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turn of the Mad Demon RAW novel - Chapter 178
178화. 꽃보다 이자하
돈 좀 있냐는 물음에 우향곡주가 대답했다.
“문주님, 돈은 물려받은 것이 있어 평생 쓰지 못할 정도로 많습니다. 얼마를 원하시든 제가 문주님과 하오문의 후원자가 되겠습니다.”
뜻밖의 대답이었지만 그리 놀라진 않았다. 살짝 졸부 느낌이 있어서 돈이 많을 것이라는 예상은 이미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와중에 돈이 있냐고 물어보는 것은 뜬금없는 질문이다. 다들 다양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말을 기다렸다.
나는 우향곡주가 머무는 것으로 보이는 산장과 주변의 정원, 잘 정돈되어 있었던 꽃길과 작은 연못을 둘러보다가 말했다.
“그런데 이곳의 전반적인 꽃밭 분위기는 누가 만들었나?”
“조부님과 제가 만들었습니다. 유곡(幽谷)에 파묻혀서 살다 보니 할 일이 없었지요.”
“정말 꽃 같군.”
욕은 아니지만, 욕처럼 내뱉은 그런 느낌?
전부 나를 바라보고 있어서 최대한 진중한 어조로 본론을 꺼냈다.
“어쨌든 내가 여기서 적을 맞이하면 이기든 지든 간에 이 아름다운 꽃밭은 황무지로 변할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
우향곡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합니다.”
“돈이 많다니 다행이군. 일단은 가솔들을 이끌고 유화곡으로 피하도록 해. 하지만 거기도 끝내 안전하지 않을 거야. 유화곡주, 철섬부인. 왜 그럴까?”
철섬부인이 대답했다.
“마교를 건드렸으니 저희도 무사하지 못하겠지요.”
“이해하니 다행이군.”
나는 이 사람들이 가야 할 곳을 알려줬다.
“어쨌든 백면공자 일당도 마교의 외부 세력쯤은 될 테니까. 이미 마교를 건드린 셈이다. 꽃잎 몇 개 뜯어낸 수준이겠지만, 그쪽에서 발끈할 수 있는 빌미는 제공한 셈이지. 우향곡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고, 유화곡도 마찬가지. 그대들은 모아뒀던 재산을 몽땅 가지고 가솔들과 함께 서악, 그러니까 화산의 연화봉으로 떠날 채비를 하도록 해.”
우향곡주가 눈을 크게 떴다.
“예? 화산이요?”
나는 뒷짐을 진 채로 우향곡을 구경하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일단은 지금 당장 우화향을 가져와라.”
나는 육합선생을 바라봤다.
“육갑은 우화향을 먹자마자, 이곳에서 당장 운기조식을 하도록. 나는 그사이에 계속 떠들고 있을 테니. 시간이 아깝다.”
우향곡주가 손짓을 하자, 수하 두 명이 우화향을 가지러 가기 위해 움직였다.
우향곡주가 내게 물었다.
“화산으로 가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내가 뜬금없이 이유도 없이 가라고 하겠나? 마교는 본질이 종교 단체야.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이상한 교리들을 만들어서 믿는 자들이지. 이상한 것을 믿다 보면, 오히려 이상하지 않은 것을 꺼리게 되는 습성이 있어. 종종 강호인들이 영산이라 불리는 장소에서 옛 마도의 고수들이 죽었던 모양이야. 대표적으로 화산과 종남산이 그런 모양이더군. 우리에겐 영산이지만, 마도 세력에겐 금지(禁地)랄까. 시간이 흐르면 교리도 점차 바뀌고 꺼리는 것도 변하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나는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금지로 가라. 살아남고 싶으면.”
그래도 먼저 인연이 닿아서 그런 모양인지 철섬부인이 내게 권했다.
“문주님, 그렇다면 문주님과 육갑, 아니 육합선생과 하오문도 함께 화산으로 가시지요. 굳이 이번에 적을 맞이할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나는 손짓으로 세 사람을 불렀다.
“가까이 오도록.”
유화곡주, 철섬부인, 우향곡주가 내게 다가왔다. 나는 어조로 낮춰서 설명했다.
