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e became the younger sister of the villain RAW novel - Chapter 61
61화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다.
말 그대로다.
끼기긱. 신발 밑창이 바닥에 밀리며 끔찍한 소리를 냈다.
내 생에 이런 일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발끝에 힘을 줘 버텼다.
마수에게 처박고 있는 지팡이 끝이 거세게 흔들렸다.
3, 2, 1.
속으로 숫자를 셌다.
스킬 시전 시간이 끝나고, 빛이 끊기는 순간.
빠악!
슬러그에게 부딪혀 좌석에 나동그라진 등뼈가 욱신거렸다.
고통을 완벽히 느끼기도 전에 마수의 대가리가 내가 누운 자리를 쿵쿵 처박았다.
몸을 굴려 바닥으로 떨어졌다. 겨우겨우 중심을 잡고 일어선다.
현재 위치, 5번째 칸 초입.
사람들의 인기척이 귀에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수 역시.
‘더 가면 내가 못 막는다.’
새애애애액.
슬러그의 숨소리가 머리 꼭대기에서 울렸다.
먹잇감들의 냄새를 맡은 대가리는 이제 내가 아닌 뒤쪽을 응시하고 있다.
작은 방해꾼을 처리하고 싶은 마수의 몸짓이 점점 더 험악해졌다.
온몸이 저릿거렸다.
갈라진 배에 불구덩이를 처박는 사이에도 나는 나에게 몇 번이고 물었다.
‘가능한가?’
지하철이 조금만 더 길었다면.
사람들이 조금만 덜 탔다면.
포탈이, 아주 조금만 더 뒷 칸에서 터졌다면.
마수와 대치하는 시간이 흘러갈수록 if들만 머릿속에 쌓아가고 있었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게 모두 ‘불가능’이라는 사고에서 비롯된 가정이라는 걸.
냉정히 상황을 보자면 모두를 구하고 다이아를 얻는 건 무리였다.
아니. 사실 말하자면 내 몸을 보전하는 것만으로도 벅찰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재빨리 미션창을 곁눈질했다.
A로 등급이 올라가기 전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7분여 정도.’
입술을 악물었다.
수월하게 포탈을 빠져나가기 위해서라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였다.
비정하다 생각해도 어쩔 수 없었다.
‘슬러그가 뭉쳐있는 사람들을 잡아먹기 시작할 때.’
다른 먹이에 신경을 빼앗긴 그 틈.
꿀렁.
비대해진 슬러그에게서 액체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발걸음이 조금씩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힘에 밀려서가 아닌, 오로지 나의 의지로.
그때, 또 다른 목소리가 내게 묻는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나?’
그건 게임을 할 때 습관적으로 내뱉던 나의 입버릇이었다.
최선을 다했나?
끝까지 포기하진 않았나?
딸피? 방어력이 너무 높아?
‘변명이다.’
익숙한 다짐에 차가운 손발로 피가 도는 게 느껴졌다.
뭔가를 깨달은 사람처럼 마음이 평온을 되찾았다.
그래. 아직 끝난 건 아무것도 없다.
가능성을 생각하며 몸을 사리기 전에, 나를 믿고 움직여야 할 순간들이 있다.
나는 그게 지금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광염.”
쾅! 쾅! 콰아앙―!
연속적인 폭발음이 내부를 부술 것처럼 흔들었다.
덜컹대는 열차 소리가 귀 바로 옆에 틀어놓은 것처럼 시끄럽게 느껴졌다.
예민해진 감각들 덕분에 신경이 날카롭게 벼려진다.
뒤로 밀리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최대한 버티면서 딜을 쏟아부어야 했다.
비명소리가.
‘가깝다.’
3번 칸과 4번 칸의 연결통로 사이.
더 이상 도망칠 곳 없는 사람들의 신음성이 귓가로 똑똑히 닿았다.
소리치고 싶은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제발 집에 가자.”
후두둑.
멎었다고 생각했던 코피가 또다시 방울져 떨어졌다.
“빛의 메아리!!”
빛과 불꽃의 폭풍이 쏟아졌다.
강력한 반동에 주춤하는 것 같던 슬러그의 대가리가 꾸물꾸물 스킬을 밀고 앞으로 움직였다.
그래도 등급이 오르기 전에는 힘의 균형이 비등비등 했었는데, 이제는 마수의 쪽으로 축이 쏠렸다는 게 체감될 정도였다.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노력이 무색하게.
“꺄아아악!”
“살려, 살려줘, 제바알……!”
나는 이제 사람들의 코앞에 서 있었다.
