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s Life After Retirement RAW novel - Chapter 279
279화 웬디
“빌어먹을. 왜 하필 나한테 이딴 일이···.”
필립은 나직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제3 키메라 저장고로 향했다.
판데모니움의 미궁.
개미굴처럼 지어진 이곳은 오래된 조직원들도 종종 길을 잃을 정도로 길이 복잡했다.
하지만 필립은 능숙하게 길을 찾았다.
그는 기억력과 눈썰미가 특출 나게 좋은 편이었다. 한 번 가본 길은 웬만해서는 잊지 않았다.
바로 그런 장점 때문에 대인이 점찍었다는 사실을, 필립은 꿈에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대로 돌아가면 거짓말한 게 들통날 텐데. 조직에서 배신자를 용서하겠어?
“개새끼···.”
필립은 악마보다 더 사악한 표정으로 자신을 협박하던 대인의 얼굴을 떠올렸다.
갑자기 나타나서 부하들을 다 때려눕히고, 자신을 협박해서 미궁의 절반을 통과한 남자.
판데모니움의 주인을 노리는 암살자.
필립은 그 남자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임대인···.”
대인의 이름과 얼굴은, 판데모니움 본부에 소속된 조직원이라면 모두 알고 있었다.
불의 아이를 훔쳤고, 조직에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혔으며, 지금까지 고위 간부들을 몇이나 죽인 자.
‘악마 같은 새끼···.’
소울이터를 마신으로 모시는 판데모니움의 조직원이 악마를 두려워하는 것도 우습지만, 그렇다고 천사라고 부를 수도 없지 않은가.
-배신자가 어떻게 되는지는 나보다 네가 더 잘 알지?
씩 웃으며 그런 협박이나 일삼는 작자를 말이다.
필립은 제3 키메라 저장고의 출입구가 보이기 시작하자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지금은 좋으나 싫으나 놈에게 협조할 수밖에 없어.’
대인의 말대로 필립은 이미 배신자가 되었고, 조직에 그 사실을 들키는 건 시간문제였다.
판데모니움은 배신자를 죽이지 않는다.
온갖 인체 실험을 해서 키메라로 만들고, 실패하면 폐기, 성공하면 실패할 때까지 계속 실험을 한다.
그리고 ‘운이 좋아서’ 일정한 수준까지 도달하면 특별 관리 대상으로 삼아 관찰, 실험, 개조를 거듭한다.
차라리 자살하는 편이 낫다.
···하지만 필립은 죽고 싶지 않았다.
“정지!”
강철로 된 출입문의 덧문이 열리고 날카로운 눈빛을 한 사내가 얼굴을 드러낸다. 필립을 알아본 사내가 의아한 목소리로 묻는다.
“필립?”
“론. 잘 지냈어? 별건 아니고 얼마 전에 들여온 상품들 중에 반품해야 될 녀석이 있어서 말이야···.”
출입문을 통과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필립은 인신매매와 상품 관리를 주 업무로 담당했기에, 저장고를 지키는 문지기들과는 안면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인맥관리를 곧잘 하는 편이었다.
쿠구구궁···!
출입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오러블레이드로도 쉽게 부수기 힘든 문이었지만, 필립은 말 몇 마디로 간단히 출입구를 통과했다.
하지만 이제 시작일 뿐이다.
“다음에 시간 될 때 술이나 한잔하자고. 내가 끝내주는 곳을 알거든?”
“크흐흐. 좋지.”
필립은 히죽거리는 문지기를 뒤로하고 저장고 안쪽으로 향했다.
‘내 소문이 여기까지 나진 않은 모양이군.’
그가 대인의 협박에 못 이겨 반쯤 막무가내로 미궁을 돌파한 지 아직 10분도 지나지 않았다.
뭔가 이상함을 느낀 조직원들이 위에 보고를 했을지도 모르지만, 보고 체계가 이쪽이 우선이 아니기에 여기까지 소문이 나려면 시간이 좀 더 걸릴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언제 들킬지 모르는 상황이다.
