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ven Lives Eight Lives RAW novel - Chapter 217
217화
* * *
일주일 동안은 희한할 정도로 평화로운 분위기가 지속되었다. 하지만 평화롭다고 해서 아무런 움직임도 없는 게 아니다.
나는 오전에는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도시를 돌아다니고, 오후에는 교류회에 참가, 밤에는 수련, 새벽은 몰래 숙소를 빠져나와 호룩스를 염탐했다.
지난 일주일간, 귀족님들을 제외하고 가장 바쁘게 움직인 사람을 고르라 하면 단연코 나일 것이다. 고수의 수를 파악하고, 띠알렌처럼 숨겨진 실력자를 일일이 세는 걸로도 모자라서 배가 드나드는 것까지 하나하나 파악한다.
‘배 두 척이 나가고 네 척이 새로 들어왔어.’
네 척의 배는 게리소님과 같이 피랄 연합체에 속하지 않은 고고한 늑대들이었다. 그들도 하나둘 합류하면서 교류회에도 활기가 띠었다.
드디어 뭔 일이 일어나나? 싶었지만, 별 일 없었다. 밤새 수련에 염탐까지 했던 내가 허탈할 만큼 아무런 문제도 없이 교류가 이어진다.
“호오? 흑자(黑磁)라고요?”
“예에. 영지 근처에 화산토가 넘쳐나서 말입니다. 외부에 적당한 흙이 있긴 한데 몬스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몇 년 동안 이것만 만지작거리더니 뭐가 나오긴 나오더군요.”
덕분에 나도 장인 짓을 할 여유가 생겼다. 피랄 연합체의 뭔 후작 밑에서 일하는 도자기 장인과 유익한 대화를 나누며 지식을 교환했다.
“한 번 보시겠습니까.”
장인이 보따리를 풀어, 내게 검은 도자기를 건네주었다. 반질반질한 촉감을 자랑하는 유광(有光) 흑자는 사이비 장인 노릇으로 먹고사는 나도 감탄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도자기 안쪽을 더듬으니 홈이 느껴지는 것이 유약이 아니라 표면을 조각하여 패턴화를 이루었다. 은은한 마나가 느껴지는 게 조각용 칼도 특별한 재질이 더해진 게 분명했다.
예를 들면, 흑요석처럼 칼날 끝에만 마나석을 조각한 날을 달았다던가.
나는 그에게 도자기를 건네주며 확인 차 물었다.
“내부 조각이 쉽지 않았을 텐데요.”
장인이 어색한 미소만 지으며 답변을 회피한다. 진짜배기 공법은 절대로 유출하지 말라는 명령이 내려와 답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나 또한 유약의 조합법과 무늬 패턴은 발설하지 말라는 명령이 있었으니 그의 심정을 이해한다.
쪼르륵!
사과의 의미로 장인의 술잔에 술을 따라준다.
“이것도 드시죠. 아주머니. 건어포 한 개요.”
“예에. 감사합니다.”
좌판에서 건어물을 가져가 죽죽! 찢는다.
우리가 있는 곳은 호룩스의 가장 큰 시장. 좌판을 깔아놓고 저급 발효주와 안줏거리 따위를 파는 곳 옆 바닥에 앉아서 술을 마시며 장인과 교류를 하고 있다.
나처럼 시장 바닥에 앉아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 덕분에 호룩스만 살판이 났다. 현재 호룩스에 모인 외부인만 해도 1천을 훌쩍 넘으니 그만큼 반사이익을 얻은 것이다.
병사들의 수만 따져봐도 게리소님 200, 피랄 연합체 600, 라그랑쥬 50, 델리오도라 100, 그리고 다른 늑대 측 넷도 각자 30에서 50씩 총 150. 해서 1100 이상.
엄격하게 통제되는 일천일백의 월급쟁이가 이제 막 발전하는 항구도시에 풀린 것이다. 한 명당 기념품 하나씩만 사가도 풀리는 돈이 어마어마하겠지.
‘그래도 그렇지 외부 전투원을 도시에 푼다고? 아무리 이유가 있다고 해도 찜찜한데?’
병사들을 외부로 푼 것은 별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배에도 자체적으로 물자가 있고 피랄 연합체에서도 음식을 제공하지만, 바로 앞에 도시가 있는데 천 명의 성인 남성이 대량생산된 군대식 따위에 관심이나 갈까.
한창 때의 청년을 구석에 처박아 놓기만 하면 사기에도 영향을 미친다.