“기왕 거처를 옮기는 거…… 세 사람이 힘을 합쳐서 연화봉 주변에 사람들이 많이 살 수 있도록 여러 채의 집과 건물을 지어주도록 해.”
세 사람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나는 내가 머물 집도 부탁했다.
“나중에 내가 머물 곳도 하나 지어주고.”
우향곡주가 침을 삼켰다.
“너무 일이 커지는데요. 문주님?”
“고향을 떠나는 게 쉽지 않다는 건 나도 알아. 하지만 고향을 떠나지 못해서 죽음을 맞이할 필요는 없어. 그곳은 사실 백면공자가 말한 영산이야. 마교의 총단에게 걸리지 않으려고 거기서 해독약을 재배하고 있었던 셈이지. 백면공자는 내공을 뺏은 다음에 그곳으로 보냈어. 만약 그가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면 세 사람이 백면을 죽이고 그 해독제를 만드는 장소도 찾아내서 불태우도록 해.”
“음, 알겠습니다.”
“그가 내게 약조한 바로는 그곳을 정리한 다음에 여행을 떠나겠다고 했었다. 놈이 약조를 지키지 않으면 죽이는 게 옳아. 반대로 만약 세 사람이 일 처리를 제대로 못 하면 내가 가서 확인할 거야. 내 성질은 부인이 잘 알고 있지?”
“예, 문주님.”
가만히 듣고 있었던 유화곡주가 질문했다.
“그런데 저희가 자리를 잡고, 집을 여러 채 짓는 동안에 문주님은 언제 정착을 하시겠습니까?”
나는 슬쩍 웃었다.
“나는 모르지. 만약 싸우다가 내가 못 돌아가면 그대들이 하오문을 좀 챙겨주도록 해. 내가 앞으로 몇 년을 더 싸움에 집중할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예.”
나는 우향곡주에게 특히 압박을 줬다.
“곡주.”
“예.”
“돈은 이런 때에 이런 식으로 써야 한다. 그대가 죽으면 그 많은 돈, 소용이 없다고. 연화봉 주변에 사람이 살 수 있도록 여러 가지를 준비하면서 돈을 뿌리도록 해. 만약 그 많은 돈이 다 떨어진다면 내가 흑도를 줘패서 쌓아뒀던 돈을 잔뜩 들고 가서 하오문의 축문과 합류할 테니…… 돈은 마음껏 퍼부어.”
“알겠습니다.”
“나는 강호에서 싸우다가 오갈 데 없는 자들이나, 부모 잃은 아이들을 거두게 되면 그곳으로 보낼 테니 그 점도 유념하도록. 내가 왜 화산으로 가라는 것인지 이제 좀 이해했나?”
세 사람이 대답했다.
“이해했습니다.”
나는 유화곡주, 철섬부인, 우향곡주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다가 말했다.
“우리 넷은…….”
내 말을 듣고 있었던 육합선생이 끼어들었다.
“왜 넷인가? 다섯이지.”
나는 말을 정정했다.
“우리 다섯은. 사실 서로 친하지도 않고 오랜 시간을 친우로 지내지도 않았고, 심지어 상하 관계도 아니야. 하지만 육합과 내가 먼저 목숨을 걸어서 시간을 벌어주겠다. 그대들은 가솔들과 끝까지 살아남아서 화산에 정착하도록 해. 우리는 전부 강호인이기 때문에 은혜는 은혜대로 갚고, 원한은 원한대로 갚는 사람들이다.”
“맞습니다.”
“그럼 더는 말을 길게 하지 않아도 되겠군. 일단 여기부터 정리해서 유화곡으로 떠나도록. 최소한 우향곡주가 금단증상을 해결한 다음에 떠나야 할 테니까 시간이 많은 것 같으면서도 실은 촉박하다.”
우향곡주가 다급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문주님, 독초로 함정을 좀 파둘까요? 위치만 기억하시면 싸울 때 도움이 되실 터인데.”
“바쁘니까 그냥 가도록 해.”
“알겠습니다.”
그사이에 달려온 우향곡의 수하들이 자그마한 상자를 가지고선 뜬금없이 내게 다가왔다.