‘그 개새끼. 죽여 버릴 거야···.’
필립은 속으로 대인을 욕하는 것으로 초조한 마음을 달래며, 걸음을 자연스럽게 빨리했다.
“필립? 여긴 웬일이야?”
“하하. 반품할 녀석이 있어서요.”
필립은 아는 얼굴들을 만날 때마다 평소처럼 쾌활하게 인사했다. ‘상품’을 점검하던 조직원들이 필립을 보고 반갑게 아는 척했다.
그들 뒤편에는 특수 제작된 우리에 갇힌 아이들이 죽은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
“······.”
이곳에 인체 실험에 의해 고통스럽게 울부짖는 아이는 없었다.
그런 건 아직 미완성이거나, 실패작이다.
여기 있는 것은 전부 상등품.
전 세계에 흩어진 실험실에서 성공한 실험체들만 이곳으로 모이고, 최종적인 개발과 연구를 통해 ‘상품’으로 거듭난다.
상등품의 키메라로 거듭난 어린아이들이 쓰이는 곳은 생각보다 아주 많다.
어릴 때부터 세뇌를 시킨, 절대 배신하지 않는 강력한 전투 병기.
게다가 어리고 예쁘기까지 하다.
전쟁, 호위병, 여러 지저분한 일.
혹은 그냥 취미.
상품들은 세계의 수많은 권력자들에게 팔려나간다. 판데모니움은 그들과 거래를 하며, 대륙 전체에 그 영향력을 키워나가고 있었다.
필립이 하는 일은 그런 상품들을 들여오고, 적절한 구매자를 찾아 파는 것이다.
‘이 조직에 계속 붙어 있으면, 언젠가 나도 한자리 꿰찰 줄 알았는데···.’
조직이 삐걱거리기 시작한 것은 대인이 나타나면서부터였다.
대인의 테러로 수많은 상품과 조직원들이 사망했고, 조직은 본거지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조직은 갑자기 차원이 연결된 지구에 간부들을 잠입시키더니, 대부분의 전력을 그쪽에 집중했다.
그 이후로 들려오는 소식들은 영 좋지 않은 것들뿐이었다.
간부와 정예 조직원 다수가 죽고, 조직의 힘은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잠깐만. 어쩌면 이건···. 기회일 수도 있어.’
필립은 저장고 안쪽으로 들어가며 눈을 차갑게 빛냈다.
‘어차피 이 조직엔 더 이상 희망이 없어.’
차원 연합군의 존재는 이미 유명했다.
그들이 마계와 싸우는 연합이고, 가이아 대륙의 여러 국가가 이미 그 연합에 가입했다.
그리고 판데모니움은 은밀하게 마계와 동맹을 맺었다.
하지만 이 꼴을 보면, 은밀한 동맹은 진작에 발각됐고 곧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될 것이다.
‘어차피 끝장날 거라면···.’
평소 필립의 신앙심이 그렇게 얄팍한 편은 아니었으나, 목숨이 달려 있다면 신앙 정도는 얼마든지 버릴 수 있었다.
조직에는 숨겨진 실험실이나 분산해 놓은 재산이 곳곳에 있다. 필립은 그중 몇 곳을 알고 있었다.
‘그중 일부만 내가 가져도···.’
상상하기 힘든 돈과 힘을 얻는다.
꿀꺽.
필립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생각해 볼수록, 이건 위기인 동시에 기회다.
‘좋아. 방법을 생각해 보자고.’
잠시 후, 그는 제3 키메라 저장고의 가장 깊은 곳에 도착했다.
싸아아아···.
그곳은 저장고 내부에서도 따로 떨어져 있었다. 출입구보다 더 두꺼운 문으로 막혀 있었고, 문틈으로 가공할 냉기가 흘러나왔다.
문 앞에는 방한복을 두껍게 차려입은 자들이 지키고 있었다.
‘저 안에 얼음 마녀가 있다.’