결국, 병력은 요인 호위, 건물 보안, 도시 정찰의 3개 조로 나뉘어 교대 근무했다. 개중 도시 정찰 때 도시로 나온 병사들이 시장을 돌아다니며 군것질과 기념품 등을 사면서 돈을 뿌렸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서 그런 걸까, 창칼보다 돈의 유혹이 커서 그런 걸까. 쥐 죽은 듯이 조용하던 호룩스도 돈의 맛을 보고는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하지만 다툼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있다. 내가 기대하는 그런 종류가 아니고, 혈기왕성한 조직의 청년들이 모이다 보니 왕왕 일어나는 종류의 것이었다.
쩔그렁!
바로 지금처럼, 사소한 충돌이 매일 벌어진다.
채앵!
“엇!”
금속이 부닥치는 소리에 나와 장인은 대화를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두 병사 무리가 좁은 시장길을 돌아다니다가 무기가 부닥쳐서 나는 소리였다.
“…….”
두 무리 모두 다섯 명씩 조를 이룬 건장한 병사들. 의복 양식을 보면 한쪽은 피랄 연합체, 한쪽은 고고한 늑대 무리 중 한 곳이었다.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며 서로를 빤히 노려보는 열 명의 건장한 남성들.
“어이. 비켜.”
“네가 비켜라.”
뭐, 애들 신경전 벌이냐? 나는 기가 찼지만, 다른 이들에겐 그렇게 비쳐지지가 않았나보다.
시장에 기묘한 기류가 흐르고, 사람들이 병사들에게서 멀어졌다. 나와 스톤을 호위하던 보로도 우리 앞에 서고, 상대 쪽 장인을 호위하던 병사도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당장 싸움이 일어나고 피바람이 불 것 같은 분위기. 하지만 손만 움찔! 할 뿐 그 누구도 무기에 손을 가져다 대지 않는다.
안 싸울 거면서. 아니, 못 싸우면서 허세 부리기는. 나는 도자기를 높게 쳐들며 외쳤다.
“흑자라고 하면 가격이 장난 아니겠습니다? 그도 그럴 게, 유니크 하잖아요!”
“예? 아… 아!”
장인이 어리둥절해하다가 말뜻을 알아듣고 장단을 맞춰주었다.
“사실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도자기의 색감과 달라서인지 그리 인기는 없더군요. 유통이 힘든 지역인 것도 있고요.”
‘아하! 하하하…….’ 하고 어색하게 웃는 장인에게 시선이 쏠린다.
“쯧!”
피랄 연합체 쪽 병사가 우리를, 정확히는 보로와 장인을 호위하는 병사를 노려보다가 혀를 차고는 시장을 떠났다. 늑대 쪽 병사들이 우리에게 무언으로 인사를 한 뒤, 마주 시장을 떠난다.
시장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활기를 되찾았다. 멀어지는 병사들을 힐끔 바라본 장인이 식은땀을 닦으며 내게 엄지를 세웠다.
“거 참… 담력이 대단하십니다.”
“담력은요. 어차피 싸우지도 못하는데.”
“하하…….”
병사들의 기 싸움이 주먹 싸움으로 번진다고? 그런 짓을 하면 기사님들이 달려와서 무장을 압수하고, 손목을 자른 뒤 골목길에 내다 버린다.
치료도 하지 않고 말이지. 손목이 잘린 병사의 운명은 뻔했다. 다음날 그 골목길에 가니 바닥에 번진 핏자국 말고 아무런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기사들만 조심하게? 용병들도 일단은 넙죽 엎드리지만, 자존심 상하면 눈 뒤집혀서 칼 빼 들고 덤비는 미친놈들이 득시글하다. 괜히 타지에서 죽고 싶지 않으면 무력 충돌은 마지막까지 참아야 했다.
하지만 한평생 흙만 만진 장인이 그걸 알 리가 있나. 그가 눈치를 보다가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섰다.
“괜히 이번 일이 윗분들 귀에 들어갔다가 저희도 불똥이 튀겠군요. 이만 헤어집시다.”
“예. 오후에 공방에서 보죠.”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거기 청년도 조심하고.”
스톤이 헤벌쭉 웃으면서 멀어지는 장인에게 손을 흔든다. 우리도 안주와 술을 주섬주섬 정리하며 떠날 준비를 한다. 찰랑이는 술 냄새를 맡은 보로가 침을 꿀꺽 삼켰다.
“마실래?” 놀리듯이 술병을 흔든다.
“안 그래도 눈알도 한 짝 없는데, 팔까지 하나 없이 살라고?”
“좋네. 균형도 딱 맞고.”
“흥! 시부랄 새끼!”