있는 힘껏 마수의 아가리를 내리쳤지만 그건 순간일 뿐.
먹잇감을 집어삼키려는 슬러그의 배가 뻐끔거렸다.
놈이 기다란 상체를 천장 위로 쳐들었다.
새카만 그림자가 사람들의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아우성치는 비명소리가 귓가에서 천천히 멀어졌다.
먹힌다.
끝 칸에 도착할 때까지, 한 사람은 구할 수 있을까?
푸과과과!
그 순간, 날카로운 검기가 머리 위를 스쳐 슬러그에게로 처박혔다.
몸통 옆을 길게 가른 상처에서 노란 피가 꿀렁꿀렁 토해져 나왔다.
캐애애액!
슬러그가 보지 못했던 고통스런 몸짓으로 몸부림쳤다.
너무 놀라 굳어버린 목이 알알하게 당겼다.
뻣뻣한 몸놀림으로 뒤를 돌았다.
나 말고, 헌터가.
‘또.’
그리고 뒤에 서 있을 각성자와 눈이 마주쳤다.
익숙한 무표정.
익숙한 단발.
긴장감이 무너졌다.
의아함과 안도감이 범벅된 얼굴로 더듬더듬 속삭였다.
“네가, 여기 왜…….”
한미래였다.
그녀는 트레이드마크인 쌍검을 들고 뚱하게 서 있었다.
그러나 한미래는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내 뒤.
마수에게로 고정된 시선이 빠르게 움직였다.
“난무(亂舞).”
그녀가 검을 들고 날아올랐다.
유려하고 아름다운.
마치 한 폭의 검무 같은 공격이었다.
칼끝에 베인 슬러그의 살갗 곳곳이 터진다.
바닥에 질척이는 노란 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내 옆으로 가볍게 착지한 한미래와 눈이 마주쳤다.
【제한 시간이 경과 되었습니다.】
【포탈 난도 재분류 중…… 】
【포탈 등급 변경을 알립니다. 결과: ‘A-’】
【상태 및 세부 사항이 조정됩니다.】
【】
그러나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
전세는 완벽히 뒤바뀌었다.
“1검, 살(殺).”
번뜩이는 쌍검이 날카롭게 허공을 갈랐다.
한미래가 마수의 타겟팅을 완전히 빼앗았다.
진액을 뚝뚝 흘리는 대가리가 한미래를 쫓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빈 공간을 찾아 잘 도망치고 있었지만, 앞은 사람.
뒤는 마수의 몸뚱이로 가로막힌 전투 장소가 협소했다.
한미래는 어느덧 코너에 몰려있었다.
손잡이를 붙잡고 짐칸으로 올라가려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마저도 마수에게 진로를 가로막혀 이도저도 못하는 상황.
곧 그녀를 깔아뭉갤 듯이 슬러그의 상체가 들썩였다.
나는 즉각 지팡이를 쥔 손을 뻗었다.
“마나 파도!”
스킬을 직격으로 맞은 마수가 잠시 분절된 스톱모션처럼 움직였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은 한미래가 몸을 피했다.
역시.
감각적인 플레이에 짧게 감탄하는 사이, 그녀가 곁눈질로 살짝 나를 확인했다.
…… 아마도.
‘내 자의식 과잉일 수도 있지만.’
아니, 얼굴이 살짝 내 쪽으로 쏠렸다니까. 진짜라니까?
어쨌든, 내 덕에 슬러그에게서 벗어난 한미래가 다시 칼춤을 추기 시작했다.
쉬지 않고 공격을 몰아치는 그녀를 보며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등급이 하나 올라 A-의 마수인데도 불구하고 싸우는 모습에는 전혀 밀리는 기색이 없었다.
단호하게 판단하고, 자신 있게 공격한다.
단연코 장학금을 받고 학교에 다닐만한 인재라는 느낌이 낭낭했다.
사람들과 마수의 거리가, 다시 조금씩 벌어지고 있었다.
“빛의 메아리!”
나는 최선을 다해 한미래의 백업에 초점을 맞췄다.
확실히 딜러가 하나 참여하니 이렇게 흐름이 좋게 바뀔 수가 없었다.
한미래가 잠시 스킬 쿨을 위해 빠지면, 내가 그 빈틈을 채웠다.
공격보다는 넉백과 스턴에 신경 썼고, 가끔은 한미래가 공격하기 쉽게 미끼가 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처음에는 독단적으로.
오로지 마수를 찢기 급급해 보이던 한미래의 기세도 조금씩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연풍대(筵風擡).”
