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fe Player RAW novel - Chapter 47
“…할 말은 참 많지만.”
공명접선(共鳴摺扇)을 한 번 휘둘렀다.
주문을 읊을 필요도 없었다.
바람이란 그녀에게 익숙한 것이었으니까.
이 세상 어디에나 존재하는 바람이 어떤 원리로 발생하는지 이해할 필요는 없었다.
“내가 그 새끼들 가만 안 둘 줄 알아.”
마나합금으로 제작된 쥘부채를 휘둘렀다.
그저 바람에 살이 베이는 감각으로.
그저 바람에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날아가는 감각으로.
“일을 이 따위로 해?”
그녀, 신서영은 분을 삭이지 못했다. 도도하고 아름다운 얼굴이 일그러질 정도로.
“그 새끼들을 진짜…!”
대한민국에서 최고라고 거론되는 열 두 명의 플레이어, 십이좌. 그 열두 개의 좌 중 하나를 차지하는 은 도저히 감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다 죽었어.”
일순 바람이 흔들리고, 휘말린 사냥개들이 양 옆으로 압축되어 터져나갔다.
물리법칙을 무시할 정도로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바람이 충돌한 것이다. 시계방향으로 회전하던 바람과 반대방향으로 회전하던 바람이 서로를 양보하지 않고 들이박은 것이다.
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녀는 세계의 섭리를 왜곡해버렸음에도 숨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박차를 가했다. 씨도 남기지 않겠다는 것처럼 폭풍에 휘말린 사냥개들이 하나둘 찢겨졌다.
이 역시 그녀가 왜곡한 것만으로 어울리지 않는 조화를 완성한 것이다.
잘게 잘린 사체와 피로 물든 은홍색 폭풍.
하늘은 파라건만, 세계는 검붉었다.
피 비린내가 감돌았다.
“아.”
아이들에게 좋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정신을 차린 그녀는 새로운 바람을 만들어냈다. 바닥에서부터 용솟음친 바람은 그로테스크한 폭풍을 산 너머로 날려 보냈다.
“미안, 얘들아. 언니가 많이 무서웠지?”
속으로는 플레이어들이 유배지라 부르는 땅에 있을 클랜원들을 욕하면서도, 하운드 무리에 둘러싸여 있던 아이들을 걱정했다.
많이 무서웠을 텐데.
고작해야 유치원을 졸업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아이들이었다. 그런 아이들이 성인도 무서워하는 몬스터에게 목숨을 잃을 뻔했으니 얼마나 무서웠을지.
정신이 붕괴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할 정도였다.
“이제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그러니─.”
그러니 걱정 마.
그런 말로 아이들을 달래려던 서영은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누나 진짜 멋있다! 누나는 누구야? 누나도 십이좌야?”
눈에 별빛이 가득한 남자아이.
“이 바보야, 먼저 언니한테 구해줘서 고맙다고 말해야지! 아,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남자아이를 나무라다 고개를 숙이는 여자아이.
“…대단해.”
까치발을 들면서 자신을 올려다보는 여자아이.
도대체 무엇이 대단하다는 걸까?
“정말,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몇 번이고 고개를 숙이는 아인 소녀.
이, 이거 나만 불편한 거야?
서영은 지금까지 일어난 일을 개의치 않아 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할 말을 잃었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랐던 그녀는 입꼬리를 씰룩거리고만 있었다.
얘네 혹시 미친 건가?
그럴 수도 있었다. 몬스터를 눈앞에 두고 정신을 놓는 사람도 많았다. 하물며 아이들은 나이도 어린 데다, 마주한 몬스터는 무리 단위였다.
미친 게 분명했다.
미친 게 분명할 텐데.
“와, 누나도 십이좌라고? 세상에! 나 지금 우리나라 최고의 플레이어를 만난 거야?”
“제발, 예의 좀 갖춰!”
“…굉장해.”
“정말,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왜 제정신인 것처럼 보이는 걸까.
“하아.”
미쳤든 미치지 않았든.
병원에 데려가는 게 급선무였다.
아이들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산에서 뛰어내려왔는지 다치지 않은 구석이 없었고, 정상적인 길을 밟지 않았는지 나뭇잎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일단 내상이 있는지 없는지 검사를 하고─.
