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s Life After Retirement RAW novel - Chapter 145
145화 마즈다의 화신
시간을 조금 되돌려 며칠 전,
릴리는 잔뜩 신이 난 얼굴로 통신기를 만지작거렸다.
“도착해서 아저씨한테 전화하면 깜짝 놀라겠지?”
“아마 당장 지구로 돌아가라고 할걸?”
옆에 있던 아브락사스의 대답에 릴리의 표정이 금세 시무룩해졌다.
“그건 싫은데···. 나도 무림이라는 곳 여행하고 싶은데.”
“나도 그래. 임대인 혼자서 차원여행을 독점하는 건 좀 치사하지.”
“맞아! 치사해! 그러니까 아스가 잘 말해줘. 셋이서 같이 여행하자.”
아브락사스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맺혔다.
“그래서 일부러 귀환 장치를 안 챙긴 거야. 대인을 만나기 전까지 우리 둘이서는 지구로 돌아올 수 없게.”
릴리는 존경스럽다는 눈빛으로 아브락사스를 올려봤다.
“아스는 역시 천재 드래곤이야.”
“그걸 이제야 알았어?”
“예전부터 알았는데 한 번 더 알았어!”
“정말? 우리 릴리 똑똑하네.”
아브락사스는 릴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두 사람은 무림으로 가는 게이트를 통과하는 중이었다.
마력으로 이루어진 새하얀 길.
키리에게 듣기로는 쭉 걷다 보면 어느 순간 출구가 나타날 거라는데, 차원마다 출구가 나타나는 시간은 천차만별이라고 했다.
‘무림이라는 차원은 어떤 곳일까?’
호기심 빼면 시체인 드래곤은 설레는 마음으로 걸음을 옮겼다. 옆에서는 릴리가 말랑이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말랑아. 너두 아저씨 다시 만날 생각하니까 신나지?”
캬아아!
말랑이는 릴리의 가방에 몸을 넣은 채, 고개를 내밀어 릴리의 뺨에 얼굴을 부볐다.
“아하하! 간지러워!”
그때였다. 아브락사스는 갑작스러운 마력의 변화를 느꼈다.
치직, 치지직-!
일정했던 게이트 내부의 마력 패턴이 일그러지고, 그 일부가 릴리에게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화르르륵!
릴리의 몸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아앗!”
깜짝 놀란 릴리가 놀라서 불꽃을 끄려 했지만 불은 쉽게 꺼지지 않았다.
피부나 옷이 타지는 않았지만, 불꽃은 소녀의 몸을 얇은 막처럼 감쌌다.
치지지지직-!
주변의 마력이 점점 일그러지고 있었다. 일직선이었던 길이 구불구불하게 변하고, 하얗던 주변이 붉게 물들었다.
릴리가 겁먹은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
“아, 아스. 이거 왜 이래?”
“이건···.”
아브락사스는 자신의 마법 지식을 총동원해서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저쪽 차원에서 자석 효과가 발생해 너한테 영향을 미친 것 같아. 그렇다곤 해도, 이건 너무 강한, 데···. 어라···?”
아브락사스는 자신의 팔을 내려 보았다.
몸이 무거웠다. 팔다리에 쇳덩이를 매단 것처럼 잘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영혼이···. 인형에서 분리되고 있어.’
지금까지 그녀의 영혼이 머물러 있던 엘프 인형에서 혼이 분리되고 있었다.
게이트 내부의 마력이 불안정하게 요동치면서 빙의 마법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마치 강한 열에 접착제가 녹아내리는 것처럼.
‘지금 지구로 돌아가기엔···. 늦었어.’
자석 효과가 발생해 두 사람을 무림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길이 스스로 움직이면서 시시각각으로 주변의 광경이 휙휙 변했다.
“릴리···.”
아브락사스는 힘겹게 릴리를 불렀다.
그녀의 영혼이 인형에서 완전히 분리되기까지 시간이 얼마 없었다.
“출구에···. 아마···. 강력한···. 마력반응이··· 있을, 거, 야.”