필립은 가까이 접근하지 않고 멀리서 관찰했다.
그는 인신매매와 상품 판매를 담당하는 중간 관리직 중 하나였지만, 간부는 아니다.
얼음 마녀를 비롯해 일부 ‘특별한 상품’들은 간부들의 직접 관리 대상이었고, 필립은 얼음 마녀의 얼굴만 아는 정도였다.
‘문 앞을 지키는 병력은 간부 하나, 키메라 시술을 받은 조직원 스물···.’
여기서부터는 인맥도 통하지 않는다.
정면돌파?
그럴 실력이 있었으면 진작 간부가 되었을 것이다.
필립은 초조한 표정으로 문 앞의 경비 병력을 바라봤다.
‘젠장. 이대로 있으면 죽도 밥도 안 되는데···.’
다행히 때마침 대인이 그에게 도움을 주었다.
쿠구구궁···!
미궁 전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표정을 굳힌 조직원들이 주위를 경계했고, 간부는 중얼중얼 누군가와 통신 마법을 연결한 것으로 보였다.
“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일이 터졌군.’
필립은 대인이 미궁을 다 때려 부수며 소울이터에게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은 몰랐지만, 그가 뭔가를 하고 있다는 것은 알았다.
그리고 잠시 후,
“너희는 이곳을 지켜라.”
문 앞을 지키던 간부와 조직원 열 명이 빛에 휩싸여 사라졌다.
남은 인원은 절반.
그들도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하는 것이 느껴졌다.
‘기회다.’
필립은 대인이 준 마법 스크롤을 찢었다.
찌이익.
스크롤이 찢어지며 필립의 모습이 주변 풍경 속에 녹아들었다.
스르륵···.
대인의 특성 이 저장된 마법 스크롤.
완벽하게 기척을 감춘 필립은 조직원들에게로 접근했다.
남아 있는 숫자는 열.
하나하나가 키메라 시술을 받아 질긴 생명력과 상당한 전투력을 지닌 조직원들이다.
웬만한 기사단 하나쯤은 간단히 처리할 수 있는 전력.
그래서 필립은 처음부터 전력을 다했다.
촤아악!
왼쪽에 있던 조직원 둘이 목에서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적···!”
기습을 눈치챈 키메라 조직원의 입안으로 단검이 파고들었다.
푸욱!
순식간에 셋을 처리한 필립은 당황해 대열이 흐트러진 조직원들을 향해 전력으로 검을 휘둘렀다.
‘지원을 부르기 전에 죽인다!’
그의 검 끝에 오러가 맺혔다.
필립은 조직의 간부는 아니었지만, 상품을 유통하고 판매하는 중간 관리직이었다.
즉, 절대로 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단지 그를 단숨에 제압한 대인이 괴물처럼 강했을 뿐이다.
잠시 후,
“후우···.”
마지막 키메라 조직원을 쓰러뜨린 필립은 천천히 숨을 몰아쉬었다.
쿠구구궁···!
미궁은 점점 더 격렬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조직 전체가 당황했고, 간부가 직접 지키는 저장고 안쪽까지 오는 자는 없었다.
필립은 조직원 중 한 명의 품을 뒤져 열쇠를 찾았다.
끼이익···.
문을 열자 혹한의 추위가 그를 덮쳤다. 필립은 시체에게서 외투를 하나 빼앗아 걸친 후 안으로 걸어갔다.
“······.”
그 안은 온통 얼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바닥에는 기묘한 형태의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고, 깡마른 소녀가 그 중심에서 몸을 1미터가량 띄운 채 허공에 떠 있었다.
“얼음 마녀···.”
백발에 가까운 푸른 머리카락.
핏줄이 보일 정도로 앙상한 몸과, 하얗게 질린 입술, 꼭 감은 두 눈.
얼음 마녀를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것은 필립도 처음이었다.
쩌저쩌적-!
