩달아 양춘삼의 표정도 굳었다. 대인만 눈치 없이 남은 술을 홀짝이고 있었다.
사냥꾼이라서 주변 산세에 환한 양춘삼이 말했다.
“그쪽 길이면 팔룡채 놈들 짓일 겁니다. 얼마 전에 두목이 바뀌었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아마 그것 때문에···.”
“놈들 숫자는? 본거지가 어딘지 알고 있나?”
“대충 50명쯤 될 겁니다. 산채는 동굴인데, 저도 그 근처까지만 가봐서···.”
‘50명이라면.’
절정고수라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숫자였다. 녹림십팔채도 아닌 바에야, 그 안에 대단한 고수가 있을 리도 없었다.
진노인은 생각했다.
‘그게 어떻게 찾은 영약인데 빼앗긴단 말인가.’
때로는 돈이 있어도 못 구하는 게 영약이다. 게다가 이런 촌에서는 더더욱 구하기 힘들다.
정말 어렵게 수소문해서 구한 영약이었고, 현이 어미가 남긴 마지막 패물까지 헐값에 팔아서 산 것이다.
‘고작 산적 따위가 그 영약을 먹게 할 수는 없다.’
시간이 없었다. 빨리 가지 않으면, 영약이 그 가치도 모르는 도적놈의 뱃속에 들어갈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놈 그 배를 갈라서라도 영약을 꺼내 올 것이야.’
결심을 한 진노인이 주방으로 가서 검을 챙겼다. 그는 낡은 검을 검집채 등에 비껴 멨다.
“내가 갔다 오지.”
“어르신!”
양춘삼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술이 꽤 들어갔기 때문인지, 그는 산적들의 행위에 분기탱천한 것처럼 보였다. 그가 칼을 뽑아들며 외쳤다.
“저도 가겠습니다! 이 섬전도 양춘삼! 도적놈들을 베고 강호의 정의가 아직 살아있음을 증명하겠습니다!”
진노인이 영 못미더운 표정으로 말했다.
“자네는 놈들 산채 근처까지만 나를 안내해주게. 그리고 다시 돌아오는 게···.”
“예! 등 뒤는 저한테 맡겨주십시오!”
“······.”
길잡이가 필요해서라도 양춘삼은 일단 같이 가야 했다. 진노인은 얕게 한숨을 쉬며 대인을 바라봤다.
“혹시 자네도···.”
대인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저는 안 갈래요. 술을 마셨더니 좀 피곤해서.”
“···잘 생각했네. 자네는 이곳에 있는 게 낫겠어.”
처음부터 안 따라오길 바랐지만, 대인이 말을 그렇게 하자 다소 실망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실망할 것도 없지. 어차피 이류무사 정도의 실력으로는 큰 도움도 안 될 테니.’
진노인은 남궁현을 불렀다.
“현아. 할애비 금방 갔다 오마.”
“꼭 가셔야 해요? 저 영약 안 먹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
남궁현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할아버지를 올려봤다. 진노인이 푸근하게 웃으며 전음을 보냈다.
[이 할애비가 누군지 잊은 게냐? 그깟 산적 오십이 아니라 오백이 와도 끄떡없다. 걱정할 것 없다.] [저도 같이 갈까요?]진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남궁현의 체력으로 산을 타기에는 무리였다. 1:1대결이라면 웬만한 일류고수도 이길 수 있는 남궁현이지만, 체력소모가 심한 싸움은 무리였다.
[여기 있는 게 더 안전할 거다. 금방 다녀오마.]그리고 진노인은 양노인, 양춘삼과 함께 객잔을 나섰다.
“할아버지···.”
남궁현은 객잔 문 앞에서 서성이며 할아버지가 사라진 방향을 계속 바라봤다.
그때 대인이 남궁현을 불렀다.
“정신 사나우니까 이리 와서 앉아. 파리 들어오니까 문도 좀 닫고.”
쾅!
문을 닫은 남궁현이 성큼성큼 걸어와 대인과 마주 앉았다.
“형이야 우리 할아버지가 어찌되던 걱정하나 없겠죠. 하지만 전 하나뿐인 가족이라고요. 어떻게 걱정을 안 해요?”
“뭐가 걱정이야? 너희 할아버지 세잖아.”
“그야 엄청 세···. 형이 그걸 어떻게 알아요?”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 남궁현에게, 대인은 피식 웃어 주었다.
“딱 보면 알지.”
대인은 남은 술을 다 비우며 주위를 슥 둘러봤다.
텅 빈 객잔 안에는 두 사람 뿐이었다.
객잔은 마을에서도 외곽에 있었고, 손님은 거의 없었다.
양춘삼은 무공을 숨기고 있었고,
양노인은 독에 중독 돼 있었다.
손녀 사랑이 지극한 진노인은 남궁현을 산적 소굴로 데려갈 리 없었다.
‘그리고 이틀 전부터 낯선 기척들이 느껴졌지.’
그들은 절정고수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먼 거리에서 진가객잔을 감시했지만, 설마 그 이상의 고수가 객잔에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쯧. 이거 봐 이거 봐.”
대인이 주위를 둘러보며 혀를 찼다.
“주인이 자리를 비우니까 금세 파리가 꼬이잖아.”
대인은 들고 있던 젓가락 중 하나를 손목 스냅만으로 가볍게 던졌다.
휘익!
젓가락이 총알처럼 날아가 벽에 틀어박혔다.
“커헉!”
젓가락이 꽂힌 벽의 구멍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걸 본 남궁현이 비명을 질렀다.
“꺄악!”
동시에 객잔의 벽과 천장이 와장창! 부서지며 복면인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점소이를 잡아!”
대인은 남은 젓가락 하나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남궁현을 등 뒤로 오게 하고, 젓가락을 볼펜처럼 빙글빙글 돌렸다.
“그럼 미래의 우리 무공선생님에게 은혜를 입혀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