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ver Temptation of the Iceworld RAW novel - Chapter 11
10장. 흔들리는 마음
현수는 그녀의 숙소동 앞에 서있는 그를 보고 반가운 마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두터운 스웨터에 방한복 바지까지 입고 그 위에 따뜻한 파카를 입었다. 게다가 스키장갑을 끼고 목도리까지 한 채 완전 무장을 하고 나섰다. 조금 둔한 감은 있었지만 얼어 죽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그가 그녀의 차림새를 쓰윽 훑어보더니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파카 안에는 뭘 입었습니까?”
“스웨터요.”
“그 안에는?”
“티셔츠요.”
“그 안에는?”
정말. 어디까지 물어보는 거야? 창피하게.
“….내복.”
설마 그 안에 뭘 입었는지 묻지는 않겠지. 그 다음은 브래지어거든요? 묻기만 해봐. 분홍빛 레이스가 달린 섹시한 브래지어라고 말해버릴 테니.
“스웨터는 벗어서 배낭 안에 넣어요.”
“네?”
“한참 걸어야 하는데 스웨터까지 껴입으면 더울 거요. 나중에 펭귄마을에 도착해서 추우면 그때 꺼내 입어요.”
태훈의 말에 현수는 순순히 배낭을 내려놓고 재빨리 파카를 벗었다. 그러자 그가 손을 턱 내밀어 파카를 들어주었다. 그녀는 고마운 미소를 짓고 스웨터를 벗은 후 다시 파카를 받아들었다.
“출발합시다.”
드디어 출발이었다. 현수는 마치 소풍이라도 가는 기분이었다. 영숙 언니가 가다가 먹으라며 챙겨준 간식거리도 가방에 들어있었고 따뜻한 커피를 넣은 보온병도 넣었다. 게다가 그의 저 큰 배낭에는 영숙 언니가 싸준 점심 도시락까지 들어있었다. 이것이 소풍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모처럼 기지 밖으로 나가는 그녀의 마음은 한없이 들떠 있었다.
해안가를 끼고 펭귄마을로 가는 동안 내내 즐거웠다. 보통 때는 그녀의 보폭은 신경도 써주지 않던 그가 오늘따라 그녀의 보폭에 맞추어 느린 걸음을 걸어주는 것도 좋았고 가끔 만나는 제비갈매기와 웨델해표 등을 보는 것도 좋았다. 펭귄마을이 가까워질수록 해변은 온통 자갈밭으로 변했다. 자갈 위로 올라와 뒹굴거리는 웨델해표 새끼와 함께 사진도 찍고, 즐거운 한때였다.
그는 꽤 괜찮은 동반자였다. 이것저것 설명을 해주며 그녀의 궁금증을 풀어주었고 가끔 그녀가 미끄러운 자갈 위를 걷다 삐끗 하기라도 하면 얼른 팔을 잡아 부축해주기도 했다. 의외로 재미있는 농담도 곧잘 했고 무엇보다 남극에 대한 그의 열정이 좋아보였다. 누구든 무언가에 깊이 빠져있는 열정적인 모습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으리라.
“4월말쯤 되면 펭귄들의 대이동이 시작돼요. 초겨울의 시작이라 조금이라도 더 따뜻한 곳을 향해 이동하지. 젠투펭귄들은 일렬종대로 길게 늘어서 이동하는데 제일 앞에 있는 놈이 대장이오. 그 이동장면도 남극의 장관 중에 하나지. 그때 다시 와봅시다.”
현수는 그의 말을 들으며 그를 흘깃 바라보았다. 그녀에게 설명을 하면서도 그의 표정에는 남극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했다. 이 모든 자연환경을 숭배하는 듯 했다. 그의 얼굴은 부드럽게 이완되어 있었고 굳어있기만 하던 입술은 작은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두근. 현수는 갑자기 자신의 심장부근에 찌르르 전류가 흐르자 급히 그에게서 고개를 돌려 발밑을 바라보았다. 뭐지? 왜 갑자기? 심장의 두근거림이 제 박자를 잃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슬쩍 그를 쳐다보았다. 여전히 씩씩하게 걸음을 옮기는 그가 저만치 앞서고 있었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어제의 그와 전혀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런데 그녀의 심장은 다른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현수는 갑자기 깨달은 자신의 심장의 반응에 당황했다. 하지만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니야. 그냥 저 남자가 워낙 남극을 사랑하니까 그 감정에 자신도 휘둘린것이리라. 설마하니 저 성질 더러운 남자에게 자신이 끌릴 리가 없었다.
“힘듭니까?”
저만치 앞서가던 그가 문득 그녀를 돌아보며 물었다. 갑자기 걸음히 현저히 느려진 그녀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었다.
“아뇨. 괜찮아요.”
안 괜찮아요. 제발 하던 대로 해요! 갑자기 왜 이렇게 친절하냐고요!
“잠깐.”
바다 위를 나는 갈매기를 보며 걸음을 옮기던 현수는 그의 낮은 목소리에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무슨 일이냐는 듯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그녀를 보지 않은 채 다른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미소를 머금은 채. 현수는 고개를 돌려 그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쳐다보았다. 아…펭귄, 펭귄들이었다. 뒤뚱뒤뚱 언덕 비탈길을 오르고 있는 펭귄 몇 마리가 보였다. 그 뚱뚱하고 둔한 모습에 현수의 얼굴에는 절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귀여워요.”
그녀의 나지막한 말에 그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부드러운 미소가 더 귀여웠다.
“젠투펭귄. 지금 저 뱃속에 크릴을 잔뜩 들어 저렇게 뒤뚱거리는 거요. 아마도 곧장 새끼가 있는 둥지로 가겠지. 거기서 다른 펭귄과 교대해 다시 새끼를 품을 거요. 갑시다. 저 위로 가면 젠투펭귄 서식지요.”
그가 그녀를 재촉해 걸음을 다시 옮기자 그녀는 얼른 그의 뒤를 쫓아갔다. 그리고 얼마가지 않아 펭귄들이 가득한 자갈밭이 나타났다. 자갈들로 만든 둥지가 곳곳에 눈에 띄었고 그 둥지마다 새끼 펭귄들이 보였다. 무리지어 뭉쳐있는 폼이 저들끼리의 질서를 보여주는 듯했다. 현수는 조금 전 그들의 앞에서 비탈을 오르던 펭귄들이 힘겹게 자신의 둥지로 이동하는 것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렇게 힘들게 다니지 말고 바다가 가까운 곳에 둥지를 틀면 좋을 텐데. 이렇게 멀리 둥지를 튼 이유가 있나요?”
그녀의 질문에 그가 슬쩍 미소를 띠었다.
“처음엔 저 언덕 아래에 둥지를 틀었었지. 그런데 턱끈펭귄들에게 뺏겼어. 젠투펭귄들은 겁이 많고 순한 반면에 턱끈펭귀들은 전투적이고 포악하지. 그러니 다른 곳에서 겨울을 나고 이곳으로 먼저 돌아온 젠투펭귄들이 좋은 자리를 차지해도 소용이 없는 거요. 뒤에 돌아온 턱끈펭귄들에게 자리를 빼앗기니.”
그의 설명에 현수는 아직 보지도 못한 그 턱끈펭귄이 은근히 얄미웠다. 여기서도 힘의 법칙이 존재한다 생각하니 씁쓸했다.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젠투펭귄이니라.
