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s Life After Retirement RAW novel - Chapter 43
43화 대통령
끼익-.
취조실 문이 열리고 한 사내가 들어왔다.
훤칠하게 큰 키에 반듯한 이목구비, 검은색 수트를 모델처럼 소화하며 걸어오는 한 남자.
나는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주상욱.
현 재난관리본부 초인협력팀 팀장이자, 훗날 ‘초인심판관’이라고 불리며 악명을 떨치게 될 남자.
피곤해질 것 같아서 웬만하면 엮이지 않으려고 했는데···. 결국 이 녀석이 나오는군.
쿵!
주상욱이 철제 테이블 위에 두꺼운 서류철을 내려놓았다.
“다른 차원에서 온 마법사라···.”
낮고 조용하게 깔리는 목소리.
새끼. 초반부터 기선제압하려고 목소리 깔기는.
나는 코웃음이 나올 뻔한 것을 억누르며, 컨셉대로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소. 나는 가이아 대륙에서 온 마법사 악시무스요.”
그렇다고 처음부터 만만하게 보일 생각은 없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나는 재앙을 알리러 온 것이지, 죄를 저질러 잡혀온 것이 아니오만···.”
우리가 있는 공간은 5평도 안 되는 취조실이었다.
사실 취조실이라기보다는 감옥에 더 가까웠다.
벽은 사방이 강철로 되어 있고, 천장의 흐릿한 전구 하나가 우리를 비추고 있었다.
벽 모서리마다 언제든지 마취가스를 분사할 수 있는 장치가 달려있고 말이지.
주상욱이 내 앞에 마주 앉으며 말했다.
“불편하시겠지만 양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저희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혹시 당신이 이쪽 세계의 왕이시오?”
내 질문에 주상욱은 고개를 저었다.
“저는 일개 공무원입니다.”
“공무원이 뭐요?”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주상욱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왕의 신하라고 보면 됩니다. ···정말 다른 차원에서 오셨습니까?”
나는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이야기라면 아까 검은 마차에 타고 오면서 전부 말했소이다.”
내가 경찰간부에게 왕에게 안내해 달라고 말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정부소속 초인들이 현장에 도착했다.
그들은 내부가 검게 코팅된 차에 우릴 태워서 이동했고, 그 후에 도착한 곳이 이곳이었다.
수갑은 채워지지 않았지만 빛나는 지팡이는 압수당한 상태였다.
예상 못한 것은 아니지만, 이쯤 되면 반은 범죄자 취급이었다.
그리고 꼬맹이는 내 옆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쿠울···.]···잘 시간이 지나긴 했다만, 너 그래도 너무 긴장감이 없는 거 아니냐?
나는 꼬맹이를 힐끗 본 후 다시 고개를 돌려 주상욱을 바라봤다.
“재앙이 닥칠 때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소. 어서 나를 왕께 안내해 주시오.”
주상욱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이 나라엔 절차라는 게 있습니다. 신분과 목적이 확인되지 않은 사람을 대통령, 그러니까 왕에게 안내할 수는 없습니다.”
“허어! 이렇게 답답할 데가.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고 몇 번이나 말했거늘···!”
나는 무척 안타깝다는 듯 연기를 했지만, 사실은 다 예상한 수순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서 마법사라고 주장하며 재앙 어쩌고 떠든다고 해서, 곧바로 대통령을 만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내가 어떤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
최악의 경우에는, 나를 고문해 정보를 캐내려고 할 수도 있었다.
물론 최악의 경우까지 가정하고 대비는 해왔다. 여차하면 도망갈 수 있도록 텔레포트 스크롤도 구해놨으니까.
주상욱이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악시무스 씨. 우리는 아직 당신의 말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갑자기 다른 차원의 사람이, 그것도 재앙을 경고하러 왔다면···. 당신이라면 그 말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나는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믿어야만 하오.”
이 신뢰감을 높이고, 가 아우라를 뿜어냈지만, 주상욱의 표정은 여전히 차가웠다.
“저는 사람의 얼굴보다 증거를 믿는 편입니다. 당신이 다른 차원에서 왔다는 증거를 보여주십시오.”
“그럴 줄 알고 준비해왔소.”
나는 기다렸다는 듯 로브 안에서 이것저것 꺼내기 시작했다.
대부분 꼬맹이와 함께 보물을 찾으러 다니며 얻은 잡동사니들이었다.
가이아 대륙의 동전, 가이아어로 된 지도책, 그리고 대륙의 전통공예품들.
그러나 주상욱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그런 것들은 우리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국토수복 계획 중에 얼마든지 발견되는 것들입니다.”
