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s Life After Retirement RAW novel - Chapter 74
74화 모드레아
촤아악!
빛이 번쩍일 때마다 몬스터가 반으로 갈라졌다.
“크하하! 덤벼라 이놈들!”
레너드는 호쾌한 웃음을 터트리며 검을 휘둘렀다. 오러 블레이드가 맺힌 검. 그는 평생 꿈꿔왔던 검을 안개 숲의 몬스터들에게 원 없이 뽐내고 있었다.
“크하하하!”
그 뒤를 따라가던 대인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조용히 좀 싸울 수 없어? 주변에 있는 몬스터란 몬스터는 다 몰려오겠네.”
대인의 불평에도 레너드는 아이처럼 신이 난 표정이었다.
“하하하! 다 몰려오면 어떤가! 내 오러 블레이드로 해치우면 그만인 것을! 이렇게 말이야!”
이제는 노인보다는 미중년이라고 불려야 할 모습의 레너드는, 달려드는 좀비 엘프의 허리를 반으로 잘라버렸다.
촤아아악!
그러나 상대는 언데드. 반 토막이 난 좀비 엘프가 두 팔로 상체를 질질 끌며 기어왔다.
그르르···!
대인은 자신에게로 기어오는 좀비 엘프의 이마 위로 제우스의 총구를 겨눴다.
“할 거면 마무리까지 제대로 하던가.”
타앙!
머리에 구멍이 뚫린 좀비 엘프의 몸이 축 늘어졌다.
그 모습을 본 레너드가 호쾌하게 웃었다.
“하하하! 내가 다 처리하면 자네가 심심할 것 같아 남겨놓은 거라네!”
그리고는 몰려오는 좀비들을 향해 홀로 돌진했다.
“오너라! 소드마스터 레너드가 모두 상대해주마!”
촤악! 촤아악!
혼자서 안개 숲을 종횡무진 누비는 레너드를, 대인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아주 신났네. 신났어.”
덕분에 편하기는 했다.
레너드가 소드마스터로 각성해준 덕분에, 안개 숲에 들어온 후로 지금까지 대인은 길만 제대로 찾으면 되었다.
그러다가 한번씩은,
“어이 노인네! 그쪽 아니라고! 몬스터 쫓아서 들어가지 마!”
“하하하하하!”
자꾸만 다른 길로 빠지려는 철없는 노인에게 소리 지르는 일도 해야 했지만.
호킨이 대인의 옆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너무 뭐라고 하지 마세요.”
레너드를 바라보는 호킨의 얼굴에는 그가 건강해져서 다행이라는 안도감, 그리고 부러움이 담겨 있었다.
“죽다가 살아나셨잖아요. 게다가 평생 꿈꿨던 경지를 이루면 저 정도 반응은 아무것도 아니죠.”
호킨은 부럽다는 듯이 레너드를 바라봤다.
소드마스터.
똑같지야 않지만, 마법사로 따지면 7서클 대마법사의 경지에 레너드는 도달한 셈이었다.
그리고 그가 깨달음을 얻도록 도와준 사람이 바로···.
호킨은 대인에게 은근슬쩍 말했다.
“크흠. 레너드 경에게 책을 읽어주셨다고···.”
도대체 그 이상한 글자가 쓰여진 책에 무슨 내용이 적혀 있기에, 다 죽어가던 사람을 소드마스터로 각성시켰단 말인가!
호기심이 많은 마법사답게, 호킨은 그 내용이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리고 혹시라도, 대인이 자신에게도 그 책의 내용을 읽어준다면···.
‘나도 대마법사가 될 수 있을지도 몰라!’
“꿈 깨. 넌 안 돼.”
대인은 짧은 몇 마디로 호킨의 희망을 산산조각 냈다.
“예? 하지만···.”
“노인네는 벽을 넘을 계기가 필요했던 것뿐이고, 넌 아직 멀었어.”
젊은 나이에 5써클 마법사라는 건 분명 상당한 재능이었다. 하지만 호킨이 대마법사가 되려면 몇 단계나 되는 과정이 더 필요했다.
“그리고 그건 검사가 쓴 책이야. 나한테 대마법사가 쓴 책은 없다고.”
‘하나 구해볼 생각이긴 하지만.’
대인은 굳이 뒷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대장로가 준 안개 숲의 옛 지도와 자신의 기억을 대조해가며 길을 잡았다.
“일단 이쪽으로···. 근데 이 조증 걸린 노인네는 그 사이에 또 어딜 간 거야?!”
저 멀리 안개 너머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하하하!”
***
대인, 레너드, 호킨.
세 남자가 안개 숲에 들어 온 지 반나절이 지났다.
대인은 일행을 데리고 안개 숲을 최단거리로 주파했다.
