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ved a tyrant from a slave trader RAW novel - chapter 27
그녀의 몸이 마치 처음 발을 딛는 대지처럼 낯설었다.
“으으윽, 이상해. 로젠비크….”
헤레이스가 허둥대며 말하자 그녀와 똑같이 당황하고 겁을 먹었던 로젠비크는 어떻게 해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
헤레이스의 얼굴은 귀까지 붉어져 있었다.
로젠비크는 다시 한번 용기를 내 그녀의 뺨을 감쌌다.
그의 가늘고 긴 손가락이 희미하게 떨리는 것을 느끼며 헤레이스는 숨까지 멈췄다.
그 역시 없는 용기를 박박 끌어낸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더는 그 일을 그에게만 맡기고 있을 수가 없었다.
헤레이스는 로젠비크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의 손가락에 입을 맞췄다.
나도 너를 좋아하고 있다는 마음을 보여주기 위한 거였는데, 별로 의미를 담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도 그 단순한 행동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자신의 얼굴이 얼마나 빨갛게 달아올랐을지 알 수 있었던 그녀는 차마 로젠비크를 계속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로젠비크는 그런 헤레이스의 행동에 한껏 고무된 듯 그녀의 턱을 부드럽게 잡았다.
그리고 단번에 그녀의 입술에 내려와 자신의 입술을 포개며 지긋이 눌렀다.
“헤레이스….”
미칠 것 같은, 소름 끼치게 좋은 목소리가 그녀의 머릿속을 파고드는 듯했다.
헤레이스는 그 자리에 금방이라도 주저앉아버릴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죽을 것 같이 황홀했다.
단지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것만으로 몸에 그런 반응이 나타난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상적인 것 같지는 않았다.
로젠비크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가만히 감쌌다.
헤레이스는 다른 생각을 전혀 할 수가 없었다.
손은 어느새 그의 어깨를 쓰다듬고 있다가 다시 그녀가 알지 못하는 순간 그의 목을 감쌌다.
언제 그렇게 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로젠비크는 헤레이스의 적극적인 호응에 용기가 났는지 그녀를 더 꼭 끌어안았다.
“헤레이스….”
“로젠비크….”
두 사람의 이름이 허공에서 헤맸다.
헤레이스는 그의 이름을 몇 번이나 불렀다.
자기가 부르는 것을 그가 듣고 있다는 것이 감격스러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헤어지고 돌아가면 앞으로 한동안은 그의 귓가에 대고 이름을 부르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절박하고 처절해지기까지 했다.
로젠비크. 로젠비크. 로젠비크….
그녀의 목소리로 불린 이름이 허공에 점점이 박혔다.
로젠비크는 헤레이스의 눈가에, 눈꺼풀에, 이마에 수도 없이 입술을 맞췄다.
검을 잡고 휘두르던 손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부드러웠다.
멀리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고야 그의 자상한 입맞춤이 멈췄다.
그가 입술을 떼는 것을 느끼며 헤레이스는 짙은 아쉬움을 느꼈다.
그런 기분이 들 거라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헤레이스.”
그는 조금 민망한 듯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어색하게 웃었다.
키스를 멈추고도 그는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기도 하고, 머리카락을 쓸어올려 주기도 했다.
그동안 그런 스킨십은 한 적이 없었다.
헤레이스가 허락할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기도 했고 용기도 나지 않았다.
원하기는 정말 많이 원했으면서도 막상 헤레이스가 싫어하고 멀리 물러나 버리게 될까 봐 걱정됐었다.
그는 헤레이스를 알고 있었다.
그녀를 자기만큼 잘 아는 사람을 찾기도 어려울 거라고 생각할 만큼 정말 잘 알았다.
일단 헤레이스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기만 하면 그 후로는 엄청나게 후회할 일이 많아질 것 같았고 그녀가 그다음부터는 확실히 거리를 두고 그 선을 넘지 못하게 할 거라는 것을 알았기에 그 도박을 하는 것이 무서웠다.
헤레이스를 절대 잃고 싶지 않아서, 섣부르게 자신의 마음을 드러냈다가 그녀에게 거절당하게 될까 봐 걱정이 됐었던 것이다.
헤레이스도 자기를 싫어하지 않았다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그동안 이렇게 시간 낭비를 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면서 많이 아쉬웠다.
“헤레이스. 헤레이스!!”
멀리서 토토토톳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레이아스와 루엔피스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헤레이스. 우리하고도 같이 있어.”
루엔피스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하자 레이아스가 다른 손을 잡았다.
헤레이스는 로젠비크와 있고 싶은 마음이 더 컸기에 조금은 아쉬웠다.
로젠비크 역시 같은 생각인 듯했지만 쌍둥이 황자들의 의지는 아주 강해 보였다.