“아스? 아스? 왜 그래?!”
“도착하면···. 너 혼자겠지만···. 당황하지···. 말고···. 침착···. 하게···. 행동해···.”
소녀의 눈동자에 두려움이 깃들었다.
“나 혼자? 아스는? 같이 안 가?”
“기다리면, 내가, 금방, 방법을···. 찾을, 테니, 까···.”
“아스! 아스!”
“걱정···. 마. 난, 네 옆에, 있을, 테니까···.”
거기까지였다.
털썩.
아브락사스의 몸이 바닥에 무너지고, 불꽃에 휩싸인 릴리는 그대로 무림으로 빨려 들어갔다.
“아스으-!!”
릴리의 외침이 길게 메아리쳤다.
***
화르르륵!
하늘 높이 쌓은 제단 위에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성화(聖火)
천마신교가 이 땅에 세워진 후, 500년간 단 한 번도 꺼뜨리지 않은 신성한 불.
성화는 천마신교의 본단, 그 안에서도 가장 중심부에 위치한 대신전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화르르르륵!
오늘은 특별한 날이었기에, 대신전의 모든 문과 지붕까지 개방했다.
신전의 내부에는 천마신교의 수뇌 수백이 들어와 있었고, 바깥으로는 수만 명이 넘는 인원이 신전을 향해 무릎을 꿇은 채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마즈다시여···.”
활활 타오르는 성화의 바로 아래.
제단의 가장 위쪽 계단에, 천마신교의 교주 천무한이 치렁치렁한 제사복을 입고 제사를 주관하고 있었다.
천마신교의 교주이자 당대에 천마의 칭호를 잇는 자.
그는 창백할 정도로 새하얀 피부와 붉은색에 가까운 갈색 머리카락을 지닌 사내였다.
쿵.
천무한이 제단 앞에 무릎을 꿇자, 그 뒤로 신전 안에 도열해 있던 수백의 무인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쿵쿵쿵쿵쿵쿵!
신전이 흔들리고 성화에서 불티가 크게 튀었다. 짧은 기도를 마친 천무한은 예정대로 의식을 진행했다.
“염소를 가져오라.”
음메에~!
제물로 준비된 염소들은 불꽃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몸을 뒤틀며 고통스럽게 울어댔다.
그러나 천무한은 아랑곳 않고 염소를 성화에 집어 던졌다.
화르르르륵!
염소를 집어삼킨 불꽃이 일순간 크게 피어올랐다. 성화는 요사스러운 뱀처럼 불꽃의 혀를 날름거렸다.
마치 아직 배가 고프다는 듯.
그 뜻을 읽은 천무한이 옆에 있는 무녀에게 말했다.
“이교도를 데려오라.”
잠시 후, 천마신교의 무사들이 얼굴이 사색이 된 사내 한 명을 포박해서 데려왔다.
“빌어먹을! 놔라! 이것 놓으란 말이다!”
격렬히 저항하는 사내는 천마신교에 침입한 무림맹의 첩자였다.
자신의 실력을 과신해 교의 중심부까지 숨어들었으나, 결국 잡혀 인신 공양의 제물로 바쳐지게 되었다.
“크악! 날 죽이더라도 이런 식은 아니다! 차라리 내 목을 베라! 무인답게 심장을 찌르란 말이다! 마교의 신에게 바쳐지는 제물이라니···! 내 혼을 더럽히지 마라!”
첩자는 제법 대가 센 사내였다. 그러나 교주는 무심하게 그의 혈도를 짚어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마즈다께서 너를 정화하실 것이다.”
그리고 사내를 성화 안으로 집어 던졌다.
“끄아아아악!”
화르르르르륵!
사내는 산 채로 불타올랐고, 인신 공양을 받은 성화는 크게 부풀어 올랐다.
그 모습을 무심하게 바라본 교주가 다시 말했다.
“이교도를 더 데려와라.”
