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oul Station Druid RAW - Chapter (319)
320화 진상품
수호시티는 상공에서 내려다보면 그 경계가 되는 숲이 눈사람을 닮아있었다.
외성이 거대한 몸뚱이를 이루고, 왼쪽 머리가 야수 쉼터, 가운데 머리가 내성, 오른쪽 머리가 외부 문파에 할당된 땅이다. 이렇게 셋이 사이좋게 붙어있어 삼두눈사람이 된다.
가장 가운데 머리인 내성엔 시티에 핵심적인 모든 시설들이 자리했고, 수호 길드의 직원이 아니면 출입 자체가 통제된다.
혈석 발전소, 수도정수시설 등의 아주 기본적인 도시부속시설부터 연구소, 아티팩트 제작소, 아티팩트 창고 등의 생산연구시설도 위치했다.
길드 소속이라 해도 직급에 따라 드나들 수 있는 시설에는 제한이 있었다.
혈석 창고는 누구나 드나들 수 있지만 혈석의 입출고 현황을 자세히 기록해야 한다.
중요 에너지원으로 쓰이는 혈석은 그 자체로 현금으로 사용하기도 하기에, 마치 은행과 같은 시스템으로 돌아간다.
몬스터 사냥으로 인한 혈석 수입이 많은 길드의 용병들은 은행에 맡기듯 본인 몫의 혈석을 보관하기도 했다.
누구나 수량을 체크해 승인을 받아 혈석을 출고해야 하지만, 면제되는 이들이 하나 있었다.
가이아 부족의 엘프들.
이들은 승인 없이 무제한으로 혈석을 가져갈 수 있으며, 상시 대기 중인 직원들이 그 수량만 체크할 뿐이다.
그들이 가져가는 혈석은 대부분 세계수의 영향력 확대에 쓰인다.
세계수의 영향력이 확대될수록 그 범위에 드는 지역에 던전 생성을 억제한다.
이미 수호시티 내외성은 물론 인근 필드에도 던전이 생성되지 않고 있었다.
아직은 조금 먼 이야기지만, 차츰 범위가 늘어나면 서울 북부까지도 그 영향력 아래에 들어갈지도 모른다.
어쨌든 가이아 부족의 엘프들이 쓰는 혈석은 모두 공익적인 목적.
“이, 이걸 다 가져다 써도 된다는 말이오?”
“아, 물론이지요.”
가니언은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이게 대체…….’
혈석은 지구에서만 난다.
아루카의 엘프들은 풍부한 식량자원으로 지구의 여러 도시들과 교역해 혈석을 얻는다.
하지만 그것도 지구로 통하는 게이트가 비교적 가까운 곳에 생성된 부족에서나 그럴 뿐이다.
대부분의 부족은 지구와의 직접 교역 대신, 혈석이 유통되는 이웃 부족과의 교역을 통해 혈석을 수급했다.
혈석.
아루카에서는 마나석이라고 부르는 이 물질은 마법사의 과로와 위험부담을 한껏 낮춰준다.
직접적으로 마력을 추출해 세계수에 숨을 불어넣는 마법사가, 그저 혈석에 깃든 마력을 세계수로 이끌어주기만 하면 된다.
가니언의 부족은 수호 길드와의 거래 체결로 이제 혈석의 공급부족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충분한 혈석 공급으로 인해 매일 과로에 시달리던 엘프마법사들도 여유로워졌다.
그래서 가니언은 동료들을 남겨두고 홀가분하게 올 수 있었다.
‘지구에 뿌리내린 세계수가 있다니. 내가 가봐야겠어.’
엘프들, 그중에서도 고위급 마법사인 가니언은 혈석창고를 보고, 또 이 많은 혈석이 내뿜는 마력 향기에 아찔한 기분이었다.
“게르르르.”
얼마나 아찔했으면 거품을 물고 쓰러져버렸다.
“가, 가니언!”
카쿤은 아버지의 동료이자 삼촌뻘은 되는 마법사 가니언의 졸도에 적잖이 당황했다.
“크, 크윽, 마나석이 이리도 많다니.”
“저, 정신 차리세요.”
“괘, 괜찮네.”
가니언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앉았다.
“여기서 잠깐 쉬세요.”
가니언을 앉혀두고 카쿤이 혈석 분출을 직접 했다.
“이만큼 주시면 됩니다.”
쌀 다섯 포대 정도는 됨직한 혈석 무더기에 출입창구를 맡은 직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매번 가져가시던 것보다 10배는 많은데요?”
“당연하죠. 저분은 베테랑 마법사십니다.”
카쿤이 자랑스럽게 한쪽에 힘없이 앉아있는 가니언을 가리켰다.
정령을 잃고 이제 막 마법사로 전향한 알리어드나 로매드와는 운용하는 마력이 다르다.
