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ved a tyrant from a slave trader RAW novel - chapter 25
“…뭐라고 하셨습니까?”
헤레이스가 그를 돌아보았지만 이번에는 그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가 웃고 있었다.
퍽이나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웃음이었다.
귀찮은 짓을 했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헤레이스는 그때부터 불안해졌다.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사람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그의 태도에 화가 났지만 헤레이스가 몇 번 다시 물어도 그는 대답을 하지 않고 그저 웃기만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녀와 말을 해 보려고 기회를 노리는 것 같던 그가 이제는 반대의 상황을 누리면서 눈을 감고 잠을 청하기까지 했다.
한 번만 주먹을 날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결국 헤레이스도 고개를 돌려버렸다.
마차의 규칙적인 흔들림에 어느덧 그녀도 몸을 맡겼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잠이 들었다.
고개가 툭 꺾여서 그때마다 깜짝 놀라며 잠에서 깼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런 게 없어져서 편하고 곤하게 잠을 잘 이루었다.
그러다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며 서서히 정신이 들었다.
‘…!’
그녀는 자기가 대공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자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잽싸게 고개를 들었더니 정전기까지 일어서 머리카락이 날리고 난리가 났다.
대공은 그 모습이 귀엽다는 듯 웃더니 손으로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려 했다.
헤레이스는 불결한 것이 닿기라도 한 것처럼 몸을 뒤로 빼고 창쪽으로 찰싹 달라붙었다.
“고맙다고도 안 하나? 잠이 깰까 봐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대공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어서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혀를 찼다.
“불편하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다음부터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즐거웠다.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는 여전히 즐거운 듯 말했고 헤레이스는 고개를 흔들었다.
하고 싶은 말만 하고 하기 싫은 말은 무시해버리는 대공의 성격을 완전히 파악한 후여서 불필요하게 힘을 낭비하고 싶지가 않았다.
마차가 달리는 동안 그녀는 익숙한 길을 보고 자신의 예상이 맞아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마차가 한참 달린 후에 도착한 곳은 그녀가 예상했던 대로 황자들이 짐꾼으로 일하며 함께 이동하고 있는 상단이었다.
상단은 상행을 마치고 돌아와 있었고 새롭게 상행을 떠나기 전에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고 마차와 물건들을 수비하는 등의 일로 분주했다.
용병대도 다른 곳으로 떠나지 않고 건물 하나를 얻어 그곳에서 쉬고 있었다.
이번 상행에도 같이 나서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상행을 같이 하고 오면서 레미나 용병대에 대한 상단주의 신임이 커져 앞으로 상단의 호위 업무는 그들에게 맡기기로 마음을 정한 탓이었다.
상단 건물이 있는 곳은 수많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각자 해야 할 일을 가지고 바쁘게 뛰어다니는 모습에서 활기가 느껴졌다.
헤레이스는 대공과 함께 길을 나서며 약간 긴장을 하기도 했지만 기왕 이렇게 된 이상 황자들을 다시 만나게 된다는 기쁨을 일부러 억누르지는 말자고 생각했다.
자기가 걱정한다고 될 일이 안 되고 안 될 일이 되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살면서 보니 걱정한다고 해서 도움이 되는 것은 거의 없었다는 생각을 하며 헤레이스는 어느 정도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마음을 놔버렸다.
“나는 상단주를 만나고 오겠다.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해도 좋다. 헤레이스. 사고 싶은 물건이 있으면 사도록 하고.”
그러면서 그가 묵직한 돈주머니를 주었다.
헤레이스는 그가 아직 앞에 있는데도 주머니를 열어보았다.
족히 30 골드는 돼 보였다.
“적은가?”
“됐습니다.”
“적으면 더 주겠다.”
“됐습니다. 여기에 맞춰서 쓰겠습니다.”
대공이 다시 웃었다.
그가 웃지만 않으면 같이 다니는 것이 이렇게 짜증 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공은 상단주를 만나러 가는 길에 그녀를 대동하지 않았다.
자기가 없을 때 헤레이스가 누굴 만나는지 알아보려고 그러는 것 같기도 했다.
헤레이스는 그의 뜻대로 움직이고 싶은 생각이 없었지만 그가 사라지자마자 로젠비크를 발견했다.
우연한 일은 아니었다.
로젠비크는 그녀가 마차에서 내렸을 때부터 헤레이스를 보았고 그때부터 주위를 어른거리고 있다가 대공이 사라지자마자 다가왔던 것이다.
헤레이스는 로젠비크가 다가오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그에게 직접 마주 다가가지는 않았다.
그녀는 앞으로 걸어가면서 사람들에게 말을 걸었다.
물건에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질문을 해 가면서 로젠비크에게 다가갔다.