그때였다. 어디선가 나타난 갈매기 한 마리가 어미가 자리를 비운 둥지가로 내려앉자 그 주변에 난리가 났다.
‘꾸악,꾸악.’
분명 그의 말대로라면 순하기만 한 젠투펭귄이 자신의 새끼를 지키기 위해서는 강인하고 용감하게 변하는 모습이었다. 둥지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마실 나갔던 어미펭귄이 갈매기를 보자 소리를 지르며 예의 그 뒤뚱거리는 걸음으로 위협을 가하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어미의 서슬에 놀란 갈매기는 목표하던 새끼펭귄을 건드려보지도 못하고 하늘로 날아오르고 말았다.
“쿡쿡. 오늘 저 스쿠아 제대로 한 방 먹는군.”
그의 웃음기 실린 말에 현수도 미소를 지었다.
“저 갈매기가 도둑갈매기에요?”
“펭귄 알을 호시탐탐 노리는 남극의 도둑갈매기요. 우린 스쿠아라고 부르지. 지금은 무사했지만 저 펭귄 새끼는 오늘 운이 좋았어. 만약 스쿠아가 하나가 아니라 두 마리였다면 저 새끼펭귄은 스쿠아의 먹이가 됐을 거요. 지금은 무사했지만 또 언제 잡아먹힐지 모르지.”
그의 설명에 현수는 기분이 가라앉았다. 끔찍했다. 이제 막 자라기 시작하는 어린 새끼인데 저렇게 예쁘고 작은 새끼 펭귄이 스쿠아의 날카로운 부리에 찢길 것을 생각하니 소름이 돋았다.
“참 냉정하네요.”
그녀의 속삭이듯 낮은 말에 그가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냉정한 것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그들만의 생존 법칙이지. 스쿠아가 펭귄을 잡아먹지 못하면 어린 스쿠아 새끼가 굶어 죽을 테니까.”
부드럽게 설명하는 그의 말에도 현수는 그 무서운 현실이 실감이 되지 않았다. 현재 그녀의 눈앞에 있는 것은 펭귄 새끼였고, 보지도 못한 스쿠아 새끼보다는 지금 저 앞의 펭귄 새끼에게 더 정이 가는 단순한 그녀였다.
그가 메고 있던 배낭을 내려놓은 후 배낭 안에서 저울같이 생긴 것과 박스를 꺼냈다. 그리고는 저울 위에 박스를 조립해 올려놓고 무게를 적었다.
“여기 가만있어요.”
그가 고개를 들어 펭귄들을 이러저리 훑어보는 것 같더니 한순간 눈을 빛내며 천천히 펭귄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침입해 들어갔다. 현수가 가만히 그의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는데 그가 갑자기 펭귄 한 마리를 쫓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안가 그물채에 잡힌 펭귄을 안고 돌아왔다. 시끄럽게 ‘꾸악’ 거리는 펭귄을 저울 위 박스 안에 집어넣고 무게를 잰 후 재빨리 풀어주었다. 가만 보니 그 펭귄의 다리 부분에 무언가가 달려있었다.
“저게 뭐죠?”
“작년에 생물학 연구원이 작업한 밴딩. 월동대 연구원들은 이런 식으로 자신이 남긴 흔적을 이어 받아 연구과정을 계속해 나가는 거요.”
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른 곳에서 겨울을 나고 다시 이리로 돌아오는지도 알 수 있겠네요?”
“그래요. 그런데 2,3년 전에 밴딩 했던 펭귄이 올해는 다섯 마리밖에 보이지 않는군.”
“그것밖에요?”
그녀의 놀랍다는 반응에 그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훗.조금 적은가? 내년에는 좀 더 많이 오겠지.”
그리고 그는 자신의 연구 자료를 모으는데 열중하기 시작했다. 현수는 자신의 가방에서 디지털카메라를 꺼내 주변의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사진으로 남기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았다. 언덕 위에서 바라보는 바다도 멋진 배경이었고 일찍 부화한 새끼에게 먹이를 먹이는 어미펭귄의 모습도 인상 깊었다. 뒤뚱뒤뚱 걷는 모습이 귀여웠고 하늘을 보고 입을 쩍쩍 벌리는 모양도 예뻤다.
현수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게 펭귄에게 흠뻑 빠져들었다. 그의 움직이자는 말에 아쉬움이 들 정도로.
“그만 갑시다.”
그가 물건들을 챙겨 넣고 그녀를 부르자 그녀는 상기된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하얗게 언 얼굴에 연방 입김을 불며 뛰오는 그녀의 모습에 태훈은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이러다 저 여자에게 생각보다 더 깊게 빠져들까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그녀의 아쉬워하는 표정에 그의 미소는 더욱 깊어졌다.
“저기 언덕 아래로 내려가면 턱끈펭귄들이 무리지어 있으니 펭귄은 더 볼 수 있을 거요.”
또다시 다른 펭귄들을 보러 간다는 말에 현수의 표정은 순식간에 밝아졌다.
“막내요?”
“네?”
현수는 걸음을 옮기다 문득 툭하고 질문을 던지는 그의 말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집에서 막내냐고?”
“네. 왜요?”
현수는 갑자기 그런 것을 묻는 그를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그나저나 막내라는 건 또 어떻게 알았을까? 그녀의 궁금한 표정에 그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얼마 전에 어떤 술 취한 여의사가 자신에게는 힘센 오빠가 둘이나 있다더군. 다른 형제 얘기는 안 하는 걸 보니 오빠 둘말고는 없다고 생각했지.”
아.젠장. 드드어 올 것이 왔다. 생각보다 너무 늦게 와 아예 그냥 없었던 일로 넘어가리라고 안심하고 있었는데………
“아. 저…..그 때 제가 술이 좀 취해서…..하하.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니라….”
“변비에 좋은 처방 있으면 따로 알려줘요. 난 아니지만 심한 변비로 고생하고 있는 대원이 한 명 있거든.”
그리고는 성큼성큼 저만치 앞서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현수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뭐야? 이게 다야? 그때 일 따지려고 하는 게 아니었어? 그의 의도를 도저히 알 수 없어 고개만 갸웃거리던 현수는 에라, 모르겠다. 어쨌든 자신에게 큰 유감이 있는 것은 아닌 듯하니 그냥 넘어가자고 마음먹었다. 성질 더러운 벽창호가 점점 괜찮은 남자로 변해가고 있었다.
젠투펭귄이 있는 언덕 아래로 내려오자 해안가에 둥지를 튼 턱끈펭귄들이 보였다. 하지만 그들을 보지 않아도 해안에 가까워질수록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에 벌써부터 턱끈펭귄들의 존재를 알 수 있었다. 과연 그의 말대로 턱끈펭귄은 그 생김부터가 차갑고 공격적으로 보였다. 목에 끈같이 검은 선이 있고 부리가 까만 것이 날카롭게 보였다.
“턱끈펭귄에게는 가까이 가지 말아요. 젠투펭귄은 새끼만 건드리지 않으면 사람을 무서워해서 피하지만 턱끈펭귄은 사람도 공격하니 가까이 가지 않는 게 상책이오.”
