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62
신필천하(神筆天下) 62화
장환이 물러가고 나자 유인표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어찌나 긴장했던지 다리에 힘이 풀려 비틀거렸다. 마침 진양이 재빨리 그를 부축하며 자리에 앉혀주었다.
권력의 무서움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는 다른 무인들보다 몇 배로 두려움을 느꼈던 것이다.
그는 얼른 표사를 불러 다친 지승악을 객당으로 옮겨 치료하게 했다.
때마침 관료들이 먼저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유 대인, 생신을 다시 한번 축하드리오. 그럼 나는 먼저 일어나겠소.”
“저도 그만 일어나야겠습니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흘렀군요.”
그들은 서둘러 금룡표국을 떠났다.
이리저리 핑계를 둘러대곤 있었지만, 모두들 금의위가 다녀간 이후로 몸을 사리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관료들이 먼저 자리를 비우기 시작하자 참다못한 남옥이 술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고함을 내질렀다.
“이런 한심한 자들 같으니라고! 금의위 따위가 두려워 자리를 피한단 말인가? 지은 죄가 없거늘 어째서 고개를 들지 못한단 말인가! 이 남옥이 아직도 자리를 지키고 있거늘 그대들이 정녕 나를 기만한단 말인가?”
그가 서슬 퍼렇게 소리치자 막 일어서던 관료들은 해쓱해진 얼굴로 서로를 번갈아 보았다. 금의위의 위세가 두려운 건 사실이었지만, 당장 눈앞에 보이는 남옥이 불같이 화를 내고 있으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유인표가 가만 보니 이러다간 정말 더 큰일이 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해서 얼른 나섰다.
“하하, 생각해 보니 시간이 꽤 지나긴 했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을 모시고 전해 드려야 할 이야기를 모두 전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자유롭게 즐겨주시기 바랍니다. 일이 있으신 분들은 먼저 일어나셔도 좋습니다.”
주인인 유인표가 나서서 좋게 말했지만 관료들은 저마다 남옥의 눈치를 살피느라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었다. 남옥은 결국 시선을 돌리고 콧방귀를 꼈다.
“흥! 한심한 것들!”
그가 모른 체하자 관료들은 용기를 내어 하나둘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 그, 그럼 먼저 가보겠소, 유 대인.”
“감사합니다. 또 들러주십시오.”
“나도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소.”
“참! 나도 일이 있는 걸 그만 까맣게 잊고 있었군. 유 대인, 생신 축하드리오. 오늘 들은 이야기는 잘 기억하겠소.”
그러자 관료들은 순식간에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이제 남은 관료들은 조진(曹震)과 장익(張翼), 주수(朱壽) 등 남옥과 친분이 깊은 대여섯 명 정도밖에 없었다.
좌중의 무인들은 이런 광경을 보고 비로소 황궁의 금의위가 얼마나 막강한 권세를 지녔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진양 역시 겉으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걱정이 됐다.
‘금의위의 권세가 이토록 강하구나. 한데 그들이 금룡표국과 남옥 대장군을 곱지 않게 보고 있으니 정말 걱정이다. 더욱이 황제는 의심병이 깊은데 훗날 우리가 화를 입지나 않을까 모르겠다.’
이때까지만 해도 진양은 앞으로 닥쳐올 화가 얼마나 가까이에 있는지 모르고 있었다.
어쨌든 대청에서 상당수의 관료들이 물러가고 나자 남옥은 더욱 화가 나서 큰 소리로 외쳤다.
“우리 충신들이 피땀 흘려 세운 나라를 간신들이 말아먹고 있으니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오! 게다가 그나마 나라를 생각하는 자들은 저리도 용기가 없으니 한숨뿐이 안 나오는구려!”
척금송이 웃으며 술잔을 들었다.
“하지만 이렇게 대장군께서 남아 계시지 않습니까? 그것만으로도 이 척 아무개는 나라가 굳건할 것이라 믿습니다.”
그 말에 기분이 좋아진 남옥이 크게 웃었다.
