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habilitating the Villainess RAW novel - Chapter 104
진짜 악녀
공기가 떨린다.
아니, 정확히는 내 몸이 떨리는 것이었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나는 에즈란 공작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그 역시도 공허한 눈빛으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차가운 분위기 속에서 먼저 입을 뗀 것은 나였다.
“아버지, 오랜만입니다.”
“그래, 오랜만이군. 무려 몇 주를 못 봤으니.”
다시 멈추는 대화. 조금은 따뜻해졌던 것 같던 분위기는 재차 차갑게 되돌아가는 듯했다.
나는 온 힘을 간신히 짜내어 말했다.
“모든 기억을 알아차렸습니다.”
그 말에 에즈란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놀랄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허나 그의 표정에서는 일말의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역시 내가 예상했던 게 맞았나.’
내가 팔찌를 깨부수고 엿보았던 기억에서는 오러를 펼쳐 냈으면서 지금은 불가능하던 에즈란 공작.
오러를 펼치는 것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심상이었다. 그러니 에즈란 공작이 무엇을 잃었을지는 뻔했다.
문제는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전의 분위기를 잃은 바슬렛가의 저택.
가장 큰 이유는 에즈란 공작의 부인인 다리아 바슬렛의 부재였다.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직접 이야기를 들려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쉽게도 그건 안 되겠군.”
에즈란 공작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 생각대로였다.
당연히 그가 섣불리 과거에 대한 말을 꺼낼 수 있을 리는 없었다.
무언가 제약이 있을 것이 뻔했다.
그게 아니라면, 분명히 이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을 테니까.
에즈란 공작이 잠시 잠적했던 것도 제약과 관련되어 있겠지.
다만 좀 더 상황을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그래도 당장 해야 할 일은 많으니.”
말만 아버지가 아니라, 진짜 아들로서 에즈란 공작을 대하고 싶다.
그래서 에즈란 공작에 대한 것을 물어보고자 했다. 하지만 에즈란 공작이 먼저 내게 말을 건넸다.
“다만 네가 모든 일을 파악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단 한 가지⋯⋯.”
에즈란 공작이 기침과 함께 말을 멈추었다. 무언가가 불편하다는 듯이 얼굴을 찌푸리던 에즈란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
에즈란 공작의 입에서 조금씩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괘, 괜찮으십니까!?”
“괜찮다. 일주일 동안 검을 너무 세게 휘두른 것 같군.”
더 물을 수도 없었다. 에즈란 공작이 이를 원치 않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사실 에즈란 공작이 갑자기 피를 흘린 이유도 조금은 짐작이 되었다.
‘제약 때문이겠지.’
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려고 해서 피를 흘린 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일단 오늘은 여기서 대화를 멈추는 것이 옳았다. 추후에 해결책을 도모해 보는 것이 더 나을 터였다.
에즈란 공작이 방에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뒤엔, 복잡한 마음에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샤엘에게 가서 마음을 달랠까.’
아니다. 일단 에즈란 공작이 쉴 수 있도록 쌓여 있는 바슬렛가의 일거리를 처리해야만 했다.
* * *
산처럼 쌓인 편지들이 눈에 들어왔다. 고개를 돌려 옆에 쌓여 있는 서류들까지 보고 나니, 앞으로의 고생이 훤히 보였다.
“샤엘은 어디로 간 거지?”
“도련님의 방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일이 끝나면 찾아오라고 하셨습니다.”
내 질문에 바슬렛가의 집사가 말했다.
나랑 절대로 떨어지지 않으려던 샤엘. 그런 샤엘이 나를 혼자 일하게 두고 방에 간 것은 간단한 이유 때문이었다.
‘내가 아버지를 위해 일하고 싶다고 했으니까.’
아무리 샤엘이라도 떼를 쓰지는 못 했다. 물론 포기가 워낙 빨랐기에 의문이 들긴 했지만.
조금 뒤에 디저트로 샤엘의 기분을 풀어주면 될 테니 괜찮을 거다. 그게 아니더라도 키스 몇 번이면 샤엘의 기분은 괜찮아질 테고.
방에서 혼자 삐져서는 볼을 부풀리고 있을 샤엘을 상상하며 편지를 보았다.
“이 가문이 우리 가문에 서신을 보낸 적이 있던가?”
“모르겠습니다. 딱히 접점이라고 할 것도 없었는데, 저로서도 알지 못하겠습니다.”
집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슬렛가에 온몸을 다 바친 자였으니, 믿을 만한 자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의문인데.’
집사마저도 고개를 갸웃거릴 정도라면 중요한 편지일 수도 있다. 사실 편지를 보더라도 무언가 급한 상황이 드러났다.
이 편지는 고급스러운 모양새뿐만이 아니라 형태 유지를 위해 세련된 마력을 내뿜고 있었으니까.
어서 편지를 뜯어 보았다. 휘적휘적 적혀 있는 글자들이 보였다.
ㅡ에란 바슬렛.
난데없는 내 이름. 발신인이 얼마나 예의 없는지를 알 수 있었다.
ㅡ아쉽게도 우리는 제국 축제를 참여하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사랑을 증명해 보이고 싶다.
이게 무슨 소리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술에 취한 상태로 편지를 보내기라도 한 건가?
커져가는 의문과 함께 시선을 내려 편지를 이어 읽었다.
ㅡ에란 바슬렛, 제국 최고의 연인을 가리자.
