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s Life After Retirement RAW novel - Chapter 26
26화 이동요새
당연한 일이지만, 내가 김현태와 장석현을 폭행한 사건은 조용히 덮기로 했다.
내 이야기를 전해들은 백창수는 말도 안된다는 반응이었다.
“김태진이 이 일을 그냥 덮자고 했다고?”
“네.”
우리 대표님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아니 왜! 기껏 내가 왔더니!”
백창수가 분하다는 듯 몸을 들썩이자, 우리가 타고 있던 대형 콜밴 택시가 요동쳤다.
···이 양반. 도대체 얼마나 무거운 갑옷을 입고 다니는 거야.
나는 이유는 잘 모르겠다며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요. 진심어린 사과를 하니까 받아주시던데. 역시 진심은 통하는 게 아닐까요?”
“그게 말이 되나! 그 놈이 어떤 놈인데! 뱀같이 교활한 놈이란 말일세!”
생각보다 백창수는 김태진에 대해서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가 콧김을 뿜으며 말을 이었다.
“젠장. 그 놈이랑 한판 붙어볼 생각에 내가 얼마나 기대하고 있었는데!”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백창수를 바라봤다.
어쩐지 심하게 아쉬워하더라니.
“그게 목적이셨어요? 절 구하는 게 아니라?”
그러자 백창수가 민망한 듯 헛기침을 했다.
“크흠. 겸사겸사란 거지. 아무튼 임팀장 어디 다친 곳은 없나? 협박당했다거나?”
“보시다시피 아주 멀쩡합니다. 협박도 안 당했고요.”
협박이라면 오히려 내 쪽에서 했지만, 그걸 모르는 백창수는 걱정되는 얼굴로 말했다.
“나중에라도 그런 일이 생기면 꼭 내게 보고하게.”
진심이 느껴지는 그의 말에,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문득 화이트하우스에 들어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날 구하겠다고 자기 아버지를 보낸 백영희도 그렇고, 그 말을 듣고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온 백창수도 그렇고···.
길드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다면 그렇게 행동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때 백창수가 내 눈치를 보면서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랜만에 갑옷까지 다 차려입고 왔는데 말이야. 그냥 돌아가려니 몸도 찌뿌등하고···. 자네도 그렇지 않나?”
“······.”
나는 자연스레 백창수의 시선을 외면했지만, 그는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계속 말했다.
“저기 임팀장. 길드로 돌아가면 나랑 대련 한번 하지 않겠나?”
이 양반 아직도 포기를 못했군.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그러지 말고 한번만···.”
“아 싫다니까요.”
중년의 초인은 끈질긴데다 구질구질하기까지 했다.
“한번만! 응? 딱 한번만! 요즘엔 그나마 상대해주던 1팀장도 없고 아무도 나랑 대련을 안 해준단 말이네!”
“왜 그러는지 스스로 반성의 시간을 한번 가져보세요.”
콜밴이 길드에 도착할 때까지도 날 귀찮게 굴던 백창수는, 결국 길드 앞에서 기다리던 자기 딸에게 끌려갔다.
“아빠! 쫌!!”
백영희가 사라진 자리에는, 릴리가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꼬맹이. 사고 안치고 착하게 기다렸지?”
“······.”
릴리가 날 올려보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뭐? 왜? 할 말 있어?”
뭔가 말하고 싶은 눈치여서 조금 기다려주자, 꼬맹이는 한참이나 머뭇거리다가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배고파.”
네가 그럼 그렇지.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오늘은 치킨 먹자!”
그런데 그날은 좀 이상했다.
꼬맹이가 치킨을 먹으면서도 별로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먹긴 했지만.
*
*
*
다음 날 아침.
우리 텐트에 손님이 한명 찾아왔다.
커다란 배낭을 메고 온, 큰 키에 비해 너무 마른 더벅머리의 청년.
왕구호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아, 안녕하세요.”
아침에 온다는 소식은 들었기에 나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흐암-. 일찍 왔네.”
내가 하품을 하며 대답하자, 왕구호가 한번 더 고개를 숙였다.
“어, 어제 일은 죄송합니다! 현태님이 재계약을 꼭 해달라고 부탁하셔서···.”
“됐어. 다 지난일인데 뭐. 일단 거기 앉아.”
나는 야외 테이블을 가리켰다. 배낭을 내려놓은 왕구호가 긴장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뭐라도 마실래?”
“괘, 괜찮습니다!”
