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te 1 RAW novel - Chapter 6
6. 어쩌면 여전히 아직도
수연은 현관문을 닫았다. 신발을 벗고 거실에 오르는데 두 쌍의 눈동자가 수연을 쫓고 있었다. 궁금해서 죽겠다는 부모님의 표정에 수연은 방문을 열려다 말고 한숨을 쉬며 뒤를 돌았다.
“뭐가 궁금한데?”
수연의 질문에 동만이 목덜미를 긁적이며 말했다.
“아녀, 그냥. 커피는 잘 마셨나 하고.”
“잘 마셨지 그럼. 저 이제 들어가요.”
대답을 마친 수연은 문고리를 잡았다.
“그, 뭐냐, 뭐더라.”
아버지 동만이 다급하게 말을 꺼내다 수연과 눈이 마주치자 멋쩍은지 으흠 헛기침을 하고는 슬쩍 물었다.
“그……. 잘 아는 사이여? 많이 친하게 지냈던겨?”
“얼굴만 안다니까.”
수연의 말에 정자가 의미심장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거짓말인 것 다 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얼굴만 아는 사이에 뭔 할 말이 있대? 딱 보니까 잘 알던 사이던데.”
TV 드라마에 시선을 둔 채로 말을 하는 정자의 눈꼬리가 웃고 있었다. 그래도 정자는 소파에 앉아 TV를 보는 시늉이라도 하고 있지. 안절부절못하는 마음을 보여 주기라도 하듯 동만은 상체가 아예 반쯤 앞으로 나와 있었다. 수연은 이런 사태를 대비해 저수지에서 올라오며 미리 생각해 둔 말을 했다.
“그냥, 소식 끊긴 친구 안부 물어봤어. 혹시 아나 해서.”
“거봐, 수연 엄마 내가 그럴 거라고 했잖어. 별 사이 아니라니까 그려.”
동만이 어깨를 펴며 정자에게 말했다. 정자가 피식 웃더니 중얼거렸다.
“그렇지. 처음엔 다 별거 아닌 사이로 시작하는 거지. 별거 아닌 사이였다가 친구도 하고, 친구 하다 자기 하고. 그런 게 남녀 사이지. 아, 참고로 엄마는 아주 마음에 든다. 합격. 땅땅땅.”
“아니, 이 사람이. 마음에 들긴 뭐가 마음에 들어! 하루 보고 뭘 안다고 합격이여 합격은! 그리고 수연이랑 얼굴만 아는 사이라잖어!”
“그래도 합격. 땅땅땅.”
정자가 탁자를 주먹으로 가볍게 쿵쿵 내리치며 선언하듯 말하자 동만이 인상을 쓰더니 주먹을 꽉 쥐며 외쳤다.
“아니여, 나는 인정 못 혀. 나는 반대여!”
“당신은 누가 와도 반대잖아.”
정자가 흥, 하고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그러는 임자는 아무나 좋다고, 지난번에도 어? 그 누구여, 처형네 가게에, 어? 요리산지 뭔지 그놈도 합격 땅땅땅 해 놓고, 이번에는 장 팀장이여? 사람이 줏대가 없어!”
“내가 언제 아무나 좋다고 그랬다 그래. 남자 별거 있나? 다 그놈이 그놈이니까 기왕이면 훤칠하고 잘생긴 남자를 만나야 후회가 없다니까? 다 큰딸 혼자 늙어 죽게 할 거야? 저렇게 썩게 내버려 둘 거냐고.”
“뭔 말이여, 수연이 아직 어린애여!”
“당신 딸 서른둘이라고. 서른둘이면 외박도 하고 그럴 나이라고.”
“외바…… 외에바악?”
경악을 하는 동만을 보며 정자가 코웃음을 쳤다.
“그래요, 외박! 그까짓 게 뭐 별거라고.”
동만과 대화를 나누다 말고 정자가 갑자기 수연에게 물었다.
“그래서 어때?”
“뭐가.”
“장 팀장 말이야. 그만하면 괜찮지 않아?”
수연은 잠깐 한숨을 삼키고 대답했다.
“괜찮으면 어쩌라고.”
“어쩌긴 잘해 보는 거지. 나 어떠냐. 한번 만나 보자. 연애 한번 해 보자. 딱 말해 버려.”
여장부다운 엄마의 대답에 수연은 기가 막혀 웃었다. 일찍 결혼을 한 데다 아이도 일찍 낳아 젊은 날 고생만 했다 생각하는 정자는 평소에도 수연에게 연애만 실컷 하라고 강조를 하곤 했었다. 그래도 그렇지, 한 번 본 태산에 대해 뭘 안다고 괜찮다는 건지.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만나자 그럼 다 만나 준대? 남자들은 뭐 눈도 없어?”
