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s Life After Retirement RAW novel - Chapter 293
293화 비밀 작전(1)
“···죄송합니다, 팀장님. 놓쳤습니다.”
본대로 복귀한 왕구호가 대인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대인은 그런 왕구호를 구박하지 않았다.
“됐다. 작정하고 도망치는 마왕을 뭔 수로 잡겠냐.”
왕구호가 얼마나 힘겨운 싸움을 겪었는지를 보여주듯, 그의 특성을 고려해 제작한 디바인 슈트가 거의 부서져 있었다.
그 뒤쪽에 있는 결사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대인은 눈으로 그들을 살피며 왕구호에게 물었다.
“사상자는?”
“다행히 사망자는 없고 부상자만 있습니다. 응급처치도 다 끝냈고요.”
고개를 끄덕인 대인은 수고했다며 왕구호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말했다.
“팀원들 데리고 성에 들어가서 쉬고 있어. 뒷정리는 다른 팀한테 시킬 테니까.”
“죄송합니다. 팀장님···.”
“됐다니까. 그리고 대체 언제까지 팀장님이라고 부를 거야?”
“입에 익어서···.”
한숨을 내쉰 대인은, 왕구호의 어깨를 두드리며 부드럽게 웃었다.
“구호야. 이제 편하게 형이라고 부를 때도 되지 않았냐?”
“저, 예전에도 나이는 제가 두 살 더 많다고 말씀 드렸···.”
“빨리 안 가고 뭐 해 인마! 부상당한 동료들 계속 세워 놓을 거야?”
“네, 넷?”
억울한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적인 왕구호는 이내 팀원들을 인솔해 성으로 돌아갔다.
대인은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본 후, 다시 정면에 펼쳐진 핵폭발의 흔적을 바라봤다.
그리고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내가 쏘라고 시킨 거긴 하지만···. 이딴 걸 만든 건 진짜 미친놈들이야.”
핵무기는 단숨에 전투를 종결지었다.
이 전장에 수십 개의 핵탄두가 사용되었다.
폭발이 일어난 순간, 빛이 번쩍였다.
지나치게 밝아서 맨눈으로는 바라볼 수도 없는 빛.
그 후 지상에 태양들이 생겨났다.
거대한 화구들이 부풀어 올랐고, 이내 버섯구름이 치솟으며 그 충격파가 반경 수십 km를 휩쓸었다.
-콰과과과과과광!
폭발의 중심에 있었던 적들은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증발했다.
차라리 그게 운이 좋았다.
폭발의 중심에서 벗어나 있던, 혹은 높은 화염 저항력과 재생력을 가진 괴수와 악마들은 운이 훨씬 나빴다.
선 채로 새카맣게 타버리거나, 눈과 내장이 튀어나와 덜렁거리는 상태로 끔찍하게 절규해야 했으니까.
그들을 빨리 죽여주는 것이, 연합군이 적들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배려였다.
[인간들은 굉장한 무기를 감추고 있었군.]어느새 대인의 옆으로 다가온 바사고가 감탄한 목소리로 말했다. 끔찍하게 학살당한 동족들의 모습에도, 마왕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딱히 감춘 건 아니야. 보다시피 쓰면 이런 꼴이 되니까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둔 거지.”
[하긴 마계와 달리 지구는 파괴될 것도 많고, 생명체들도 나약하니···. 어쨌든 덕분에 압승을 거뒀군.]말 그대로 압승이었다.
아군의 전력은 거의 소모되지 않은 채, 아가레스의 본대에 심대한 타격을 입혔다.
대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딱 한 가지 아쉬운 건, 아가레스를 놓쳤다는 거지.”
핵무기로 선제타격한 후, 아가레스의 군대는 거의 궤멸 상태에 이르렀다.
바사고가 성에서 군대를 이끌고 나온 것은 그때였다.
패닉에 빠진 아가레스는 바사고의 공격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었다. 바사고가 직접 자신을 따르는 마왕들과 고위 악마들을 이끌고 아가레스를 포위 공격했다.
그러나 아가레스는 상상 이상으로 강력했다.