“문주님, 우화향을 가져왔습니다.”
나는 턱짓으로 육합선생을 가리켰다.
“선생에게 줘라.”
“두 개를 가져왔는데요?”
나는 뒷머리를 긁다가 대답했다.
“줘.”
하나를 받아서 일단 품에 넣은 다음에 곡주들과 부인에게 손짓했다.
“빨리 움직이라고. 인원이 많으니.”
나는 우화향 상자를 건네받은 육합선생에게 말했다.
“육갑, 바로 복용해서 운기조식하도록. 나는 지금 먹을 생각이 없다.”
육합선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다가 때때로 내게 다시 인사를 하러 오거나, 육합선생에게 말을 걸려는 자들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다들 입을 닥치게 한 다음에 전부 돌려보냈다.
육합선생이 곧장 운기조식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들과 마지막 작별의 순간에도 손을 몇 번 흔들다가 입 모양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잘 가라.’
다들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가 서두르는 걸음으로 우향곡을 빠져나갔다.
전부 등에 커다란 봇짐을 짊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피난민 행렬을 보는 것만 같았다.
나는 그제야 조용해진 우향곡을 바라보다가 육합선생 근처에 앉아서 가부좌를 틀었다.
전생 귀마가 눈을 감은 채로 운기조식에 집중하는 동안…….
나는 뜬 눈으로 새소리와 물소리를 들으면서 상념에 빠졌다.
* * *
나는 가부좌를 튼 채로 반쯤 졸고 있다가 육합선생의 깊은 호흡 소리에 눈을 떴다. 엉터리 도사 놈처럼 허우적대는 손짓으로 운기조식을 마무리한 육합선생이 만면에 미소를 띤 채로 눈을 떴다.
표정만 봐도 성과가 제법 좋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찌 보면 이 영약이야말로 우리 같은 사내들에겐 백면공자가 뿌리던 해독제, 즉 마약이나 다름이 없었다.
육합선생이 웃음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자네도 복용하고 어서 운기조식을 하게. 내가 교대할 테니.”
나는 웃음이 절로 나왔다.
전생 귀마를 앞에 두고 운기조식을 할 마음은 전혀 없었다. 또한, 이미 내 몸에는 대붕(大鵬)만 한 영약이 들어있는 상태라서 서두를 필요도 없었다.
“나는 나중에.”
육합선생이 표정을 굳힌 채로 내게 물었다.
“문주, 아직도 나를 믿지 못하나?”
“선생.”
“말하게.”
“갑자기 생각난 것인데 그대는 제자가 있나? 설마 그 벌레 같은 놈들이 제자는 아닐 테고.”
“없네.”
“왜 없어?”
문득 육합선생이 입을 다물었다. 나는 육합선생의 표정을 보고 나서야, 그가 무공을 배웠던 육합문이 멸문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어찌 보면 그 사건 때문에 육합선생이라 불리던 사내가 시간이 흘러 귀마가 됐을 터였다. 이 사내는 복수심을 가지고 살아가던 인생의 방향을 다른 곳으로 전혀 틀지 못했던 사람이다.
하지만 상처는 누구에게나 있는 법이라서 나는 하고 싶은 말을 내뱉었다.
“나중에 제자를 한 명 거둬들이도록 해.”
“내가 왜?”
“나는 천하에서 가장 뛰어난 협객의 자질을 가진 제자를 가르칠 거야. 다음 시대를 이끌어야 할 테니 되도록 안전하게 화산에서 무공을 가르치는 게 낫겠지. 자네는 종남산에서 제자를 가르치도록 해.”
“그러니까 내가 왜?”
내가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제자끼리 싸움을 붙여서 구경 좀 하자고.”
“…….”
“자고로 불구경하고 싸움 구경이 제일 재미있는 법이지. 선생도 알겠지만 싫어하는 놈하고 허구한 날 치고받고 싸워야 실력이 빨리 느는 법이야. 경쟁 상대가 없이 벽 보고 수련하는 것은 사실 미련한 짓이지. 무슨 말인지 대충 알지 않나.”
“그렇긴 하지.”
“혹시 모르지.”
