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196
제195화
일정에 차질을 빚은 것은 산등성이 너머에서 날아온 소음 때문이었다.
몇 시진이나 쉬지 않고 달리는데 진력이 났는지 명이 무슨 일인지 가보자고 보챘다. 마련의 영역에 들어선지 오래였기에 조심해야 했으나, 진천은 그녀의 청을 들어주었다.
남쪽으로 방향을 튼 진천은 산정에 올랐다. 산 아래 빛 무리가 고여 있었다. 마련 중북부에 위치한 용진(龍津)이었다. 꽤 먼 거리였으나 징과 북을 두드리는 소리가 뚜렷하게 들렸다. 진천보다 청력이 월등히 좋은 명이 미간을 모았다.
“북소리 말이오?”
진천은 귀를 기울였다. 사람들의 아우성이 잡혔지만 무슨 말들을 하는지는 구분할 수 없었다. 하지만 왜 명의 기분이 나빠졌는지는 알고도 남았다. 그녀는 눈을 찌르라는 말에 신경이 날카로워진 것이었다.
진천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명이 몸을 날렸다. 황급히 그녀를 뒤쫓으며 진천이 주의를 주었다.
“열락궁에 이르기 전에 우리의 행적이 노출되어서는 안 되오, 명.”
진천은 하는 수 없이 명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달렸다.
산을 내려온 두 사람은 속도를 줄였다. 그럼에도 말보다 빨랐다. 어둠 속을 질주한 두 개의 인영은 반각 후 중소 규모의 시진에 들어섰다. 진천은 곧장 소음의 진원지로 나아가려는 명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오층 전각 지붕으로 올라갔다. 명은 불만스러운 기색이었으나 그를 따랐다.
지붕 끝에 엎드린 진천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오륙십 장쯤 떨어진 광장에 일견 일천 명은 됨직한 군중이 운집해있었다. 요란하게 울리던 징소리와 북소리는 어느새 뚝 그치고 수많은 입들이 쏟아내는 괴성으로 왁자지껄했다.
기감으로 파악하기엔 먼 거리였기에 상황을 알 수 없는 명이 물었다.
진천은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명이 앞을 보지 못하는 게 다행스러웠다. 그녀가 보기엔 너무나 참혹한 풍경이었다.
진천은 명의 손을 잡고 전각을 뛰어내렸다. 하지만 그가 기대와 달리 광장이 아니라 반대편으로 경신을 전개하려 하자 명이 버텼다.
“산으로 돌아갑시다. 저곳의 행사는 다 끝났소.”
“산에 가서 다 얘기해주겠소. 저기 가면 시체들과 광인들밖엔 볼 게 없소.”
얄따란 입술을 삐죽 내밀었으나 명은 그녀를 잡아끄는 진천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용진이 내려다보이는 낭떠러지에 선 진천이 무거운 입술을 뗐다.
“아까 거긴 난장(亂場)의 현장이었소.”
진천은 명에게 난장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난장은 마련의 악명 높은 풍습이었다. 마련 자체적으로는 난장을 축제로 여겼다. 마인들의 산실이기 때문이었다.
간단히 말해 난장은 마전에 보낼 마동을 추리기 위한 시험대였다. 철책으로 둘러싸인 원형의 공간에 아이들을 몰아넣고는 그들로 하여금 사투를 벌이게 한 후 생존자들을 뽑아내는 잔혹한 방식이었다. 평균적으로 삼백의 아이가 난장에 투입되었고 보통 다섯 명 정도가 살아남았다. 죽거나 불구가 될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았지만 절대다수의 아이들은 난장에 들기를 고대했다. 혈로를 뚫고 사로(死路)를 벗어나는 순간 탄탄대로가 보장되기 때문이었다.
마왕 권상명도 난전을 통해 비천한 노예에서 마련의 지존으로 수직상승한 인물이었다. 마왕까지는 아니더라도 마인이 되기만 하면 재물과 여자를 마음껏 취할 수 있는 권력을 부여받았기에 마련의 아이들은 난전에 목을 매달았다.
진천의 설명을 들은 명이 고개를 갸웃했다.