핵폭발 속에서도 살아남은 마왕들과 고위 악마들을 규합해 바사고과 맞섰다.
두 마왕이 부딪친 장소는, 가장 강력한 핵폭탄이 떨어진 현장보다 더 참혹한 흔적을 남겼다.
[설마 그런 상태에서도 그렇게 강할 줄은···. 너희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오히려 내가 아가레스에게 당했을지도 모르겠군.]바사고는 수정구에 금이 간 자신의 지팡이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그만큼 아가레스는 강했다.
나중에는 연합군의 최정예인 100인의 결사대까지 동원돼 합공했음에도, 결국 포위망을 뚫고 도망칠 정도로.
[하지만 다른 마왕들은 대부분 사로잡았으니, 아가레스의 세력은 이미 끝장난 것과 다름 없다.]킬킬 웃으며 전장을 바라보는 바사고를, 대인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흘겨봤다.
‘이 새끼. 아까 아가레스와 싸울 때 일부러 힘을 아낀 게 분명해.’
아가레스에 비해 약하다고 해도, 바사고 역시 그에 못지않은 괴물이었다.
비록 가장 강한 인원들은 빠졌다고 해도, 연합군의 최정예와 합공을 하고도 아가레스를 놓쳤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즉, 일부러 힘을 아꼈다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는다.
‘바사고. 넌 역시 못 믿을 놈이야.’
목적은 아마도 연합군의 전력을 어느 정도 함께 약화시키는 데 있을 것이다.
이 상태로 마계의 전력만 깎여나가면, 훗날 차원 연합과 상당히 불리한 평화협정을 맺어야 할 테니까.
그러나 대인은 그런 속마음을 감추며, 태연하게 물었다.
“도망친 아가레스는 어디로 갔을까?”
[아마도 서쪽 영토 끝에 있는 자신의 성으로 도망쳤을 거다. 그 자존심에 죽어도 바알한테 도움을 청할 리는 없고···.]바사고는 서쪽을 바라봤다.
마계의 지도는 크게 3개의 지역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북쪽의 바알.
서쪽의 아가레스.
동쪽의 바사고.
이 중 바알이 차지한 영토가 마계 전체의 절반가량이고, 나머지는 아가레스와 바사고가 비슷하게 차지하고 있다.
즉, 바사고가 아가레스의 영토를 흡수하게 되면 단숨에 마계의 절반을 손에 쥐게 되는 것이다.
[한동안 아가레스는 전장에 나타나지 못할 거다. 내 저주의 권능이 제법 제대로 들어갔으니 치료가 쉽지 않을 터. 우리는 이때 서쪽 정벌을 끝내야 한다.]대인을 바라보는 바사고의 텅 빈 눈동자에서, 시퍼런 귀기가 춤추듯이 일렁였다.
임대인과의 동맹은 바사고가 예상했던 것 이상의 효과를 가져왔다.
단 한 번의 전투로 눈엣가시 같았던 아가레스를 패퇴시켰고, 아가레스가 지니고 있던 세력을 고스란히 흡수할 수 있는 기회마저 생겼다.
“사로잡은 아가레스 파벌의 마왕들은? 회유할 건가?”
대인의 질문에 바사고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그래야지.]전장 곳곳에, 연합군에 의해 포박된 마왕들이 쓰러져 있었다.
아가레스와 일부 마왕들은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러지 못한 마왕들이 더 많았다.
“쉽게 회유가 되겠어? 아가레스 파벌하고는 사이가 안 좋다며. 나중에 괜히 뒤통수 맞는 거 아냐?”
걱정되는 듯 미간을 찌푸린 대인의 질문에, 바사고는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설마 마왕들끼리 우정이라도 나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존재 맹세를 받아 내 휘하로 거둘 것이다.]“존재 맹세?”
대인은 ‘존재 맹세’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지만, 처음 들어보는 것처럼 고개를 갸웃거렸다.
[말 그대로 자신의 존재에 대고 하는 맹세다. 영혼을 걸고 하는 맹세이기에 절대 배신하거나 어길 수 없지. 어기는 즉시 소멸해버리니까.]“호오. 그거 꽤 흥미로운데?”
