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s Life After Retirement RAW novel - Chapter 5
5화 통제구역
몇 시간 후.
나는 서울에 얼마 남지 않은 관공서 앞에 도착해 있었다.
-재난관리본부 서울종로지부-
건물로 들어온 나는 [초인협력팀]부서로 들어갔다.
업무가 바쁜지 빠르게 키보드를 두드리던 단발머리의 여자가 나를 힐끗 보고 물었다.
“무슨 일로 오셨어요?”
그리고는 다시 모니터를 쳐다보는 여자에게, 나는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초인등록 하러 왔는데요.”
순간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올려봤다. 여자의 가슴에는 [진소미] 라고 적힌 명찰이 붙어 있었다.
“네?”
“초인으로 등록하러 왔다고요.”
“아, 지금은 담당자님이 안 계신데···.”
점심시간도 아닌데 자리에 없다니. 공무원들은 20년 전이나 후나 똑같았다.
···잠깐만. 이곳 담당자라면 그 자식 아니었나?
그 자식이라면 땡땡이가 아니라 다른 이유로 자리를 비웠을 것이다.
마침 잘 됐다. 그 자식 없을 때 후딱 등록하고 가야지.
“급한데 어떻게 안 될까요?”
“저도 관련 교육을 받긴 했는데···. 여기 온지 얼마 안 돼서···.”
진소미는 잠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짓더니 내게 말했다.
“혹시 개성을 가지고 계세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무개성 육체강화계열입니다.”
거짓말이었다.
진소미는 그 담당자에 전화를 하더니, 몇 번 “네! 네!” 라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일단 이쪽으로 오세요.”
나는 진소미를 따라 지하에 있는 체력단련실로 향했다.
이 시기에는 마력을 측정하는 장치조차 개발되지 않아서, 초인임을 증명하는 방법도 단순했다.
초인이 되었다는 증거로 [개성]을 보여주거나, 개성이 없다면 인간을 아득히 초월하는 신체능력으로 증명하면 되었다.
나는 체력단련실에 있는 운동기구들을 죽 둘러봤다. 진소미가 옆에서 말했다.
“우선 근력 측정부터···.”
“이거요?”
나는 마나를 컨트롤하며, 앞쪽에 놓여 있는 200kg 바벨을 한 손으로 번쩍 들어올렸다.
순간 진소미의 눈이 두 배로 커졌다.
“우와!”
근육도 별로 없는 호리호리한 남자가 이걸 들다니, 초인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
갑자기 진소미가 말을 더듬었다.
“지, 진짜 초인이셨네요?”
“그럼 가짜겠어요?”
“팀장님이 사기꾼도 종종 온다고 하셔서···.”
“······.”
이제 보니 나를 사기꾼이라고 생각했었군.
내가 그런 시선으로 쳐다보자 진소미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 그럼 다른 것도 해볼까요!”
나는 진소미가 시키는 대로 몇 가지 테스트를 더 치렀다.
초인등록법.
능력을 각성한 초인은 의무적으로 그 사실을 신고해야 한다는 법이 있었다.
이 시기에는 안 지켜도 그만인 유명무실한 법이지만, 초인으로 등록이 되지 않으면 몇 가지 불편한 점이 있었다.
내 모든 테스트 장면은 동영상으로 녹화 돼 상위기관으로 보내지고, 위에서 최종적으로 판단해 통보한다.
물론 내가 불합격될 일은 없었다. 오래 걸리지 않아 상위기관의 연락을 받은 진소미가 내게 말했다.
“축하드려요. 정식으로 초인으로 등록되셨어요.”
나는 덤덤히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초인증명서는 바로 받을 수 있나요?”
초인증명서란 운전면허증 같은 것이었다.
“정식 증명서는 며칠 걸리고요. 지금은 임시 증명서만 발급 가능하세요.”
“그럼 임시증명서 하나 주세요.”
증명서만 받으면 내 볼일은 끝났다.
아, 한 가지 물어볼 게 더 있었지.
“다음 랭킹전은 언제 하나요?”
랭킹전은 초인들이 참가하는 무술대회 같은 것이다.