“우리 딸이 어디가 어때서. 엄마 눈에는 최고로 예쁘구만. 아, 직업 있겠다, 머리 좋겠다, 나 닮아서 얼굴도 예쁘겠다. 네가 만나자 그럼 얼씨구 넙죽 엎드려서 감사합니다, 해야지. 안 그래, 수연 아빠?”
“당연하지. 세상 어느 놈이 와도 우리 딸이 훨씬 아깝지.”
당당하다 못해 뻔뻔하게까지 느껴지는 자식 사랑이란. 고슴도치가 따로 없었다. 수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엄마도 아빠한테 물들었어. 아무리 자식이라지만 콩깍지 너무한 거 알지?”
“내가 낳은 내 자식 내가 예쁘다는데 지들이 어쩔 거야. 그래서 어떠냐고.”
“뭐가.”
시치미를 떼어 보지만 소용없었다.
“아, 장 팀장 말이야.”
“어떻긴 뭐가 어때. 아무 생각 없지. 그냥 얼굴만 아는 사이라니까.”
“얼굴 아니까 더 알아보면 좋잖아. 요즘 할 일도 없겠다 심심한데 이참에 연애나 하면 얼마나 좋아.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확 사귀자고 해 봐. 훤칠하고 듬직하고 아주 딱 좋아.”
아무래도 태산의 키가 큰 것이 문제다. 평소에도 엄마는 키가 크고 어깨가 넓은 남자를 좋아했다. 지나다가도 키 크고 훤칠한 남자만 보면 가져다 붙이더니 이번에도 어김없었다.
별 의미 없이 하는 말인 줄 알고는 있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수연은 난감했다. 부모님이 뭘 알고 하는 소리도 아닌데 괜히 마음이 쿡쿡 찔리는 기분이다.
부모님이 꼬치꼬치 캐묻기 전에, 엄마가 슬쩍 엮으려 들기 전에, 무엇보다 엄마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장태산이 알기 전에 이쯤에서 단념을 시켜야겠다. 수연은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손을 저으며 말했다.
“어디 가서 그런 소리 하지 마. 장 팀장 여자친구 있어.”
“있어?”
엄마가 아쉽다는 듯 되물었다. 수연은 단호하게 말했다.
“있어. 되게 오래된 여자친구.”
동만이 안심한 표정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수연은 혹시나 못 믿을까 싶어 한마디 더 보탰다.
“대학 때부터 사귀던 사람 있어. 곧 결혼할 거래.”
“그래에?”
“어.”
수연은 마침표를 찍듯이 말했다. 이쯤은 되어야 더는 말이 안 나오겠지 싶다. 그러고도 혹시나 싶어 다시 한 번 엄포를 놓았다.
“그러니까 내 얘기 꺼내지도 마. 여자친구 있냐 괜히 떠보지도 말고. 그거 엄청 실례야. 알았지?”
“아쉽네.”
정자가 입맛을 다시며 미련을 보였다. 동만이 옆에서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거봐, 그러게 내가 아무나 찍어다 붙이지 말라니깐. 수연이 너는 그냥 얌전히 몸조리 잘하다가 이 아빠가 고르고 고른 놈으로다가, 아주 괜찮은 놈으로다가 소개시켜 주면은 그때에.”
“쟤도 나처럼 처음 만난 남자한테 발목 잡히라고? 됐고요. 이놈 저놈 다 만나 보고 젤 나은 놈으로 결혼은 최대한 늦게, 아니, 그냥 연애만 하면서 살아도 좋지. 죽는 날까지 연금 나오겠다 혼자 살아도 충분한데.”
“발목은 누가 발목을 잡았다 그려!”
정자가 TV 리모컨을 찾으며 말하자, 이건 또 무슨 소리냐는 듯 동만이 눈을 크게 뜨며 반박했다. 익숙한 패턴이다. 이제는 누가 먼저 좋아했는지 옥신각신 다툴 차례였다. 골백번도 더 들은 레퍼토리를 들으며 수연은 슬그머니 뒤로 물러나 방으로 들어왔다.
“아아. 복직하고 싶다.”
침대에 털썩 누우며 중얼거리는데 태산의 충격을 받아 크게 뜬 눈이 생각난다.
‘썸남?’
기가 막히다는 듯 되물으며 눈썹을 치켜올렸지. 수연은 픽 웃으며 옆으로 몸을 돌렸다. 아무것도 없는 벽을 바라보다 느리게 눈을 감았다.
‘옛사랑.’