그녀의 칼 위로 바람이 일렁거렸다.
연풍대는 검에 스택을 쌓는 패시브 스킬이었다.
이제 한미래는 판을 읽고, 좀 더 효과적인 다음 공격을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나를 어느 정도 믿고 있는 건가?’
미약한 희망이 펄떡이는 게 느껴졌다.
몰아치는 우리의 공격에 마수는 맥을 못 추렸다.
어느덧, 다시 5번 칸.
딱딱한 송장들이 발밑에 채였다.
슬러그는 난폭하게 몸통을 이리저리 부딪쳐 댔다.
마치 마지막 생명을 불태우는 것처럼 거칠고 과격하게.
새애애애액!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마침내.
파아아아앙!
거대한 폭발음에 귀가 먹먹했다.
코앞에서 터진 슬러그의 조각들이 철퍽거렸다.
끈적이는 액체가 발목까지 찰랑거렸다.
주변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덜컹덜컹.
여전히 흔들리고 있는 지하철 안.
나는 비틀거리며 좌석에 주저앉았다.
“끝났다.”
혼잣말이 탄식처럼 터져 나왔다.
【MISSION을 클리어하셨습니다!】
【달성도를 계산 중입니다…… 】
확인사살 하는 것처럼 보상창이 시야를 가렸다.
원래 같으면 빠릿빠릿하게 다이아를 주고 끝내는데, 동전 떨어지는 효과음과 계산 중이라는 글자만 한동안 움직였다.
‘렉 걸렸냐?’
그러든지 말든지.
떼먹히지만 않으면 된다.
꼴 보기도 싫은 미션 창을 눈앞에서 치워버렸다.
대충 얼굴을 닦아내고 있는 한미래를 보며 천천히 숨을 골랐다.
살았다.
덕분에.
지금 상태의 이모아와 한미래가 붙으면 가망이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이건 한미래의 덕분이었다.
기진맥진한 머리를 굴렸다.
정신이 없어 처음엔 인과관계를 따져보지도 못했지만 이 아이가 여기 있다는 건 어쨌든.
‘약속 장소에 나타났고, 나를 따라 열차를 탔다는 말이 된다.’
한미래는 처음부터 나를 보고 있었다.
그렇다면 왜 포탈이 터진 처음부터 나타나지 않고?
헐거운 의문과 미약한 희망이 겹겹이 쌓였다.
꼬리에 꼬리를 문 질문의 답은 내가 할 수 없지만, 나는 묘한 두근거림에 차 있었다.
전투 중 나눴던(정확히는 나눴다고 느꼈던) 시선과 합.
등 뒤를 믿고 맡길 수 있다는 신뢰와 전우애는 사라질 리 없다.
그리고.
‘어쨌든 한미래가 자발적으로 이모아를 도와줬다는 건 팩트잖아.’
아주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마음이 통했다면.
용기를 내 한미래와 눈을 마주쳤다.
“…….”
“…….”
‘아니네.’
응. 아니야.
여전히 싸늘한 오오라에 본능적으로 시선을 피해버렸다.
뭔가 변했을 거란 건 내 착각이었다.
고작 같이 목숨 걸고 한 번 싸운 거 가지고, 크게 바뀔 거라고 믿은 내가 바보.
숨이 턱턱 막히는 침묵이 흘렀다.
지지지직.
머리 위에서 뭔가 말하는 것 같은 안내방송 소리가 들렸다.
고장 났는지 시끄러운 노이즈음 밖에 나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열차의 속도가.
‘점점 줄고 있다.’
정말 끝났구나.
오히려 마음이 후련했다.
한미래랑 친구가 되어보겠다는 장기 프로젝트는 거창하게 망했고, 쌔빠지게 굴러서 얻은 건 오로지 다이아 뿐이지만.
“너무 미워하지 마.”
부담이 사라진 목소리가 오히려 담담하게 속삭였다.
적어도, 나는 다음 스텝으로 넘어갈 수 있을 테니.
찐득한 검 날을 닦아내던 한미래의 손이 잠시 멎었다.
“이모아도…… 이모아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건 아닐 테니까.”
네가 한미래가 아니고, 이모아가 이모아가 아니었다면.
그랬다면, 우리는.
《이번 역은 뚝섬. 뚝섬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 》
아무도 보지 않는 전광판이 번쩍였다.
【8,000 다이아를 얻으셨습니다.】
【업적을 달성하셨습니다. (업적: 믿을 수 없는 성과)】
【추가보상 5,000 다이아를 얻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