“크하하하! 척 장로께서는 감당할 수 없는 칭찬을 거두시오. 하지만 이 남옥은 척 장로의 말씀대로 이 나라가 이대로 쇠락하도록 좌시하지는 않을 것이오!”
이미 술기운이 오른 남옥은 거침없이 말을 던져댔다. 사실 그의 말은 어찌 들으면 상당히 위험한 발언이었지만, 남옥은 다른 이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았다.
남옥은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한참 동안 간신들을 욕했다.
시간이 지나자 이야기는 다시 천의교에 관한 것으로 돌아왔다.
척금송이 말했다.
“우리 청성파는 앞으로 천의교의 무인을 만나게 된다면 보는 족족 죽여 버릴 것이오!”
그러자 무당파에서 온 구정광이 말했다.
“무당파에서는 천의교에 대해서 좀 더 확실히 조사해 보겠습니다. 혹시 실마리를 잡게 된다면 여러 무림 영웅들께 알려 드리도록 하지요.”
“천상련도 그리하겠소. 또한 천의교 무인을 만나게 된다면 사로잡거나 죽일 것이오.”
왕자헌이 담담한 태도로 말했다
유인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이렇게라도 모두에게 진실을 전할 수 있어 다행입니다. 혹 앞으로 어떤 일이 발생하더라도 천의교의 만행이 아닌지 한번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강호 무림은 근래 몇 년 동안 정사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서로 다투지 않았습니다. 이런 평화는 지속될수록 좋겠지요.”
그러자 왕자헌이 픽 웃었다.
“우리는 정도 무인들이 함부로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아무런 일도 일으키지 않을 것이외다.”
“흥! 그 전에 그대들이 사악한 짓을 저지르지 않아야겠지.”
척금송이 냉랭하게 대꾸하자 왕자헌은 그저 소리 없이 웃을 뿐이었다.
유인표는 다시 분위기가 험악해질 것을 염려해서 얼른 자리를 정리했다.
“밤이 깊었습니다. 오늘은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고 다음에 또 깊은 대화를 나누도록 하지요. 객당에 머무시는 손님들께서는 필요한 것이 있다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술과 고기는 넉넉합니다.”
그의 말에 무인들이 저마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양은 뒷정리를 끝낸 뒤에 자신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루 사이에 많은 일이 일어나서 그런지 몸이 무겁고 피로가 몰려왔다.
한데 그가 막 건물을 돌아서는데, 후원 깊숙한 곳에 언뜻 사람의 그림자가 비쳤다. 진양은 혹시라도 천의교가 잠입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바짝 긴장을 하고는 그쪽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과연 두 사람이 커다란 나무 뒤에서 속삭이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바로 천상련에서 온 왕자헌과 곽연이었다.
하지만 진양은 어두운 밤인 데다 두 사람의 목소리가 극히 조용해서 미처 알아보지 못했다.
만약 진양이 처음부터 그들을 알아보았다면 굳이 신경 쓰지 않았을 터였다. 괜히 다른 문파의 밀담에 깊이 관여했다가 오히려 오해를 살지도 모를 일이니까.
진양은 그들이 천의교의 첩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심스럽게 접근해 갔다.
다행히 후원에는 나무가 듬성듬성 있었고 군데군데 풀포기도 길게 자라 있어서 진양이 몸을 숨기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두 사람에게 차츰 가까이 다가가니 그들의 말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진양은 바위와 풀포기 사이에 몸을 바짝 웅크리고 체내의 자양신공을 끌어올렸다. 귀가 밝아지자 두 사람의 대화가 곧 들렸다.
“……실수한 것이네. 나서지 말아야 했어.”
“죄송합니다, 당주님.”
왕자헌의 말에 곽연이 대답하는 소리였다.
왕자헌이 말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그만 넘어가지. 하지만 다음부터는 경거망동하지 말게.”
“명심하겠습니다.”
“그나저나 나도 놀랐군. 양가명이라는 자가 그처럼 강할 줄은 몰랐어.”
“혹시 들어본 적이 있으십니까?”