보로가 콧김을 불며 시장을 나갔다.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걸음걸이에 힘이 빡 들어갔다.
“나보다 센 놈이 두 놈이나 있는데 뭘 조심하라는 건지.”
그렇게 성을 내며 앞서가다가 엉뚱한 길로 빠졌다. 인적이 드문 곳을 지나는 도중, 내게만 작게 속삭인다.
“그래도 조심해. 네가 나보다 강하다 해도 뭔가… 뭔가가 심상치 않아.”
벅벅!
피부가 시뻘게질 때까지 코를 마구 문지른 후 이어 말한다.
“시큼한 냄새가 나. 예전부터… 배 창고에 있을 때부터 이 냄새가 나면 누군가가 꼭 죽었어.”
“…….”
과거 이야기를 꺼내자 실실 웃던 스톤이 침묵한다. 보로가 스톤과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이곤, 날카로운 눈으로 시장을 구석구석 훑었다.
대인전을 상정한 전문적인 전투 교리도 모르고, 정치의 흐름도 배우지 못했지만, 죽음의 냄새를 맡는 것 하나만큼은 초감각의 영역에 들어가 있는 보로.
그 초감각은 병사 시절부터 빛을 발했다. 보로가 뭔가가 불안하다 하면 절반 정도는 꼭 피를 보는 사건이 발생했다.
드디어 일이 벌어지는 건가? 나도 감지를 못한 사건의 냄새를 그가 감지한 건가? 그렇다면 언제? 어디에서? 나는 눈을 빛내며 보로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나도 잘은 모르겠지만, 오늘 밤은 아무 데도 나가지 말고 숙소에 처박혀 있어. 적어도 일주일은 그래야 할 거야.”
에이. 김 샜네. 나는 술병에 남은 술을 마시며 말했다.
“너, 나 온 날 해적들 다 죽는 것도 예지 못했으면서.”
“아이 씨! 그건 네가 이상한 놈이라서 그런 거고! 원래는 절반 정도는 맞거든?”
“절반이면 나도 할 수 있는데? 봐봐, 신발 이렇게 던지고… 앞면 나왔으니 내일도 술 마시는 날이야. 어때?”
나는 보로를 놀리며 지나쳤다.
본디 기습은 처음이 가장 중요하다. 누가 뭔 짓을 저지르든 간에 우리 같은 하급자한테 귀중한 처음의 습격을 양보할 리 있겠냐?
우리는 그저 마음 편히 먹고 윗사람들이 하라는 대로만 일하면 된다고. 보로 이놈, 역시나 나이 먹고 괜한 걱정이 많아졌다니까.
“…개 같은 새끼.”
나는 보로의 욕을 흘려들으며 숙소로 복귀했다.
* * *
인정한다. 내가 잘못 판단했다.
르암인은 미친놈들이었다.
알테어가 마초마초 상마초라면, 평균적인 르암인은 그냥 마초남이다. 앞뒤 안 가리고 저지르고 보는 돌대가리 새끼들.
일단 죽이고, 시체한테 심문을 개시하는 놀라운 머저리들.
개새끼들. 맨날 나한테 미친놈, 미친놈 하면서 노래를 부르더니. 알고 보니 지네가 제일가는 미친놈이었어. 전생의 내가 수도 없이 들은 미친놈이라는 욕설이 억울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이런 걸 보면 나도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게리소님의 마법사들이 철선(鐵船)을 보고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으면서 받아들이지 못한 것처럼, 나 또한 마법을 배웠지만 진짜 마법사가 어디까지 미친 짓을 벌일 수 있는지를 잊고 살았다.
‘문명 발달이 더디다고 무시할 게 아니야. 마법과 자원의 힘이 있으면 지구와 스케일이 다르게 사고를 칠 수 있다니까.’
이게 무슨 뜻이냐. 내 예상과 다르게 첫 번째 습격은 나, 쟈기가 포함된 장인들에게 이루어졌다. 습격도 시작부터 범상치 않았다. 평범했으면 르암인이 미친놈이라고 할 리가 없잖아.
‘의도적으로’ 배치한 듯이 귀족들과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 잡은 장인들의 숙소. 이곳을 지키는 병사도 스무 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드드드드득!
습격자는 수십 명의 장인과 스물이 넘는 병사들이 머무르는 5층 건물을 통째로 도려내는 무식의 극을 달리는 짓을 저질렀다.
그야말로 억! 소리 나는 돈을 투자해서 건물이 무너지지 않게 건물 전체에 강화마법을 걸고, 밑바닥 땅을 통째로 뜯어낸다.