이미 제국 최고의 연인은 나와 샤엘로 결정이 났다. 순수한 사랑을 증명했고, 그 무엇보다도 끈적하게 이어져 있는 사랑을 내보였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1,203번이라는 말도 안 되는 수치의 키스. 어떤 이라도 샤엘과 나를 사랑으로 이길 수는 없을 거다.
그러니 괘씸했다. 도대체 누가 이런 편지를 내게 보낸 걸까?
편지를 재빨리 살폈다. 그제서야 느껴지는 익숙함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마탑주의 마력이 느껴지는 편지. 그리고 황태자의 방에서 훔친 책으로 보았던 황태자의 필체.
그 모든 것이 편지에 담겨져 있었다. 편지의 끝 부분에는, 자기들이 마탑주와 황태자라는 말도 언급이 되어 있었다.
얼굴이 구겨졌다. 더는 볼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급기야 편지로 나를 괴롭혀온다.
‘지랄하네. 제국 최고의 연인을 가리자고?’
1,203번의 키스가 장난으로 보이나.
말처럼 보이지도 않는 마탑주와 황태자의 편지를 찢어 버리려고 했다. 더 이상 그들에 대한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았다.
사실 혐오감이 들어 뒷내용이 보고 싶지도 않았고.
그러나 안타깝게도⋯ 검술 명가의 재능이 흐르는 눈은 내가 읽고 싶지 않았던 문구조차도 읽어내 버렸다.
ㅡ우리는 네가 자랑하는 1,204번의 키스를 곱절로 뛰어넘었다.
“씨발.”
나도 모르게 욕이 나왔다. 옆에 서 있던 집사는 흠칫 놀라며 내 눈치를 살폈다.
쫙.
쫘아악.
화르르륵.
파사삭.
편지가 단숨에 재가 되어 흩뿌려졌다. 나는 힘껏 구겨진 얼굴을 애써 피며 집사에게 말했다.
“앞으로 마탑주와 황태자가 보내는 편지는 받지 마.”
“예⋯? 그게 그 사람들이 보낸 편지였습니까?”
불현듯 머릿속에 좀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발신인이 이상한 가문으로 되어 있던 편지.
마탑주와 황태자는 내가 편지를 무시하지 못 하도록 그렇게 보낸 것이 분명했다.
마음속으로 그들에게 욕을 퍼부으며 일에 집중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편지들에는 마탑주와 황태자의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ㅡ혹시 알고 있나? 요즈음 제국에서는 성별이 바뀌는 장르의 소설이 인기라더군.
ㅡ그래서 마탑주가 아주 큰 결심을 했다.
‘다른 가문에서 보낸 편지잖아.’
그런데 왜 발신인이 마탑주와 황태자인 거냐고.
마탑주와 황태자가 보낸 편지를 불살랐다.
그다음에는 죄 없는 집사를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 편지를 볼 때마다 쌓인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으니까.
집사가 내 시선에 당황하며 말했다.
“살펴 보니⋯. 다른 가문의 이름으로 계속해서 편지를 보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역시 예상이 맞았다. 그렇다면 편지를 무시할 수도 없었다.
중요한 편지를 무시해 버리면 안 될 테니까.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하나뿐이었다.
“앞으로 편지는 다른 사람이 받도록.”
“예. 알겠습니다!”
편지를 보게 될 누군가에게는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 * *
입이 찢어지도록 웃음을 지은 샤엘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앞에는 바슬렛 가문의 집사가 땀을 뻘뻘 흘리며 내용을 전달하고 있었다.
“마, 말씀대로 적어 주셨던 편지를 도련님께 건넸습니다.”
“그래서?”
“편지를 보시더니, 앞으로는 다른 사람에게 편지를 맡기겠다고 하셨습니다.”
푸흐흐.
소름 끼치는 웃음 소리를 내는 샤엘. 집사는 샤엘의 눈치를 살피며 샤엘에게 질문을 건넸다.
“편지의 발신인이 공녀님이 아니라 마탑주와 황태자로 되어 있다고 하셨습니다. 혹시 편지를 잘못 전달한 것은 아닌지⋯⋯.”
“아니, 제대로 전달했어. 이제 가 봐도 돼. 에란은 이제 일이 없을 테니 불러오고.”
집사가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며 방을 나갔다. 그때까지도 샤엘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런 샤엘이 고개를 돌려 책상을 보았다.
책상에는 고급스러운 편지지와 함께 펜이 놓여 있었다. 에란을 더 치밀하게 속이기 위한 마탑의 마도구들도 마찬가지였다.
편지지에는 황태자의 필체로 글씨가 적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샤엘이 적은 글씨였다.
황태자가 쓴 책을 보았던 샤엘이 그의 글씨체를 따라해서 만든, 모순되게도 최악의 걸작이었다.
상황의 시발점은 다소 간단했다.
이전에 술에 취했던 에란. 바보 같은 에란은 샤엘에게 자신의 모든 계획을 말했었다.
사랑의 묘약을 그렇게 이용하다니. 조금은 충격이 큰 계획이었으나 오히려 샤엘에게는 이득이었다.
그 덕분에 에란과 함께 보낼 시간을 늘릴 수 있었으니까.
편지를 쓸 때에는 조금 거부감이 들었지만. 상관 없다. 에란과의 시간이 더 중요했으니.
끼이이익.
마침 에란이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무언가 짜증이 난다는 듯이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왜 그러세요⋯⋯?”
샤엘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에란에게 말을 건넸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요? 일단 이리 오세요.”
샤엘의 말대로 가까이 다가온 에란이 샤엘의 품에 안겼다.
온갖 피로가 느껴지는 것 같은 에란을 보니 온종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샤엘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샤엘의 계획이 완벽하게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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