“꼭 그렇지는 않소. 근골이 우수한 아이들만 고르고 골라 난장에 들여보내기 때문이오. 가슴 아프게도 마련의 아이들은 난장에 들 자격이 부여되는 것만으로도 기뻐한다고 들었소.”
진천은 명이 제기한 의문의 또 다른 이면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여인들이 상대를 가리지 않고 사내들과 집단으로 교합하여 아이들을 낳는 마련의 특성상 인구가 줄어들 일은 없을 터였다.
흥미를 잃은 듯 별다른 감상을 뱉어내지 않는 명을 바라보며 진천이 진중한 음성을 토해내었다.
“난장은 반드시 철폐되어야 하는 악습이오. 그런 잔인무도한 일이 반복되도록 허용해서는 안 되오. 만약 내가 이 과업을 이루지 못하고 떠난다면 명이…….”
“…….”
“고맙소, 명. 명만 믿겠소.”
다시 열락궁으로 출발하려던 진천이 문득 물었다.
“혹시 어렸을 때 승천제일관(昇天第一關), 단순히 일관이나 유룡관(幼龍關)이라고도 하오만, 아무튼 거기에 든 적이 있소, 명? 대문의 기둥이 하얀 색이었을 거요.”
명이 고개를 갸웃했다.
진천은 쓴웃음을 지었다.
월교는 마련의 난장과 마전을 본 딴 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바로 승천팔관(昇天八關)이었다. 흔히들 줄여서 팔관이라고 불렀다. 마련처럼 특정 문파나 가문을 인정하지 않는 월교는 저력을 키우기 위해 초창기부터 출신을 가리지 않고 재능이 있는 아이들을 모아 무인으로 양성했다. 그러다 십삼대 교주였던 아수라마검 장일청의 대에 이르러 팔관의 틀과 방식이 확립되었다. 장일청은 마련 검마류에서 잔뼈가 굵은 마인이었거니와 검후의 사부이기도 했다.
장일청을 시해하고 십사대 교주에 오른 사파 쾌부문(快斧門)의 반역자 혈살부군(血殺斧君) 기영우(奇英宇)는 전임자가 심혈을 기울여 쌓은 탑을 하루아침에 허물어뜨렸다.
월교 전역에 설치되었던 여든네 개의 무관은 전격적으로 폐쇄되었다. 기영우를 몰아내고 권좌를 차지한 팔극천수 성찬성도 월교의 중흥기를 이끈 장일청의 흔적을 지우는 데 급급했다. 성주 성가의 이단아였던 그는 정파 태생이 아니랄까봐 마련의 흔적을 극도로 역겨워했다.
성찬성을 꺾고 십육대 교주에 등극한 검후 송하령은 사부의 업적을 되살렸다. 압도적인 무력으로 반란세력을 진압한 검후는 월교 내의 모든 파벌을 철폐하는 동시에 그녀가 다스리는 광대한 영토 곳곳에 총 삼백십육 개의 무관을 세웠다. 장일청이 두었던 무관의 거의 네 배에 달하는 숫자였다.
수만 늘린 것이 아니라 규모도 커졌고 운영도 한층 체계화되었다. 월교의 땅에서 나고 자라는 모든 아이들은 일정기간의 심사를 거쳐 무재를 판별 받았다. 마련의 난장처럼 남을 죽여야 승자가 되는 살벌한 전장은 아니었으나, 신분상승의 유일한 통로였기에 아이들 간의 경쟁은 매우 치열했다.
오백에 하나 꼴로 심사를 통과한 아이들은 일백오십 개의 시진에 산재한 유룡관으로의 입관을 허락받았다. 월교는 유룡관에서 성취가 뛰어난 무동(武童)들만 추려 제이관인 흑룡관으로 올려 보냈다. 그런 방식이 제팔관이자 월교의 중추라 할 천룡관까지 되풀이되었다. 천룡관 소속이 되면 자동적으로 금수위(金袖衛)를 보장받았다. 소매에 금빛 띠를 두른 금수위의 무호(武豪)들은 정맹의 용호나 사벌의 사령에 비견되었다.
설명을 다 듣고도 명은 아무 것도 모른다는 표정을 지었다.
진천은 의아했다. 삼보장을 떠나기 전 마지막에 나누었던 대화에서 검후는 분명 유룡관을 언급했었다. 뒷말을 얼버무리긴 했지만 진천에게 이미 명에 관한 중요한 정보 조각을 던져준 셈이었다.
