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hon RAW novel - Chapter 276
276화. 비분강개
임근용은 찻잔을 놓고 시녀 왕씨를 바라보며 말했다.
“형님께서 입덧 때문에 힘드시다면 당연히 동서인 내가 나서서 도와야지. 하지만 난 주방을 관리해 본 적이 없어서 괜히 좋은 마음에 도우려고 나섰다가 방해만 될 것 같아 선뜻 나서기가 그래. 아니면, 나랑 같이 영경거에 가서 할머님께 어찌해야 할지 여쭤보자꾸나. 식구들이 끼니를 거르거나 제대로 먹지 못하면 안 되잖아.”
임근용이 웃으며 마지막 한 마디를 내뱉자 방 안에 있던 마마들이 모두 따라 웃었다.
“설마 그러기야 하겠어요? 왕씨가 그 자리를 맡은 지 벌써 10년이 넘었는데 여태껏 집안 식구들이 먹을 밥 하나도 제대로 못 챙길 정도라면 쫄보도 그런 쫄보가 없는 거지요. 부끄러워서 어디 얼굴이나 들겠어요.”
지금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예전에 송씨가 집안일을 관리했을 때의 사람들이 아니었다. 반수 이상은 임근용이 직접 발탁한 사람들이었고 나머지 반은 전부터 있었던 사람들이긴 했지만 송씨와는 데면데면하고 처음부터 노태야나 노부인, 혹은 장남가에 의지했던 사람들이었다. 왕씨는 그녀들의 말속에 숨은 의미가 무엇인지 자연스럽게 알아듣고 다소 불안한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그게 그렇게 쉬운 줄 아세요? 평소였다면 저도 그냥 관례대로 했겠지요. 하지만 이런 큰 명절에는 세세하게 결정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아서 노비가 혼자서 마음대로 할 수 없어요.”
그녀가 이렇게 말하는 사이에 임근용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들 가 보거라.”
왕씨는 조심스럽게 임근용의 뒤를 따랐고 임근용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이 천천히 잡담을 하며 주방의 관례와 사람들에 대해 물었다. 왕씨는 임근용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전부 정곡을 찔러서 간담이 서늘했고 동시에 아주 난감했다. 그녀는 대답하고 싶지 않았지만 대답을 안 할 수는 없었고 대답을 한다 해도 아주 정확하게는 대답할 수 없었다. 세상사 다 돌고 도는 것인데 차남가가 아직 완전히 무너지지 않은 상황에서 그녀가 앞으로 누구에게 의탁하게 될지 누가 안 단 말인가? 비록 그녀가 차남가에 크게 의지하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전혀 여지를 남겨 두지 않을 수는 없었다.
“왜, 누군가 도와줄 사람이 필요한 거 아니었어? 이렇게 감추고 속이며 제대로 말을 안 하면 어떻게 도와주겠어?”
임근용은 다른 사람들처럼 반쯤 의도를 숨기지 않고 아주 직설적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귀에 거슬렸다. 분명 한겨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왕씨는 이마에 갑자기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솔직히 말해서 그녀는 운이 나빴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이런 쓸데없는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노복의 신분으로 또 어찌 임근용의 말을 무시할 수 있겠는가? 왕씨는 이리저리 궁리해 보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소부인, 노비는 평소에 대소부인의 명령에 따라 일을 해서 어떤 일들에 대해서는 노비도 잘 모릅니다. 그래서 노비가 제대로 대답을 할 수 없는 부분도 있습니다.”
임근용도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잠시 그녀를 놓아주었다.
잠시 후 영경거에 도착하니, 육 노부인은 막 아침 예불을 마친 상태였다. 그녀는 임근용이 왕 마마를 데리고 온 것을 보고 절로 의아해하며 말했다.
“오늘 친정에 간다고 하지 않았니? 난 이렇게 추운 날에는 나갈 수 없어서 못 간다 치지만 너희는 어째서 아직도 출발을 안 한 게야?”
임근용이 웃으며 그 일에 관해 이야기하자 육 노부인이 사 마마와 눈빛을 교환했다. 육 노부인은 시녀 왕씨를 앞으로 불러 이야기를 나누더니 또 임근용에게 지시했다.
“넌 빨리 가 보거라, 친척 간에 서로 체면을 세워 주어야지 늦으면 되겠니. 네 셋째 숙모한테는 갈 건지 물어봤니?”
임근용이 웃으며 말했다.
“셋째 숙모님께서는 바쁘셔서 내일이나 시간이 날 것 같다 하셨어요.”