안 그래도 그럴 참이었다. 확실히 턱끈펭귄보다는 조금 전 지나온 젠투펭귄에 더 정이 갔다. 뭐든 생긴 걸로 판단하면 안 되는데, 동물이나 사람이나 어쩔 수 없나보다. 첫인상이 첫 느낌이 되니.풋. 그러고 보면 저 남자도 첫인상이 과히 좋지 않았었다. 하긴 뭐 오늘 이곳으로 오기 전까지만 해도 그 좋지 않았던 첫인상이 쭉 이어져왔었지만. 하지만 오늘 그가 보여주는 이미지는 첫인상을 꽤 호전시키고 있었다. 조금 전 젠투펭귄을 관찰하던 것처럼 마찬가지로 턱끈펭귄의 배설물을 채집하고 사진을 찍는 폼이 사뭇 진지했다.
현수는 한동안 그를 관찰하다가 어제 저녁 영숙 언니가 하던 말이 떠올랐다.
‘남극이 사람 하나 만든 거지. 남극에 대한 열정으로만 따지면 그가 세계 제일일 거야.’
그녀는 영숙 언니의 그 말이 어렴풋이나마 공감이 갔다. 오늘 오전 내내 그의 열정적인 모습에서 언니가 말하던 그의 남극사랑을 조금은 엿본 느낌이었다.
강 박사가 연구자료를 채집하고 펭귄들의 생활을 관찰하는 동안 이리저리 구겨을 하며 다니던 현수는 턱끈펭귄의 무리가 없는 곳의 바위 근처에 앉아 쉬고 있었다. 펭귄마을에서의 오전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고 영숙 언니가 싸준 간식이며 도시락까지 다 까먹은 터였다. 현수는 저 멀리 떠 있는 빙하를 바라보며 잔잔하고 차가운 바람을 느끼고 있었다. 오늘은 정말 오랜만에 바람도 크게 없는 날이었다.
그때였다. 현수는 바위 뒤쪽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작은 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펭귄소리 같기는 한데 그 소리가 너무 힘이 없고 작았다. 현수는 바위를 돌아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바위를 조금 돌아가자 바위 틈 사이에 있는 작은 둥지가 보였다. 아기펭귄이었다. 풋.부화한지 얼마 되지 않은 아기펭귄에게도 목에 검은 선이 있는 것을 보니 분명 턱끈펭귄의 새끼가 분명했다. 그나저나 왜 새끼만 있는거지? 게다가 여긴 턱끈펭귄들의 무리에서 너무 떨어진 곳이었다. 이러다 스쿠아라는 저 도둑갈매기의 눈에 띄기라도 한다면……
현수는 근처에 어미가 없나 싶어 몸을 일으켜 주면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막 몇 걸음 옮기려는 찰나 큰 소리와 함께 바위 뒤쪽에서 위협적으로 달려오는 어미펭귄을 보았다. 눈을 사납게 치켜뜨고 날개는 활짝 펼친 채 커다란 소리를 내지르는 폼이 분명 그녀를 자기의 새끼를 노리는 적으로 알고 있음이 분명했다.
“어! 아냐. 난 아냐.”
현수는 순간 당황해 어쩔 줄을 모르며 손사래를 쳤지만 새끼를 보호하려는 어미펭귄이 그녀의 뜻을 알아챌 리 만무했다. 현수는 뒷걸음질 치다 그 위협적인 모습에 눌려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오. 맙소사. 누가 펭귄이 귀엽기만 하다고 한다면 절대 아니라고 알려주고 싶었다. 있는 힘껏 달리던 현수는 뒤를 흘깃 바라본 순간 아직도 그녀를 쫓아 달려오는 펭귄의 모습에 기겁을 했다. 그녀가 겁을 집어 먹어서인지, 저 어미펭귄이 본래 덩치가 큰 것인지 모르지만 유달리 크게 느껴지는 펭귄의 전투자세에 현수는 혼이 빠져 버렸다.
“엄마야! 강 박사님. 이봐요! 엄마!”
현수는 마치 그녀를 단숨에 쪼아버리겟다는 듯 달려오는 펭귄의 위협에 놀라 그가 있는 곳으로 사정없이 달렸다.
태훈은 새끼펭귄의 모습을 사진에 담으려 긴장하며 가까이 다가가다 그녀의 비명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곧장 그녀가 있는 방향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았다. 겁에 질린 그녀가 허둥지둥 뛰어오는 뒤로 턱끈펭귄 한 마라기 위협적으로 뒤뚱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태훈은 웃어야할지 말아야할지 몰라 갈피를 못 잡고 있는 사이 그녀가 그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힘껏 품에 안겨드는 그녀의 반동에 순간 휘청했지만 태훈은 그녀를 안고 재빨리 균형을 잡았다.
그녀를 쫓던 턱끈펭귄은 또 다른 인간이 있다는 사실에 달리던 걸음을 멈추고 있었다. 충분히 위협을 주었다 생각했는지 다시 자신의 둥지로 돌아가고 있었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그녀는 아직도 펭귄이 자신을 쫓는 줄 알고 그의 파카를 움켜쥐고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헉헉.어떡해요….펭귄이….난 아무 짓도 안했는데….쟤가 날….헉헉. 아이고 ,숨차.”
자신의 품에 안긴 채 격한 숨을 몰아쉬는 그녀를 내려다보던 태훈은 무언가 이상한 감정에 빠져들었다.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그녀를 안고 있는 자신의 팔이 이보다 더 자연스러운 상황은 있을 수 없다는 듯 그녀를 안고 있었다.
한동안 숨을 내쉬던 그녀가 그제야 고개를 돌려 펭귄이 보이지 않는 것을 알았는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문득 자신이 누구의 품에 안겨있는지도 깨달았다.
“어.아. 이런….미안해요. 하하하 제가 너무 놀라서….”
그녀가 그의 품에서 조금 떨어지며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를 올려다보며 다시 한 번 미안한 미소를 지으려던 그녀는 그의 표정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녀의 팔을 잡고 있는 그의 손에 힘이 가해지고 그녀는 의미를 알 수 없는 그의 진지한 눈빛에 미소는커녕 입도 벙긋 할 수 없었다.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뭐, 뭐야? 이게 지금 무슨 분위기지?
그들의 사이로 하얀 입김이 뒤섞이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마치 고개를 숙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와의 거리가 점점 좁혀지는 이유가 그것 말고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하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의 입김이 그녀의 입김과 섞이는 그 순간이 더욱 짧아졌지만 그마저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들의 사이로 흐르는 열기가 차가운 남극바람마저도 잠재우고 있었다. 허공에서 만난 두 사람의 눈길은 시선을 피할 생각조차 못한 채 그대로 굳게 얽혀있었다. 현수는 너무나 가까운 그와의 거리에서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하얀 입김만 내뱉고 있었다. 그 짧은 순간이 마치 영원처럼 느껴질 즈음 마침내 그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그만 갑시다.”
그의 목소리가 갈라지듯 어색함이 느껴지는 것은 그녀만의 착각일까? 그가 자신의 짐을 챙기는 모습을 지켜보던 현수는 갑자기 바다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에 정신을 차렸다. 말도 안 돼. 윤현수. 정신 차려. 여기까지 와서 또 사랑타령이나 할거야? 그것도 날 싫어하는 남자를 상대로?
기지로 돌아가는 길은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이상한 기류로 더 이상 즐겁지 않았다. 그도 말없이 조용히 걸음만 옮기고 있었고 그녀는 그녀대로 낯설고 정리되지 않은 느낌에 기분이 이상했다. 그녀는 옆에서 말없이 걷기만 하는 그를 흘깃거리며 살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꽤 진지한 모습이었다.
