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e became the younger sister of the villain RAW novel - Chapter 186
76화
같은 시각, 신촌 막사.
부상자들을 치료하거나 좀 더 제대로 된 시설로 옮기기 위해 분주한 구출팀원들을 지나고 나면, 막사 좀 더 깊은 곳에는 곧 터질 것 같은 캐비닛과 각종 서류들이 마구잡이로 널브러진 지휘실이 존재했다.
간이 테이블 위로 넓게 펼쳐진 구(區) 지도에는 노랗고 빨간 핀들이 잔뜩 꽂혀 있었다.
1-SA, 2-NEC, 3-SB…….
작은 포스트잇에 적힌 정체불명의 문자들은 전부 온이헌이 나타난 이후 생성된 포탈들의 표시였다.
그리고, 세기도 어렵게 핀이 밀집된 주거단지 위로 팔꿈치를 괸 주서윤은 어느 한 곳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중이었다.
어쩌면 반쯤 뚫어졌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
“…….”
상대가 아는 척도 하지 않는 게 문제였지만.
서윤은 버석한 분노가 담긴 얼굴로 눈도 마주치지 않는 맞은편 남자를 쓸어보았다.
집에서 막 나온 것처럼 얇고 헐렁한 면티에 대충 걸친 점퍼.
하나도 세팅되지 않은 머리가 부스스하게 흩어졌다.
누가 보면 흡사 현 상황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길 가던 민간인을 붙잡아 앉힌 것 같은 생뚱맞은 모습이었지만,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겸.”
그는 어떤 장비 하나 장착하지 않은 이 상태로도 일절의 상처 없이 시내 중앙까지 뚫고 들어왔다.
그게 이겸이란 각성자의 힘이었다.
사람들의 상식을 뒤집고, 언제나 기대 이상의 것을 보여주는 영웅.
희망.
‘지금은 그 칭호들 중 어떤 것도 해당되지 않는 것 같지만.’
스스로도 정돈되지 못한 그를 ‘마스터’라고 부를 수는 없다는 게 서윤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름을 부르는 그 두 음절에 화들짝 어깨를 떤 건 두 보스의 옆에 앉아 있던 권해이와 구서복이었다.
그 이유인즉슨, 첫째.
아무리 연이 깊은 친구사이라곤 하지만 서윤이 공적인 자리에서(혹은 남들 앞에서) 이겸을 이겸으로 부르는 일이 근 몇십 년간 없었기 때문이었고, 둘째.
차갑고 딱딱한 얼음 능력을 가졌지만, 본성적으로 은근히 다정함을 따지는 그녀가 누군가의 성을 붙여 단호히 이름을 부르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겸은 여전히.
“…….”
사방에 철벽이라도 세운 듯 묵묵한 얼굴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자강두천의 싸움.’
서복은 사색이 된 얼굴로 눈만 도르르 굴려대며 질식할 것 같은 공기를 참아냈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이나 팡팡 터져나간다고, 한 치의 양보도 없는 팽팽한 분위기 속에서 곤란해 보이는 건 권해이와 자신뿐인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엄중한 분위기는 견뎌내지 못하는 그녀인데…….
그 예상이 틀리지 않았다는 듯 힐끔 시선을 들어 올리자 따악 눈이 마주친 권해이가 안면 근육을 이리저리 찌푸리며 항의했다.
서복 역시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눈썹을 들어 올렸더니, 그녀가 조심스레 입을 벙긋거리기 시작했다.
“(어. 떻. 게. 좀. 해. 봐. 요.)”
있는 힘껏 얼굴을 구겨 만들어내는 처절함이란.
서복은 깊은 동병상련의 슬픔을 느꼈지만 해줄 수 있는 답이란 이 것뿐이었다.
“(내. 가. 뭘. 어. 떡. 해. 요.)”
말 그대로였다.
아가씨가 그렇게 뛰어내린 후, 보호막이 무너져 무방비 상태로 전장에 내던져진 아파트는 곧 비명으로 가득 찼다.
그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아가리를 벌려오는 마수들 사이에서, 이겸은.
「꽈아아아아앙!」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광경이었다.