오기 전에 대장로에게 받은 옛 숲의 지도와, 과거에 와본 적 있던 기억을 더하자 어렵지 않게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지칠 때까지 검을 휘두르고 나서야 조금 진정이 된 레너드가, 일행의 선두에서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안개가 갈수록 짙어지는군.”
스스스슷.
안개 숲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안개는 더욱 짙어져서, 이제는 몇 미터의 앞의 사물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물론 오감이 전부 초인수준으로 발달한 대인과 레너드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호킨도 강철마차에서 가져온 적외선 투시경을 쓰고 있었다.
호킨이 주위를 죽 둘러보며 말했다.
“주변에 몬스터는 안 보입니다.”
대인이 목소리를 조금 낮추며 말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몬스터 개체는 줄어들어. 대신 점점 더 강해지니까 긴장은 놓지 마.”
스스스슷.
불길하게 피어난 안개가 세 사람의 몸을 훑듯이 피부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 불쾌한 느낌에 호킨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으윽···.”
이 안개는 인간인 세 사람에게는 그저 소름 돋는 감촉을 전할 뿐이었지만, 엘프에게는 치명적인 독이자 저주였다.
이 안개 속에 들어온 엘프는 극심한 환각과 공포를 느끼고, 결국은 좀비로 변해서 안개 속을 배회하게 된다.
“잠깐만.”
대인은 오랜 기억 속에 남아있는 바위를 발견했다.
“···여기까지는 제대로 찾아왔나 보네.”
바위는 엘프의 얼굴을 닮아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수많은 칼자국이 새겨져 있었다.
누군가 바위에 엘프의 얼굴을 조각하고, 그것을 수없이 난도질한 흔적.
이 안개 숲을 만든 자의 감정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장소였다.
바위를 본 레너드가 미간을 찌푸렸다.
“끔찍하군.”
대인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여기서 잠깐 쉬었다 가자. 정비도 좀 하고.”
세 사람은 출발한 후 처음으로 휴식을 취했다. 바위에 기대어 앉아 배를 채우고, 무기와 방어구를 점검했다.
잠시 여유가 생기자 레너드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이 안개. 수백 년 넘게 엘프들의 골칫거리라고 들었네만.”
출발하기 전에 앨리나 공주를 만나서 이야기를 들은 레너드였다.
대인은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실제로 엘프들의 안전을 위협하니까. 이 안개만 없어지면 앓던 이가 빠진 기분일걸?”
그 순간, 레너드와 호킨은 동시에 “과연!” 하고 감탄사를 터트렸다.
“자네! 도대체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했나?”
“역시 대단하십니다!”
반응이 뭔가 이상해서 대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이 둘이 자신을 존경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거지?
“무슨 소리야?”
심지어 말로 안 해도 다 안다는 눈빛이었다. 레너드가 대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정말이지 고맙네. 자네가 공주마마를 위해 이렇게까지 노력해주는 것을 보면···.”
“내가 뭘 해?”
대인이 의아함을 가득 담아서 쳐다보자, 레너드는 훗, 하고 웃으며 말을 이었다.
“능청은. 안개의 숲 문제를 해결해서 엘프족이 우리를 은인으로 여기게 하려는 의도가 아닌가.”
“그건 그런데. 근데 그게 공주랑 무슨 상관···.”
대인이 말을 끝맺기도 전에, 호킨은 퀴즈 프로에 출연한 학생처럼 정답을 외쳤다.
“그럼 엘프들이 저희에게 호감을 가지겠지요. 저희의 대계도 더욱 빨라질 테고요! 전부 계산하신 것 맞죠?”
···아닌데?
나중에 엘프의 숲에 별장이나 하나 지을까 해서 온 건데? 덤으로 여기서 챙겨 갈 물건도 있어서 온 건데?
대인은 딱히 공주를 위해서 더 도움을 줘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만큼 해줬으면 됐지. 지 인생 앞으로 지가 알아서 해야지.’
하지만 레너드와 호킨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대인이 자신들을 돕기 위해 안개 숲의 문제까지 해결하려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이유도 짐작하고 있었다.
‘역시 그거겠지요?’
‘아무렴. 그것 밖에는 이유가 없지 않겠나.’
두 사내가 눈빛을 교환하더니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호킨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여기에 사내들끼리만 있으니 하는 말입니다만.”
릴리는 아직 회복 중이었고,
장영신은 그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고,
하프엘프인 앨리나는 이곳에 들어올 수 없었다.
때문에 이번 파티는 남자 셋으로만 구성되었다. 그리고 그중 둘은 한 명을 확실하게 밀어주기로 결심했다.
“저희 공주님. 아름답지 않습니까?”
“······.”
대인은 이게 무슨 개수작인가 싶었지만, 일단 가만히 들어보기로 했다.
호킨이 눈을 반짝이며 말을 이었다.
“아시겠지만 그 미모는 대륙 제일. 게다가 문무 출중하시지, 하프엘프라서 잘 늙지도 않으시지, 이런 조건은 어디에서도···.”
