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75
제74화
강연(姜蓮)은 북천도왕 강운(姜雲)의 고명딸이었다.
그녀가 태어난 날은 강운이 마흔둘이라는 사상 최연소의 나이로 정맹의 맹주 위에 등극한 날이기도 했다. 강운은 경사스러운 날 얻은 막내딸을 애지중지했다. 정파제일인의 장중보옥으로서 강연은 세상 누구도 부러울 것 없는 유아기를 보냈다.
그러나 그녀의 행복한 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불과 다섯 살에 강연은 다름 아닌 부친에 의해 인생의 결정적인 좌절을 맛봐야 했다.
발단은 무공이었다. 원주 강가는 여식들에게 가문의 비전을 가르치지 않는 가법으로 유명했다. 오래전에 겪은 뼈아픈 경험 때문이었다.
이백여 년 전 정체불명의 외인과 사랑에 빠진 종가의 여인이 그에게 번천칠십이도(翻天七十二刀)의 요결을 전하는 바람에 강가는 큰 곤경에 처했다.
그 외인은 원주 일대의 지배권을 두고 다투다 강가에 멸문지화를 당했던 조원(朝原) 석가(石家)의 후예였다. 그는 살아남은 친족들과 함께 여인에게서 얻은 강가의 절학으로 복수의 칼을 갈았다. 삼십 년 후 그를 비롯한 이십 인의 도객들이 원주를 찾았을 때 강가는 최정예의 팔 할을 잃는 참사를 당해야 했다.
시련은 한 번에 그치지 않았다. 옥쇄를 각오했던 석가의 후예들은 원주에 쳐들어오기 전 번천칠십이도의 구결들을 사방에 뿌려놓았다. 강가에서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손쓸 수 없을 정도로 퍼진 후였다. 당시 신흥 강호로 발돋움하고 있던 강가는 이 일로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파훼법이 알려진 도공(刀功)으로는 한계가 자명했다.
그러나 세상사는 모르는 법이었다.
강가에게 불어닥친 시련은 역설적으로 그들이 강대 가문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사실상 봉문한 채 반세기가 넘는 암흑기를 거치는 동안 강가는 낙담으로 세월을 허비하지 않고 절치부심했다. 강호에 노출된 약점을 없애고 기존에 없던 절기들을 창안해 추가하며 강가의 후손들은 칼을 벼렸다. 그리고 석가의 침략을 받은 지 일 갑자 만에 완전히 새로운 번천도공을 들고 다시 일어섰다. 원주 한 귀퉁이에 죽은 듯 웅크리고 있던 강가는 활동 재개를 선언한 후 파죽지세로 주변의 강대 문파들을 굴복시키며 오백 년 가문 역사상 처음으로 오대세가에 드는 기염을 토했다.
결과적으로는 전화위복으로 끝났으나 강가는 전날의 교훈을 각골명심했다. 아무리 무재가 뛰어나더라도 여식들에겐 번천도공을 전수하지 않은 것이었다. 애꿎은 희생양이 되었지만 백여 년이 지나며 전통으로 굳어지는 바람에 강가의 여인들은 당연히 감내해야 할 차별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강연이라는 변종이 출현하기 전까지는.
“어쩐지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이었다. 네가 그자의 아들일 줄이야.”
강찬이 말하는 ‘그자’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선친임을 깨달은 진천은 기분이 묘했다.
나는 그분을 닮았던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모친과는 어느 한 군데도 닮은 구석이 없으니 친탁을 했다고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창인의 지인들은 이목구비가 전혀 다른 모자를 두고 뒷말을 일삼았다. 그녀가 진천의 친모가 아니라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어린 시절 진천은 그 소문이 사실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란에서 출산을 도왔던 허 노야는 ‘개소리’라고 일축했다.
진천은 가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돌연 통곡을 하던 모친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에게서 ‘그분’을 보았던 것일까. 그런 날이면 모친은 더욱 그를 몰아붙였다. 팔비수(八臂手)와 원앙각(鴛鴦脚)을 행하는 진천의 동작이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등이 끊어질 정도로 매질을 하곤 했다.
광기에 젖어 참나무 가지를 휘두르던 모친이 떠오른 진천은 가슴이 쓰라렸다. 그녀를 용서했지만 그의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여섯 살의 아이는 여전히 두려움과 분노에 떨고 있었다. 진천은 ‘어린 자신’의 곁으로 다가가 그를 껴안고 부드럽게 다독거렸다.
“그 아이는 어디에 있느냐?”