여씨는 임씨 가문 사람들에 대해 이유 없는 분노를 품고 있었다. 더구나 그녀는 임옥진, 임근용과 함께 임씨 가문으로 가는 건 더욱더 싫었다. 그래서 그녀는 가족들이 내년에 입을 새 옷을 준비하느라 너무 바빠서 당일에나 참석할 수 있겠다고 미리 통보했다.
육 노부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그러라고 해라.”
이 일이 앞으로 어떻게 처리가 될지는 이제 임근용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녀는 아무 걱정 없이 빙그레 웃으며 작별을 고하고 물러났다. 임근용은 외원에다 중문 밖에 마차를 대기시키라 지시하고 임옥진과 육운, 육함을 데려오라며 사람을 보냈다. 또 자기 집에 가서 자신의 난로와 물건들을 가져오라 지시했다.
잠시 후, 여지가 임근용이 외출할 때 입는 피풍과 예비 옷 등을 챙겨 나와 따뜻한 구리 손난로를 임근용의 손에 쥐여 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씨, 노비가 확실하게 물어봤는데, 역시나더라고요……. 장수가 말 안 하려고 하는 걸 노비가 윽박질러서 겨우 알아냈어요.”
임근용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낮은 목소리로 지시했다.
“그런 일은 소문나면 좋을 게 없어. 혹시라도 나중에 그 사람을 마주치게 되면 멀리 피해서 가는 게 좋을 것 같구나.”
현재 상황으로 볼 때 육함과 육적의 관계는 더 이상 좋아질 수 없을 것 같았다. 임근용은 열심히 전생을 떠올려 보고 있었다. 당시 육함이 그녀에게 육적에 관한 이야기나 그와 어떤 의견 충돌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었던가? 임근용은 여러 번 생각해봤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가 죽을 때까지 육적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이라곤 그가 차남가와 왕래하는 걸 좋아해 수시로 육씨 가문에 드나들다가 육륜이 죽은 이후부터 출입하지 않았다는 것 정도였다.
“아가씨, 대부인과 육운 아가씨께서 오셨어요.”
여지는 미간을 찌푸린 채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임근용을 보고 재빨리 그녀를 깨웠다. 임근용은 얼른 앞으로 나가 임옥진을 부축하며 눈으로는 육운을 살폈다. 육운의 주변에는 항상 그녀를 모시는 간아 외에 또 다른 상급 시녀인 주아(珠儿)와 삼등 시녀인 란아(兰儿)도 있었다. 세 명의 시녀는 모두 극도로 긴장한 모습이었다. 간아는 육운 곁에 꼭 붙어서 부축하고 있었고 주아와 란아도 큰 가방을 든 채 육운을 주시하고 있었다.
임옥진과 방 마마 역시 수시로 육운을 훔쳐보며 육운이 중간에 가지 않겠다고 말을 바꾸거나 도착해서 일부러 소란을 피워 일을 어그러뜨릴까 봐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육운의 표정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그저 눈빛이 좀 싸늘하고 살짝 짜증이 난 듯한 기색이 보일 뿐이었다.
임옥진은 긴장한 표정으로 임근용의 손을 확 끌어당겨 팔짱을 끼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아용, 이따가 네가 아운이를 잘 살펴야 해. 뭔가 잘못될 것 같으면 얼른 네가 진정시켜. 절대로 멍청한 짓을 해서 평생을 망치게 하면 안 돼.”
“알겠어요.”
임근용은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녀는 부모의 마음은 다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임옥진이 아무리 못된 사람이라도 이때만큼은 그냥 한 명의 불쌍한 어머니일 뿐이었다.
일행이 중문 밖으로 나가자, 이미 마차 곁에서 기다리고 있던 육함이 그녀들을 보고 달려와 임옥진을 부축해 마차에 태웠다. 육함과 눈을 마주친 육운의 눈에서 번쩍 하고 불길이 치솟는 것 같았다. 그녀는 얼른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임근용은 두 남매가 이러는 걸 여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보아하니 육운이 육함에게 화가 난 것 같은데 짧은 시간 동안 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임근용이 약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육함을 바라보았지만 육함은 그녀를 향해 싱긋 웃고 마차의 발을 내렸다.
세 사람은 가는 내내 각자 다른 걱정을 하느라 별로 말을 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육운은 아주 어두운 표정으로 정면의 마차 벽만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임옥진이 약간 애원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운아?”
육운이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담담하게 말했다.
“걱정 마세요, 어쨌든 육씨와 임씨 두 가문 체면이 상하게 만들지는 않을게요.”