“영숙 언니가 사촌 누나라면서요?”
기지까지 가는 거리 내내 어색한 느낌으로 갈 것 같아 현수는 먼저 말을 꺼냈다. 이 이상한 분위기를 깰 수 있으려면 뭐든지 말을 해야 할 듯싶었다.
“…..”
“어떻게 사촌간이 함께 남극에 관심을 가지고 함께 월동도 해요?”
“……”
현수는 자신의 질문에 대답도 않는 그를 흘겨보았다. 기껏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 신경 썼더니 이 남자는 관심도 없는 모양이었다. 현수는 그에게 말을 붙이는 것을 포기하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오늘 오전에 펭귄마을로 갈 때와 같은 길임에도 기지로 돌아가는 길은 오전과 달리 가라앉아있었다.
“덩치 크고, 화통해 보여도 속은 여리고 외로움을 타는 사람입니다.”
현수는 문득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아무렇지도 않은 듯 정면만 바라보고 걸음을 옮기는 그의 모습에 현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가요? 누가 덩치는 큰데 여려요?”
“…..”
현수의 궁금한 듯 묻는 질문에 그는 대답이 없었다. 다시 질문을 하려던 현수는 순간 떠오르는 생각에 그를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그가 말하는 덩치 크고 여린 사람은 영숙이 분명했다. 무슨 일에든 무뚝뚝하고 잔정이 없어보이던 그의 입에서 영숙 언니를 감싸는 듯한 말이 흘러나오자 현수는 문득 그가 다시 보였다. 강태훈, 그에게도 저런 면이 있었네.
그날 밤 현수는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눈만 감으면 오늘 오후 그의 품에 안겼던 그 상황이 생생히 되살아났다. 겨우 자정이 되어서 살포시 잠이 들었지만 그마저도 악몽에 시달리며 금방 깨버렸다. 그 잠깐사이의 꿈속에서 그녀는 그의 품에 안겨 진한 키스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그가 그녀를 내팽개치고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리자 그녀는 그의 웃음소리에 귀를 막으며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결국 얕게 들었던 잠에서 마저 깨고 말았다.
휴…..미쳤지. 윤현수. 여기까지 와서 남자랑 연애 따위나 하려고? 연애 같은 것, 다시는 안한다고 맹세해놓고. 풋. 혼자서 김칫국 마시는 것도 아니고. 그는 자신에게 아무 감정도 없을 수도 있는데 자신은 지금 뭐하는 짓인지. 연애는 혼자 하나? 그리고 누가 연애한데? 오늘 오후 그와의 사이에 특별한 느낌을 받은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둘이 연애를 해야 한다는 이유가 될 수는 없었다. 절대 있을 수 없었다. 명운 선배와 그렇게 헤어지고 자신에게 쏟아지는 사람들의 수군거림, 그 불쌍하다는 눈빛에서 벗어나 여기까지 도망쳐왔는데 여기서 또 그런 일을 당할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여기선 더 이상 도망갈 데도 없었다.
하지만…..하지만 오후에 자신이 느꼈던 그런 심장의 두근거림은 명운 선배에게서는 단 한 번도 느낀 적이 없었다. 아니, 명운 선배뿐 아니라 지금껏 그녀가 사랑이라 믿어왔던 그 누구에게서도 그런 강렬한 느낌은 받은 적이 없었다. 그래봤자 명운 선배 외에는 연애다운 연애를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짝사랑에,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지만. 그것도 그녀의 환상 속에만 존재하는 사랑. 그녀는 명운 선배뿐 아니라 그 전에 짝사랑을 했던 남자들 모두에게 일종의 환상을 품었던 것 같았다. 상대를 정해놓고 혼자만의 상상의 나래를 펴며 상대를 자신의 환상에 맞게 꾸며놓고 사랑을 했었다. 지금껏 자신은 실제 인물들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환상속의 인물을 사랑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그는 뭐지? 그를 상대로 단 한번도 상상을 한 적도 없었고 그에게 좋지 않은 감정은 있었어도 그를 상대로 이성적인 호감 한 번 느낀 적이 없었다. 그러면 도대체 오늘 오후에 느꼈던 그 느낌은 뭐란 말인가.
“아. 미치겠다.”
현수는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 진짜. 이대로는 절대 잠들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슬쩍 창밖을 바라보았다. 분명 조리실 냉장고에는 어제 저녁 먹다 남은 맥주가 남아있을 것이다. 영숙 언니가 장 박사에게 몇 캔 되지 않으니 냉장고에 두겠다고 한 것이 기억이 났다. 딱 한 캔만 마시면 쉽게 잠들수 있을 텐데…..
잠시 갈등하던 현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파카를 껴입었다. 새벽 한 신데 누구 깨어있는 사람도 없을 테고 조용히 가서 맥주만 하나 가지고 얼른 돌아오면 아무도 모를 것이다. 현수는 자신의 방문을 살며시 열었다.
탁.
현수는 맥주 캔 두 개를 든 채 냉장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먹다 남은 비스킷까지 꺼내들고 조리실을 나왔다. 아무도 없는 어두운 식당 안은 고요하기만 했다. 조용히 들려오는 온풍기 돌아가는 소리와 바깥의 바람소리만이 들려오는 아늑한 공간이었다. 현수는 식당 불을 켤까 하다가 관두기로 했다. 자신이 자기오 나온 작은 손전등만으로도 충분했다. 손전등을 켠 채 식탁 위에 올려두고 현수는 맥주 캔 하나를 따 시원하게 들이켰다.
“음. 맛있다.”
현수는 비스킷 하나를 입안에 쏙 집어넣고 우물우물 씹으며 쿡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얼마 전 술에 취해 변비사건을 저지른 후부터 술은 절대 안 마시겠다고 맹세해놓고 또 이렇게 술을 마시다니. 하긴 자신의 결심이 언제 길게 간적이 있었던가. 그래도 이번 금주결심은 꽤 오래 간 것이었다. 1월말이니 근 한 달간은 결심을 지킨 것이다. 그래. 한 달이면 충분하지. 그만큼 벌 받았으면 충분해.암. 충분하고말고. 그런 의미에서 또 한잔.크….
그녀가 또 한 모금을 길게 마시고 고개를 내리는 순간 식당문이 슬며시 열리는 것이 보였다.
그녀가 ‘헉!’하고 숨을 멈추며 굳은 사이에 강태훈 박사가 식당 문을 열고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식탁 앞에 앉은 그녀와 그녀의 손에 들린 맥주 캔을 차례대로 훑어보더니 곧장 그녀의 앞으로 다가와 의자를 빼내어 앚았다.
“그거 더 있어요?”
“네?”
그녀가 가까스로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그에게 되묻자 그는 아예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그녀 앞에 놓인 따지 않은 맥주 캔을 딱 소리가 나게 따고 길게 한 모금 들이켰다. 그 모양을 바라보던 현수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잠이 안 오세요?”
그가 무슨 말이냐는 듯 그녀를 향해 짙은 눈썹을 치켜 올리자 그녀는 무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 전 저처럼 잠이 안 와서 맥주라도 한잔 하시려고….”
“연구실에 있다 지금 막 숙소로 가는 길에 식당에 불빛이 보여서 와본 거요.”
아……현수는 그의 말에 고개를 숙였다. 난 또, 그도 나처럼 잠이 안 와 술이나 한잔 하려고 온줄 알았지.