나는 빙긋 미소 지었다.
“하지만 그 역사는 모르시겠지. 예를 들면 이 동전은 제국력 800년 기념주화로···.”
나는 나만이 알고 있는 가이아 대륙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대륙은 하나의 제국과 두 개의 왕국, 여러 공국으로 이루어져 있소. 나는 은자의 숲 출신으로···.”
만화가나 소설가라고 해도 결코 즉석에서 지어낼 수 없는 이야기들.
그 곳에서 직접 살아보고 느껴봐야만 알 수 있는 생생한 기억과 경험들.
내 이야기가 계속 될수록, 주상욱의 표정도 점점 바뀌었다.
“······.”
주상욱 뿐만이 아닐 것이다.
밖에서 내 이야기를 듣고 있을 모든 이들이 지금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진짜 다른 차원에서 온 마법사구나.’ 라고.
잠시 후, 나는 이야기를 끝내고 주상욱을 지그시 응시했다.
“이래도 증거가 더 필요하오?”
그러나 주상욱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당신이 다른 차원에서 온 마법사라고 칩시다. 하지만 재앙에 관한 건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당신이 미래에 벌어질 일을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입니까?”
나는 에 마나를 주입하며, 허리를 곧게 펴고 경건하게 말했다.
“나는···. 미약하지만 운명을 읽을 수 있소.”
주상욱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게 무슨 개풀 뜯어먹는 소리냐는 표정이었다.
“운명을 읽는다고?”
“모든 운명을 다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오. 하지만 역사의 큰 줄기나, 큰 운명의 별을 지닌 사람들의 앞날은 어느 정도 알 수 있다오.”
“······.”
주상욱의 눈에 불신의 빛이 깃든다. 터무니없는 얘기라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잠시 후면 생각이 바뀔걸?
“마침 당신도 큰 운명의 별을 가졌으니···. 당신의 운명을 읽어 보겠소.”
나는 눈을 감고 온 몸으로 마나를 뿜어냈다. 가 펄럭대며 아우라를 미친 듯이 뿜어냈다.
잠시 후, 나는 경악한 듯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당신은···.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하는군.”
그 순간 주상욱이 눈에 띄게 당황하는 것이 느껴졌다.
“무, 무슨 소립니까 그게.”
나는 신비로운 분위기를 유지하며 말했다.
“10년, 아니 15년 뒤일지도 모르겠군. 당신이 왕이 되기 위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연설하는 모습이 보였소.”
믿을 수 없다는 듯, 주상욱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어떻게···.”
어떻게 네 야망을 알았냐고?
그야 네가 10년 뒤에, 그리고 15년 뒤에도 대선에 출마한 걸 직접 봤으니까 알지.
큰 운명의 별을 지닌 자.
내가 생각해도 참 잘 만들어낸 명칭이었다.
웬만큼 유명한 사람의 미래는 대충 알고 있으니 말이다.
그 한마디로 주상욱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나는 신비로운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이제 내 말을 믿어줄 수 있겠소?”
주상욱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잠깐 나갔다 오겠습니다.”
주상욱이 취조실에서 나간 후, 나는 허리를 펴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머릿속으로 뭔가 잘못 말한 것이 있나 검토해봤지만, 딱히 꼬투리 잡힐만한 것은 없었다.
앞으로 할 예언에 대한 복선도 잘 깔아놨고 말이지.
‘남은 건 재앙에 대비하게 만드는 건데···.’
잠시 고민하고 있을 때, 주상욱이 다시 취조실로 들어왔다.
그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대통령께서 직접 만나보겠다고 하십니다.”
첫 번째 단계는 넘었다. 나는 입가에 피어나는 미소를 억누르며,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그리고 아까부터 꾸벅꾸벅 졸고 있는 꼬맹이의 어깨를 가볍게 흔들었다
“조수여. 일어나거라.”
꼬맹이가 고양이가면 위로 눈을 비비며 웅얼거렸다. 그러니까 진짜 고양이 세수 같았다.
[우웅. 벌써 아침밥이야···?]“······.”
그나마 잠꼬대를 가이아어로 해서 다행이다.
*
*
*
알고 보니, 우리는 이미 청와대에 와 있었다.
지하에 있던 취조실에서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상으로 올라오자, 창문을 통해 바깥의 풍경이 보였다.
주상욱이 우리에게 설명을 해줬다.
“이곳은 청와대···. 그러니까 이 나라의 왕궁입니다.”
새로 지은 청와대는 군사시설에 가깝게 변모해 있었다.