절대로 헤레이스를 양보하지 못한다는 의지가 눈에서 번쩍거리는 듯했다.
헤레이스는 로젠비크를 한 번 바라보고 쌍둥이 황자들과 놀아주었다.
“그동안 힘들지는 않았어?”
헤레이스가 묻자 두 사람은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모두 들려주었다.
“헤레이스. 우리 형이 얼마나 인기가 많은지 모르지? 여자들이 형 얼굴을 좋아하는 것 같았어. 형이 있으면 형 주위로 여자들이 다가온다?”
“맞아. 우리를 보면 아주 까무라치려고 그러고. 인형 같다고 하질 않나 천사 같다고 하질 않나. 귀찮아 죽겠어.”
레이아스와 루엔피스의 얘기를 듣는 건 재미있었다.
그들이 얘기를 하는 동안 로젠비크의 얼굴이 붉어지는 걸 구경하는 것은 또 다른 재미였다.
“그래도 형 때문에 좋은 일도 많아. 저 사람이 너희 형이니? 그러면서 맛있는 것도 많이 사주거든.”
“맞아. 에이바르도 인기가 좋아서 가끔은 에이바르에 대해서 물어보는 사람도 있어. 에이바르도 우리가 자기에 대해서 여자들한테 말해주는 걸 좋아해. 웬만하면 좋게 말하래. 에이바르는 여자들이랑 같이 사라지기도 하고 그런다?”
두 녀석은 그동안 봐 왔던 것들을 쉬지도 않고 떠들어댔다.
헤레이스는 로젠비크의 얼굴을 계속 구경했다.
그러나 겁을 내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당당한 얼굴이었던 것이다.
“에이바르가 여자들이랑 사라졌다가 돌아오면 얼굴에 빨간 나뭇잎 자국 같은 게 생긴다? 그게 뭐냐고 물으면 어른이 되면 저절로 알게 되는 거래. 손가락으로 문지르면 지워져.”
생생한 증언은 그 후로도 계속되었다.
“로젠비크는 그런 적이 없었고?”
“응. 형은 다른 여자들이 말을 걸어도 대답도 안 해. 그래서 형이 말을 못 하는 줄 아는 사람도 있어.”
“아무하고도?”
“응. 되게 예쁜 여자들이 말을 걸어도 말을 안 해. 불러도 들은 척도 안 하고 그냥 말을 끌고 가 버려. 나 같으면 일을 하느니 그냥 여자들이랑 놀 것 같은데 형은 일을 하는 게 더 좋은가 봐.”
“용병들이 형한테 그 얼굴 그렇게 쓸 거면 자기들 달래. 나도 내 얼굴 이렇게 쓰는데.”
방향을 알 수 없는 이야기가 아무렇게나 튀어나오는 동안 헤레이스는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로젠비크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당연한 것 아니냐는 표정을 지었다.
“다른 것도 더 말해봐.”
“아! 말을 타고 가는데 내가 다른 사람들을 다 따라잡았다?”
“나는 이제 무거운 것도 나를 수가 있어. 다들 놀라. 이렇게 조그만데 그런 것도 다 할 줄 안다고 하면서.”
그런 것은 별로 궁금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열심히 들어주었다.
쌍둥이들은 헤레이스의 손을 꼭 잡은 채 끝도 모르고 얘기를 했고 헤레이스의 얼굴에서는 따뜻한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시간이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대공이 상단주와 함께 나타난 것이다.
대공은 처음부터 헤레이스를 불러 옆에 두더니 그녀가 다른 곳으로 가지 못하게 했다.
이전에도 필요에 따라 자신의 파트너로 데리고 다닌 적은 있지만 이번엔 왠지 다른 때하고도 분위기가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헤레이스는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려고 했지만 대공은 가끔씩 그녀의 허리에 손을 올렸다.
헤레이스가 손을 치우라는 의미로 그를 똑바로 바라보면 손을 내리기는 했지만, 그런 일이 몇 번 더 반복됐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말을 걸었다.
그의 얘기는 로젠비크에게 집중됐다.
로젠비크는 그의 질문에 예의 바르게, 그러나 짧게 대답했다.
말을 길게 해 봤자 쓸데없는 꼬투리나 잡힐 뿐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고급 레스토랑으로 사람들을 데려간 대공은 요리를 풍족하게 시켰다.
그러나 요리를 즐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불편해했고 쌍둥이 황자들도 풍족한 음식을 앞에 둔 채 제대로 먹지 못했다.
대공이 대화를 주도해나갔지만 다른 사람들은 심드렁했다.
“헤레이스는 미네른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지.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벌써 중요한 일을 전부 다 파악했어. 많은 사람들이 그녀에게 의지하고 있지.”