소녀를 중심으로 휘몰아치는 냉기는 불꽃도 단숨에 얼려버릴 정도였다. 필립은 온몸의 마력을 끌어 올리며, 단숨에 소녀를 덮쳤다.
소녀를 마법진에서 끄집어내자 마법진이 가동을 멈췄다.
“으으···.”
필립은 반쯤 굳은 몸에 마나를 돌렸다. 얼어붙던 몸에 조금씩 온기가 돌아왔다.
“이런 미친 냉기라니···.”
바닥에 드러누운 소녀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잠들어 있었다.
필립은 덜덜 떨면서 얼음 마녀의 목에 대인이 준 목걸이를 채웠다.
-달칵.
목걸이의 이음새가 맞물리며 목걸이 자체에서 은은한 마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몸에서 흘러나오던 냉기가 조금 줄어든 것 같았다.
“이봐.”
“······.”
“어이. 내 말 안 들려?”
멍한 표정의 소녀는 대답이 없었다. 인상을 찌푸린 필립은 확인해 볼 겸 소녀의 뺨을 때렸다.
짝!
소녀의 고개가 옆으로 홱 돌아갔다. 그러나 여전히 무생물처럼 아무 반응도 없었다.
“아무래도 소문이 맞나 보군.”
“······.”
필립은 얼음 마녀에 대한 소문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판데모니움 최고의 성공작.
잠재력은 오히려 불의 마녀보다 높다고 평가받던 상품.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얼음 마녀는 하루의 대부분을 잠에 빠져 보냈다.
그리고 점점 말라가고 있었다.
마치 적극적인 형태의 자살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에, 천천히 말라 죽기로 결심한 것처럼.
‘억지로 깨워도 하루에 한두 시간 깨어 있는 게 한계라고 했지.’
그렇기 때문에, 얼음 마녀는 판데모니움 최고의 성공작인 동시에 실패작이다.
하지만 임대인은 그 사실을 모를 것이다.
‘이 정보를 이용하면 놈과 거래를 할 수 있겠어.’
필립은 눈을 빛냈다.
악마니 어쩌니 했지만, 임대인은 기본적으로 ‘좋은 인간’이라는 사실은 유명했다.
자신 같은 악당들에게야 무자비하지만, 약하고 불쌍한 인간들 앞에서는 한없이 자비로운 인간.
필립은 그걸 이용할 생각이었다.
‘멍청한 놈.’
얼음 마녀를 구하라고 한 시점에서, 임대인은 스스로 약점을 하나 드러낸 것과 마찬가지다.
얼음 마녀가 필요하지 않다면 구하라고 할 이유가 없으니까.
필립은 소녀를 둘러메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스크롤의 효과가 소녀에게도 적용이 돼, 두 사람은 조용히 저장고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필립은 인신매매와 상품 관리·유통을 담당하는 중간 관리직이었다.
당연히 상품들을 제어할 수단과 방법을 여럿 알고 있었다.
끔찍한 고통을 주는 구속구라거나, 이성을 마비시키는 마약, 극심한 공포를 느끼게 하는 고문, 협박 같은 것들.
어린애 하나쯤 세뇌시키는 건 아무것도 아니다.
“우선 조용한 곳으로 가자고. 정신을 차리면 그때부터 교육시켜 줄 테니.”
필립은 얼음 마녀가 대인과 만나기 전에 단단히 세뇌시킬 생각이었다.
소녀가 자신을 은인이자 세상에서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으로 믿도록 말이다.
‘그럼 임대인도 나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겠지. 그때부터는 얼음 마녀를 이용해서···.’
동정심 따위는 없었다.
상품은 어차피 인간이 아닌 도구이고, 그는 비슷한 일을 수없이 해왔으니까.
필립 모리스는 스스로가 괴물이라는 것을 모르는 괴물이었다.
“놈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빨리 안전한 곳을 찾아야···.”
그리고 그가 납치한 소녀는, 그런 괴물들이 만들어낸 최악의 괴물이었다.
-쩌적.