퍼스트 게이트 당시, 청와대 바로 위에도 게이트가 하나 열렸다.
그곳에서 튀어나온 몬스터는 단 한 마리였다.
레서드래곤.
20미터가 넘는 거대한 드래곤의 아종형 몬스터는, 청와대를 잿더미로 만들고 대통령과 국무위원 대부분을 몰살시켰다.
그 후 혼란이 수습되고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되기까지 수개월이 걸렸다.
“이곳입니다.”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서자, 수십 명의 보안요원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집무실 가장 안쪽에, 깐깐해 보이는 인상의 50대 사내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뒤에는 철가면을 쓴 거한이 서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내 한쪽 입꼬리가 살짝 비틀렸다.
‘이렇게 나오시겠다?’
나는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왕이시여. 저는 가이아 대륙에서 온 마법사 악시무스입니다.”
대통령은 자기 맞은편에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두 분 다 거기 앉으십시오.”
그건 평범한 의자가 아니었다. 거짓말탐지기가 설치된 의자였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태연하게 물었다.
“특이하게 생긴 의자로군요.”
깐깐해 보이는 대통령은 굳이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거짓말을 간파하는 도구입니다. 내 질문에 당신들이 거짓으로 대답한다면, 그 도구가 내게 알려줄 것입니다.”
“······.”
짧은 순간 내 눈과 대통령의 눈이 마주쳤다.
기다렸다는 듯 준비해 놓은 거짓말 탐지기.
그리고 방안에 대기하고 있는 수십 명의 보안요원들. 그들 중엔 초인도 적지 않았다.
특히 저 뒤에 서 있는 철가면은 아마···.
피식.
“거짓말탐지기는 당신한테 써야겠는데.”
내가 가이아어로 중얼거리자, 대통령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나는 다시 한국어로 말했다.
“우리는 아무것도 숨길 것이 없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당당히 거짓말 탐지기에 가서 앉았다. 꼬맹이도 내 옆의 의자에 앉았다.
“얼마든지 물어보십시오.”
주상욱이 와서 내 몸에 이것저것 달았다. 혈압, 맥박, 땀을 체크하는 장치들이었다.
대통령이 첫 번째 질문을 던졌다.
“당신들은 정말 가이아 대륙에서 왔습니까?”
“그렇습니다.”
[네!]거짓말 탐지기의 그래프는 미동도 없었다. 대통령은 그걸 확인한 후 다시 질문했다.
“재앙에 대한 이야기가 사실입니까?”
“그렇습니다. 나는 재앙을 경고하러 이곳에 왔습니다.”
[조수는 잘 모른다요!]그래프는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았다. 꼬맹이도 내가 미리 알려준 대로 잘 해주고 있었다.
대통령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가 어렵게 다시 입을 열었다.
“재앙에 대해서 아는 대로 말해 주십시오.”
“무지개의 일곱 띠가 모두 사라지는 날···.”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직접 경험한 재앙에 대해 상세히 이야기했다.
“수백 개의 차원문이 열리고 최소 1만의 몬스터가 쏟아질 것입니다.”
“1만이라니···. 1천도 감당하기 힘든 판에···.”
대통령은 차라리 거짓말탐지기 그래프가 움직이길 바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래프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럼···.”
그 이후에도 여러 가지 질문이 이어졌지만,
“그렇습니다.”
[모른다요!]“아닙니다.”
[모른다요!]“그건 설명이 길어질 것 같은데···.”
[배고프다요···.]거짓말탐지기는 우리에게 아무 소용도 없었다.
나야 무공을 익혀서 호흡, 맥박, 땀 정도는 얼마든지 조절할 수 있었고,
꼬맹이는 여전히 한국어가 서툴러서 질문을 절반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
질문을 멈춘 대통령은 고개를 숙이고 한동안 아무런 말도 없었다.
한참 만에 고개를 든 그가, 심각한 표정으로 방안의 사람들에게 말했다.
“모두 나가세요.”
잠시 후 집무실 안에 남은 것은 대통령, 나, 꼬맹이, 그리고 대통령을 바로 옆에서 경호하는 철가면뿐이었다.
“마법사님의 몸에서 저것들을 떼 드리게.”
“네.”
철가면이 내 몸에서 거짓말 탐지기 장치들을 떼어냈다. 나는 편안해진 팔로 꼬맹이의 몸에 붙은 장치들을 떼어냈다.
대통령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계속 의심만 해서 미안합니다. 사안이 사안인지라.”
나는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합니다. 저라도 그랬을 테니.”
“개인적으로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재앙이 닥치기 전에···.”
