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s Life After Retirement RAW novel - Chapter 6
6화 이 아이는 커서
흐릿해진 내 모습은 주변 풍경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내 개성은 [은신]
주변의 사물과 동화되어 존재를 감추는 힘이다.
정찰, 첩보, 암살 등에 잘 어울리는 능력.
예전에는 이 능력을 활용해 위험지역을 정찰하거나, 첩보임무를 수행하기도 했었다.
그러다 죽을 뻔한 적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옛 기억들을 떠올리며 나는 치를 떨었다.
“그런 개고생을 다시 하나 봐라.”
이번 생에서는, 내 개성에 대해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꺼져! 죽여버릴 거야!-
거 누군지 모르겠지만 성질 한번 사납네.
목소리는 처음보다 멀어져 있었다. 목소리의 주인이 한 자리에 있지 않고 움직이고 있다는 의미였다.
누군가, 혹은 무언가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이동속도를 높였다.
그런데 얼마 가지 못해서 문제가 생겼다.
스스슷.
얼마 사용하지도 않았는데 은신이 풀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문제는 내가 가진 마나의 양이었다. 무의식적으로 회귀하기 전에 보유했던 마나를 생각하고 능력을 사용했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내가 은신 능력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었던 것은 초인으로 각성하고 1년은 더 지나서였다.
나는 마나가 바닥나기 전에 은신을 해제하며 투덜거렸다.
“답답해서 안 되겠네. 마나부터 빨리 늘려야지.”
다행히 나는 마나를 빠르게 늘릴 수 있는 방법을 몇 가지 알고 있었다.
20년 후의 미래에는 누구나 아는 상식이지만,
지금은 세상에서 나밖에 모르는 방법.
그 지식을 활용한다면 빠른 속도로 몸 안에 마나를 쌓을 수 있었다.
-꺼져! 가까이 오지마!-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주위를 살폈다. 반쯤 무너진 빌딩이 하나 보였다.
타닷!
건물 벽을 타고 순식간에 옥상까지 내달렸다. 그리고 건물과 건물 사이를 뛰어넘으며 이동했다.
휘익! 휙!
순식간에 배경이 뒤로 지나갔다.
[은신]을 사용하지 않아도, 기척을 감추거나 몰래 접근하는 것은 내 특기 중 하나였다.잠시 후 목적지에 도착한 나는 몸을 낮추고 아래에 벌어진 상황을 살폈다.
버려진 폐건물 사이, 막다른 골목에 몰려 있는 어린 소녀.
그리고 소녀에게 접근 중인 우락부락한 사내들.
나는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간단히 요약했다.
인신매매 현장이로군.
이 시기에는 아직 치안이 불안정해서, 뒷골목이나 도시 외곽에서 저런 범죄가 종종 일어나곤 했다.
하지만 여긴 도시외곽 정도가 아니라 통제구역인데?
범죄조직 놈들이야 그렇다고 쳐도, 저런 꼬맹이가 어떻게 여기까지 들어왔지?
나는 소녀를 자세히 살펴봤다.
이제 겨우 10살쯤 되었을까.
허리까지 내려오는 붉은 머리카락은 타오르는 불꽃같았다.
얼굴은 어른이 되면 대단한 미인이 될 거라는데 전 재산도 걸 수 있을 만큼 예뻤다.
하지만 그 표정은 야생짐승처럼 사나웠고, 작은 손에는 어울리지 않게 칼을 들고 있었다.
“꺼져! 다 죽여 버리기 전에!”
소녀의 말은 가이아 대륙 공용어였기에 사내들은 알아듣지 못했다.
알아들었다고 해도 그냥 물러날 놈들이 아니었지만 말이다.
소녀를 쫓아오느라 지쳤는지, 사내들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후우-. 씨바알···. 좆만한 게 왜 이렇게 빨라?”
“허억··· 헉. 근데 저건 어느 나라 말이야?”
“알게 뭐냐. 외국년이 더 비싸게 팔린다는 게 중요하지.”
천천히 소녀에게 다가가는 녀석들의 어깨와 팔뚝에는, 똬리를 튼 붉은뱀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그걸 본 순간 나는 녀석들의 정체를 깨달았다.
범죄조직
살인, 강도, 납치, 인신매매.
돈이 되는 짓이라면 뭐든지 하는 쓰레기들이었다. 퍼스트 게이트 이후 생겨난 많은 범죄조직 중에서도 규모로는 첫손에 꼽히는 놈들이다.
붉은뱀의 조직 수뇌부에는 초인들까지 포함 돼 있어서, 전력이 웬만한 길드보다 강했다.
군이나 경찰과도 커넥션이 있는 놈들이라, 통제구역을 드나드는 것 정도는 저 녀석들에겐 아무것도 아니었다.
한마디로 건드리기엔 꽤 께름칙한 상대.
사내들은 흩어져서 소녀를 포위하고 천천히 접근했다.
“꼬마야. 좋은 말로 할 때 오빠들 따라가자.”
“좋은 곳에 데려가 줄게. 먹을 것도 주고 잠도 재워주고. 너 엄마아빠 없지?”
소녀도 사내들처럼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다.
알아들었다고 해도 그걸 믿고 따라갈 만큼 순진해 보이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난 경고했어! 전부 너희가 자초한 짓이야!”
소녀가 표독스럽게 외친 순간,
화르르륵!
소녀의 좌우에 피어나는 붉고 파란 불꽃.