강찬의 질문이 진천을 현실로 되돌렸다.
“어머니는 몇 년 전 돌아가셨습니다.”
웬일인지 진천의 대답에 강찬은 안도한 기색이었다.
“저런, 어쩌다가. 경인년생이니 고작 마흔밖에 안 됐을 텐데.”
모친의 정확한 나이를 비로소 알게 된 진천은 다시금 속이 쓰렸다. 그의 기억 속에서 모친은 노파라 해도 이상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하얗게 새지는 않았지만 숱은 물론이고 윤기도 빠져 지푸라기처럼 푸석푸석했던 머리카락, 자그마한 얼굴을 가득 채운 깊고 굵은 주름들, 성한 이가 둘밖에 없어 오므라든 입술. 노화가 진행되지 않은 곳은 오뚝하고 반듯한 콧날뿐이었다. 그마저도 진천의 낮은 콧대와는 반대였다.
강찬의 다음 질문은 진천의 예상을 빗나갔다.
“정말 연아가 죽었더냐?”
사인(死因)을 물을 줄 알았던 진천은 헛웃음이 나왔다. 어쩌면 다행이었다. 병사나 사고사라고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되었으니.
“그렇습니다.”
진천의 이마에 그늘이 내리자 비통함의 표시로 해석한 강찬이 눈치를 봤다.
“안타까운 일이로다. 하나 어쩌겠느냐? 누구나 때가 되면 떠나야 하는 법이니.”
위로랍시고 하나 마나 한 소리를 내뱉는 강찬을 직시하며 진천이 본 용건을 상기시켰다.
“어머니는 제가 강호에 나가면 반드시 외조부님께 인사를 올리라고 하셨습니다. 실은 정맹의 용호가 된 연후 찾아뵈라고 이르셨지만, 저번 마령 문가와의 일로 그렇게 하기는 어려워졌기에 당부를 따르지 못하고 부득이 이렇게 바로 오게 되었습니다.”
강찬이 우물쭈물했다.
“이걸 어쩐다.”
진천은 안광에 내공을 실어 강찬을 압박했다.
“도왕, 아니 네 외조부는 여기에 없다.”
진천의 처진 눈이 치떠졌다. 그에게서 불신의 기색을 읽은 강찬이 미간을 찌푸리며 목소리를 키웠다.
“정말이다. 내가 왜 네게 구차스러운 거짓말을 하겠느냐? 형님에게 알리면 당장에 불러오라고 할 터인데.”
진천은 아직도 반신반의했다. 오재승의 도움으로 북천도왕이 현재 원주에 머무르고 있음을 확인하고 삼보장을 출발했었다.
“하루만 일찍 왔어도 형님을 뵈었을 것을. 도왕은 어제 낮에 본가를 떠났다.”
당혹감을 추스르며 진천이 담담히 물었다.
“어디로 가셨습니까?”
“나도 모른다. 정맹으로 가셨을지 아니면 개인적인 용무를 보러 모처로 향했을지.”
최측근이 아님이 드러날까 봐 뜸을 들이던 강찬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러더니 진천의 반응이 나오기 전에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이런 경우는 드물다. 어지간하면 출타하시며 나에게 일정을 미리 알려 주시니까. 그러니 어쩌면 오늘내일 귀가하실지도 모르겠다. 물론 아닐 수도 있고.”
두 가지는 확실했다. 첫째, 북천도왕의 부재는 거짓이 아니었다. 둘째, 강찬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진천은 난감했다.
북천도왕이 없다면 강가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북천도왕은 어떨지 모르지만 강가의 친족들이 그를 환영할 가능성은 극히 낮았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환대 여부가 아니라 그들과는 담판을 짓기 어렵다는 점이었다. 오로지 북천도왕만이 결단을 내릴 수 있는 문제였다.
강가에 죽치고 앉아 무작정 북천도왕의 귀환을 기다릴 여유가 없었기에 진천은 적극적으로 움직이기로 마음먹었다. 그의 소재를 파악한 후 직접 찾아가거나 그를 자신이 있는 곳으로 부를 참이었다.
“혹시 다른 분들 중에 외조부님의 행선지를 아시는…….”
진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찬이 버럭 화를 냈다.
“누가 연이 자식이 아니랄까 봐, 건방진 놈. 내가 모르는데 누가 알아?”
노기를 분출하고는 진천이 그를 한 주먹에 짓뭉갤 수 있는 강자임을 상기한 강찬이 허둥지둥 일어섰다.
“여기서 기다리라. 그럴 리는 없지만 선(宣)이에겐 알리고 가셨을 수도 있으니 물어보마.”