아이들의 몸을 가볍게 스캔하고 병원에 보내려던 그녀는 또 다시 할 말을 잃었다.
…미쳤네, 미쳤어.
미친 게 분명했다.
아이들이 아니라 자신이.
그녀는 비정상적으로 방대한 마나를 품은 여자아이를 바라보았다.
마침 여자아이, 하양도 조금 전부터 그녀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은아 언니 같아.”
서영은 하양이 조금 전부터 중얼거리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단지 그녀는 하양이 품은 마나에 정신을 빼앗겼을 뿐이다.
“대~박.”
“으, 응?”
과거, 은하가 했었던 말을 내뱉은 그녀는 하양의 볼을 잡아 늘리고, 뺨에 입을 맞추기까지 했다. 얼굴이 땀과 흙으로 범벅이 되었더라도 꺼려하지 않았다.
“너, 플레이어가 되지 않을래?”
“프, 플레이어요?”
“응, 플레이어.”
이 아이가 플레이어가 된다면.
신서영은 흥분을 억누르듯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아이가 플레이어가 된다면, 미래에 십이좌의 자리를 차지할지도 모른다.
아니, 그렇게 만들 것이다.
만들고 싶었다.
그런데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드는 아이가 있었으니.
“플레이어는 내가 될 거예요!”
바로 은혁이었다. 그는 자신이 아닌 하양이 주목을 받으니 불만이었다.
“아.”
서영은 그제야 그녀가 나타나기 전까지 아이들을 지키던 은혁을 떠올렸다.
장하네.
체내 마나도 괜찮은 수준이었다. 플레이어가 되더라도 밑바닥 인생을 살 만한 아이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인성이 마음에 들었다. 유배지에서도 문제를 일으키는 개 같은 부하들과는 다르게 목숨을 바쳐서라도 아이들을 지키겠다는 기개가 마음에 들었다.
적어도 남자라면 이래야 한다.
그래, 남자라면.
“어, 어어?”
“아유, 예쁜 것!”
그녀는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생각을 떨쳐내기 위해서라도 그에게도 똑같을 행동을 보였다.
“어, 난, 왜?”
당황하는 민지.
그러거나 말거나 서영은 민지를 끌어안았다.
아이는 사랑스러웠다. 미래에 꽃으로 거듭날 씨앗이었다. 그녀가 플레이어가 된 이유에는 몬스터에 대한 증오심만이 아니라 미래를 지키고 싶다는 이유도 있었다.
“네가 텔레파시를 보낸 거지? 덕분에 너희를 찾는데 어렵지 않았어.”
마지막으로 서영은 빨개진 눈시울을 비비던 서나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손을 뻗어 서나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었다.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러자 서나도 마음을 놓고 그녀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잘했어, 아주.”
텔레파시는 아인에게 당연한 능력이었지만, 어린 나이에 눈을 뜬 경우는 드물었다.
아마도 긴박한 상황이 그녀가 텔레파시를 개화하게끔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텔레파시를 개화한 이유에는 분명 이 아이들을 지키고 싶다는 마음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그녀가 보낸 텔레파시에서는 그 마음이 절절히 느껴지는 것 같았으니까.
“…대단하네.”
서로를 지키려고 필사적인 아이들이 눈부셨다.
그녀는 씁쓸하면서도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녀는 깨닫지 못했다.
아이들이 어린나이에도 불구하고 몬스터를 마주하면서도 겁을 먹지 않았던 이유를.
“…일단 산을 내려가렴. 밑에 구조대가 와 있을 거야.”
“언니는 같이 안 가요?”
민지가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아이들에게서 처음으로 정상적인 반응을 발견한 서영은 어색하게 웃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 구하러 가야 하거든.”
그리고 그 새끼들을 가만 두지 않을 거야.
“그래도 너희를 혼자 보낼 수는 없으니까…, 아, 마침 오네.”
서영은 중장갑을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가리켰다.
“고, 곰 아저씨?”
먼저 반응을 보인 아이는 하양이었다. 목소리에서 들뜬 반응이 나왔다.
“”…헐.””