정부에서 주최하는 이벤트대회로 참가는 자유지만, 성적에 따라 랭킹이 매겨지고 TV에도 방송된다.
랭킹전 순위는 인기로 직결되기에 꽤 많은 초인이 랭킹전에 참가하는 편이었다. 길드에서도 홍보를 위해 장려하는 편이었다.
물론 나도 랭킹전에 몇 번 참가해본 적이 있었다.
성적은 어땠냐고?
···그냥 참가에 의의를 뒀다고 치자.
진소미가 일정을 확인하더니 말했다.
“다음 랭킹전은 9월 15일에 시작될 것 같아요. 변경될 수도 있기는 한데, 현재로선 아마 이대로 갈 것 같아요.”
“9월 15일이라···.”
두 달이 조금 넘게 남았군. 준비하기엔 충분하려나.
“참가신청하실 건가요?”
“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달이면 우승권까지는 무리겠지만, 본선 토너먼트까지는 가능할 것이다.
첫 출전에 거기까지만 올라가도 인지도는 엄청나게 오른다.
게다가 걸려있는 상품도 쏠쏠하다.
참가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신청서 주세요.”
나는 랭킹전 참가신청서를 작성해 진소미에게 건넸다.
초인등록도 했고, 랭킹전 참가신청서도 냈고.
이제 이곳에서 볼일은 전부 다 끝냈다.
“그럼 수고하세요.”
내가 볼일을 다 마치고 몸을 돌렸을 때,
“앗, 팀장님!”
등 뒤에서 진소미가 벌떡 일어났다. 마치 아이돌 팬이 아이돌을 봤을 때 같은 목소리였다.
그녀의 시선의 끝에서 훤칠한 외모의 사내가 걸어오고 있었다.
깔끔하게 빗어 넘긴 머리와 반듯한 이목구비. 드라마에서 재벌2세를 연기할 것만 같은 얼굴.
세상 혼자 사는 듯한 사내의 이름은 주상욱.
나한테 과거로 돌아와서 엮이고 싶지 않은 인간을 꼽으라고 하면, 반드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인간이었다.
한 순간 주상욱과 내 눈이 잠시 마주쳤다.
“······.”
주상욱이 먼저 내게 고개를 가볍게 숙였고, 나도 미미하게 고개를 숙여 그 인사에 답했다.
그리고 우리는 말없이 스쳐 지나쳤다.
나는 빨리 지나갈 생각으로 걸음을 빨리했다.
뒤쪽에서 두 사람의 대화가 들려왔다.
목소리를 줄인다고 줄였겠지만 다 들렸다.
“진소미씨. 방금 나가신 분은 누굽니까?”
“아까 전화로 말씀드린 초인이세요.”
“혹시 성함이 임대인님 아닌가요?”
“어? 어떻게 아세요? 제가 아까 이름은 말씀 안 드린 것 같은데···.”
“오다가 길드 관계자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오늘 나타난 루키에 대해서···. 흥미롭군요.”
나한테 흥미 보이지 마. 이 미친놈아.
나는 걸음을 더 빨리했다.
저 자식이랑은 엮여서 좋은 꼴 볼 일이 없다.
여기에도 두 번 다시는 오지 말자. 어차피 이젠 올 일도 없지만.
“씨발. 근데 왜 이렇게 불안하지. 조만간 또 볼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틀리길 바라며, 나는 재난관리본부를 서둘러 빠져나왔다.
***
“정지! 이곳은 민간인 통제구역입니다.”
나는 앞을 가로막는 군인에게 오늘 받아온 따끈따끈한 임시 초인 증명서를 내밀었다.
“바깥에 볼일이 있어서요.”
군인은 내 증명서를 살펴보더니, 내 양손의 캐리어와 등에 짊어지고 있는 엄청난 양의 짐을 보고는 혀를 찼다.
“짐이 굉장히 많군요. 조사해 봐도 되겠습니까?”
나는 조금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저는 상관없는데. 통제구역 밖에서 길드 사람들이 기다려서요. 지금도 빨리 오라고 난린데···.”
“소속이 어디십니까?”
“화이트하우스 길드요. 아, 아직 신입이에요. 여기 연락해보시면···.”