왕자헌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듣지 못했네. 물론 본 적도 없는 인물이지. 그런데 유 국주가 말하더군. 그가 들고 있는 붓은 황태손에게 선물 받은 것이라고.”
“황태손에게요?”
“그렇다더군. 황태손의 눈에 들었다는 것은 그만큼 잘난 구석이 있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곽연이 한참을 생각하다가 대꾸했다.
“정말 이상한 일입니다.”
“뭐가 말인가?”
“저는 분명 그자를 처음 보았습니다. 한데 어쩐지 낯이 익다는 느낌이 듭니다.”
“어디서 닮은 자를 보았겠지.”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한데 정말 너무 익숙해서…….”
곽연은 ‘마치 오래전부터 알던 사람 같습니다’라는 말을 속으로 삼켰다. 어차피 이런 잡담은 길어서 좋을 것이 없었다.
이때쯤 진양은 이들이 왕자헌과 곽연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고 있으니 쉽게 자리를 뜨지 못했다. 만에 하나라도 이들이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된다면 천상련에서는 자신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진양은 계속해서 숨을 죽이고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왕자헌이 말했다.
“그나저나 천의교의 움직임이 정말 대담하군. 어쩌면 남옥 대장군의 말대로 그들이 고위 권력과 손을 잡았을지도 모르겠어.”
“혹시 그놈을 좀 더 추궁하면 뭔가 나오지 않을까요?”
“추궁한다고 해서 나오겠는가? 벌써 수년 동안 버틴 놈이다.”
“그럼 차라리 죽여 버리면 어떻습니까?”
“멍청한 소리는 하지도 말게. 인질을 무가치하게 죽여 버린다고 해서 달라질 건 뭐란 말이냐? 그자는 단순한 죄인이 아니라 천상련의 인질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진양은 여기까지 엿듣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들이 말하는 그놈이라는 게 대체 누구를 가리키는 말일까? 천상련의 인질이라니? 그가 또 천의교와 관련이 있다는 말일까?’
그때 다시 왕자헌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나저나 자네는 좀 어떤가?”
“무슨 말씀이신지요?”
“후후, 자네가 날 속이려는 건가? 굳이 직접 금룡표국에 오려는 목적이 있지 않았나?”
그러자 곽연이 쑥스러운 듯 뒤통수를 긁적였다.
“알고 계셨습니까?”
“자네가 유 낭자와 서신을 주고받았다는 걸 본 련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터인데?”
“하하, 그렇습니까?”
곽연이 멋쩍은 듯 웃어 보였지만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왕자헌이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물었다.
“생각대로 되지 않는 모양이군.”
“저에 대해서 좋지 않게 보는 듯합니다.”
“후후, 그럼 좋게 보도록 해야지. 만약 유 낭자가 자네와 마음이 맞기라도 한다면 이는 천상련에도 이득이 되는 일일세.”
“그렇잖아도 지금 유 낭자를 한번 찾아가 보려고 합니다.”
“가서?”
“사실을 이야기해야지요.”
“후후! 어찌 될지 궁금하구먼.”
“그런데 그녀에게서 서신이 끊어진 지가 오래된지라 어떨지…….”
“여기서 백날 고민하면 무엇하나? 어서 가서 물어보든지 해야지.”
“그럼 속하가 먼저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이제 이야기는 끝났으니 상관없지. 표국에 머물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잘해보게나. 좋을 때군, 좋을 때야.”
곽연이 웃으며 답했다.
“감사합니다. 그럼!”
곽연이 먼저 걸음을 옮기자, 왕자헌도 곽연의 뒤를 보다가 객당으로 걸어갔다.
두 사람이 사라지자 진양은 천천히 수풀 사이에서 빠져나왔다.
진양은 곽연이 사라진 방향을 보며 생각했다.
‘만약 지금 가서 유 낭자에게 모든 사실을 알린다면 유 낭자의 반응은 좋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곽연에 대해서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으니 자칫 불화가 생길까 봐 걱정되는구나. 안 되겠다. 내가 뒤따라가서 살펴봐야겠다.’
생각을 마친 진양이 얼른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