“잠이 안 옵니까?”
“좀 그러네요.”
그리고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현수는 갑자기 그와 단둘이 있는 지금 상황이 무척 어색했다.
“연애해 봤습니까?”
콜록!
현수는 그의 황당한 질문에 맥주를 마시다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가슴을 탕탕 치며 기침을 몇 번 한 후에야 비로소 진정이 되었다.
“뭐라고요?”
아직도 기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다시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태평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연애해 봤느냐고 물었습니다.”
아니. 이 남자가 날 뭘로 보고! 그럼 이 나이에 연애 한 번 못해 봤을까봐?
“당연하죠.”
“당연?”
“그래요. 내 나이가 몇인데. 나 참. 연애는 해 볼만큼 해봤죠.”
“연애해 볼 만큼 해봤다라…..그 해 볼 만큼이 얼마나 되는데?”
얼마나? 음….글세. 그게….그런데! 남이야 연애를 얼마나 했든 말든!
“그건 왜 물어요?”
“내 보기엔 제대로 된 연애는 한 번도 안 해본 것 같아서.”
뭐? 이 남자가 근데.
“저, 정말 연애 많이 해봤거든요?”
“10분 이상 키스한 적 있습니까?”
엥?
“남자와 10분 이상 키스해본 적 없으면 연애 해봤다는 말 다신 하지 말아요. 알았어요?”
그리고 들고 있던 맥주 캔을 단 한 번에 비운 그가 벌떡 일어서더니 빠른 걸음으로 식당을 나가버렸다.
현수는 황당한 눈빛으로 그가 사라진 문을 바라보았다. 아니. 그럼 키스,10분 이상 해본 적 없으면 연애도 아닌가? 연애가 키스 10분으로 정의되는 거야? 살다 살다 별 희한한 연애정의도 다 들어본다.
태훈은 본관을 빠져나오다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훗. 뭐? 연애를 해 본 만큼 해봐? 웃기는 소리. 오늘 오후에 그의 품에 안겨 멍한 표정으로 굳어있던 그녀가 연애를 해볼 만큼 해봤다고? 키스 10분 이상 해봤냐는 질문은 그저 그녀가 할 말은 잊게 만들려 일부러 지어낸 말이지만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녀가 정말 그의 말대로 남자와 키스를 한번이라도 진하게 해본 적이 있다면 오늘 오후 그가 보낸 신호를 그녀는 정확히 알아챘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가 보내는 눈빛이고, 손짓이고, 그 어느 것도 눈치 채지 못했다. 그저 멍하니 두려움에 떨며 어쩔 줄을 몰라 하기만 했다. 남자가 자신에게서 뭘 원하는지, 뭘 느끼는지도 모르면서 연애를 해볼 만큼 해봐? 해볼 만큼 해본 여자가 남자가 보내는 키스 신호도 못 알아차리고 떨기만 해? 과연 그런 그녀의 말을 누가 믿겠는가!
태훈은 문득 고개를 저었다. 빌어먹을, 저 여자가 연애를 백 번을 했든, 천 번을 했든 자신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녀에게 그런 멍청한 질문을 한 것 자체가 기함할 일이었다. 잠이 오지 않는다는 그녀의 말에 혹시 한국에 둔 애인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애인 있느냐는 질문을 하는 대신 연애를 해봤느냐는 질문을 했다. 생각지도 못한 사이에 튀어나온 말이었다. 지금도 왜 자신이 그녀에게 그런 질문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물론 그녀에게 호감은 있었다. 하는 짓도 귀여웠고, 조금 어수룩한 면이 사랑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오늘 오후 그녀에게 느꼈던 이상한 기류나 그녀에게 무언가 다른 감정을 느낀다하더라도 지금은 안 될 일이었다. 이곳에서 월동하는 동안 저 여자와 연애를 할 수는 없었다. 남극에 연구를 하러왔지 연애를 하러 온 것은 아니었고, 더군다나 소수의 인원이 함께 생활하는 공동생활에서 혹시 모를 감정의 혼란도 겪고 싶지 않았다.
태훈은 다시 한 번 그녀가 있는 본관 건물을 일별하고 돌아섰다. ‘안 된다’라는 말을 스스로에게 수없이 되뇌며.
쏴아아.
현수는 세면대에서 팬티 두 장과 브래지어를 한 번 더 헹구고 탈탈 털었다. 이런 것도 세탁실에서 탈수까지 하면 더 좋겠지만 거긴 오가는 남자들이 너무 많았다. 숙소 화장실에서 빨아 되도록 물기를 힘껏 짜고 방안에 널어두면 그럭저럭 마르니 그리 큰 불편함은 없었다. 다만 생리가 있는 날은 좀 불편했다. 여자라서 안 좋은 점은 그것 딱 하나였다. 생리가 있는 날은 본관건물 화장실을 쓰는 것도 여의치 않아 꼭 여기 숙소 화장실까지 와야 했다.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본관에도 여자 화장실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도 했었지만 사실 그건 낭비였다. 남극에서 월동하는 여자 대원은 거의 극소수인데 그런 극소수의 인원을 위해 다른 공간을 만든다는 것 자체가 낭비였다. 그녀가 보기에 기계동에 여자 샤워실을 만든 것만도 대단한 일이었다.
현수는 다시 한 번 방금 빤 속옷의 물기를 꼭 짜고 힘껏 털었다. 빨리 널어놓고 점심 식사를 하러 가야 했다. 어젯밤 영숙 언니가 오늘 점심에 짜파게티를 끓여준다 했는데 벌써부터 침이 고이기 시작했다.
현수는 숙소동을 나와 식당으로 향하다 본관 건물로 들어가는 외국인들을 보았다. 계단을 오르는 외국 남자 네 명의 뒤로 강태훈 박사가 보였다. 요 며칠 사이로는 여러 나라와 기지에서 세종기지를 방문하고 있었다. 듣기로는 남극의 여름동안 이웃 기지들을 방문해 기지간의 협력방안이나 연구 활동 등을 의논한다고 했다. 지난번 그녀가 함께 했던 러시아기지 방문처럼 그런 이유일 것이다. 이번엔 어느 나라 기지에서 온 것일까? 현수는 멈추었던 걸음을 다시 옮기며 그들 쪽을 바라보았다. 순간 그와 눈이 마주쳤다. 외국인들을 먼저 올려 보내고 그도 막 계단을 오르다 그녀를 발견한 것 같았다. 며칠 전 펭귄마을을 방문했던 밤, 그가 했던 이상한 질문이 떠올랐다.
‘연애해봤습니까?’
’10분 이상 키스한 적 있습니까?’
갑자기 왜 그런 질문을 했을까? 현수는 잠시 그녀를 응시하던 그가 몸을 돌려 계단을 오르자 눈살을 찌푸렸다. 알 수 없는 남자였다. 어떤 때는 천하에 다시없은 벽창호에 독재자처럼 굴다가도 또 어떤 때는 열정적이고 따스한 남자처럼 행동했다. 비록 그 따스한 느낌을 많이, 자주 받지는 못했지만.
“안녕하세요.”
현수는 문득 들려오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아. 네. 안녕하세요.”
“식사하셨습니까?”
“아뇨. 지금 먹으러 가려고요.”
현수는 살갑게 웃는 허기태를 바라보며 마주 미소 지어주었다.