은혁과 민지는 하양과는 다른 반응으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덩치가 컸다. 멀리서 올려다보지 않았으면 불룩 튀어나온 배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전체적으로는 푸근한 인상을 가진 중년인이었다.
겉으로 풍기는 분위기는 곰돌이 푸를 연상케 했다. 하양이 곰 아저씨라고 부른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래, 기계 팔만 아니었다면.
중년인의 오른쪽 어깨는 쇄골이 시작하는 자리에서부터 구조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기계 팔이 달려 있었다. 왼쪽 어깨에는 거대한 원형방패를 장비하고 있었는데, 그는 조금도 힘든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누님, 먼저 가면 어떡합니까. 덕분에 나 혼자 올라오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중년인이 펄펄 끓었다. 그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산길을 오른 것이 불만인 모양이었다.
정작 불만을 토하면서도 힘든 티를 내지 않고 있었지만.
“정말 급한 일이었어. 너도 알잖아.”
“흠, 뭐, 그건 그렇지. 저 애들이 그 애들이요?”
아이들을 힐끔 쳐다보는 중년인. 그는 텔레파시를 보냈던 아인 소녀에게 관심을 가진 모양이었다. 그녀를 훑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너 혹시 플….”
“그 얘기는 이미 내가 했어, 얘.”
“흠, 흠. 그래서, 난 이 아이들을 데리고 내려가면 되는 거요?”
“참 쉽지?”
“말로는.”
중년인은 한숨을 쉬었다.
아이들은 분명 정신적으로 피폐해져 있을 것이다. 혼자서 아이들을 데리고 내려가는 일이 여간 쉬운 일은 아닐 터였다.
하지만 그의 고민을 종식시키듯,
“얘네들. 네가 생각할 정도로 문제 있는 애들이 아니야. 내가 보증할게.”
“누님은 하도 보증보증거려서 신용이 없는데.”
“어쭈, 이게?”
“흠, 흠.”
보아하니 아이들은 겁에 질린 것 같지 않았다. 아이들을 데리고 내려가는 데에는 크게 어려울 것 같지 않았다.
문제는 신서영이었다.
“누님은 괜찮겠소?”
“뭐가?”
“이 길로 의정부로 넘어가려는 것 아니오? 그 개노무 자식들을 확….”
“애들 앞에서….”
“흠, 흠. 아무튼 혼자서 괜찮겠소?”
신서영은 십이좌의 일원 중 한 명이었다. 명실상부 대한민국에서 최고라고 거론되는 플레이어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최강은 아니었다. 그녀가 방대한 마나를 매개로 바람을 자유자재로 일으킨다지만, 그래봤자 그녀는 캐스터에 불과했다.
만에 하나라도 플레이어의 기습을 허용하게 된다면.
“날 뭐로 보고? 내가 우습니?”
“뭐, 그건 아니지만. 하긴, 누님이 알아서 잘하겠지.”
괜한 생각이었다.
신서영이 누군가. 창해 클랜을 대한민국에서 두 번째 손가락으로 손꼽히는 클랜으로 만든 위인이 아닌가.
더군다나 그녀는 십이좌가 된 이후, 독립적으로 행동하는 일이 잦았지 않은가.
“그러니까 애들 잘 데리고 내려가고.”
“뭐, 알았소. 그럼 나는 애들 내려 보낸 다음, 몬스터의 침입을 허용해버린 자식들 좀 보러 가야겠소.”
“그래. 걔네들도 나중에 손을 봐줘야지.”
의정부에서 하운드 무리의 이동을 보고해주지 않은 것도 잘못이었지만, 북한산으로 넘어온 몬스터도 제대로 처리
하지 못한 창해클랜 지역도시파견국 북한산관리단의 잘못도 있었다.
분명 몬스터가 넘어올 리 없다는 안일한 생각을 품었다가 이 사단이 났을 것이리라.
“후우.”
이제는 클랜이 내부적으로 곪았다는 말만 할 것이 아니었다. 대외적으로도 이미지에 큰 손실이 생길 것이다.
답답해서 한숨만 나왔다.
“…그래도 일단 걔네들은 어르고 달래줘. 걔네 중에서도 사망자가 많이 나왔을 테니까. 벌을 내리는 건 죽은 애들 장례식을 치러주고 나서 해서도 되잖아.”