뜯어내기도 참 쉽다. 돌 계열의 마법으로 지면을 스푼으로 뜨는 것처럼, 얇게 푹! 뜨면 끝이다. 그렇게 마치 장난감 집처럼, 5층 건물이 지면에서 분리되었다.
흔들흔들! 쿠르르릉!
“어엇?!”
건물이 무너질 듯이 흔들리며 장인, 식당 주인 내외, 병사들이 복도, 방 안에서 중심을 잃고 쓰러진다.
우당탕! 끼이익! 쨍그랑!
의자와 탁자가 쓰러지고, 침대가 기울고, 그리고… 도자기 병이 깨져? 이 새끼들이 내 도자기를 깨뜨려?!
쟈기의 공식적인 계급도 있고, 이 미친놈들이 어디까지 미친 짓을 저지르나 가만히 구경하고 있었는데. 내 도자기… 한 점 만드는 데 30번이 넘게 장인의 손길이 들어가는 예술품을 쇳덩이나 휘두르는 무식한 잡것들이 감히?
“이 개새……!”
나는 흔들리는 바닥에서도 균형을 잃지 않고 벌떡 일어섰다. 강화 마법 덕분에 하중을 뛰어넘은 충격이 닥쳐와도 기둥과 벽은 멀쩡하다. 먼지가 푸스스 떨어지지만, 금이 간 곳은 한 곳도 없다.
나는 입술을 씰룩대며 창밖으로 이동했다. 한적한 거리가 내다보이는 풍경이 위아래로 흔들리다가… 검게 출렁이는 바닷물 위로 추락했다!
첨벙! 쿠당탕!
5층 건물이 수심 5미터도 넘게 가라앉는다. 단 몇 초 만에 1층은 바닷물이 무릎까지 차올랐고, 2층에도 바닷물이 튀었다.
내가 있는 3층은 물보라 말고는 거의 물이 튀지 않았다. 하지만 건물이 5미터나 위아래로 흔들리자 방과 복도에 있던 이들이 이리저리 뒤흔들리며 앓는 소리를 내는 것이 내 감각에 잡혔다.
“끄악!”
“아으아아아……! 다, 다리가…!”
“쟈기! 이런 썅! 이건 또 뭐야?!”
이대로 수십 명의 장인, 병사들이 건물과 함께 물에 빠져 죽을까? 승천자의 감각은 그럴 리가 없다고 말한다. 1층까지 잠겼던 건물은 기적처럼, 물 위로 떠오르더니 바다 위에 둥실 떴다.
무게 감소와 하중 분산, 균형 조절 등의 여러 마법이 들어간 끝에, 5층 건물이 바다에 뜨는 기적이 벌어졌다.
촤라락! 털컥!
부두 근처에서 어슬렁대던 배가 신속하게 다가와 건물에 갈고리를 박는다. 그러곤 검은 바다 너머로 이동했다. 건물도 배를 따라 목적지 모를 항해를 시작한다.
무식하게도 저지르네. 나도 가만히 있을 순 없다.
“스톤! 일어서!”
“응!”
재미있다고 굴러다니던 스톤이 벌떡 일어선다.
텁!
바닥을 굴러다니던 가방을 찬다. 초능력을 발휘해 가방에 고이 숨겨져 있던 단검을 꺼내 손에 쥐었다. 내 감각에 침입자들이 접근하는 게 느껴졌다.
탁! 타닥!
배의 후미에서 각 건물의 창문 쪽을 향해 사다리를 놓는다. 내 방 창문은 배가 아닌, 도시 쪽을 향하고 있으니 바로 반대편 방으로 가면 되는 일이겠지.
간다. 가서 다 죽이고 도자기를 깨뜨린 죗값을 치르게 해주마. 도자기 한 점에 너희 목 백 개는 내놓아야 한다. 네 점이 깨졌으니 사백 두 정도면 계산이 맞겠지.
‘너무 평화에 잠겨 지내다 보니 감각이 무뎌졌어.’
이 멍청한 새끼. 적의 수작을 재밌다고 구경하다니. 션이나 웨일이 들었으면 이빨을 몽땅 뽑아버릴 생각이나 하고 자빠져있다.
관망하는 건 여기까지다. 나는 옛날 감각을 되살리며 문을…….
벌컥!
“쟈기! 안 돼!”
어떻게 알았는지 보로가 문을 열고 들어와 나를 말린다. 맨발에, 바지까지 흠뻑 젖었다. 아, 병사들은 2층에 머물렀지. 잘도 여기까지 왔네.
내가 엉뚱한 감상을 하고 있으려니, 보로가 내 손에 들린 단검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다… 그거 숨겨 인마!”