“뭘?”
“그대가 나보다 제자 가르치는 재주는 더 뛰어날지도.”
“그걸 말이라고 하나? 당연히 내가 더 뛰어나겠지.”
나는 발끈하는 육합선생의 장단을 좀 맞춰줬다.
“생각해 보니 아니야. 당연히 내가 더 뛰어나겠지.”
“그 지랄 맞은 성격에 잘도 뛰어나겠군.”
“그대도 지랄은 나 못지않아.”
나는 낄낄대면서 웃다가 육합선생을 놀렸다.
“그리고 이미 내가 이겼어.”
“뭔 개소리야? 아직 제자도 없는데.”
나는 품에서 우화향 상자를 꺼낸 다음에 육합선생을 향해 흔들었다.
“나는 안 먹었거든. 그때까지 보관했다가 제자에게 줘야겠다. 육갑 떠는 제자 놈을 당장 줘팰 수 있도록.”
육합선생이 비웃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썩어 문드러지겠네. 잘 보관해라. 독초가 되어서 먹자마자 제자를 잃겠군. 하여간 자네는 너무 충동적이야.”
나는 육합선생의 말을 듣자마자 상자를 열어서 우화향을 입에 넣은 다음에 잘근잘근 씹으면서 육합선생을 바라봤다.
“선생, 진심 어린 충고 고맙군. 바로 먹는 게 낫겠어.”
육합선생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다른 곳을 쳐다봤다.
나는 우화향을 씹으면서 중얼거렸다.
“이거 진짜 염병할 맛이네. 인생의 쓴맛이로구나.”
육합선생이 벌떡 일어나더니 내게 말했다.
“한바탕 돌아보고 올 테니 바로 운기조식해라. 지형을 잘 살펴놓아야 잘 싸울 수 있다는 것을 애송이가 알런가 모르겠다만.”
육합선생이 뒷짐을 진 채로 우향곡을 둘러보면서 산책을 시작했다. 아무래도 본인이 근처에 있으면 내가 불편하리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육합선생의 등을 한참이나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호흡을 길게 내뱉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정말 변하긴 하는 모양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 변화가…….
내게도 전생 귀마에게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나는 탁자로 가서 섬광비수를 꽂은 다음에 두 다리를 빈 의자에 뻗었다. 백면공자는 첫 휴가를 얻어서 화산으로 향하고 있겠으나, 나는 이런 순간이 짧은 휴가였다.
양손을 머리 뒤에 댄 채로 우향곡의 하늘을 바라보다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우향곡의 진한 꽃향기를 맡는 도중에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는 육합선생에게 물었다.
“육합.”
“왜 그러나?”
“화산에도 꽃이 많을까?”
“그걸 말이라고 하나? 그걸 질문이라고 해? 당연히 많겠지.”
“역시…….”
“역시 뭐?”
“그대는 화산과 어울리지 않아. 종남으로 꺼지도록 해. 자네 못난 얼굴 때문에 꽃들이 놀랄 거야. 내가 가는 게 맞겠지.”
제법 떨어진 곳에서 육합선생의 긴 한숨 소리가 들렸다.
나는 육합선생과 지금 쳐다보고 있는 하늘을 향해 선언했다.
“내가 화산으로 간다. 왜냐하면, 육갑보다 잘 생겼기 때문이다.”
어디선가 육합선생이 소리를 버럭 내질렀다.
“거, 지랄 염병 떠는 소리 좀 그만하고. 운기조식 좀 해라!”
“방금 지랄 염병이라고 했나?”
“…….”
“그것이 나다.”
나는 우향곡의 꽃들을 구경하다가 생각나는 대로 중얼거렸다.
“……꽃보다 이자하.”
이건 좀 너무 나간 것 같아서 나는 나 자신에게 혀를 찼다.
쯧쯧쯧…….
먼 곳에서 육합선생도 나를 따라서 혀를 찼다. 문득 고개를 돌려보니, 새삼스럽게 전생 귀마가 입을 굳게 다문 채로 우향곡의 꽃을 구경하고 있었다.
‘꽃들 놀라겠다. 이 새끼야.’
이번에는 속마음을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