나는 백영희의 명함을 보여주었다.
필요할 때 팔아먹을 배경이 있다는 건 이래서 좋다.
제법 이름 있는 길드 이름을 대자, 군인들도 굳이 내 짐을 뒤지거나 백영희에게 연락하는 수고를 하지 않았다.
왜냐면 이 자식들 길드에서 뒷돈 받고 있거든.
“통과.”
나는 철책을 지나 통제구역으로 들어갔다.
휘이이잉~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을씨년스러운 바람이 불어왔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폐허가 된 대지.
처참하게 부서진 건물과 오염된 땅, 마구잡이로 자라난 식물들. 황폐화된 땅과 동물의 뼈들.
나는 그 길을 지나 목적지로 향했다.
퍼스트 게이트가 발생하고 고작 2년 밖에 지나지 않은 시기.
인류는 잃어버린 땅의 5분의 1도 수복하지 못했다.
그 외에는 민간인에겐 출입이 금지된 위험지역이었다.
“그 버려진 땅이 몇 년만 지나면 수백 배로 뛸 거란 말이지.”
화이트하우스 길드에서 계약금을 받으면, 무조건 땅부터 살 생각이었다.
“흐흐흥~.”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나만이 알고 있는 미래의 일.
앞으로 약 1년 후, 지구는 새로운 차원과 연결된다.
가이아 대륙.
검과 마법이 존재하는 판타지세상.
가이아 대륙과 통하는 차원 게이트가 지구 곳곳에 열리면서 인류는 새로운 문명과 조우하게 된다.
한국에서는 단 한곳.
바로 이곳, 지금 내가 서 있는 땅에 고정게이트가 생성된다.
당연히 이 주변은 두 차원이 교류하는 중심지가 되고 땅값은 어마어마하게 오른다.
그러니까 모조리 살 생각이었다.
여기에 빌딩까지 지어서 건물주가 되면,
“앉아서 떼돈을 버는 거지.”
물론 그 전에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적지 않았다.
오염된 부분도 해결해야 하고, 돈냄새 맡고 꼬일 날파리도 미리미리 제거해야하고···.
“뭐,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텐트나 칠까.”
나는 등에 짊어지고 온 짐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무려 24인용 텐트.
한동안은 이곳을 집으로 쓸 생각이었기에 가장 큰 걸로 사왔다.
설치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각성하기 전이었다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초인이니까.
뚝딱뚝딱 텐트 설치를 끝내고 바위에 앉아 저녁으로 통조림을 먹고 있는데, 그 냄새를 맡은 야생동물 몇 마리가 접근했다.
크르르르!
이곳에는 사람들에게 버려지거나 동물원을 탈출한 동물들이 새로운 생태계를 이루고 있었다.
나 역시 그 생태계의 법칙을 존중할 생각이었다.
물론 맛있게 먹는 입장으로 말이다.
“마침 잘 됐네. 고기가 없으니까 힘이 안 나더라고.”
나는 한쪽에 놓아둔 칼을 들고 일어섰다.
그리고 잠시 후, 나는 불판위에 치이이익- 익어가는 고기를 바라보며 침을 꼴깍꼴깍 삼켰다.
“슬슬 다 익은 것 같은데.”
내가 큼직한 고기를 한입 가득 베어 물려고 할 때였다.
-꺼지지 않으면 죽여 버릴 거야!-
“···!”
나는 깜짝 놀라서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돌아봤다.
비명소리 때문이 놀란 것이 아니었다. 그 살벌한 내용 때문도 아니었다.
사용된 언어 자체가 문제였다.
“가이아 대륙어?”
지금 이 시점에서는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언어.
가이아 대륙 공용어가 방금 들렸었다.
나는 먹던 고기를 내려놓고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바라봤다. 혹시 착각인가 싶어서 고개를 갸웃거릴 때,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경고했어! 가까이 오면 죽여 버린다고!-
확실했다. 가이아 대륙 공용어다.
하지만 어떻게? 아직 게이트는 열리지 않았는데?
생각해 본다고 알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선 직접 확인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비명이 들려오는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휘익!
동시에,
스르르륵.
개성을 사용해 모습을 감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