“저도 지금 먹으러 갈 건데 함께 가시죠.”
“네. 근데 지금 식당에 다른 기지 사람들이 가는 것 같던데….”
“어. 그래요? 그런 나중에 먹을까요? 그 사람들 있으면 아무래도 마음 편히 먹기 힘들죠.”
“좀 그렇죠? 하하하.”
현수는 그녀의 마음과 같은 허기태의 말에 자연스럽게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럼요. 낯선 사람하고 밥 먹는 거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럼 그동안 저기 가까운 언덕 쪽으로 산책 가실래요?”
“언덕이요?”
“네. 오늘 날씨가 맑아서 지금 언덕에 오르면 마리안 소만이 한눈에 보일 겁니다. 어쩌면 남극대륙도 볼 수 있을지 모르죠.”
“정말요?”
“그럼요. 대륙은 장담 못해도 마리안 소만은 장담합니다.”
현수는 자신 있다는 듯 큰소리를 치는 허기태의 표정에 마주 미소를 짓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럼. 기태 씨 한번 믿어볼까요?”
“네. 알아서 모시겠습니다.”
현수는 장난스럽게 거수경례를 하는 기태에게 곱게 흘겨주고는 그와 함께 방향을 틀어 그가 말하던 언덕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닌 게 아니라 오늘은 정말 날씨가 화창했다.
“와아!”
현수는 힘겹게 오른 언덕을 뒤돌아볼 사이도 없이, 가쁜 숨을 진정시킬 새도 없이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절로 입술이 벌어졌다. 장관이었다. 저 멀리 펼쳐진 커다란 얼음덩이, 아니 빙원이 하얗게 빛나며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시야가 맑아 더욱 깨끗하게 보였다.
“대단하죠?”
현수는 기태의 질문에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고개만 끄덕였다. 환산적이었다. 햇살에 반짝반짝 빛나는 푸른 바다위로 눈부신 만년설이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아름다웠다. 마치 동화 속에나 나올 그런 장면이었다. 현수는 정말 남극에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남극이 아니라면 이런 광경을 어디서 보겠는가 말이다.
기태는 눈앞에서 순수하게 감탄의 표정을 짓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저 푸른 바다와 만년설로 뒤덮인 마리안 소만도 눈앞의 여자 앞에서는 그 빛이 힘을 잃었다. 처음 세종기지로 왔을 때부터 때 묻지 않은 순수함에 눈길이 갔었다. 간혹, 강 박사의 말에 발끈하기도 하지만 그마저도 기태의 눈에는 귀엽게 보였다. 자꾸만 그녀에게 눈길을 보내는 일이 점점 잦아졌고 어느새 그녀가 눈에 보이면 심장이 두근거렸다. 아마도 자신이 그녀를 좋아하게 된 때문일 것이다. 숱한 여자들을 만나보고 사귀기도 했지만 눈앞의 여자처럼 그를 가슴 뛰게 하는 여자는 없었다.
“맙소사! 봤어요?”
기태는 자신에게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감탄만 하는 그녀를 보며 더욱 미소가 깊어졌다. 마리안 소만에서 떨어지는 얼음덩이가 바닷물에 떨어지며 일으키는 커다란 물보라에 그녀의 감탄은 더욱 커지고 있었다.
“애인도 없고, 남자친구도 없고, 남편도 없다고 했죠?”
현수는 갑자기 황당한 질문을 하는 기태를 돌아보았다.
“네?”
허기태가 웃고 있었다.
“저번에 그러지 않았나요? 한국에 두고 온 애인도, 남자친구도, 남편도 없다고.”
“네. 그랬죠.”
“그럼 앞으로 애인이나, 남자친구 만들 계획 있으세요?”
현수는 자꾸만 이상한 질문을 하는 기태를 미심쩍게 바라보았다. 도대체 왜 그런 것이 궁금한지 알 수가 없었다.
“아뇨. 없어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남극에 온 이유가 남자 따위 모두 잊고 지난 과거 따위 모두, 깡그리 잊어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남자친구? 애인? 천만의 말씀이다. ‘노땡큐’였다.
그녀의 단호한 대답에 기태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그래요? 그러면 곤란한데….”
“곤란해요?”
“예. 곤란합니다.”
“그러니까, 제가 앞으로 남자친구나 애인을 둘 계획이 없다는 사실이 기태 씨한테 곤란한 일이란 말씀인가요?”
“네.”
현수는 더욱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이 남자가 나랑 장난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실실 웃고 잇는 그가 실없어 보였다.
“왜요? 왜 기태 씨가 곤란한데요?”
“글쎄요. 앞으로 남자친구나 애인을 만들 계획이 생기면 말씀 드리죠.”
애매한 대답을 하는 기태의 말에 현수는 더욱 눈살을 찌푸렸다.
“전 당분간은 아니, 먼 훗날까지 그런 계획 없는데요.”
“너무 장담하지 마세요. 사람일은 어떻게 될지 한치 앞도 모른다지 않습니가. 자. 그만 내려가시죠. 점심 드셔야지요. 배 안 고프세요?”
현수는 싱글거리며 앞장서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멀뚱히 쳐다보았다. 뭔가 아주 중요한 대화를 나눈 것 같은데 그게 무슨 뜻이었는지, 그런 말을 하는 기태의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아주 달갑지 않은 예감 하나는 들었다. 하지만 깊이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가능성조차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그가 혹시….혹시 그녀에게 다른 마음이 있는 것이라면…….
현수는 그가 돌아보며 빨리 오라는 손짓을 하자 더욱 인상을 썼다. 그는 아니었다. 정말 먼 훗날까지도 남자친구니, 애인을 만들 계획도 없었지만 그 먼 훗날이 지나 누군가를 만든다 해도 그는 아니었다. 그에게는 다른 어떤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마치, 명운 선배를 처음 보았던 그때처럼, 허기태, 그에게서는 아무 느낌도 없었다. 실수는 한번이면 충분했다.
태훈은 장 박사와 세종기지를 방문한 칠레기지 대원들의 대화를 들으며 그들의 의견에 동의하는 미소를 지었다. 매해 기지 대원들이 바뀌기 때문에 새로운 해가 되어 월동하는 대원들에게는 이웃기지와의 원만한 관계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가끔 우리 기지에 없는 장비를 빌리 수도 있었고 어려운 일에 닥쳤을 때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문명의 혜택을 받을 수 없는 남극에서는 ‘상부상조’는 아주 중요한 항목이었다.
태훈은 커피 잔을 입으로 가져가다 문득 식당 입구에 들어서는 여자와 남자를 바라보았다. 태훈은 문득 눈살을 찌푸리며 그들을 지켜보았다. 윤 선생이 식판을 들고 반찬이 나열된 곳으로 움직이자 허기태가 그녀의 뒤를 바싹 뒤따르며 이것저것 챙겨주는 폼이 영 기분이 나빴다. 무엇이 그리 좋은지 입가에 웃음을 잔뜩 머금은 허기태의 표정과 약간은 어색해하는 윤 선생을 번갈아 바라보며 태훈은 영 심사가 뒤틀렸다.
장 박사는 칠레 대원들을 향해 친절한 미소를 짓고는 태훈을 바라보았다.
“강 박사. 연구실로 안내해 드리지.”
“네.”