대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만하다는 듯, 바사고가 킬킬 웃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마왕들 중에서도 바알, 아가레스, 그리고 나만이 다른 마왕들에게 존재 맹세를 받을 수 있지.]그것이 세 대군주가 마왕들 중에서도 격이 다른 존재이자, 각자의 세력을 이끌 수 있는 이유였다.
[내 존재 맹세를 받아 불가침 약속을 받아내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아쉽게도 그건 바알도 불가능한 일이다.]“···아쉽네.”
[영혼의 격이 상대보다 높아야 상대의 존재 맹세의 힘을 견딜 수 있다. 그렇지 못한 자가 맹세를 받았다간, 오히려 자신이 소멸하게 되지.]“그런데 그 맹세라는 거. 쟤네들은 이미 아가레스한테 했을 거 아냐?”
[기존의 맹세는 새로운 맹세로 덮을 수 있다.]“호오···.”
그 순간 대인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지만, 바사고는 눈앞의 승리에 취해 자세히 보지 않았다.
[너무 아쉬워할 것 없다. 이 전쟁이 끝나면 나는 마계의 새로운 지배자가 될 것이고, 너는 내 우정을 선물 받게 될 것이다.]‘우정은 개뿔.’
이렇게 음흉하고 교활한 마왕 놈의 우정은 사절이었다.
얼굴에 은근히 그게 드러났는지, 바사고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라고 차원 허브의 지배자에게 밉보여서 좋을 것 없지 않겠나?]“···무슨 지배자?”
방금 무슨 소리를 한 건가 싶어서 대인이 되물었다.
[차원 허브의 지배자라고 했다. 우주에 몇 없는 절대적인 권력자. 나로서도 까마득한 옛날에 이야기로만 전해 들었을 뿐이지만, 분명 그러한 존재들이 있다고 했다. 아마 너는 그에 가장 가까운 존재겠지.]바사고의 눈빛은 진지했다.
그는 대인을 경계하고 있었지만, 그만큼 인정하고 두려워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미 지구를 비롯해 여러 차원에서 널 신처럼 여기는 자들이 있더군.]“무슨···.”
헛소리하지 말라고 말하려던 순간, 대인은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녀석이 그렇게 생각하는 게, 조금이라도 헛짓거리를 할 확률이 줄어든다면···.’
대인은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뭐, 앞으로도 잘 해보자고.”
[큭큭. 역시 우리는 잘 맞는군.]“······.”
대인은 전혀 동의하지 않았지만, 그냥 그러려니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봐도 된다면.”
[기꺼이 허락하지.]그들은 포박돼 있는 마왕들에게 다가갔고, 바사고는 그들을 회유, 설득, 협박해 존재 맹세를 받아 충성을 강요했다.
전장을 정리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애초에 아가레스의 군대에서 살아남은 존재가 거의 없었으니까.
모든 마왕들에게서 맹세를 받아낸 후 돌아오는 길에, 바사고가 대인에게 물었다.
[그런데 궁금한 것이 하나 있다.]“뭐가?”
[연합군에 익숙한 얼굴들 몇이 안 보이더군. 불의 아이, 천마, 그리고 그 드래곤.]바사고가 말하는 것은 릴리, 천무극, 아브락사스였다.
특히 릴리와 천무극은 헬게이트가 시작된 이후 마왕들에게 가장 많은 피해를 입힌 존재들이었다.
당연히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대인이 지구에서 데려온 100인의 결사대에는 그들이 포함돼 있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남겨두고 왔지.”
[혹시나?]대인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내가 이곳에 넘어온 걸 알면, 바알이 이판사판으로 지구에 총공격 명령을 내릴 수도 있잖아? 그땔 대비해서 전력을 남겨두고 온 거야. 본진이 털리면 안 되잖아?”
[으음···.]뭔가 미심쩍긴 했지만,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바사고도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대인이 친근하게 웃으며 말했다.
“친구. 신경 쓰지 마. 어차피 때 되면 다 넘어올 테니까.”
둘 중 누가 더 뛰어난 거짓말쟁이인지, 아직까지는 알 길이 없었다.
***
[공격하라-!]바사고의 군대는 거칠 것 없이 아가레스의 영토로 진격했다.