항상 괜찮다는 말만 하는 녀석이기에, 나는 음료수를 가져다 녀석 앞에 내려놓았다.
“마셔라.”
“고맙습니다!”
아직 꽤 이른 시간이었다. 꼬맹이는 세상모르게 자고 있었고, 시루떡은 새벽부터 내가 시킨 일을 하느라 바빴다.
나는 잔뜩 긴장한 표정의 왕구호를 빤히 쳐다봤다.
“······.”
“왜, 왜 그렇게···.”
나는 이 녀석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대충은 알고 있었다.
태어나자마자 버려져서 보육원에서 자랐고, 7살인가에 한번 입양이 됐지만 얼마 못 가서 파양을 당했다.
왕구호가 타인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이 된 건 아마 그 탓일 것이다.
항상 남의 눈치를 보고,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서 자라다보니, 뭐든 시키는 대로 다 하는 호구가 된 것이다.
그렇게 호구로 살던 과거의 왕구호는, 첫 번째 ‘재앙’이 닥쳤을 때 죽었다.
그러고 보니 첫 번째 재앙도 얼마 안 남았다.
뭐, 이번에는 왕구호가 죽을 일은 없겠지만.
일단은 좀 편하게 대화를 틀 생각으로, 나는 관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편하게 형이라고 불러.”
그런데 왕구호가 곤란한 기색을 보였다.
“저, 저 스물 두 살인데요···.”
“근데?”
“팀장님은 스무 살이라고···. 들었는데···. 형은 좀···.”
···맞다. 나 스무 살이지.
전혀 자각을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왕구호를 형이라고 부를 생각은 없었다.
나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너만 알고 있어라. 사실 난 스물 셋이다.”
“예, 예?”
“호적이 잘못 된 거야. 왜 예전에는 자주 그런 일 있었잖아.”
“그건 6.25때나 있던 일 아닌가요···.”
거 새끼 더럽게 따지고 드네.
나는 테이블을 손으로 쾅! 내리치며 말했다.
“그럼 팀장님이라고 부르던가. 아무튼 넌 오늘부터 우리 팀 탱커다.”
“···네. 팀장님.”
관련 서류 작업은 어젯밤에 전부 끝났다.
블랙하운드는 초인 왕구호에 대한 권리를 전부 화이트하우스에 넘겼고, 나머지 절차는 백영희가 알아서 처리했다.
이제 왕구호는 화이트하우스 소속 초인이었다.
만약 왕구호가 스스로의 의지로 블랙하운드에 남겠다고 했다면 일이 복잡해졌겠지만, 그럴 녀석이었으면 호구 소리를 듣지도 않을 것이다.
그저 남들이 하라는 대로, 왕구호는 수긍하는 녀석이었으니까.
그래서 더, 녀석이 내게 질문을 했을 때는 의외라고 생각했다.
“근데 왜 전가요?”
“뭐가?”
왕구호가 고개를 푹 숙이고 말했다.
“팀장님처럼 강한 분이 왜 저 같은 탱커를 원하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어서요.”
“당연히 필요하니까 널 데려온 거지.”
내 대답에, 왕구호는 지레 겁먹은 표정으로 말했다.
“호, 혹시 모르실까봐 말씀드리는데요. 제 개성은 이것 뿐이에요.”
드드드드득.
왕구호의 피부가 돌로 변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암석인간으로 변한 왕구호가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이···게···전···부···에···요···.”
그리고 석화를 해제해 원래대로 돌아왔다.
원래대로 돌아온 왕구호는 더 자신감이 없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방금 전 상태에서는 말도 느리고, 발도 느리고···. 몸도 느려서 제대로 싸우질 못해요.”
“그건 나도 알아.”
“···팀장님이라면 얼마든지 더 좋은 탱커를 구하실 수 있을···. 티, 팀장님?! 왜 이러세요!”
왕구호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왜냐면, 내가 지금 녀석의 가슴을 만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해봐.”
“네?”
“아까처럼 다시 해보라고.”
드드드드득.
왕구호가 다시 암석인간으로 변했다. 나는 돌덩어리로 변한 녀석의 가슴을 만져보고, 통통 두드려도 봤다.
“···혹시나 했는데.”
다시 보니까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왕구호는 이동요새라고 불리던 금민철보다 더 좋은 개성을 가졌다.
이동요새 금민철.
10년 뒤쯤부터 활동할 초인으로, 왕구호와 같은 개성으로 영웅으로 추앙받는 초인이었다.