태훈은 칠레 대원들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판을 들고 식탁에 자리를 잡던 현수가 그와 눈이 마주친 것은 그때였다. 태훈의 표정은 몹시 못마땅하다는 듯 굳어 있었고 현수는 그런 태훈의 표정에 기분이 상했다. 그녀를 향해 고개만 까닥이는 그를 향해 마주 고개를 숙여주고 그녀는 자리에 앉았다.
“이제 식사하나?”
“네. 박사님. 조금 늦었습니다.”
“그래. 먹어. 윤 선생 많이 먹어요.”
“네. 장 박사님.”
현수는 앉으려던 자리에서 엉거주춤 다시 일어서 장 박사와 칠레 대원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태훈이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마치 쌩 하고 차가운 얼음바람이 부는 듯 했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그에게서는 남극의 칼바람보다 더 매서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앉으세요. 윤 선생님.”
“아.네.”
현수는 기태의 말에 그가 사라진 식당 문에서 고개를 돌리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왠지 부담스러운 친절을 베푸는 기태와 함께 늦은 점심을 먹기 시작했다. 머릿속으로는 조금 전 강태훈 박사의 굳은 표정을 떠올리며.
“언니. 뭐 도와드릴 거 없어요?”
“어?아.윤 선생. 글쎄, 없는데….아니, 하나 있다. 목조 창고 어디 있는 줄 알지?”
“목조창고요? 네. 잠수동 옆에 있는 건물이죠?”
“응. 거기 가서 멸치 봉지 좀 가져다줄래? 목조 창고로 들어가서 오른쪽으로 두 번째 선반에 있을 거야.”
“네. 제가 다녀올게요.”
현수는 명쾌한 웃음으로 영숙에게 대답을 하고 몸을 돌려 조리실을 나왔다. 월동대원들의 하루 세끼 식사와 간식, 게다가 늦게까지 일하는 연구원들의 밤참까지 준비하는 영숙은 하루 종일 조리실을 빠져나오지 못했다. 스스로 좋아서 하는 일이라지만 현수가 보기엔 여기 월동대원들 중에서 가장 일이 많은 사람이 영숙 언니 같았다. 그래서 가끔 영숙에게 도와줄까 물었지만 영숙은 매번 이렇게 작은 심부름이나 간단한 설거지만 시켰다. 아마도 집안일을 해보지 않은 자신이 못미더워서일 것이다.
현수는 본관건물을 빠져나와 기계동 옆을 가로질러 걸음을 옮겼다. 대부분의 연구원들은 러시아기지에서 빌린 쇄빙선을 타고 연구 활동을 나갔고 기술대원들은 이것저것 보수작업을 위해 중장비보관동에 가있다고 들었다. 그래서인지 본관건물 주변은 조용했다. 그때였다.
“꾸악.꾸악.”
현수는 기계동을 지나다 자신의 앞을 당당하게 걸아가는 작은 펭귄의 모습을 보고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니, 웬 펭귄?
그녀가 놀라거나 말거나 그 당당한 펭귄은 여전히 꾸악거리며 종횡무진 앞으로 옆으로 걸어 다녔다. 아니, 뛰는 건가? 어땠든 꽤 바쁘게 뛰어다녔다. 새끼 펭귄이었다. 이제 막 털갈이라도 시작하려는지 여기저기 털갈이의 흔적이 보이는 작은 펭귄이었다. 어미도 없이 새끼펭귄이 기지까지 웬일이지? 그런데….뭔가 이상했다. 처음엔 기분이 좋아서 뛰어다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듯 보였다. 게다가 뛰는 폼도 이상했다. 마치 다리가 아파서 제대로 걷지 못해 껑충껑충 뒤는 것처럼 보였다.
현수는 드디어 뛰는 것을 멈추고 가만히 서있는 펭귄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러자 펭귄이 다시 껑충껑충 뛰기 시작했다. 이제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좋아서 뛰는 것이 아니라 걷고 싶은데 다리가 아파서 팔짝팔짝 뛰는 것이었다. 현수는 가마히 있지 않는 펭귄을 붙잡고 싶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답답했다. 이럴 때 강 박사라도 있다면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하지만 강 박사는 연구선을 타고 연구 활동을 나간 상태였고 눈앞의 새끼 펭귕은 당장 도움이 필요한 상태였다.
현수는 우선 펭귄을 몰기 시작해싿. 그녀가 뒤에서 크게 발자국 소리를 내며 뛰자 새끼 펭귄은 그녀를 피해 달아나기 시작했다. 현수는 새끼 펭귄을 목조창고 쪽으로 몰았다. 처음엔 본관건물 쪽으로 몰고 싶었지만 펭귄이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안항싿. 아무래도 사람냄새가 더 많이 나는 쪽은 본능적으로 피하는 것이리라.
현수는 목조창고 쪽으로 가까이 가자 재빨리 뛰어서 목조창고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다시 펭귄을 몰아 목조창고의 열린 문으로 펭귄이 들어가도록 했다. 얼마간의 사투 끝에 결국 새끼펭귄이 창고로 들어가자 현수는 자신도 황급히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숨이 찼다. 어찌나 열심히 뛰었는지 거침 숨결이 절로 새어나왔다.
“헉헉. 에고 힘들어. 야. 너! 내가 너 다친 다리 좀 보려고 이러는 건데 날 이렇게 힘들게 해?”
현수는 짐짓 화를 내며 눈앞에 서있는 펭귄을 바라보았다. 낯선 장소에 갇힌 것을 알아서일까? 펭귄은 가만히 서서 그녀를 쳐다보기만 했다. 가여웠다. 어쩌다 어미를 잃고 다리까지 다쳤는지 궁금했고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과 부딪쳐 무서워하는 것 같아 더욱 불쌍했다.
“괜찮아. 다친 다리 치료하고 너희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보내줄게. 여기 사람들 중에 벽창호 강태훈 박사라고 있는데 그 사람이 너 같은 펭귄 전문이야. 그러니까 안심해. 알았지? 내가 가서 구급함이랑 먹을 것 좀 가져올 테니 넌 여기 꼼짝 말로 있어야해. 알았어?”
현수는 부드러운 어조로 겁먹은 펭귄을 달래고 가만히 펭귄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여전히 펭귄은 그녀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녀가 다가가는 만큼 펭귄은 멀어졌다.
“휴. 이러면 안 돼. 네가 얼마나 다쳤는지 알아야 약을 가져오지. 좋아. 그럼 먹을 것 먼저 가져올게. 됐지?”
현수는 먹을 것으로 유인하기로 했다. 그리고 가는 길에 영숙 언니에게 펭귄을 의논해도 좋을 것이다. 그녀는 재빨리 목조창고 문을 열고 나가 다시 꼭 닫았다. 급했다.혹시 누군가 모르고 문을 열어 새끼펭귄이 탈출한다면 치료조차 하지 못한채 어딘가를 헤매다 스쿠아의 먹이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현수는 본관건물을 향해 전속력으로 뛰었다.
“윤 선생. 무슨 일 있어요? 뭐가 그렇게 급해요?”
현수는 본관 건물로 통하는 철제 계단을 급히 오르다 뒤에서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에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아. 장 박사님. 제가 좀 급해서…. 혹시 펭귄에 대해 잘 아세요?”
“펭귄? 펭귄이야 강 박사가 잘 알지. 안 그래도 펭귄 한마리가 필요한데. 새끼면 더 좋고. 서울 어린이 박물관에서 전시용 박제가 모자르다고 해서…”
헉!
