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lesperson Kim Yubin RAW novel - Chapter 67
67화 – 뒷정리(2)
“…..”
유빈이 어이 없다는 표정으로 최석원과 다시 마주했다.
“너도 사회생활을 해 봤으니 실적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겠지?”
참지 못한 최석원은 가면을 벗어 던졌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유빈에게는 더는 본심을 숨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겁니까?”
하지만 유빈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지금의 모습이 아니더라도 그의 본성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네가 실적이 아무리 좋아도 우리 아버지가 곧 사장이 되면 너도 끝이라는 이야기야.”
“제네스는 누구의 것도 아닙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한심하기 짝이 없군요. 다 큰 성인이 혼자서 서지는 못할망정 아직도 아버지 품에서 응석을 부리는 꼴 아닙니까. 적당히 좀 하십시오.”
“뭐, 뭐라고?”
유빈이 동요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최석원의 화를 돋웠다.
“상대할 가치도 없군요.”
최석원의 감정과는 상관없이 유빈이 고개를 돌리려 했다. 하지만 최석원은 다시 한 번 유빈을 불러 세웠다. 목소리에서 날카로운 쇳소리가 섞여 나왔다.
“……이 자식, 거기 안 서? 여성건강사업부가 축소되면 네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소용없어!”
“그게 무슨 소리지?”
돌아선 유빈의 강력한 눈빛에 최석원은 말실수를 깨달았는지 잠시 움찔했다.
또 저 눈빛이다.
고요하고 깊지만 건드렸다가는 폭발할 것 같은 눈빛.
싸이클 미팅 때도 유빈의 저 눈빛에 몸이 떨렸다.
머리로는 어떻게든 대항하려 했지만, 몸은 따라 주지 않았다.
“내가 베스트 MR이 되면, 그럼 주서윤도…….”
당황한 최석원이 알 수 없는 말을 주절거리기 시작했다.
“아니, 아무튼 요령껏 잘하는 게 좋을 거야. 모난 돌이 되기 싫으면 알아서 수그리는 게 좋을 거라고.”
자신이 뱉은 말을 대충 얼버무리는 게 보였다.
최석원이 뭔가 찔리는 게 있는지 급하게 유빈을 지나쳐 가려 했다.
유빈은 지나쳐 가는 최석원을 잡지 않았다.
그의 말실수로부터 뜻밖의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분명히 여성건강사업부의 축소를 언급했다.
한낱 MR인 최석원의 의중은 아닐 것이다. 아버지인 최상렬 부사장의 이야기를 들은 것으로 추측할 수 있었다.
여성건강사업부의 축소가 최상렬이 가진 비장의 한 수라면?
최상렬 부사장이 사장이 되면 본사 CEO인 마크 램버트처럼 비용 절감이라는 명분으로 인원감축이 일어날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 첫 번째 대상은 바로 여성건강사업부였다.
최상렬과 싸워야 할 명분이 하나 더 생긴 것이었다.
한 가지 더.
최석원은 말하는 도중에 주서윤에 대한 감정을 노출했다. 짧은 언급이었지만 유빈은 놓치지 않았다.
주서윤을 언급하면서 최석원의 오라가 강한 변화를 보였다. 오라가 보여 준 것은 그의 욕망이었다.
남녀와 관계된 감정의 강력함은 일리아드 오디세이에서처럼 전쟁도 일으킬 수 있을 정도였다.
주서윤과 친하게 지내는 자신에 대한 최석원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의 행동이 단지 실적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말은 유빈이 주서윤과 계속 가깝게 지낸다면 앞으로도 써니힐 병원에서와 같은 비상식적인 행동을 계속할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였다.
최석원의 처리를 일단 첼시 사장에게 맡겨 보려던 유빈의 생각이 달라졌다.
‘넌 내가 가만히 안 둔다.’
유빈은 칼을 갈면서 최상렬의 의중에 대해서도 깊숙이 생각해 봤다.
최상렬은 부서의 분사를 통한 비용 절감과 인력 구조조정으로 제네스 본사를 다이어트하고 있는 마크 램버트 CEO와 궤도를 맞출 생각으로 보였다.
최상렬에게 타 부서보다 인풋 대비 아웃풋이 낮은 여성건강사업부는 좋은 타겟임이 분명했다.
올해는 여성건강사업부가 좋은 실적 증가율을 보였지만, 그가 본격적으로 나선다면 상황이 안 좋아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유빈은 그렇게 되도록 놔둘 생각이 전혀 없었다.