이 정도 분량도 가니언이라면 단번에 마력을 추출해 세계수에 공급시킬 수 있으리라.
카쿤은 다섯 포대나 되는 혈석 무더기를 반지의 아공간 주머니에 후루룩 넣었다.
“이제 돌아가시지요.”
“후, 그러세.”
가니언이 겨우 정신을 수습하고 내성을 걸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선조들의 땅이라.’
옛 고대의 엘프와 드워프들은 이 지구에서 왜 떠나와 아루카에 자리잡았을까?
가니언은 지구의 세계수라는 호기심과 과거 역사에 대한 궁금증으로 가이아 부족행을 택했다.
하지만 궁금증 해소나 연구는 일단 할 일을 끝내놓고 해야 했다.
이미 열심히 일하란 신탁도 떨어지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 숲지기들은 어디 갔는가?”
“어떤 숲지기 말씀입니까?”
“그 왜, 기사였다가 이번에 숲지기로…….”
“아, 알리어드와 로매드를 말씀하시는군요. 그들은 포교를 떠났습니다.”
“포교?”
“저희야 당연하게도 세계수를 가꾸어 신을 섬기지만, 지구인들은 또 다르니까요. 그들에게 신의 뜻을 전하러 갔습니다.”
“으음, 힘든 길을 가셨구려.”
“예에.”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숲의 입구인 본사 건물에 당도했고, 곧 숲에 진입했다.
“이 숲은 아루카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하군요.”
“신께서 직접 만드셨습니다.”
“얼른 그분을 뵙고 싶군요.”
*가이아 부족의 숲지기들이 그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는 그때, 두 엘프는 서울의 주택가를 걷고 있었다.
“후, 포교의 길이 이리도 험한지 처음 알았소.”
“맞습니다. 지구인들이 이리도 쌀쌀맞을 줄이야.”
알리어드와 로매드는 신의 뜻을 열심히 전파하고 다녔지만 주변 시선은 냉랭하기만 했다.
그들이 지금 전파하는 신은 창조자가 아닌 구원자.
수호는 지금도 어딘가에서 고군분투 중이다. 그분께 힘을 보태주는 게 그리도 어려운 일일까?
결과적으로 지구를 위하는 길인데 말이다.
“저기로 가십시다.”
“그러시지요.”
두 엘프의 발걸음은 빌라촌으로 향했다.
“오늘도 참 바쁘겠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저 많은 집들을 돌아다니려면 말이다.
알리어드가 첫 집의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세요?]“좋은 말씀 나누러 왔습니다.”
[꺼져.]“그러지 마시고 저…….”
[뚜우.]끊어진 인터폰 소리에 알리어드가 허허롭게 웃었다. 이제 하도 익숙한 반응이다 보니 별로 당황스럽지도 않았다.
“허허, 다음 집으로 가시지요.”
“그럽시다.”
두 엘프가 옆집의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세요?]“좋은 말씀 나누러 왔습니다.”
[저 절 다녀요.]“저도 절 다닙니다.”
아미파부터 봉림사까지 수호 길드 내에만 두 개의 절이 있지 않은가?
두 엘프가 호의 가득한 얼굴을 내밀어 봤으나 반응은 차가웠다.
[뭐래. 뚜우-]“허허허.”
로매드가 알리어드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너무 상심 말게나. 저들도 신의 뜻을 알아줄 날이 있을 걸세.”
신이 존재치 않던 세상에 신의 존재를 설명하는 건 무척이나 고된 작업이었다.
두 엘프는 오늘도 열심히 초인종을 누르고 다녔다.
*까앙, 까앙!
“좋아.”
푸시시시시!
연구소 옆에 차려진 대장간은 꽤 고전적인 모습이었다.
드워프들은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고 망치질도 직접 했는데, 한 번 한 번에 영혼을 갈아 넣는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까앙, 까앙!
묘한 운율이 느껴지는 대장간의 드워프들의 얼굴은 매우 밝았다.
‘신화의 시대를 산다!’
드워프 장인이라면 신께 무기를 진상하는 것이 일생의 목표다.
막연히 뜻을 품는 것에서 발전해, 여기서는 정말 신께 진상할 수 있다.
그분께서 내가 만든 무기를 선택해주신다면…….
“융, 이거 어떤가?”
“활? 그분께서 활을 쓰시는 건 보지 못했네만.”
“흐음, 그래?”
드워프 활 장인이 금방 시무룩해졌다.
“아, 보지 못했다뿐이지, 그분께서 다루지 못하는 무기는 없다네.”
“오오오! 그래?”
활장인이 다시 활기 띤 얼굴로 활을 들고 돌아갔다.
“역시 신께서 쓰시기엔 장력이 약하지. 더 보완해야겠네.”