서쪽 세력의 수장인 아가레스는 첫 전투에서 패퇴한 후 종적을 감췄다.
서쪽의 마왕들은 바사고와 연합군에게 사로잡히거나, 스스로 항복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소멸당했다.
그 모든 과정이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이루어졌다.
바알이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고 대책회의를 소집했을 땐, 바사고가 아가레스의 영토 절반 이상을 점령한 뒤였다.
그리고 그 시각,
마계, 최북단.
“좋아. 탐지마법에 걸려드는 녀석은 없어.”
마력으로 일대를 확인한 아브락사스의 말에, 눈을 감고 있던 천무극도 천천히 눈을 뜨며 말했다.
“내 기감에도 걸려드는 녀석이 없구나. 저 안에 있는 건 전부 별 볼 일 없는 잔챙이뿐이다.”
그때 웬디가 언덕 아래로 보이는 낙후된 마왕성을 가리키며 릴리에게 물었다.
“언니. 우리 저기 쳐들어가?”
한때 영양실조가 걱정될 정도로 말랐던 소녀는, 이제 제법 뺨에 살이 보기 좋게 올라 있었다.
“쉿. 비밀 작전이니까 조용히 해야 해.”
릴리는 손가락으로 입술을 누르더니, 제법 어른스러운 표정으로 웬디를 나무랐다.
“응! 비밀 작전! 쉿!”
웬디가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릴리를 똑같이 따라 했다.
아브락사스. 천무극. 릴리. 웬디.
지구에 있다던 네 사람은, 마계의 어느 언덕 위에서 몸을 낮춘 채 목표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근데 무슨 마왕성이 저렇게 작고 허름해? 게다가 냄새는 왜 또 이렇게···. 도대체 관리를 어떻게 한 거야?”
인상을 찌푸린 아브락사스가 손안에 든 유리병을 노려보자, 그 안에서 꿈틀거리던 검은 슬라임 같은 것이 움찔했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자리를 비운 지 오래되다 보니, 잡스러운 마수들까지 오가게 된 것 같습니다···.]병 속의 검은 슬라임은 마왕 벨리알이었다.
한때 저 언덕 아래에 있는 낙후된 마왕성의 주인이었으나, 지금은 병 속에 사로잡힌 가련한 영혼.
“클클. 마왕도 다 같은 권세를 지닌 것이 아닌가 보구나.”
[···그렇습니다.]벨리알은 힘없이 대답했다. 마계 최북단에 위치한 그의 마왕성은, 바알의 파벌에서도 가장 구석진 곳에 있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도 있었다.
[다른 마왕들도 이곳은 신경 쓰지 않습니다. 워낙 구석진 땅이라···.]“알아. 그게 유일하게 마음에 드는 거 하나지. 우리가 여기 온 이유기도 하고.”
[······.]벨리알이 병 속에서 소심하게 몸을 움츠렸다.
그때였다.
“모두 집중!”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릴리가, 허리에 손을 척 얹으며 모두를 둘러봤다.
미간을 모은 소녀의 표정이 사뭇 비장했다.
“우리는 엄청 중요한 임무를 맡은 특수부대야. 신속하게 임무를 완수해야 해!”
“해야 돼!”
웬디가 옆에서 릴리의 모습을 똑같이 따라 했다.
아브락사스와 천무극이 동시에 혀를 찼다.
“아까는 조용히 해야 한다더니···.”
“클클. 어차피 다 확인하지 않았나.”
“집중!”
두 사람을 째려본 릴리가 말을 이었다.
누가 뭐래도, 이번 작전의 대장은 자신이었다.
소녀는 막중한 책임감과 사명감을 느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작전 설명할게! 잘 들어!”
“잘 들어!”
릴리는 대인에게 전달받은 작전 내용을 모두의 앞에서 달달 외웠고, 기어이 일행 모두에게 박수를(그중 둘은 영혼 없는 박수였지만) 받아냈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릴리가 모두에게 말했다.
“그럼 비밀 작전! 시작할게!”
“시작할게!”
잠시 후, 네 사람은 주인 없는 마왕성에 잠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