임옥진은 한숨을 내쉬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임근용은 뭐라 타이를 수도, 타이를 말도 없어 그저 고개를 숙이고 손에 든 난로만 만지작거렸다. 이 각쯤 지나 임씨 가문 저택에 도착했다. 새 옷을 곱게 차려입은 도씨가 밖으로 나와 그녀들을 맞이했다. 그녀는 우선 환한 얼굴로 육함의 인사를 받은 다음 임신지에게 육함을 임 노태야에게 데려가라고 말했다. 그런 다음 살짝 책망하는 투로 임옥진에게 말했다.
“왜 이제 왔어요? 어머님께서 몇 번이나 물어보셨는지 몰라요.”
임옥진이 말했다.
“근용이가 전이랑 다르게 일이 많이 늘어서 외출하기 전에 집안일을 다 해놔야 했어요. 안 그랬으면 지금쯤 집에 난리가 났을 거예요.”
임옥진은 평소답지 않게 친절한 말투였다.
도씨는 그녀의 말뜻을 알아듣고 임옥진에게 일부러 밝게 말했다.
“오늘이 혼례 당일은 아니지만 아침부터 친지들이 찾아와 결혼 선물을 주고 하는 통에 아주 떠들썩했어요. 지금은 다들 안락거에 모여 있는데 완전히 북새통이에요.”
임옥진이 도씨에게 눈짓을 하며 다소 심드렁한 목소리로 작게 말했다.
“네, 그 금씨 가문 사람들은 엊그제 도착했다고요?”
도씨는 이런 일로 그녀를 난처하게 하고 싶지 않아 자발적으로 자신이 알고 있는 걸 모두 털어놓았다.
“예, 근음이가 시집가기 전에 살았던 집에 묵고 있어요. 지금은 아마 안락거에서 어머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거예요. 그 사람들이 노비를 열 명 정도 데리고 왔는데 다들 일도 시원시원하게 잘하고 예의도 바르더라고요. 금 부인은 인자한 편이시고 금 대소부인도 용모가 단정하고 성품이 온화해 보였어요.”
임옥진은 안심하며 고개를 돌려 육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육운은 눈을 내리깔고 바닥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또 마음속으로 한숨을 내쉬고 다시 정신을 바짝 차렸다.
“친지들은 누구누구 왔어요?”
도씨가 그녀에게 하나하나 이야기했다.
“라씨 가문에서는 어르신들, 아가씨들이 오셨고, 성 서쪽에 사는 왕(王)씨 가문 분들, 성 동쪽에 사는 채(蔡)씨 가문 분들도 왔어요. 오씨 가문에서도 왔고요.”
도씨가 이 말을 하자 육운의 안색이 확 변했다. 그녀는 절로 비분강개했다. 어쩌다 이렇게 선을 보면서 남의 눈치까지 봐야 하는 지경이 된 걸까? 그건 둘째 치고 이렇게 많은 친지들 앞에서, 더구나 오씨 가문 사람들까지 있는 자리에서 이런 우스운 꼴을 보여야 한단 말인가?
임옥진은 사람이 많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좀 불편해졌다. 하지만 선을 드러내놓고 보는 게 아니라 그냥 이참에 겸사겸사 하는 것에 불과하고 남들에게 알리지도 않을 계획이었기 때문에 오씨 가문에서 알게 될까 봐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임옥진은 정신을 가다듬고 빨리 그 금씨 가문 고부와 만나 일을 마무리 지어야겠다고 생각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도씨는 임옥진의 심정을 알 것도 같아서 웃으며 길을 안내했다. 얼마쯤 걷다가 도씨가 어두운 표정으로 뒤에 처져 있는 육운을 보고 말을 걸으려 하자 임근용이 그녀에게 눈짓했다. 그녀는 잠시 생각해보다 눈치를 채고 임근용에게 가서 두 모녀가 이 일 때문에 실랑이를 벌였느냐고 물었다.
임옥진은 3할 정도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3할 정도는 강압적으로, 또 나머지 4할 정도는 애원을 담아 육운을 불렀다.
“아운아?”
육운은 아무리 이 일이 마음에 안 들어 마지막에 가서 거절을 하게 된다 할지라도 절대 다른 사람들 눈에 띄어 망신스러운 꼴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잠시 눈을 내리깔고 서 있던 육운은 순간적으로 결심을 하고 입을 꾹 다물며 꿋꿋하게 걸음을 옮겨 사람들을 따라 안락당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