나는 그가 재앙에 대한 질문을 계속할 줄 알았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했던 질문이 날아왔다.
“나를 가이아 대륙으로 망명시켜줄 수 있습니까?”
“······.”
나는 잠시 대답 없이 대통령을 바라봤다. 그는 힘들고 지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애원하듯 말하고 있었다.
“가이아 대륙은 여기보다는 안전한 곳이지요?”
“······.”
“돈이라면 충분히 있습니다. 아니, 그쪽에서 원하는 것이 따로 있다면 구해 오겠습니다. 나와 내 가족. 여기 이 친구까지만 데려가주면 됩니다.”
대통령은 자기 옆에 있는 철가면을 가리켰다. 철가면은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
나는 잠시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한 후에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지금, 왕이 백성을 버리고 도망치겠다고 말하는 겁니까?”
대통령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나는 왕이 아닙니다! 그냥 어쩌다 이 자리에 앉게 된 사람일 뿐입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대통령이 성큼성큼 내게 걸어와 내 두 손을 감싸 쥐었다. 그는 내게 매달렸다.
“난 지쳤습니다. 더 이상 이 위험한 땅에서 살고 싶지 않습니다. 날 당신 나라에 망명시켜 주십시오. 돈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아니면 정보, 기술, 자원···. 당신을 보낸 사람이 누군지 모르지만 원하는 게 있을 거 아닙니까!”
“······.”
상상했던 것 이상이었다.
설마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이야.
어처구니가 없어서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나는 그의 손을 쳐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가 사람을 잘못 찾아왔군! 돌아가겠소!”
나는 꼬맹이의 팔을 잡고 뒤돌아섰다. 당장 밖으로 나갈 기세로 성큼성큼 걸었다.
스르륵.
그 순간 철가면이 유령처럼 문 앞을 가로막았다.
등 뒤에서는 대통령의 울분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를 가이아 대륙으로 데려가 주시오. 원하는 게 있다면 다 주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싫다면 어쩔 거지?”
내가 뒤돌아보며 묻자, 대통령의 입가에 비릿한 웃음이 맺혔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을 거요.”
그 순간, 철가면의 몸에서 폭풍 같은 기세가 터져 나왔다.
푸화아아아아악!
어마어마한 마력이었다.
소문으로 들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만나 보자 더욱 거대하게 느껴졌다.
최초의 각성자 중 한명.
거신(巨神) 김수호.
쿵! 쿵! 쿵!
그는 내게 걸어오면서 점점 더 커졌다. 평균보다 조금 더 크던 키가 2미터가 되고, 3미터, 이내 4미터까지 거대해졌다. 그가 더 커지지 않은 이유는 천장 때문이었다.
작아진 철가면은 더 이상 소용없었다. 그는 철가면을 종잇장처럼 구겨 바닥에 내팽개치고,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내려 봤다.
김수호의 전신에 흐르는 마력이 용암처럼 들끓었다.
그는 백창수와 함께, 근접전에서는 최강의 초인이었다.
그 얼굴을 마주본 순간 나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푸훗!”
더 이상 이 괴상한 상황극을 받아주기 힘들었으니까.
나는 이 남자가 결코 국민들을 버리고 떠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왜 웃지?”
조용히 묻는 김수호에게, 나는 여유롭게 웃으며 되물었다.
“언제까지 이런 장난을 칠겁니까? 진짜 왕이시여.”
“······.”
스르르륵.
어느새 평범한 크기로 돌아온 김수호가, 턱을 긁적이며 물었다.
“어떻게 알았습니까?”
그야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를 수가 없으니까.
김수호.
그는 대통령이 죽고 지휘체계가 무너진 서울을 수습한 영웅이었다.
경찰서장 출신으로, 능력을 각성하자마자 경찰병력을 동원해 시민들을 보호하고 초인들을 규합해 청와대를 탈환하기도 했다.
그 후에도 도시를 정상화하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했고, 은퇴 후엔 죽을 때까지 국토를 수복하기 위해 몸 바친 초인이었다.
역사상 최강의 초인이 누구냐에 대한 논란은 많아도, 최고의 이름은 항상 김수호였다.
그런 사내가 대통령이기에, 나는 그를 만나겠다고 생각했다.
이 우스꽝스러운 상황극도 내게 다른 의도가 있는지 알아보기 위한 시험이었을 것이다.
나는 내가 존경하는 남자에게 신비로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당신처럼 큰 운명의 별을 가진 사람을 못 알아볼 리 없지요.”
그날 밤, 대통령은 최초의 각성자들을 모두 소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