이놈이 장난하나. 그래도 옛 정을 생각해서 한 번은 들어주지. 나는 단검을 허벅지에 넣었다. 초능력으로 환각까지 걸었으니, 스칼러 급의 실력자가 검사하지 않는 이상 들키지 않을 것이다.
꽝!
“병사 발견! 복장… 게리소님!”
그 타이밍에 반대편 문을 박차고 나온 습격자가 보로를 보고 그리 외쳤다. 보로가 급히 뒤를 돌아보았지만.
뻑!
검은 가죽 갑옷을 입은 병사가 주먹을 휘둘러 보로의 안면을 때렸다. 보로가 바닥을 뒹굴고, 방에서 나온 나머지 병사 몇몇이 우리에게 칼을 겨누며 외쳤다.
“너희 둘! 어디 소속 장인이냐! 말해라!”
보로는 입가에서 침을 흘리는 와중에도 내 바지를 꼭 붙잡는다. 나는 얌전히 두 손을 들었다.
“게리소님의 도자기 장인 쟈기입니다. 이쪽은 허드렛일꾼 스톤입니다.”
“쟈기하고 스톤. 목록에 있나?”
“예. 있습니다!” 얍삽해 보이는 놈이 외친다.
“쟈기하고 스톤 확보! 죽기 싫으면 얌전히 따라와!”
그렇게 외친 병사들이 우리 둘, 보로도 포함해서 셋의 팔목을 밧줄로 묶었다. 열린 문틈으로 반대편 방을 보니 그쪽 장인들도 억류되고선 창밖으로 기어간다.
우리도 그들을 따라 창밖, 배로 연결되는 사다리를 기어서 건넜다. 갑판 위에는 통일된 검은 가죽을 입은 병사들 수십 명이 우리를 분류했다.
나는 그 틈을 타서 보로에게 속삭였다.
“왜 말린 거야.”
보로가 피가 섞인 침을 퉤! 하고 뱉으며 나를 째려보았다.
“미친놈아. 한평생 도자기만 만진 십 대 애새끼가 단검 한 자루 들고 병사들 수십 명을 썰어 죽이면 사람들이 잘도 네 신분을 믿어주겠다? 그치? 너 의심받으면서 내 인생도 꼬일 일 있냐?”
“…….”
“딱 보니 배에 가둘 것 같은데. 일 저지르려면 남들 안 볼 때 저질러.”
퍽!
“거기 너! 떠들지 마! 죽고 싶어! 그리고 병사들은 이리 오라 했을 텐데!”
습격자가 보로의 배를 발로 찬 뒤 목덜미를 잡았다. 보로가 죽는 소리를 내며 병사에게 끌려갔다. 그가 은밀히 나를 바라보며 입만 벙긋거렸다.
‘나 죽기 전에 구해라.’
하이고. 친구 하나 잘못 둬서 이게 뭔 개고생이냐.
나는 긴 한숨을 내쉬며 스톤과 함께 병사를 따라 선실로 이끌렸다. 선실 4층. 교과서에서나 보던 나무 감옥에 몇 명의 장인과 함께 억류되었다.
“사, 살려주십쇼! 저는 아무것도 모르는……!”
억류된 장인은 살려달라고 벌벌 떨고.
“끄아악! 어, 어깨가!!”
누군가는 어깨가 빠져서 비명을 지른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어깨를 맞춰주었다.
몇 명을 더 도와주며 감각을 곤두세우니 익스퍼트 급의 실력자와 마법사들이 급하게 접근하는 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미 속도가 붙은 습격자의 배는 멀어져만 갔다.
병사들을 배에 태우고, 돛을 올리는 사이에 배는 어두운 바다로 도망치고도 남겠지. 기대할만한 건 할리 마법사 등이 수면 걷기로 쫒아오는 거다.
찰그랑!
숙소와 배를 이은 갈고리가 빠지는 소리가 들린다. 두 거대한 물체가 분리된다. 발이 빠른 병사가 숙소 안에 마나석을 집어던지고 몇 초 지나지 않아…
꽈과광!
숙소가 바다 한가운데서 폭발을 일으켰다. 아하! 추격에만 힘쓰지 못하게 속임수를 쓰는 거군.
영리한 놈들이다. 속임수에, 건물을 뜯어내는 과감성, 5분도 지나지 않아 납치와 탈출을 이루는 신속함까지. 나는 무식함만 가득했던 이들의 평가지에 ‘영리함’ 한 글자를 더했다.
그렇게 우리를 납치한 납치범의 배가 유유히 호룩스를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