최석원과의 짧지만 강렬한 만남을 뒤로하고 유빈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두근거리던 심장은 피어오르는 분노로 차갑게 식고 있었다.
유빈이 23층 버튼을 눌렀다.
4분기 싸이클 미팅인 그랜드 미팅을 앞두고 첼시 사장이 다시 유빈을 호출했기 때문이었다.
호심법으로 마음을 다스린 유빈이 감정을 완벽히 조절한 상태로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사장님, 김유빈입니다.”
“오, 미스터 킴. 들어오세요.”
첼시 사장이 반갑게 유빈을 맞았다.
그녀가 보기에 유빈은 늘 믿음직스러웠다. 사장인 자신을 대할 때도 쓸데없이 굽실거리지 않으면서도 호감 가는 매너를 보여줬다.
마치 오랜 시간 갈고 닦은 매너가 몸에 배 있는 사람 같았다.
매너 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보여 주는 실적은 유빈의 능력을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었다.
첼시 사장은 최상렬 부사장에 의해 팔다리가 묶여 있었지만, 유빈을 만난 이후로는 한결 숨통이 트인 느낌이었다.
유빈이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첼시 사장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통유리로 된 첼시 사장의 집무실에서 밖을 바라보니 영동대로와 테헤란로가 훤히 보였다.
“경치가 나쁘지 않죠? 한국 사람들은 한강처럼 자연이 보이는 건물을 선호한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저는 빌딩 숲 사이에 있는 이곳이 더 마음에 듭니다.”
“그러신가요? 저도 한국 사람이라 딱딱한 건물보다는 산이나 강이 보이는 곳이 좋습니다.”
유빈은 일단 최석원과의 만남이 남긴 잔상을 떨쳐버리고 첼시 사장과의 대화에 집중했다.
머릿속을 완전히 정리하기 전에는 최석원이 한 말은 아직 첼시 사장에게 말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렇군요. 저는 반대편 건물을 볼 때마다 열심히 일하고 있는 사람들의 에너지가 느껴집니다. 한국은 제가 가 본 그 어느 나라보다 사람들이 열심히 일합니다. 밤늦게까지 켜져 있는 맞은편 건물을 보면 저도 열심히 일해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그녀가 아무 이유 없이 사장이 된 것이 아니었다.
첼시 사장 정도의 마음가짐과 또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이는 임원을 꿈꿀 수도 없었다.
유빈도 그런 첼시 사장을 보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미스터 킴의 4분기 실적을 막 확인했습니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수치더군요.”
“감사합니다. 그저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미스터 킴, 본사에 가면 조금 더 자신의 능력을 어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겸손은 곧 무능입니다.”
겸손함을 보이는 유빈에게 첼시 사장이 애정 어린 조언을 해 주었다. 그녀가 지켜본 유빈이라면 본사에서 일하는 것이 단지 목표로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사장님. 그런데 오늘은 왜 부르신 건가요?”
유빈이 미소로 그녀의 조언에 감사를 표했다.
“이제 그랜드 미팅만 끝나면 마케팅 부서에서 일하게 될 텐데, 마법 같은 영업 실적처럼 프로젝트를 성공하게 할 계획이 있나 궁금해서요.”
첼시 사장이 유빈에게 프로젝트에 대한 설명을 한 게 3개월 전이니 그녀도 그동안 유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계획을 세웠는지 궁금할 만했다.
그녀의 말에 유빈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영업할 때처럼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겸손이 무능이라고 말씀하셨으니 직설적으로 답하겠습니다. 프로젝트는 성공할 겁니다. 자신 있습니다.”
유빈은 4분기에 담당 지역의 영업일을 마무리하면서 동시에 틈틈이 회사 내부의 분위기를 살폈다.
특히, 같이 일하게 될 마케팅 부서의 직원들과 호감을 쌓기 위해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주서윤의 도움으로 우연인 것처럼 식사를 함께하면서 사람들을 파악해 갔다.
처음에 유빈은 임원들을 대상으로 한 발표 때문에 자신이 비호감일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PM들은 오히려 유빈의 주장을 지지했다. 어차피 마케팅 플랜의 큰 줄기는 마케팅 헤드인 유진영 차장이 결정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들은 상사에게 자신들이 대놓고 말하지 못한 부분을 시원하게 이야기해 준 유빈과의 대화를 오히려 반겼다.