로젠비크도 헤레이스가 왜 그러는 건지 대충 알아차린 듯했다.
“쌍둥이들은?”
헤레이스는 상단의 짐꾼들이 싸는 물건을 구경하면서 로젠비크에게 물었다.
그를 바라보지도 않고 허공에 대고 말을 해서 그에게 말을 걸고 있다는 것도 웬만해서는 알아차리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다른 곳에 있어. 짐 싸느라고 바빠.”
“애들이 짐을 싸?”
“자기들 짐. 그리고 다른 짐도 쌀 만하지. 이제는 많이 컸는데. 그런데 여기에는 어떻게 왔어?”
“대공이 오자고 해서.”
“대공이 왜?”
“상단을 인수하려고 한다는데 그건 헛소리하는 걸 테고, 아마 내가 전에 여기에 온 걸 봤나 봐. 그래서 나를 압박하려고 그러는 것 같아.”
헤레이스는 마차 사이를 천천히 걸으며 말했다.
“압박하다니?”
“여기에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여긴 것 같아. 그리고 그 사람들을 적절히 이용하면 나에게 압력을 가할 수도 있을 거라고도 생각하는 것 같고.”
“압력?”
로젠비크는 갑자기 헤레이스의 입에서 그런 말들이 연달아 나오자 긴장이 됐는지 그녀를 바라보았다.
“자연스럽게 행동해.”
헤레이스가 말하고 앞으로 걸음을 이동하자 로젠비크도 곧 시선을 돌렸다.
“너희가 황자라는 걸 아는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아. 오빠는 계속 여기에 있는 거지?”
“응. 에이바르 덕분에 지내는 게 편해. 우리가 쓸데없는 일에 끼지 않게 든든하게 지켜주고 있어. 처음에는 우리를 귀찮게 하려고 하는 놈들이 있었는데, 에이바르가 나서서 다 정리해줬어.”
에이바르가 생각 외로 신경 써 주고 있는 것 같아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수련은 어떻게 하고 있어?”
“시간 나는 대로. 틈틈이.”
“이 생활은 얼마나 더 할 생각이야?”
“적어도 반년은. 어쩌면 일 년이 될지도 모르고. 애들이 안전하게 자라는 게 가장 중요하니까.”
헤레이스도 그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에이바르의 용병대가 함께 하고 있기도 한 데다, 한 곳에 정착해 있는 것보다 오히려 상단을 따라 이동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번에는 상단주가 안 가고 딸이 간대.”
로젠비크의 말에 헤레이스가 그를 바라보았다.
이곳에 온 후에 그의 얼굴을 똑바로 본 것은 거의 그때가 처음이었던 듯했다.
로젠비크는 갑자기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이, 이상하게 생각할 것 없어. 나보다 나이도 많아.”
“나도 너보다 나이가 많아.”
“아니야. 헤레이스. 나는 너보다 나이가 안 적어. 에이바르한테 물어봤어.”
로젠비크가 진지하게 대꾸하는 걸 보며 헤레이스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예뻐?”
그가 당황한 모습을 보는 게 재미있어서 헤레이스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용병들은 예쁘다고 하는데 왜 예쁘다는 건지 모르겠어. 사람들 눈에는 그런 얼굴이 예쁘게 보이는 건가 싶기도 하고. 나한테는 별로거든.”
“그래? 미네른에 들어온 정보에 의하면 상단주 딸이 상당한 미인이라던데? 그럼 그 정보가 잘못된 건가?”
“응. 잘못된 것 같다.”
로젠비크는 자기 말에 확신이 있는 것 같았다.
헤레이스가 피식 웃었다.
“야. 너 뭐냐, 헤레이스? 너 언제 온 거냐? 왔으면 왔다고 말을 해야지, 이 자식이. 하여간 빠져 가지곤. 오빠 보러 온 거 아니야?”
갑작스러운 소리에 헤레이스는 인상을 구겼다.
대공이 어디에서 보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조심하고 있었는데 헤레이스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에이바르가 나타나서 시끄럽게 떠들어댔던 것이다.
“조용히 해. 대공이랑 같이 왔어. 대공은 지금 상단주를 만나러 간다고 했는데 무슨 꿍꿍이로 여기에 온 건지 몰라. 그러니까 모르는 척하고 거리를 유지해.”
헤레이스가 빠르게 말을 하자 에이바르의 표정이 변했다.
그러고는 마법에라도 걸린 것처럼 그녀에게서 멀어졌다.
그러나 그 직후에 나타난 쌍둥이들에게는 그 방법도 통하지 않았다.
“우와아아아. 헤레이스잖아? 헤레이스. 언제 왔어? 어떻게 왔어? 언제 가?”
