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s Life After Retirement RAW novel - Chapter 314
314화 마지막 전투(2)
-툭, 투둑.
마계의 날씨는 대체로 흐리고 어둡다. 어디서나 시커먼 먹구름을 흔히 볼 수 있었다.
때문에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을 때, 그 사실을 이상하게 여기는 마족은 없었다. 전투를 앞두고 재수가 없다고 생각한 자들이야 있었겠지만.
-쏴아··· 아아아!
조금씩 떨어지던 비는 금세 장대비가 되어 쏟아졌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쏟아지는 비는 무슨 불순물이라도 섞인 것처럼 잿빛이었다.
몰려든 먹구름과 쏟아지는 빗줄기 탓에, 마계의 정경은 평소보다 더 어둡고 음습하고 처량하게 보였다.
“거, 죽기 딱 좋은 날씨네.”
연합군의 결사대원 중 누군가가 농담을 하자 주변에서 피식피식 웃었다. 다들 긴장을 푸는 각자의 방식이 있다. 디바인 슈트가 온통 피로 물든 상태에선 그런 것이 필요했다.
그들 주위에는 수많은 마족들이 죽어 널브러져 있었고, 불과 몇 분 전까지 살아있던 동료도 쓰러져 있었다.
-쿠르르릉! 번쩍!
하늘에서 천둥이 치고 낙뢰가 떨어졌다. 그 짧은 순간순간마다, 어두운 전장이 잠깐씩 밝혀졌다.
양측의 군대가 부딪친 전장은, 일전에 바사고가 아가레스에게 대패를 경험한 불타는 평야였다.
가용 병력을 모두 동원한 양측은 평야의 중심에서 충돌했다. 사방이 탁 트인 평야였기에 기습이나 매복은 불가능했다. 시간이 부족했기에 세밀한 전술을 짤 수도 없었다.
연합군은 단기결전으로 승부를 보겠다는 계획으로 진격했다. 아가레스가 이끄는 바알군 또한 회전(會戰)을 마다하지 않았다.
평야의 중심에서, 양측 군대가 전력을 다해 힘과 힘으로 부딪쳤다.
-콰드득! 콰드드드득!
선두에서 마수, 마족들이 충돌하며 서로를 짓이겼다. 피와 살점이 사방으로 튀고, 고함과 비명이 처절하게 울려 퍼졌다.
-크워어어어어!
“으아아아아아!”
뜨겁게 달아오른 열기를 쏟아지는 빗줄기가 식힌다. 온몸에서 새하얀 김이 피어오른다. 마수들이 사납게 울부짖고, 눈이 시뻘게진 마족들이 크큭큭 괴이한 웃음을 흘린다. 인간들은 낯선 이계에서 목숨 건 사투를 벌인다.
마계의 종족들은 대부분 성정이 거칠고 쉽게 흥분한다. 그래서 전쟁 수행 능력은 오히려 조금 떨어지는 경향이 있었다. 다만 압도적인 힘과 공포로 여러 차원을 침략하고, 짓밟고, 지배해 왔다.
“···하지만 너희끼리 이렇게 큰 전쟁을 벌인 적은 없지. 바알이 건재하고, 철저하게 서열이 나뉜 마왕들이 마계의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으니까.”
대인은 높은 언덕에서 전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 그의 곁에는 단 한 명의 호위도 없었다.
결사대원 전원이 전장에 투입되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대인은 그 어느 때보다 조용히 전투를 감상할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웃기는 일이다.
혼돈과 공포, 무질서와 파괴의 상징 같은 마계의 마왕들이 서로 서열을 매기고, 땅을 나누어 질서를 유지하고 있으니.
때문에 마계에는 마족들 간의 작은 갈등이나 다툼은 있어도 큰 전쟁은 없었다. 마계의 전력은 오직 다른 차원의 침략에 집중될 수 있었다.
“그래서 니들이 이런 상황에 취약한 거지.”
웬만한 종족은 생존조차 힘든 척박한 마계.
다른 차원에는 그들을 침략할 만한 능력도, 이유도 없었다.
그래서 대인은 마계에 쳐들어간다는 계획을 세웠다. 바사고를 부추겨 반란을 일으키고, 릴리를 마왕으로 만들었다.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위기 사태에 바알은 지구 침략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마계의 질서는 이제 무너졌다.
“그리고 이 싸움이 끝나면 새로운 질서가 생기겠지.”
대인은 고요한 시선으로 전장을 응시했다.
어마어마한 대군끼리 맞부딪치는 전장이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전투는 몇 곳에 한정돼 있었다.
‘다섯 마왕을 쓰러뜨려야 전투가 끝난다.’
드넓은 전장은 크게 다섯 지역으로 나눌 수 있었다.
아가레스. 가미긴. 마르바스. 아몬. 부에르.
마계의 10좌에 해당하는 강대한 마왕들이 자신의 마왕성과 함께, 권속들을 이끌고 전장에 나섰다.
-콰콰콰콰쾅!
-퍼버버버벙!