하늘에서 무언가 터지는 소리와 동시에 눈앞이 새하얗게 타들어 갔다.
서서히 천지가 분간될 쯤이 돼서야 구서복은 제 귀가 청력을 잃은 게 아니라 주변이 고요해졌다는 걸 깨달았다.
허둥지둥 창문 밖을 내다보았을 때에는 그가 발을 내리꽂은 반경 주위로 마수들이 ‘삭제’됐다는 걸 파악할 수 있었다.
이 말이 아니고서는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정말 꼭 지우개로 지워 버린 것처럼, 살아있었던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포탈과 마수들은 공중분해 된 상태였다.
그 범위가 어느 정도인지 단숨에 알아차리기 어려울 정도로 사방은 깨끗해져 있었다.
이겸은 할 수 있었지만 하지 않았던 것이었고, 그러니까, 서복이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거냐면.
‘지금 제정신 아니라고요, 길드장님.’
그러나 미처 해명을 끝내기도 전에 먼저 방아쇠를 당긴 건 서윤이었다.
“이번에도 혼자 짊어지겠다고 선언한 결과가 이렇게 다가오니까 어때.”
“…….”
“말했지. 네 그 비장한 고집이 언젠간 누구 하나를 다치게 할 거라고.”
선발전.
생각하기만 해도 기가 차다는 듯 힐난하는 목소리에 서복과 해이의 눈이 사시나무 떨듯 흔들렸다.
본인들이 아는 서윤은 적어도 누군가를 감정적으로 책망할 사람이 아니었다.
특히나 겸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랬다.
그녀는 이겸의 절대적인 지지자였고, 모두가 등을 돌린다 하더라도 믿고 따를 거란 충신 취급을 받았으니까.
‘하지만…….’
입에 자물쇠라도 잠근 것처럼 여전히 침묵하는 얼굴을 보며 서윤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정신 차려, 제발.”
그녀의 시선이 날카롭게 이겸을 훑었다.
지금의 주서윤은 설득되지 않으면 이겸을 낱낱이 분해해 찢어 날리기라도 할 것처럼 이글거렸다.
서윤이 말했다.
“화랑 재건의 총책임자를 맡아달라고 해서 받아들인 걸 뭔가 이상한 쪽으로 생각한 모양인데…… 너도 그랬잖아. 화랑 누구한테 물려줄 생각 없다고.”
“…….”
“내가 세우는 화랑은 여전히 ‘이겸’의 화랑이야. 부탁으로 만드는 건 뼈대일 뿐이고.”
그 안에 뿌리를 채울 건 너라고.
서윤은 확답 받듯 한 글자 한 글자를 짓이기며 속삭였다.
배신감이 듬뿍 담긴 목소리의 의미를 그가 모를 리 없었다.
화랑을 부탁한다 말했을 뿐, 서윤에게 역시 선발전에 나갈 것이라 이야기한 적은 없었다.
왜 혼자 모든 것을 책임지려 하냐고.
돌아오지 않겠다는 말을 본인의 입도 아니고, 딱딱한 시스템 창으로 우리에게 전하는 게 맞는 상황이냐고 그녀는 캐묻고 있었다.
겸은 알면서도 애써 모르는 척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에게는 죽음을 각오하는 것보다 마음을 꺼내 설명하는 게 더 어려운 일이었으니.
하지만.
“사람이…….”
오랜 적막을 깨고 바짝 마른 목소리가 공기를 긁어냈다.
여기까지 왔으니 더 이상 피할 수만은 없었다.
세 쌍의 눈동자가 모두 이겸을 향했다.
그는 깊은 절망을 마주한 사람처럼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쥔 채 몸을 웅크렸다.
“막을 수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잖아.”
그건 명백한 사실이었다.
단정 짓는 목소리에 허, 작은 헛숨이 테이블 위를 맴돌았다.
황당과 어이없음의 감정이 제각기 둥둥 떠올랐지만, 그 말에 반박할 수 있는 각성자는 이 나라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두 번째 SSS등급.
뒤바뀐 랭킹 1등.
어떤 상식이나 체제도 막을 수 없는 폭주를 잠재울 수 있는 건 그걸 짓누를 또 다른 힘뿐이라는 걸 사람들이 알지 못할 리 없었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못 미더워?”