먼저 그녀를 발견한 레이아스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헤레이스를 발견하고 그때부터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고 정신없이 달려와 헤레이스에게 폭 안기는데 그사이에 조금은 자라서 머리가 전보다 높은 곳에서 만져졌다.
헤레이스도 그 순간만큼은 모든 생각을 다 잊고 레이아스를 안아주고 뺨까지 부볐다.
“짐 싼다더니. 다 쌌어?”
“응. 그것도 알아, 헤레이스? 내가 하는 건 전부 다 알아?”
아이다운 말에 헤레이스가 웃음을 지었다.
“로젠비크가 말해줬어.”
“야. 모르는 척하라며.”
에이바르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말했고 헤레이스는 그 말에 뜨끔하면서도 잠시 레이아스를 놓지 못했다.
“헤레에에에에에이스으으으으으!”
이게 무슨 일인가 하고 나타난 루엔피스도 반가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 황자라는 것만 안 들키면 되겠지.
대공이 알려고 했으면 이미 다 알았을 거야.
어차피 다 알고 있으면서 모르는 척하고 있는 거였을 거야.
헤레이스는 자포자기한 채 생각하면서 레이아스와 루엔피스의 뺨을 어루만졌다.
“헤레이스. 어떻게 왔어? 언제 가? 여기에서 자고 갈 수 있어?”
루엔피스가 물었지만 헤레이스는 고개를 저었다.
“일하러 잠깐 온 거야.”
그러자 뜻밖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반가워하는데 하루쯤 자고 가도 나쁠 건 없겠군. 헤레이스. 오랜만에 만난 것 같은데 말이야.”
헤레이스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을 느끼면서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대공이 서 있었다.
그는 자상한 표정을 하고 헤레이스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옆에 매달려 있던 쌍둥이 황자들은 그의 기세에 저절로 눌린 듯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어느새 에이바르가 두 황자를 자신의 뒤쪽에 숨기고 서 있었다.
눈짓으로 로젠비크에게 다른 곳으로 가라고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로젠비크도 그 눈빛을 받고 슬쩍 자리를 피했다.
그 자리에 자기까지 같이 있으면 대공이 어떤 것을 떠올릴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 듯했다.
“얘기가 잘 됐다. 헤레이스. 대단한 상단은 아니지만 내가 손을 댄다면 제국에서 가장 큰 곳으로 만들 수도 있겠더군.”
대공이 말했지만 헤레이스는 그 말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어차피 그 말이야 안부 인사 대신 꺼내는 날씨 얘기만큼이나 의미 없는 얘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는 아이들인가?”
쌍둥이 황자를 보며 그가 헤레이스에게 물었다.
아마도 이게 대공의 진짜 목적이겠지.
“전에 알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여기에서 다시 만났다는 건가 보군.”
대공이 황자들을 보며 말했다.
“나는 이아노브 대공이다.”
그가 말하자 레이아스와 루엔피스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에버쿠젠이라는 성 대신 제국에서 흔한 다른 성 이페르만을 댔다.
“이페르만. 그렇군.”
대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단주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기로 했다. 같이 가도록 하지. 오랜만에 좋은 곳으로 가서 식사를 하자고 했다. 근처에 요리 솜씨가 훌륭한 식당이 있다더군.”
“알겠습니다.”
헤레이스는 짧게 대답했다.
“같이 가도록 하지. 여기에 있는 용병대장은 헤레이스의 오빠지? 페이먼 용병대의 대장이었던.”
대공은 별것 아니라는 투로 말했지만 에이바르는 눈에 띄게 긴장했다.
그가 자기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것이 좋게 느껴지지 않았을 터였다.
대공이 알려고 하기만 하면 그 정도의 정보를 모으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그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맞습니다. 대공 전하. 에이바르 아르시아 인사드리겠습니다.”
“그래. 헤레이스를 지금까지 잘 돌봐줘서 고맙군. 함께들 가도록 하지. 나는 좀 더 둘러볼 테니 그때까지 못다 한 얘기도 나누고. 식사 자리에는 그도 같이 있었으면 하는군. 헤레이스. 이름이 로젠비크라고 했지? 그러면 그도 로젠비크 이프레만이 되겠군.”
대공은 별것 아닌 얘기를 한 듯이 말을 하고 헤레이스의 어깨를 톡톡 치고 돌아갔다.
헤레이스는 모골이 송연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의 말투를 듣고 그녀는 대공이 황자들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에이바르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되는 거냐, 헤레이스? 이대로 애들을 데리고 도망칠까?”
에이바르가 헤레이스에게 가까이 다가와 목소리를 잔뜩 낮춘 채 물었다.
정말 그러는 게 좋을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