포박된 무림맹의 무사들이 줄줄이 끌려왔다. 그들은 비명을 지르고, 저주하고, 혹은 살려달라고 빌었다.
교주는 그들 모두에게 평등한 판결을 내렸다.
화르르르르륵!
화르르르르륵!
성화는 살아있는 인간을 집어삼킬 때마다 크게 부풀었다가 잦아들었다. 그 모습이 마치 불꽃이 춤을 추는 듯했다.
“아버님. 포로들을 전부 그렇게 불태워 버리면···.”
교주의 뒤편에 무릎을 꿇고 있던 청년이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천무한은 엄한 표정으로 청년을 돌아보았다.
“의식을 치르는 중이다. 교주님이라 불러라.”
“···교주님. 포로들을 전부 제물로 바치시면, 무림맹과의 관계가 더욱 악화될까 걱정입니다.”
순간 천무한의 입가에 비웃음이 맺혔다.
“더 이상 악화될 관계가 남아있다고 생각하느냐? 놈들은 전쟁을 원한다. 그리고 나 역시 그렇다.”
“······.”
소교주 천무진은 무심한 듯 보이는 아버지의 눈동자 속에서, 맹렬히 타오르는 불꽃을 보았다.
그것은 저 성화의 불꽃보다도 더 뜨거웠다.
적을 모조리 불사르고, 자기 자신마저 태워버릴 광기의 불꽃.
“오늘 마즈다의 뜻을 받아 출병일을 잡을 것이다.”
‘결국 의미 없이 무수히 많은 피만 흐를 겁니다···.’
천무진은 차마 마음속에 있는 반대의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그랬다간 자신도 저 성화 안에 집어 던져질 것 같았으니까.
천마신교는 무력집단이기 이전에 종교단체였다.
그들은 이 땅에 정착한 500년 전부터 지금까지 교리를 지켰다. 세월이 흐르며 더해지거나 바뀐 것은 있지만, 그 근본은 바뀌지 않았다.
유일신 마즈다를 믿고,
그의 상징인 불을 숭배하며,
언젠가 자신들을 선조들의 고향이자 낙원으로 데려갈 구원자를 기다린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성화에 산 제물을 바쳐서 신탁을 받는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너도 그리 알고 준비하거라.”
한 치의 반론도 용납하지 않는 눈빛으로 아들을 일별한 교주가 다시 성화를 향해 몸을 돌렸다.
“마즈다 카로다···.”
교주의 입에서 무림의 언어가 아닌 언어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500년 전, 초대 천마께서 동포들을 이끌고 이 땅에 정착했을 때 가져온 경전.
그들의 경전에 적힌 기도문은 무림의 언어와는 전혀 다른 언어로 돼 있었다.
그들의 뿌리가 무림이 아니라는 증거였다.
“마즈다카로다루루고라밀다천누미로···.”
“마즈다카로다루루고라밀다천누미로···.”
교주가 경전에 있는 기도문을 외우기 시작하자, 그 뒤로 부복한 무인들도 내공을 담아 경전을 외우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수백이 넘는 무인이 내공을 실어 구절을 외우자 그 소리가 공명하기 시작했다.
곧 신전 바깥에 있는 신도들도 따라서 경전을 외웠다.
“마즈다카로다루루고라밀다천누미로···.”
“마즈다카로다루루고라밀다천누미로···.”
“마즈다카로다루루고라밀다천누미로···.”
우우우우우웅!
우우우우우웅!
수만 명이 함께 경전을 외우자, 대지가 진동하고 공기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일정한 운율로 반복해 경전을 외우면서, 교도들은 일종의 정신적 합일 상태에 이르렀다.
“아아···!”
그들은 그 순간이 유일신 마즈다와 접속한 상태라고 믿었다.
“아아아아···!!”
놀랍고도 아찔한 감각에 눈물을 흘리는 자, 마즈다를 부르짖는 자, 바닥에 머리를 찧는 자, 혼절하는 자가 속출했다.
“오오오오!”
“마즈다시여!”
우우우우우우우웅!!!