필립은 그대로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발바닥이 그대로 땅에 붙어버린 것이다.
필립은 창백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얼음 마녀가 싸늘한 시선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 언제 깨어난···.”
“네가 내 방에 들어왔을 때부터.”
툭.
웬디는 바닥에 내려서서 필립을 올려봤다. 필립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다 그대로 얼어붙었다.
“자, 잠깐만! 난 너를 구하려고···.”
“구해달라고 한 적 없어.”
쩌저저저적!
필립의 몸이 아래에서부터 얼어붙었다.
순식간이었다. 가슴까지 얼음으로 변해버린 자신의 몸을 내려 보며, 필립은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질렀다.
“사, 살려줘! 뭐든지 다 할 테니···.”
“그럼 죽어.”
소녀의 냉혹한 한마디 말을 끝으로, 필립은 완벽한 얼음 동상으로 변해버렸다.
“······.”
소녀는 텅 빈 눈동자로 주위를 둘러본다.
평소와는 다른 장소다.
감시하던 자들도 없고, 방금 전까지 처음 보는 인간이 자신을 둘러메고 도망치고 있었다.
‘납치?’
이곳이 그런 게 가능한 곳이었던가.
아니, 불가능하다.
그랬다면 진작 스스로 탈출했을 것이다.
자신이 조금이라도 도망칠 낌새가 보이면 판데모니움의 수많은 간부와 키메라들, 조직원들이 몰려와 막는다.
이미 숱하게 경험해본 일이다.
그리고 소울이터.
그 괴물이 자신을 내버려둘 리 없다.
“그런데 왜···.”
소녀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볼 때,
-쿠르르르릉!
막대한 진동과 함께 멀리서 폭음이 들려 왔다.
소녀가 이곳으로 옮겨진 후,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던 현상이었다.
“전투···?”
무슨 일이 생긴 건 확실했다. 누가 이곳을 습격했든, 내분이 일어난 것이든. 전투가 벌어지면서 판데모니움 전체가 혼란에 빠졌다.
텅 비어있던 소녀의 눈동자에 어떤 감정이 차오른다.
희망.
‘도망칠 수 있을지도···.’
지금까지 소녀는 차라리 죽기를 바라고 있었다.
괴물로 사느니 죽고 싶었다.
하지만 판데모니움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자신의 힘을 억누르며 긴 시간 잠에 빠져드는 것만이, 소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소녀는 자신을 가둬두던 감옥에서 빠져나왔고, 주변을 감시하던 자들도 없다.
소녀는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허억, 헉···.”
거의 쓰지 않았던 몸을 움직이자 금세 숨이 차올랐다. 그러나 소녀는 발을 멈추지 않았다.
이 순간 떠오르는 사람이 둘 있었다.
“아빠···.”
이제는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지만, 자신을 꼭 안아주던 따뜻한 아빠의 모습과,
“릴리···!”
지옥 같았던 그 동굴에서 만나,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며 버티게 해주었던 유일한 친구.
웬디는 그 두 사람을 떠올리며 심장이 터져라 뛰었다.
머릿속에 소울이터의 목소리가 들려올 때까지.
[내게로 오라.]“시, 싫어···.”
웬디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순간 소녀가 차고 있는 목걸이에서 은은한 빛이 흘러나와 소녀의 정신을 보호했다.
그러나 목소리의 힘은 강력했다.
[내게로 오라.]“아아악! 싫어! 싫어! 싫단 말야!”
웬디는 귀를 틀어막고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목소리는 더 집요하게 소녀를 불렀다.
털썩.
웬디는 그대로 주저앉았고, 잠시 후 다시 일어난 소녀는 텅 빈 눈동자로 허공을 바라봤다.
“······.”
잠시 후, 소녀의 몸이 빛에 휩싸여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리고 지금.
[너, 내 목소리가 들려?]머릿속에 들려오는 대인의 목소리에, 웬디는 눈동자를 빠르게 깜빡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대인에겐 그걸로 충분했다.
[좋아.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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