두 개의 불꽃은 소녀를 호위하듯 빙글빙글 돌았다.
깜짝 놀란 사내들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씨발! 저건 또 뭐야?”
“초능력?”
그러나 놀란 사내들이 주춤 물러난 것은 잠깐이었다.
소녀가 만들어낸 두 불꽃은 야구공 크기에 불과할 정도로 작았다. 게다가 바람이라도 세게 불면 꺼질 듯 위태로웠다.
피시시식.
불꽃이 희미해지더니 이내 꺼져버렸다. 소녀는 능력을 사용한 반동 때문인지 비틀거리다 주저앉았다.
놀라서 물러났던 사내들이 다시 다가왔다.
오히려 방금 전 소녀가 보여준 불꽃이 그들의 탐욕에 기름을 부었다.
“대박이다! 저년 초인이었어!”
“팔면 얼마나 받을 수 있을까?”
“씨발. 부르는 게 값이지. 잡아서 목줄만 잘 묶어놓으면 평생 노예로 쓸 수 있는데.”
사내들은 더욱 집요해진 모습으로 포위망을 좁혀왔다.
셋 중 한명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 형님. 아까 생겨난 게이트 근처에서 도망친 꼬마를 찾았습니다. 이거 대박입니다. 초인이에요!”
나는 그들의 대화로 돌아가는 상황을 대충은 파악할 수 있었다.
‘저 꼬마. 차원 난민이었군.’
가이아 대륙과 지구의 차원연결 게이트가 고정적으로 연결되는 것은 약 1년 뒤.
하지만 그 전에도 게이트가 불안정하지만 잠깐씩 연결되는 경우가 있었다.
그 현상에 휘말려 차원을 넘어오거나, 넘어간 이들을 ‘차원 난민’ 이라고 불렸다.
매우 희귀한 경우였다.
훗날 귀환자들이 그 사실을 증명하지 않았다면 아무도 믿지 않았을 정도로.
그나저나 이걸 어쩐다?
“꼬마야. 포기하고 이리와.”
“오빠들이 맛있는 거 사줄게.”
지구에 떨어진 가이아 대륙출신 꼬마.
그 꼬마를 납치해 노예로 팔려는 거대 범죄조직.
성가신 놈들이랑 엮이는 건 싫은데···.
냉정하다고 비난해도 어쩔 수 없었다.
이 혼란스러운 시기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런 범죄에 노출 돼 있었다.
그때마다 모든 사람을 돕겠다며 손을 내밀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자칫 거대한 범죄조직을 적으로 돌릴 수도 있는 상황이 아닌가.
그만한 위험을 감수하고 저 꼬마를 구할 이유가 있을까?
“···있지.”
나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가이아 대륙어.
1년 후에 그 언어를 아는 사람이 여럿이 있는 것과, 나 혼자인 것은 천지차이였다.
여기에 가이아 대륙에 대한 정보도 얻을 수 있다면 금상첨화.
결정을 내린 나는 건물에서 뛰어내렸다.
속전속결로 끝낸다.
“살모사 형님이 애들 보낸데. 도망 못 치게 막고만 있으란다.”
전화통화를 끝낸 사내의 말에 다른 사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입가에 징그러운 미소가 맺혔다.
“우리도 한몫씩 챙겨주겠지?”
“그걸 말이라고. 저 얼굴에 초인이면 특상품인데.”
“흐으. 잘만 키우면···.”
히죽거리는 사내들. 그리고 절망에 빠진 소녀.
간신히 부들거리는 팔로 칼을 들고는 있지만, 소녀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소녀를 포위한 놈들도 그걸 알기에 완전히 방심하고 있었다.
뭐, 방심 안했어도 놈들 따위가 날 막을 수는 없었겠지만.
-푸욱!
“컥···!”
첫 번째 놈이 쓰러지기 전에, 나는 두 번째 놈의 목젖을 갈랐다.
촤아악!
그제야 첫 번째 놈이 바닥에 쓰러지고, 세 번째 놈이 나를 발견하고 소리치려 했다.
“넌 뭐···!”
그러나 놈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내가 던진 비수가 심장을 꿰뚫었으니까.
털썩. 털썩. 털썩.
세 녀석이 도미노처럼 연속으로 바닥에 쓰러졌다.
회귀한 이후로 첫 살인이었다.
물론 아무런 감흥도 없었다.
쓰레기를 치우는데 감정을 소비하지는 않으니.
나는 소녀를 돌아봤다. 녀석은 돌처럼 굳어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 가이아 대륙 출신이지?”
내가 유창한 가이아 대륙어로 말하자 소녀의 눈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일단 따라와. 다른 놈들이 오기 전에 자리를 피하자.”
“당신을 어떻게 믿어?”
애처로울 정도로 부들거리는 팔과 다리. 꼬맹이는 이미 저항할 힘도 없었다.
그냥 강제로 데려가는 건 쉬웠다.
하지만 어린애를 달래는 데는 더 간단한 방법이 있었다.
“너 배고프지?”
소녀의 눈이 급격히 흔들렸다.
“무, 무슨···.”
꼬르륵.
초인의 귀를 속일 수는 없는 법. 아까부터 엄청 꼬르륵 대는 걸 들었거든.
나는 특별히 선심 쓴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따라오면 밥 줄게.”
잠시 후, 꼬맹이는 못 이기는 척 나를 따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