오랜 기간 참아냈던 묵은 먼지를 털어내듯 서윤이 토해냈다.
그 목소리는 꼭 기침처럼 쏟아져 나와 무겁게 내려앉았던 공기를 일렁이게 하기에 충분했다.
버석한 얼굴을 느릿하게 비비던 이겸의 손길이 뚝 멈췄고, 바짝 마른 침을 되삼키는 목들이 오르내렸다.
서윤은 솟구쳐 오른 감정을 내리누르듯 잠시 눈을 감고 심호흡하다, 어느 전장에 선 때보다 과단한 시선으로 이겸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속삭였다.
“그래, 맞아. 그 사람을 상대할 수 있는 건 너뿐이지. 집중해야 하는 싸움에 다른 사람들이 끼어드는 건 방해처럼 느껴질 수도 있어. 근데.”
“…….”
“같이 노력은 할 수 있는 거잖아.”
서윤이 답답하다는 듯 소리쳤다.
“무슨 생각인지 이야기하고, 이해시키고. 그것도 안 되면 서로 좀 싸우고. 그걸 못하게 해서 너한테 소중한 사람을 위험에 빠트리게 만들고 있잖아, 네가.”
그녀가 밝게 빛나는 핸드폰을 그대로 이겸에게 내던졌다.
가슴팍을 툭 맞고 떨어진 단말기는 몇 차례 바닥을 굴렀음에도 생채기 하나 없이 같은 화면을 떠올리고 있었다.
[경매장 그거 ㄹㅇ 있는 거였음?ㄷㄷ ㄷ] (8211)
[그래도 화랑이 움직이고 있긴 한가 보네] (5317)
…….
…….
쉴 새 없이 밀려 올라가는 커뮤니티 제목들 사이에서 아이의 이름이 선명했다.
서윤은 이겸이 칩거하고 있던 아파트의 보호막이 무너졌을 때부터 뭔가 잘못됐다고는 여기고 있었지만, 그게 별안간 랭킹 3위가 된 모아의 출가 사건이라고는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
이 남매들은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건지.
서윤이 머릿속이 복잡한 만큼 강하게 테이블을 내리쳤다.
붉어진 손바닥이 허공을 움켜쥐듯 구부러들었다.
“더 이상 얼간이처럼 굴지 말고 군장 차.”
“…….”
“네가 뭘 바라는지 옆에서 제일 오래 지켜본 내가 조금 아는데, 그거 아니야.”
이내 어딘가 착잡한 얼굴을 한 그녀가 먼 곳에 보내는 동정의 눈빛으로 한숨을 쉬어 내렸다.
곧 흩어질 입김처럼 미약한 목소리가 중얼거렸다.
“네 세상에 모아가 없으면 안 되는 것처럼, 모아 세상에도 네가 없으면 안 되는 걸 왜 몰라.”
등신.
***
우우웅.
우우우웅.
끊임없이 울리는 핸드폰을 무미건조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던 얼굴이 툭.
풀숲 사이로 멀리 단말기를 내던졌다.
「고구마」
화면 위로 떠 오른 이름이 눈앞에 아른거렸지만 그것뿐.
일이 끝날 때까지 다른 사람들에게 오는 연락 같은 건 받을 이유도, 생각도 없었다.
‘위치 추적이라도 당하면 골치 아프니까 버리고 가는 게 낫겠지.’
중요한 것도 없고.
짧게 고개를 주억거린 윤채희가 군데군데 녹이 슬어 있는 아치형 철장을 붙잡았다.
쇠를 타고 오른 장미 줄기의 가시가 살갗을 찍었지만, 그 정도는 거슬릴 정도도 아니었다.
삐걱. 삐걱.
허락받지 않은 침입자의 발자국에 움직이는 기구 소리가 스산하게 울렸다.
폐쇄된 놀이공원, 용마랜드.
이곳에 내가 찾는 것이 있었다.
뻗어 나가는 빛을 모아, 찬란히 산란시킬 수 있는 유일한 도구.
‘프리즘.’
겨울의 노을이 짙게 깔린 하늘 아래, 작은 그림자가 새어들었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