눈을 감고 가만히 떠올려보았다. 가슴속에 따뜻한 물이 천천히 차오르는 기분이 든다. 어딘가 태산을 닮은 말이었다.
태산이 별채의 방문을 열자 이불 위에 엎드려 핸드폰 게임을 하던 박재민 대리가 고개를 슬쩍 들었다. 젖은 머리와 말끔해진 얼굴을 보니 샤워를 마친 게 분명한데, 아직까지 술기운이 남아 있는 얼굴은 검붉었다.
“이제 오세요?”
“응. 씻었지?”
“네. 샤워하니 살 만하네요. 아이구 삭신이야.”
태산보다 두 살이 어린 재민이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태산은 슬쩍 웃으며 몸을 굽혀 재민의 어깨를 잡았다. 꾹꾹 힘주어 주무르자 재민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나왔다.
“으, 으으, 으, 사, 살살. 팀장님 으으어억.”
“어때, 시원하지?”
“으아. 팀장님 저 죽어요.”
“가만있어 봐. 여기 이 자리를 이렇게 꾹 눌러 줘야…….”
“으엌 너무 아파요옷. 항복, 항복!”
패배를 시인하는 레슬링 선수처럼 재민은 방바닥을 두드리며 항복을 외쳤다.
“자식. 엄살은.”
“어 죽다 살았네. 얼른 씻으세요. 저 요 판 깨야 합니다.”
다시 엎드려 핸드폰을 잡는 재민을 보며 피식 웃고는 태산은 가방을 뒤적여 속옷을 찾았다. 욕실 한쪽의 샤워기로 뜨거운 물을 틀고 흙먼지를 뒤집어쓴 머리부터 감기 시작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환한 형광등 불빛 아래 이불 두 채가 펼쳐져 있고, 그중 하나 위에서 핸드폰을 잡은 채로 엎드린 박 대리가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태산은 재민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서 머리맡에 두었다.
발치에 아무렇게나 놓인 이불을 대충 덮어 준 뒤 방 안의 불을 껐다. 시골이라 그런지 불을 끄자 사위가 어둠이다. 창밖의 백열전구만이 방을 비추는 유일한 조명이었다.
태산은 불빛에 의지해 가방에서 편한 티셔츠를 꺼내 입었다. 수건으로 머리의 물기를 대충 털어 내고 한쪽 벽에 기대어 앉았다. 벽에 등을 기대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크게 숨을 내쉬게 된다.
공사 전 현장 세팅을 하는 것도 힘든 일인데, 오늘은 여기저기서 나와 보는 바람에 일이 툭툭 끊겨 더 힘들었다. 유난했던 첫날이 지나고 이제야 좀 편하게 다리를 뻗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멍하니 창밖의 창문을 보던 태산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수연이 제 등치만큼 커다란 개에게 질질 끌려다니던 모습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피로로 후끈거리는 눈두덩이를 손바닥으로 꾹꾹 누르다 다시 피식 웃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던 수연과 먼지를 헤치며 다급히 다가오던 수연. 담담히 인사를 건네던 수연과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을 귀찮다는 듯 쓱 넘기던 수연.
웃지 말아 줄래.
다 늦게 나가 달라는 말을 하며 자조 섞인 한숨을 쉬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라 다시 한 번 웃음이 난다. 가벼운 미소를 짓던 태산의 입매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수연을 마주 보았던 순간을 생각했다. 우리가 무엇이었는지 물어보는 웃음 머금은 눈동자를 마주했던 순간.
어디선가 밤바람이 불어왔고, 이르게 피어난 하얀 벚꽃이 쏴아아 바람을 타고 춤을 추었다. 저수지에 비친 달빛과 검은 산이 바람에 출렁이며 수연의 머리카락이 날리던 그 순간에.
열차처럼 빠르게 시간들이 거꾸로 감겼고, 어느새 태산은 10년 전 혜화역 승강장에 서 있었다.
삐리리리, 커다란 알림음이 환청처럼 다시 들렸다. 어서 타라는 듯 문을 여는 열차를 그냥 바라보기만 했다. 문이 닫힌 뒤, 빠르게 빠져나가는 열차의 뒤로 바람이 세차게 불었고, 맞은편 승강장에 서 있는 수연의 머리카락이 제멋대로 흩날렸었다.
한 발만 뻗으면 탈 수 있었던 열차를 보낸 뒤, 선로를 사이에 두고 시선이 닿았던 그때.
사랑에 빠지고 말았던 그때, 그 순간으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어둠 속에서 태산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눈 감은 어둠 속에서 수연이 보인다. 너는 나에게 흘러가 버린 옛사랑.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첫사랑.
어쩌면, 여전히, 아직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