돌아가는 그를 보며 융은 미소지었다.
모든 드워프들의 얼굴에 생기가 넘친다.
그동안 막연하게 신을 위해 무기를 만들었던 그들이 직접 신께 진상할 기회를 잡았다.
누군들 신나지 않겠는가?
평생의 꿈이 이뤄질 수도 있는데.
자신이 만들어낸 무구가 신의 선택을 받아 신화를 써나간다.
얼마나 영광되는가.
신화세계에 이름 한 줄을 올릴지도 모를 일이다.
융의 설득에 따라나선 드워프들이 대부분 전사가 아닌 대장장이이자 저마다 비기를 가진 장인인 이유다.
“젠장. 이건 실패작이야.”
드워프 하나가 신경질을 내며 검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손잡이까지 모두 달아 완성된 검임에도 날을 세우고 최종적으로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누구의 평가도 아닌, 검을 만들어낸 장인 스스로 내린 평가.
“쯧, 저기 버리게.”
“후, 젠장.”
드워프 검장 뮴은 융의 여러 형제 중 하나다. 불같고 급한 성격으로 인해 장인들 중에서도 불량품을 많이 내기로 유명한 검장.
실패작을 가득 담은 수레를 끌어 오는 사람을 보며 뮴이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이거 지구의 친구들에게 미안하군그래.”
“하하, 아닙니다. 지구에서 철은 많으니 마음 놓고 쓰셔도 됩니다.”
“그리 말해주니 내 마음이 한결 가볍군. 이번엔 꼭 신께 어울리는 검을 만들어 낼 테니 기대하라구!”
“하하하, 쉬엄쉬엄 하셔도 됩니다.”
대장간에 배속된 지원부서 직원의 말은 빈말이 아니다.
‘와, 저거 감정하면 얼마나 나올까.’
슬쩍 보니 수레에 담긴 검은 절대 실패작으로 보이지 않았다.
내구성 좋기로 소문난 드워프제 무기다.
거기에 마법적 효과까지 더해진 아티팩트.
보나마나 풀옵션에서 수치 하나 정도 빠진 정도겠지.
극상품은 아니지만 충분히 특상품 취급을 받을 만한 명품 무기다.
‘실패작 수준이 경매장을 씹어먹네.’
지금 대장간에 여러 분야의 드워프 장인들이 한 번에 합류했다.
그들이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고 실패작 딱지를 붙여버린 성능 미달품은 폐기하지 않는다.
그대로 수호 길드 무기 창고로 가, 용병들의 전력을 증가시킬 뿐이다.
“됐다!”
그때 드워프의 환호에 고개를 돌린 직원은 고개를 갸웃했다.
“어?”
대단한 물건을 만들었나 싶었는데, 그의 손은 빈손이었다.
“오오, 브랄! 축하하네.”
“이런, 영광의 첫 순번은 내가 차지하고 싶었는데. 부럽구만!”
“으하하하!”
양손을 치켜들고 의기양양하게 웃는 도끼장인 브랄의 얼굴은 더없이 환했다.
영혼을 갈아 넣어 만든 물건이 신께 진상되었다.
*부식되어버린 제왕검을 내려다보는 수호의 표정은 어이없음 그 자체였다.
“이게 녹네.”
구천 행성 최고의 장인인 천검야장이 두드린 명검이다.
무려 역사에 이름까지 올린 명검이 녹아버렸다.
“지독하다. 증말.”
신으로 숭배받다 스스로의 독에 죽어버린 두꺼비 군주의 독은 정말 지독했다.
이놈이 죽고 신계에서 다시 탄생한 두꺼비 군주는 이놈의 열화판일 뿐이었다.
수호는 삭아버린 제왕검을 인벤토리에 넣고 대체 될 무기를 찾았다.
문명시대 이전에 만들어진 창.
수호가 만들었던 조잡한 목창이다.
태초의 활, 태초의 도끼와 함께 리자드맨 던전에서 파밍한 아이템들.
‘문명 이전이라.’
이제 와 생각하니 왜 저런 문구가 붙었는지 알 만했다.
수호가 머물렀던 신계는 지구문명 이전의 세상이니까.
거기에 태초의 인류이기도 했으니…….
“이것들은 못 쓰겠고.”
상징성이야 있지만 쓸 만한 물건은 못되었다.
구천 행성에서 노획한 무공서와 무구들은, 어지간하면 수호 길드 창고에 두고 와서 그런지 변변찮은 무기가 없었다.
그때 인벤토리 한쪽이 수호의 눈길을 끌었다.
“음?”
새로운 창이 떠오르는가 싶더니, 그 안에서는 수십 종의 무기들이 선택을 바라듯 반짝이고 있었다.
수호는 그중 커다란 도끼를 골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