대공은 말을 하는 동안 애정 어린 눈길로 헤레이스를 바라보곤 했다.
헤레이스는 대공이 왜 그런 수작을 부리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녀는 혹시 로젠비크가 기분이 나쁘지 않을지 걱정이 됐지만 그의 얼굴에서는 별다른 감정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헤레이스가 대공에게 아무 감정도 없다는 것도, 그리고 대공이 일부러 헤레이스와 자신의 사이를 벌리려고 그런 짓을 하는 거라는 것도 모두 알고 있는 듯했다.
“이것도 먹어 봐, 헤레이스.”
대공이 불필요한 친절을 베풀면 헤레이스는 선을 그었다.
“제가 먹고 싶은 건 알아서 먹도록 하겠습니다. 대공 전하.”
확실하게 선을 긋고 거리를 두는 목소리였기에 그들 사이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헤레이스가 대공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은 저절로 알 수밖에 없을 정도였다.
헤레이스가 태도를 매번 분명히 하자 쌍둥이 황자들은 점차 기분이 좋아지는 듯했고 나중에는 테이블 아래에서 두 다리를 흔드는 장난을 해가면서 즐겁게 식사를 했다.
대공은 타격을 입지 않은 듯 계속 얘기를 했지만 초반의 기세는 많이 누그러진 상태였다.
대공은 갑자기 변덕이 생겼는지 대공저로 돌아가겠다고 말했고 헤레이스는 황자들과 에이바르에게 인사를 나눴다.
그렇게 갑작스럽게 헤어지게 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기에 아쉬움이 크게 남았다.
로젠비크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쌍둥이 황자들도 마찬가지였지만 헤레이스는 로젠비크밖에 보지 못했다.
다시 그를 보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러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어서 더 서글펐다.
“가자. 헤레이스.”
재촉하는 대공의 목소리가 원망스럽게 들렸다.
대공저로 가는 동안 대공은 생각이 많아졌다.
헤레이스 아르시아를 데려오기로 한 것은 오래전부터 계획된 일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자기가 헤레이스를 어떤 용도로 사용할지 알고 있었다.
게다가 헤레이스는 그가 원한대로 영리하게 역할을 해 주었다.
처음에 기대했던 것보다 더 뛰어나게 일을 해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가 의도하지 않은 부분에까지 그녀의 영역이 넓어졌다.
그녀가 자꾸만 자신의 마음속으로 들어오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 이유는 그도 알 수가 없었다.
8장
헤레이스 아르시아보다 더 아름다운 여자는 지금까지 숱하게 봐 왔다.
그러나 헤레이스처럼 궁금해지는 상대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대화가 시작되기도 전에 대화가 지루해지는 경험.
그에게는 그런 경험이 정말 많았다.
누구와도 가까워지고 싶지 않았고 친밀해지고 싶지 않았다.
그는 혼자만의 시간을 즐겼고 그 시간을 만족스러워했다.
그 시간을 타인에게 방해받는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불쾌했다.
그러나 헤레이스 아르시아를 만나게 된 후에 많은 것이 달라졌다.
이유를 알아보려고 무진 노력을 했지만 결국 알아낼 수가 없었다.
그는 헤레이스 아르시아의 모든 것을 알고 싶었고, 그녀가 원하는 것을 안겨주고 헤레이스를 자신의 곁에 두고 싶었다.
그게 그렇게 어려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대공저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그는 그녀를 자주 바라보았다.
그러나 헤레이스는 창밖으로 시선을 주다가 나중에는 눈을 감았다.
그녀에게 다가갈 여지는 조금도 없었다.
억지로 취할 수는 있을 것 같았지만 그것은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가 원한 것은 그녀의 마음이었지, 마음을 잃은 몸이 아니었다.
‘헤레이스 아르시아.’
그는 불만 어린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 * *
대공은 전보다 자주 미네른으로 갔다.
그리고 헤레이스를 만났다.
그가 미네른으로 가면 사람들 사이에 갑작스럽게 긴장감이 형성되는 것이 느껴졌다.
그들은 대공이 얼마나 우월한 사람인지, 그리고 그가 가진 힘이 얼마나 크고 강력한지 알고 있었고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애를 썼다.
단 한 사람, 헤레이스 아르시아만을 빼면 모두가 그랬다.
그가 원한 단 한 사람은 그녀였는데 그녀만은 그가 와도 무관심한 얼굴로 자신의 일에 열중할 뿐이었다.
그럴 때마다 그의 관심은 헤레이스에게 집중되었다.
사람들은 대공의 관심을 받는 헤레이스를 부러워하는 것 같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헤레이스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일에 열중했다.
대공은 헤레이스를 향해 커지는 마음을 달래기 위해 결국 사용하지 않으려고 하던 것까지 만지작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