폭발이 일대를 휩쓸며 다섯 마왕의 주변을 청소했다. 마왕성과 직속의 권속들, 수천의 정예부대를 이끄는 10좌의 마왕들은 가공할 만한 힘을 보여주었다.
대인은 조용히 미간을 좁힌 채, 다섯 지역 중에서도 가장 격렬한 힘이 부딪치는 곳을 바라봤다.
-화르르르르륵!
쏟아지는 폭우조차 증발시켜버리는, 세상을 전부 불사를 듯 타오르는 홍염과,
-콰콰콰콰콰콰!
걸리는 것은 닥치는 대로 파괴하는 검은 마력.
막대한 두 힘이 부딪치며 세상을 둘로 갈라놓고 있었다. 그 반경 수 km 이내에는 감히 어떤 마왕이나 초인도 다가가지 않았다.
대인이 마른침을 삼키며 중얼거렸다.
“꼬맹이···.”
릴리가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상대가 저 아가레스라고 해도 쉽게 지지 않을 만큼, 아니 어쩌면 이길 수도 있을 정도로 강해졌다는 것을.
하지만 그렇다고 걱정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아무리 강해져도 꼬맹이는 꼬맹이고, 자신은 녀석의 보호자였다.
“무리하지 마라.”
작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린 대인은 다른 지역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섯 마왕이 무자비한 힘으로 전장을 휩쓸자, 그들을 막기 위해 마계 연합군(바사고 & 니바니바 & 차원 연합군)에서도 최정예가 나섰다.
“마왕들을 막아라-!”
-쿠콰콰콰쾅!
폭발한 에너지의 파동이 쏟아지는 폭우를 잠시나마 걷히게 할 정도였다.
‘조금 더.’
대인은 기다렸다.
-쏴아아아아아!
빗줄기는 점점 거세졌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쏟아지는 폭우는 전장을 흐릿하게, 뭔가 비현실적으로 만들었다.
‘조금만 더.’
대인은 조금 더 기다렸다.
다섯 마왕이 눈앞의 적들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을 때까지, 그래서 자신을 향한 관심이 사라질 때까지.
스르륵···.
마계에 넘어온 이후로, 대인은 자신의 존재감을 죽여 왔다.
직접 전투에 나서지 않았고, 기를 최대한 갈무리했으며, 항상 한 팀 이상의 결사대가 그를 호위했다.
-임대인은 약해졌다. 그는 더 이상 제대로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연합군은 물론이고, 마계의 웬만한 마족들도 그런 소문을 들었다.
바알군의 마왕들은 여전히 ‘임대인’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이를 갈았지만, 대인을 연합군의 전력에서는 어느새 배제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막,
“슬슬 움직여 볼까.”
스르르륵···.
대인의 모습이 폭우 속에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쏴아아아···.
-쏴아아아아···.
빗줄기는 여전히 약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
[크하하하하하하!]아가레스는 전장이 떠나가라 광소를 터트렸다. 불에 그슬린 몸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반쯤 녹아내려 들러붙은 손가락이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바로 그렇기에, 아가레스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이렇게 흥겨운 싸움은 처음이다!]미치도록 즐거웠다.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지르고, 눈앞에서 불꽃이 폭발할 때마다 소멸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엄습했다.
세포 하나하나가 올올이 깨어나는 기분!
아가레스는 진심으로 상대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니바니바여! 너는 나를 죽일 자격이 있는 마왕이다!]그것은 아가레스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찬사였다. 아가레스는 주먹에 마력을 모아서 힘껏 휘둘렀다.
-우우우우웅!
10좌에 속하는 강대한 마왕들도 받아내기를 꺼려 할 만한 힘이 담긴 일격이었다.
그러나 상대는 피할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하아압!”
거구의 마왕인 자신에 비하면, 10분의 1도 안 되는 작은 마계토끼가 똑같이 주먹을 휘둘러 온다.
화르르륵!
통통한 주먹 위로 불꽃이 휩싸여 크기를 키운다. 주먹만 기형적으로 커다랗게 만든 모습이다.
마계 최강의 육체를 지닌 자신에게 정면으로 맞서는 어리석음이라니!
[부디 죽지 말아다오!]아가레스는 간절한 바람을 담아, 주먹에 더 강한 힘을 담았다.
-쩌어엉!
두 주먹이 부딪친 순간, 그 충격파가 반경 수 km를 휩쓸었다. 재수 없게 그 주변에 있다가 휘말린 마족들은 압력에 몸이 터져나갔다.
충돌의 반발력에 튕겨난 두 마왕은, 비슷한 거리에서 멈춰 선 후 서로를 빤히 응시했다.
아가레스는 전율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방금 전의 일격에서, 그리고 그 전까지의 싸움을 통해 그는 예감했다.
[너는 나보다 강할지도 모른다.]다른 마왕들이 그 목소리를 들었다면 경악했을 것이다.
그 자존심 강한 아가레스가, 바알 이외에 상대를 인정하다니!