주서윤에게 듣기는 했지만, 유빈은 마케팅 직원들과 이야기하면서 생각보다 내부 사정이 심각하다는 사실을 느꼈다.
우선, 여자들로만 이루어진 홍보부와 여성건강사업부 마케팅 부서는 앙숙 중의 앙숙이었다.
신속한 일 처리가 중요한 구매부와의 관계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나머지 부서와도 소통이 잘 안 되는 것 같았다.
그저 자기 일에만 프로지 유기적인 협업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구심점이 되어야 할 마케팅이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회사 실적이 잘 나오는 이유는 제네스가 보유한 약품 포트폴리오가 워낙 뛰어나고 우수한 영업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마케팅과 영업팀 사이에도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모든 문제가 겉으로 확연하게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속에서 곪고 있는 것은 확실했다.
대부분의 직원은 문제점을 느끼고 있었지만, 자기 일 만해도 바쁘고 딱히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게다가 나서서 해결해야 할 임원들 역시 손을 놓고 있었다.
내부 사정을 속속들이 알게 된 유빈은 왜 첼시 사장이 무리하면서까지 자신을 내근 부서로 불러들였는지 알 수 있었다.
제네스 코리아는 변화가 필요했다.
그리고 첼시 사장은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사람으로 유빈을 선택한 것이었다.
문제점을 알면 해결할 수도 있었다. 유빈은 자신이 있었다.
유빈의 자신감 있는 모습에 첼시 사장은 그랜드 미팅에서 있을 깜작 발표를 생각했다.
그녀는 저 말을 듣기 위해 오늘 유빈을 부른 것이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이제 9개월밖에 안 된 MR을 내근 부서 그것도 프로젝트 매니저라는 생소한 직급으로 임명한다는 사실이 나중에 그녀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사실을.
하지만 첼시 사장은 사람을 보는 자신의 안목을 믿었다.
어려운 일이지만 눈앞에 앉아 있는 선한 인상의 유빈이라면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프로젝트가 실패한다면 미스터 최가 가만히 보고 있지만은 않겠지만, 미스터 킴의 자신감을 보니 조금은 흔들리던 마음이 다잡아지는군요. 고마워요.”
“아닙니다. 아, 그런데 제가 전에 드린 사진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마침 최상렬 부사장이 언급되자 유빈은 자연스럽게 전에 만났을 때 건네준 고원일의 파파라치 사진을 언급했다.
그녀의 선에서 최석원 문제가 해결된다면 손을 더럽힐 필요가 없어 건네준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생각이 달라졌다.
“아, 그 사진. 음, 미스터 팍과 대화를 나눠봤지만, 그 사진만으로는 부족한 것 같습니다. 뭔가 더 확실한 증거가 있어야만 미스터 최를 인사위원회에 세울 수 있습니다. 마음이야 바로 해고시키고 싶지만……. 해결해 주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그렇군요. 사장님, 그럼 그 문제는 그럼 저한테 맡겨 주십시오.”
유빈은 최석원을 이대로 놔둘 생각이 없었다.
“미스터 킴이요? 어떻게?”
“기다려 보시면 알게 되실 겁니다. 그럼 그랜드 미팅 때 뵙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사장실을 나서는 유빈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
유빈은 평소처럼 담당 지역을 돌아다니고 마케팅 업무를 준비하는 한편 시간이 될 때마다 영업팀의 다른 직원들 그리고 마케팅 부서의 PM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슬쩍 최석원에 대한 이야기를 물었다.
최석원이 빠져나갈 수 없는 완벽한 그물을 치기 위한 준비였다.
대부분은 능력 있으면서 예의 바르고 잘 웃는 최석원을 좋게 평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이야기도 있었다.
“최석원씨요? 제 타입은 아니에요.”
유빈의 질문에 젤레크 PM인 박다혜가 엉뚱한 대답을 했다.
“아, 네……. 하하. 그런데 왜 마음에 안 드세요?”
“그 사람 겉으로는 밝아 보이지만 어딘가 찜찜하다고 해야 할까?”
유빈은 속으로 놀랐다. 엉뚱해 보이는 박다혜는 뜻밖에 사람 보는 눈이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까 전에 강남구 의사회에서 세미나 하는데 엄청 비싼 식당에서 하더라고요. 내가 물어보니까 얼버무리던데 수상해요. 수상해.”
대화는 그렇게 끝났지만, 유빈은 박다혜의 말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