대인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무슨 물건 팔러 나왔냐?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반대쪽에서 레너드가 대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작게 속삭였다.
“크흠. 우리가 다리를 놔주겠다는 뜻이네.”
호킨이 그 말을 이어 받아서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슬금슬금.
두 사람은 대인을 가운데 두고 점점 엉덩이를 가까이 붙여왔다.
어느새 부담스러울 정도로 대인에게 가까이 붙은 호킨이, 국가의 1급 비밀이라도 말하듯 손가락으로 입술을 가리며 말했다.
“사실 공주님도 마음이 없지는 않으신 것 같습니다.”
“···뭐?”
더 솔직하게 말하면, 앨리나는 마음이 꽤 많아 보였다. 하지만 두 사내는 모시는 주군의 자존심을 세워주기로 했다.
레너드가 은근슬쩍 말했다.
“자네가 노력하면 불가능하지는 않다, 그런 이야기네. 신분의 차이야 뭐···. 지금은 난세가 아닌가.”
호킨도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러니 이제부터 저희만 믿으십시오.”
후후후···.
양쪽에서 음흉한 웃음을 짓는 두 사내 사이에서, 대인은 정면에 있는 안개너머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어휴.”
대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두 사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반응이 왜 저러지?’
‘분명 좋아할 줄 알았는데요?’
스르릉.
대인이 허리춤에서 샬리트를 뽑으며 말했다.
“헛소리 그만하고 싸울 준비나 해. 적이다.”
잠시 후, 안개 속에서 기괴한 형태의 그림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르르···.
그르르···.
그 순간 레너드와 호킨도 벌떡 일어났다. 레너드가 검을 뽑아들고 달려 나가며 외쳤다.
“내가 처리하지! 빨리 처리하고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하세나!”
휘익!
순식간에 그림자 앞에 다다른 레너드가 검을 휘둘렀다. 그의 검에는 오러 블레이드가 얇게 맺혀 있었다.
그 순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까앙!
“!!”
오러 블레이드가 막히자 레너드는 눈을 부릅떴다. 그러나 그는 백전노장의 기사답게 빠르게 몸을 뒤로 물렸다.
그가 서 있던 자리로 기형적으로 긴 팔이 휘둘러졌다.
까가가각-
레너드의 흉갑 일부가 날카로운 손톱에 긁혀나가고, 곧 안개를 뚫고 기이한 형상의 엘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르르···.
그르르···.
아름다운 얼굴 위로 얼기설기 꿰맨 자국들이 보였다. 몸도 마찬가지였다. 잘못 수선한 봉제인형마냥 팔다리가 기형적이었다.
도저히 엘프라고도 말하기 힘든 괴물들.
하나같이 기이한 마력을 뿜어내고 있는 괴물은 총 셋이었다.
대인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키메라 엘프. 약점은 가슴 한가운데 박혀 있는 정령석이니까 잘 노려.”
우우우우웅!
키메라 엘프들이 일제히 정령의 힘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붉게, 파랗게, 그리고 노랗게.
다양한 색으로 피부가 물드는 키메라 엘프들.
그러나 대인의 시선은 키메라 엘프가 아닌 그 뒤를 향하고 있었다.
키메라 엘프들이 까다롭기는 해도, 약점만 알면 상대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레너드와 호킨 둘이서 힘을 합친다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저 뒤에 있는 녀석인데···. 생각보다 빨리 나타났네.”
스르르륵.
짙은 안개를 좌우로 밀어내며, 새하얀 나신의 엘프가 걸어 나왔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흑단 같은 머릿결.
그에 대비되듯 잡티 하나 없이 깨끗한 육체.
그 손에는 커다란 대궁이 들려 있었다.
대인은 엘프의 손에 들린 대궁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예전에 저 활로 수십 명의 초인을 꿰뚫는 모습을 직접 봤으니까.
대인은 저 엘프의 이름도 알고 있었다.
“모드레아.”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모드레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천 년 전, 이 땅에 정착했던 대마법사 드레이츠가 만든 인형.
그 형상은 마법사 드레이츠가 가장 사랑했던, 그리고 가장 증오했던 엘프를 본 딴 것이었다.
훗날 지구의 초인들에 의해 드레이츠의 던전이 발굴되고, 그가 남긴 일기가 세상에 공개되면서 알려진 스토리.
나중에는 지구에서 드라마로 만들어질 정도로 인기 있는 캐릭터이기도 했다.
“···뭐, 그거야 나중 일이고.”
지금 이 앞에 있는 모드레아는 안개 숲을 지키는 최강의 가디언이었다.
츠츠츠츠츠.
대인은 정령의 힘을 끌어내는 모드레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뒤에 있는 두 사람에게 말했다.
“둘은 키메라 엘프를 맡아. 저건 내가 맡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