그러나 정작 그런 찬사를 받은 니바니바는 그 말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럼 항복할래?”
릴리는 오직 이 싸움을 빨리 끝내고 싶을 뿐이었다.
더 이상 죽거나 다치는 사람이 없도록, 그래서 슬퍼하는 사람들이 생기지 않도록 만들고 싶었다.
“항복하면 내 부하로 삼아줄게.”
[크크크···.]아가레스는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그의 영혼은 바알에게 지배당하고 있었지만, 자아까지 완전히 침식된 것은 아니었다.
그 드높은 자존심과 자신의 강함에 대한 긍지는 여전했다.
[그래. 너는 그런 말을 할 만한 자격이 충분하지. 하지만 그 말을 꺼낸 이상···.]-우득! 우드드득!
들소를 연상시키는 근육이 꿈틀거리며 갑옷처럼 외피가 자라나고, 뿔이 더 길게 늘어나 정면을 겨눴다.
[후욱···.]아가레스가 거친 숨결을 내뱉자 흑염이 코와 입에서 뿜어졌다.
[네 운명을 걸고 힘을 증명해야 할 것이다.]쿠-웅!
아가레스가 한 걸음 내디딘 순간, 그를 중심으로 땅이 갈라졌다.
쩌저저적···!
지저에서 검은 짐승이 기어 올라왔다. 두꺼운 몸통은 곰을 닮았고, 주둥이는 악어처럼 뾰족해 그 안에 칼날 같은 이빨이 가득했다.
-크워어어어어!!!
포효하는 짐승의 정체는 아가레스의 마왕성이었다.
과거 아가레스는 바사고를 피해 도망치면서 마왕성을 두고 와야 했지만, 메인코어만큼은 챙겨두었기에 다시 원하는 형태로 빚어낼 수 있었다.
복수와 전투에 가장 적합한 형태로.
마왕성의 꼭대기에 올라선 아가레스가 포효했다.
[마왕이여! 네가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를 소환하라!]마왕성이야말로 마왕이 지닌 가장 강력한 갑옷이자 무기.
또한 최후의 보루.
전장에 마왕성을 소환했다는 건 뒤를 생각하지 않겠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릴리도 머뭇거리지 않고 바로 용암 거인을 소환했다.
“나와라 거인!”
땅이 갈라지고, 그 안에서 시뻘건 마그마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불쑥 튀어나온 두 손이 바닥을 짚으며 힘껏 지상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워어어어!
가슴을 내밀고 포효한 용암 거인이 아가레스의 짐승을 향해 진격했다. 릴리는 그 머리 위에 올라섰다.
잠시 후 마왕을 태운 두 거대 괴수가 충돌했다.
-쾅! 쾅! 콰콰콰쾅!
그리고 그 위에서, 두 마왕이 서로를 향해 공격을 쏟아냈다.
마왕성까지 소환한 싸움은 반경 수십 km를 초토화시켰다. 주변에 있던 마족들이 짓밟히고, 녹아내리고, 압력에 분쇄 당했다.
“윽···.”
릴리는 입가에 흐르는 핏줄기를 손등으로 대충 닦아냈다.
이곳까지 오면서 거의 쉬지도 않고 연달아 싸웠다. 벨리알의 성에서 베리트의 몸에 강림한 바알과 싸웠고, 곧바로 마계 북부를 평정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다. 그 후 파이몬을 만나서 사투를 벌였다.
그 과정에서 몇 번이나 벽을 뛰어넘어 강해졌지만, 아직 어린 소녀의 육체와 정신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쏟아지는 아가레스의 공격을 막아내는 것이 힘에 겨웠다.
[고작 이 정도냐! 나를 실망시키지 마라!]-쩌엉!
간신히 아가레스의 주먹을 막았지만 한참 튕겨 날아갔다. 릴리는 서둘러 자세를 바로잡았다. 쉴 틈이 없었다. 아가레스의 공격이 유성우처럼 쏟아졌다.
“으윽···.”
온몸이 부서질 것만 같았다. 충격이 계속 쌓였다.
주르륵. 코피가 흐른다.
상대는 지금까지 만났던 적들 중 최강의 상대였다.
시야가 흐려진다···.
-꼬맹이. 무리하지 마. 싸우다 힘들면 도망쳐도 돼.
대인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릴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저씨는 무리하지 말라고 했지만, 무리하지 않고는 절대 이길 수 없는 싸움이다.
‘아저씨는 항상 무리하면서!’
자신이 도망치면 다른 사람들이 아가레스를 막아야 한다.
이 전투에 나선 모든 사람들에게 각자 역할이 있었다. 자신이 포기하면 다른 사람들이 대신 싸우다가 죽거나 다칠지도 모른다.
소녀는 막중한 책임을 느꼈고, 물러서지 않기로 결심했다.
“내가···. 할 수 있어!”
붉은 눈동자가 보석처럼 반짝였다.
화르르르륵!
한 번 더 불꽃을 쥐어짜며, 소녀는 또 한 번 자신의 한계에 부딪쳤다.
***
대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