그 집단적 광기에 공명하듯, 성화의 불꽃도 더더욱 사납게 날뛰기 시작했다.
화르르르르륵!
500년 동안 꺼뜨리지 않고, 사람들이 숭배해 온 불은 스스로 영성을 지니게 되었다.
“···사바라다-야스!”
“···사바라다-야스!”
“···사바라다-야스!”
특별한 불꽃인 성화는 지구에서 무림으로 넘어오고 있던 릴리를 자석처럼 끌어당겼다.
잠시 후 성화 내부에서 게이트가 열렸고,
지이이이이이잉!
동시에 성화에서 치솟은 불길이 땅에서 솟구친 벼락처럼 하늘을 꿰뚫었다.
푸화아아아아아악!
어마어마한 불길이었다. 천지가 둘로 찢어지는 것이 아닌가 싶은 광경이었다.
벌떡!
절대고수인 천무한마저 자리에서 일어나 뒷걸음질 쳤다.
“!!”
그는 경악한 얼굴로 하늘과 땅을 하나로 연결한 불기둥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처절하게 신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마즈다시여!!”
교주는 이 폭발적인 불꽃이, 마즈다 신의 축복이자 계시라고 믿었다.
‘정파의 위선자들을 토벌하고 그 풍요로운 땅을 차지하라는 계시로다!’
결심을 굳힌 천마교주의 쩌렁쩌렁한 사자후가 신전을 넘어 교 전체로 퍼져나갔다.
그는 예정보다 빠르게 정마대전을 일으키기로 결심했다.
“마즈다께서 응답하셨다! 당장 전쟁을 준비하라! 그분께서 우리의 승리를···. 헉!”
갑자기 터져 나온 외마디 비명.
장로들과 교의 수뇌들, 그리고 교도들은 놀란 얼굴로 교주를 바라보았다.
동시에 교주의 호위무사들은 무기의 손잡이를 꽉 쥐었다.
세상에 천마를 저리 놀라게 할 일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리고 잠시 후, 그들도 똑같은 비명을 질렀다.
“허억!”
“저, 저것은···.”
하늘 위, 불기둥이 된 성화를 뚫고 날아오는 존재가 보였다.
화르르르륵!
타오르는 불꽃을 머금은 듯, 선명한 진홍색 머리카락과 눈동자.
무림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 독특한 의복에, 피부 위로 성화의 불길이 자연스럽게 넘실거리는 모습.
형상은 고작 작은 여자아이에 불과했지만, 그녀가 품고 있는 신비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사방에서 교도들이 중얼거렸다.
“서, 설마···.”
“마즈다의 화신···.”
“직접 강림하신 것인가···.”
모두가 혼란스러워하던 그때, 소녀는 자신의 발아래에 무릎 꿇고 있는 인간들을 둘러보며 외쳤다.
“아스! 아스-!!”
“!!”
그 순간 사람들은 벼락을 맞은 것처럼 큰 충격을 받았다.
‘야스!’
야스는 그들의 경전에 적혀 있는 말로, 해석하면 ‘경배하라.’라는 뜻이었다.
화르르르륵!
성화가 서서히 잦아들며 너울너울 춤을 추었다. 불꽃은 소녀를 보호하듯 등 뒤에서 날개처럼 그녀를 감쌌다.
그것은 신의 힘이 아니면 설명될 수 없는,
기적이었다.
“오오오오···!”
마즈다의 화신을 맞이한 교도들은 그 감격을 주체할 수 없었다. 다들 오체투지하며 신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마즈다시여-!!””
경외심과 두려움에 눈물과 침이 줄줄 흘렀다.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신앙심이 깊은 자들은 신의 영광을 노래했고, 부족했던 자들은 용서를 빌었다.
“마즈다시여···.”
신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했다. 설사 교주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그 역시 신을 모시는 자에 불과했으니까.
“···미천한 종이 주인을 배알하나이다.”
쿵!
천마신교의 교주, 당대의 천마가 소녀 앞에 무릎을 꿇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