금민철은 이 능력으로, 재앙이 닥쳤을 때 수많은 사람들을 지켜냈었다.
왕구호는 그 금민철보다도 단단한 능력을 가졌다.
나는 전에 금민철이 초기에 활동할 때 만들었다는 암석조각을 만져 본 적이 있었는데, 그것보다 지금 왕구호의 몸이 더 단단했다.
게다가 앞으로 더 단단해질 테고.
“왕구호. 내가 아는 탱커 중에 너보다 나은 녀석은 없어.”
“노, 놀리지 마세요. 저보다 좋은 탱커가 얼마나 많은데···. 저 같은 건 아무짝에도···.”
“멍청아 누가 지금이래?”
“네?”
“1년, 아니 6개월.”
왕구호는 무슨 소린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확신을 담아서 말했다.
“6개월만 지나면, 서울에 너보다 나은 탱커는 없을 거다.”
“말도 안 돼···.”
녀석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하면서도, 내 확신에 찬 표정에 흔들리는 모습이었다.
왕구호는 시대를 잘못 타고났다.
지금은 ‘개성’에 대한 연구가 거의 돼 있지 않은 시대.
게다가 선택받은 소수를 제외하고는 초인들이 가진 마나도 대부분 보잘 것 없었다.
왕구호처럼 마나가 많아야 개성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초인은 손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 모든 것을 내가 채워줄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능력으로 어떻게 싸워야 할지 모르겠지?”
“네···.”
“걱정 마. 내가 다 가르쳐줄 테니까.”
나는 이동요새 금민철이 어떻게 적들과 싸웠는지, 저 능력을 어떻게 활용했는지, 전부 다 알고 있었다.
그걸 왕구호에게 가르친다면 어떻게 될까?
최강의 딜러인 불의 마녀.
최고의 탱커인 이동요새.
이 둘이 함께라면, 나는 뒷짐만 지고도 수많은 던전을 쓸어버릴 수 있다.
“너한테 재능이 없다고 했지?”
“···네.”
나는 여전히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왕구호에게 씩 웃어주었다.
“내가 너한테 재능을 줄게.”
“아···.”
순간 왕구호는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였다. 텐트 뒤편에 있는 조리장에서, 시루떡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형님! 다 된 것 같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타이밍이 좋네. 시루떡! 그거 여기로 통째로 들고 와라.”
“넵! 형님!”
나는 텐트 안으로 들어가서 식기를 챙겼다.
오늘은 왕구호 몫까지 4인분이었다.
“야 꼬맹이. 밥 먹자.”
내 말에 릴리가 졸린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바압···.”
“어휴. 가서 세수부터 하고 와.”
잠시 후, 우리 셋은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꼬맹이가 숟가락으로 왕구호를 가리키며 말했다.
“누구야요?”
어제 한국말 끝에는 무조건 “요”자를 붙이라고 가르쳤더니 이 모양이다.
나는 꼬맹이의 숟가락을 옆으로 치우며 말했다.
“숟가락으로 사람 가리키는 거 아니다. 그리고 쟨 앞으로 여기서 같이 살 애야.”
“그럼 머슴이야? 시루떡처럼?”
“뭐, 크게 틀리진 않아.”
그때 시루떡이 커다란 냄비를 들고 이쪽으로 왔다.
왠지 모르게 녀석은 두려운 표정이었다.
“저, 형님···. 이거 진짜··.”
“수고했다.”
나는 시루떡의 어깨를 두드려준 후, 냄비뚜껑을 잡고 말했다.
“그럼 오늘도 즐거운 아침식사를 해볼까?”
“응! 빨리 줘!”
요 며칠 아침식사에 항상 만족했던 꼬맹이가 밥 달라고 보챘다.
나는 씩 웃어준 후 냄비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는, 뭔가 엄청난 존재가 배설해 놓은 듯한 걸쭉한 것이 가득 담겨 있었다.
임대인표 마나영양식 세 번째 레시피.
어젯밤 블랙하운드 본사에서 털어온 몬스터 내장과 내단을 넣어서 만든 요리였다.
나는 그릇에 마나영양식을 가득 퍼서 한명씩 앞에 놓아줬다.
“자, 쭉쭉 들이켜. 한 사람당 세 그릇씩이다.”
““······.””
‘타락한 영혼의 미궁’ 공략까지 이제 나흘.
팀의 전력을 끌어올려야 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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