명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녀가 일관에 들었음은 명약관화했다. 하지만 여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승천팔관은 어떤 경우에도 월관(越關)을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아무리 무재가 뛰어나더라도 오 년으로 내정된 통관시간을 단축할지언정 반드시 순차적인 단계를 거쳐야 했다. 그 원칙은 지난 사십여 년간 단 한 번도 깨진 적이 없었다.
명의 무력이라면 당연히 팔관에 이르러야 했다. 진천은 그녀가 유룡관에서 천룡관에 도달하는 동안 어떠한 소문도 나지 않았다는 점에 의구심이 생겼다. 월교에서 정보를 철저히 통제했다고 해도 명의 유별난 특징과 무위를 감안하면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안구가 있어야 할 자리에 시커먼 구멍이 자리 잡은 명의 눈을 바라보며 진천은 불온한 상상을 했다.
명이 유룡관에 들었을 때 이미 그녀에 관한 보고가 검후에게까지 올라가지 않았을까. 검후는 직접 명을 보러 유룡관을 찾지 않았을까. 그러고는 어린 소녀가 반인반괴임을 알아차리고서 그녀를 빼돌리지 않았을까.
검후가 직간접적으로 명을 알고 있던 모든 이들에게 함구령을 내렸을 것은 불문가지였다. 어쩌면 단순한 입단속이 아니라 관련자들을 모조리 죽임으로써 살인멸구를 꾀했을 지도 몰랐다. 성군(聖君)이라는 평가 뒤에 냉혈여제(冷血女帝)라는 양면성을 가진 검후라면 얼마든지 가능한 조치였다.
이만 접을 것인지 아니면 한 발짝 더 나갈 것인지를 두고 갈등하던 진천은 후자를 택했다. 말이 나온 김에 짚고 넘어가고 싶어서였다.
“잘 생각해 보오, 명. 하얀 기둥이 있는 대문, 아이들로 북적거리는 연무장. 거기서 명은 동무들과 기초적인 권각술과 토납법을 배우며 구슬땀을 흘렸을 거요. 표창을 던지고 목검이나 죽도를 휘둘렀을 지도 모르오. 그러다 어느 날 명을 찾아온 면사여인을 만났을 거요. 그녀는 명에게…….”
나다 만 듯한 눈썹을 잔뜩 찡그리고 있던 명이 돌연 신음성을 흘렸다. 이상신호였기에 진천은 말을 멈추고 명의 어깨를 잡았다. 떨림이 심해지더니 명이 소리쳤다.
“알았소, 명. 미안하오. 기억나지 않으면 굳이…….”
명이 내지른 비명이 진천의 말을 끊었다.
진천은 명을 끌어안았다. 명의 비틀린 입술에서 뭉글뭉글 거품이 새어나왔다. 진천은 발작을 일으키는 명을 진정시키려 안간힘을 썼다. 명이 발악했다.
경기를 일으키던 명이 울부짖었다.
구명을 간청하는 명의 애절한 목소리가 야밤의 적막한 공기를 찢고 멀리까지 날아갔다. 하지만 아무도 알아듣지 못할 터였다. 그녀의 뾰족한 음성은 사람이 아니라 새가 내는 소리처럼 들렸다.
진천은 혼절한 명을 안고 심산으로 들어갔다.
염두에 두었던 일정에 어긋났지만 열락궁 행을 고집할 계제가 아니었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협곡에 이른 진천은 명이 깨기를 기다렸다. 경험 상 한두 시진 후면 정신을 차릴 터였다. 그러나 명은 날이 밝고 해가 중천에 오르도록 미동도 없었다. 진천은 장왕 건을 포기하고 삼보장으로 돌아가야 하는 지를 두고 고민했다. 하지만 삼보장에 간들 명에게 도움이 될 성싶지 않았기에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명은 해질 무렵에야 정신이 돌아왔다. 진천은 그녀의 젖은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두피에 땀이 흥건했다.
“괜찮소, 명?”
명이 진천에게 매달렸다.
진천은 ‘목소리’라는 단어가 왠지 신경에 거슬렸다. 불현듯 뇌리 속에 떠오른 한 가지 가능성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