진천은 ‘선’이란 이가 외숙임을 알았다. 모친에겐 둘째 오빠일 터였다.
순간적으로 겁을 집어먹은 민망함을 감추려는 듯 진천을 쏘아본 강찬이 방을 빠져나갔다. 홀로 남은 진천은 고민에 빠졌다.
가만히 앉아서 강찬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상책이 아니었다. 강찬은 북천도왕의 행방을 탐문하는 것은 팽개쳐 두고 가문의 원로들에게 ‘골칫덩이’의 후예가 왔음을 알리러 동분서주할 게 뻔했다. 강가의 수뇌부는 그의 처분을 두고 중의를 모을 터였다. 진천은 그들에게서 우호적인 대우를 받을 가망성을 낮게 보았다.
그렇다고 외조부가 없으니 나중에 다시 오겠다며 곧바로 강가를 떠나기도 부담스러운 노릇이었다. 그러한 처신은 그에 대한 강가 원로들의 경계심과 반감을 강화시킬 뿐이었다. 삼보장의 친인들에게 밝혔던 구상을 실현하려면 그들과 원만한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할 필요가 있었기에 북천도왕의 결정을 이끌어 낼 때까지는 되도록 유화적인 태도를 취해야 했다.
숙고를 거듭한 진천은 행동 방침을 따로 정하지 않고 흐름에 맡기기로 했다. 북천도왕의 부재로 인해 수순이 시작부터 꼬여 버렸으니 뾰족한 타개책을 찾기 어려운 국면이었다.
강찬이 엄명을 내렸는지 아무도 방 근처에 얼씬거리지 않았다.
식은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진천은 무료한 시간을 견뎠다. 반 시진이나 흘렀을까. 이윽고 밖에서 진천의 기감을 자극하는 인기척이 났다. 조심스럽게 와옥 안팎을 오가는 하인들이 아니었다. 진천은 복도를 걸어오는 두 사람이 상당한 수준의 무인들임을 알아차렸다.
여닫이문이 양쪽으로 열리더니 각각 흑백의 무복을 입은 청년들이 들어섰다. 둘 다 심장 부위에 강가를 상징하는 엇갈린 쌍도(雙刀) 문양을 금실로 새기고 있었다. 좌우의 허리에 칼을 찬 것도 똑같았다. 공히 이십 대로 보였지만 검은 무복을 입은 쪽이 연상인 듯했다. 백의 무복의 사내는 약관 어림이었다.
진천은 본능적으로 두 청년 도객의 무력을 가늠했다. 흑의인은 기세가 준엄하고 안광이 형형했다. 반면 백의인은 특별한 기운을 발산하지 않았고 눈빛 또한 호수처럼 잔잔했다. 진천은 그와 동년배로 보이는 백의 청년이 보다 위험한 인물임을 직감했다.
통고도 없이 입실해서는 진천을 뜯어보던 흑의 청년이 입을 열었다.
“나는 강정(姜政)이다. 네가 고모의 아들이라니 말을 놓으마. 이제 열여덟이라고 들었는데, 나는 너보다 열 살 위다.”
자리에서 일어난 진천이 포권을 하며 외사촌 형을 맞았다.
“진천입니다.”
강정이 흡족한 미소를 머금었다. 진천은 머릿속에서 오재승이 건네준 원주 강가 인명록에서 보았던 정보를 뒤졌다.
절환도(絶環刀) 강정. 나이 스물여덟. 무위 절정 중하(中下). 소속 정맹 집법단(執法團). 성격 방약무인.
강정은 원주 강가의 젊은 세대를 대표하는 강자였다. 다섯 명에 불과한 이십 대 용호(龍虎)의 일원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정파 무림에서는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초신성이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강정이 그의 조부인 북천도왕의 영광을 재현할 거라 기대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동갑내기인 마령 문가의 풍뢰도 문상현보다도 낮은 평가를 받았다. 용봉대전(龍鳳大戰)에서의 우승과 용호단 입단 모두 문상현이 일 년 빨랐기 때문이었다. 강정은 문상현을 필생의 숙적으로 간주하나 문상현은 그를 한 수 아래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진천은 포권을 한 채 백의 청년에게로 눈을 돌렸다. 하지만 그는 자기소개를 하지 않고 진천을 주시할 뿐이었다. 그와 눈을 마주친 진천은 기시감이 들었다. 분명 그와 똑같은 동공을 본 적이 있었다.
아주 오래전에. 혹은 최근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