“흠, 누님이 그렇게 말한다면 그렇게 하겠소. 자, 그럼. 얘들아, 내려가야지.”
이야기를 마친 중년인이 아이들을 불렀다.
아이들은 저희들끼리 수군거리고 있었다.
중년인에게 불린 아이들 중에서 은혁이 손을 번쩍 들었고,
“아직 대장이 안 왔어요!”
“대장?”
“이 바보야, 대장이 뭐야! 노은하라는 애가 있어요. 걔가 아직 산 위에 남아 있을 거예요.”
“대장 안 오면 우리는 안 갈 거예요!”
은혁이 성화를 부렸다.
중년인은 난감했다. 신서영 역시 얼굴이 어두워졌다.
산 위에 있었다니 결말이 뻔히 예상되었다. 안타깝게도 은하라는 아이는 몬스터에게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물론 아이들에게 그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아이들이 받을 충격을 생각해야 했다.
그래서 서영은,
“그럼 언니가 찾으러 가볼게. 너희는 먼저 내려가 있을래?”
상냥한 거짓말을 했다.
“서영 언니라면 찾을 수 있을 거야.”
“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양과 서나가 서영의 거짓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러자, 그럼.”
머리 뒤로 팔을 낀 은혁이 순순히 넘어갔다. 아직 그는 하양의 말을 들으라는 은하의 지시를 잊지 않았다.
“자, 그럼 나랑 내려가자.”
“아, 얘들아, 잠깐!”
아이들을 데리고 내려가려던 중년인.
무언가 생각났다는 것처럼 손뼉을 친 서영이 씩 하고 웃었다.
“얘 이름이 뭔지 아니?”
“아, 아니, 누님, 왜 갑자기….”
“”””알고 싶어요!!””””
즐거운 미소를 짓는 서영.
그리고 서글픈 얼굴을 보이는 중년인.
“강철이야. 강철. 강철이라고, 뭐든 싹 밀어버린다는 뜻이지. 이 바닥에서는 꽤 유명한 가디언이야.”
☆
“…위라 했던가.”
서영은 아이들과 나눈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산을 수색했다.
바람을 타고 공중으로 날아오른 그녀는 곳곳에 바람을 전개했다. 돌아오는 바람이 전해주는 정보를 따라 몬스터를 토벌하고, 사람들을 구출했다.
하지만 아이는 찾을 수 없었다.
역시.
죽은 게 분명했다.
아이들이 우는 모습을 생각하니 괜스레 그녀도 서글퍼졌다.
“그런데 헬 하운드는 어디에 있는 거지?”
이만한 무리가 움직였다면 제6위계에 해당하는 헬 하운드도 있을 터였다.
하지만 바람은 그녀에게 어떤 정보도 전해주지 않았다. 헬 하운드의 기운을 찾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산을 넘어 의정부로 가기로 했다.
그리고 북한산 정상에서,
“…이게, 뭐야.”
서영은 경직된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시체였다.
곳곳에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사람의 시체는 아니었다. 모두 몬스터의 시체였다.
마치 난도질을 당한 것처럼.
몬스터들은 곱게 죽은 것 같지 않은 것 같았다.
대체 누가?
자연히 떠오르는 의문은 그것이었다.
하운드가 배를 굶주렸을 때에는 동족까지 포식하는 몬스터라지만, 무의미한 학살을 자행하는 몬스터는 아니었다.
이건 사람의 짓이었다.
그것도 아주 흉악하고 잔인한 사람의.
그녀는 이 광경을 더 가까이에서 지켜보려 땅으로 내려왔고,
“…얘, 얘!”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다. 피바다가 된 장소에서 피를 뒤집어쓴 아이가 주저앉아 있었으니.
아이가 고통에 찬 신음을 흘리지 않았더라면 눈치 채지 못했을 것이다.
“얘, 괜찮니? 응?”
서영은 깜짝 놀라 뛰어갔다.
일단 이 아이를 구하는 것이 우선해야 할 일이었다.
머릿속에서 의정부로 넘어간다는 생각은 사라진 그녀였다.
리라이프 플레이어 0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