박제? 바악제? 현수는 순식간에 얼어버렸다. 펭귄과 박제라는 단어가 그녀의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더니 갑자기 지금 목조창고에 있는 새끼펭귄이 박제가 되는 끔찍한 모습이 그려졌다. 안 돼! 절대 그럴 수 없어!
“그런데 왜요? 윤 선생이 펭귄을 왜?”
“아니요! 아니에요. 그냥 한번 물어봤어요.하하하.”
현수는 어색한 웃음을 지어주고는 홱 몸을 돌려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장 박사가 저런 생각이라면 다른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특히 장 박사의 애제자 강태훈 박사는 더더욱!
현수는 식당 한쪽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영숙과 장 박사를 피해 조용히 식당 문을 나섰다. 영숙 언니가 조리실을 나간 사이 펭귄이 먹을 것 몇 가지를 챙겼다. 그녀가 생각하기로 어린 펭귄은 무언가 아주 작은 것을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다 자라기 전에는 어미가 되새김한 것을 주지 않던가….펭귄마을을 방문했던 것이 이제야 도움이 되었다. 그때 어미펭귄이 입에서 입으로 먹이를 주는 것을 본 현수는 새끼펭귄에게 줄 생선을 잘게 썰어 담았다.
현수는 목조창고 앞에서 주변을 확인하고는 곧장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디에 숨었는지 보이지는 않았지만 곧 꾸악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보니 아직 목조창고 안에 있는 것은 확실했다. 그녀는 의무실에서 가져온 구급상자와 먹을 것을 내려놓고 주변을 훑어보았다. 분명 어디 구석에 숨어있을 텐데….
“펭귄아. 배고프지? 이리 와서 이거 먹어.”
“어서들 오게. 수고했어.”
태훈은 보트에서 내리며 장 박사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연구 활동은 꽤 성과가 있었다. 날씨가 순탄해 많은 종류의 동물 플랑크톤도 채집했고 꽤 깊은 해저의 코어 시료채취에도 성공했다. 연구선을 타고 연구 활동을 나간적은 여러 번 있었지만 이번만큼 큰 성과는 없었다.
“하늘색이 별로 좋지 않습니다. 파도도 높아지고.”
“안 그래도 지광호가 그러더군. 오늘밤 약한 블리자드가 예상된다고.”
“블리자드?”
태훈은 눈살을 찌푸렸다. 곧 2월이었다. 하긴 블리자드가 올 때가 되었다. 한겨울의 블리자드야 무서운 것이지만 아직 1월이고 약한 블리자드라면 그리 걱정할 일은 안있다. 하지만 남극에서 처음 월동하는 대원들은 당황할 수 있었다. 가령, 윤현수 같은 여자.
“처음 월동하는 대원들은 따로 주의를 줘야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해. 한국에서 이미 교육은 받았지만 실제는 다르니까.”
“네.”
태훈은 나머지 짐을 끌어내리고 다른 대원들과 함께 보트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윤 선생 못 봤습니까?”
“윤 선생? 아니. 못 봤는데. 왜?”
태훈은 기지 어느 곳에도 보이지 않는 현수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이 여자가 도대체 어디 박혀있는지 보이지가 않았다. 의무실에도 없었고 휴게실, 숙소, 샤워실까지 모두 뒤졌지만 보이지 않았다. 이젠 슬슬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곧 블리자드가 온다. 하늘은 온통 어두운 회색빛을 띠고 있었고 약한 눈보라라지만 블리자드는 블리자드였다.
“언제 마지막으로 봤습니까?”
“음…아까 오후에 식당에서 본 것 같은데….그때 장 박사님이랑 얘기하고 있을 때 윤 선생이 조리실을 왔다 갔다 했어. 그러고 보니 그 후로 못 봤네. 날씨도 안 좋은데 어디 갔지? 숙소동 가봤어?”
“네.”
태훈은 더욱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를 마지막으로 본 사람이 영숙 같았고, 그마저도 몇 시간 전이었다. 이미 주위는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 여자를 빨리 찾지 못한다면 대원들 모두를 동원해서 수색해야 했다. 젠장. 여러 가지로 애먹이는 여자였다.
태훈은 점점 초조해지는 자신을 다잡고 돌아섰다.
“강태훈. 어디 가? 나도 같이 가자.”
“됐어요. 여럿이 움직이면 일만 더 복잡해져요. 그러니 각자 자리를 지키세요.”
태훈은 말을 마치고 황급히 식당을 나섰다. 보트창고부터 시작해서 다시 모든 건물을 살펴볼 참이었다. 그래도, 그래도 없다면 대원들 모두를 동원해야 하리라. 빌어먹을 여자 같으니라고.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겠지. 지금 태운에게는 온통 그 여자를 빨리 찾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태훈은 보트창고와 기계동, 발전동을 지나쳐 잠수동 쪽으로 뛰어갔다. 바람이 점점 세지고 있었다. 이 상태라념 곧 눈보라가 칠 것이다. 얼마나 많은 양의 눈이 내릴지는 모르지만 이정도의 어둠에 눈보라까지 친다면 아무리 그 힘이 약하다하더라도 처음 겪는 사람에게는 충분한 위협이 될 수 있었다.
태훈은 걱정으로 얼굴을 굳히며 모자를 푹 눌러썼다. 그리고 걸음을 더욱 빨리했다. 그때였다. 눈앞에 희미한 무언가가 보였다. 잠수동으로 들어가려던 태훈은 고개를 돌려 목조창고 입구를 바라보았다. 누군가 나오고 있었다. 파카에 달린 모자를 푹 눌러쓰고 목조창고 문을 꼼꼼히 닫는 사람은….젠장. 윤현수. 저 여자가 지금 저기서 뭘 하고 있단 말인가? 태훈은 연신 욕설을 내뱉으며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현수는 세차게 부는 바람에 고개를 숙이며 창고 문이 제대로 닫혔는지 꼼꼼히 점검했다. 시간이 이렇게 지난 줄도 몰랐다. 겨우 먹이로 유인한 새끼펭귄을 붙잡아 끙끙거리며 찢어진 발을 응급처치 했고, 발버둥 치는 펭귄에게 먹이를 먹였다. 입고 있던 카디건을 벗어 아늑한 잠자리를 만들어준 후, 일어서고 나서야 밖의 바람이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벌써 날이 어두워졌고 바람까지 세차게 부니 숙소로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펭귄만 두고 돌아서려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몇시간 사이에 정이라도 들었는지, 아니면 먹이를 주느느 그녀를 어미로 생각하는지 새끼펭귄은 그녀의 품속으로 자꾸만 파고들었다. 겨우 독한 마음을 먹고 임시 잠자리에 펭귄을 놓아두고 돌아서는 참이었다.
“헉! 아.아니.”
현수는 심장이 쿵 내려앉은 것을 느꼈다. 창고문을 점검하고 돌아서자마자 눈앞에 강태훈 박사가 짠 하고 나타났다. 그것도 험악한 인상을 있는 대로 팍팍 지으며.
“지금 여기서 뭐하는 겁니까?”
“어….저요?”
“제기랄. 그럼 여기 당신 말고 또 누가 있어!”
현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남자가 왜 또 성질이야? 성질은!
“왜요? 왜 화를 내고 그래요?”
“빌어먹을. 왜 화를 내냐고?”
태훈은 기가 막혔다. 천진하게 바라보며 왜 화를 내냐고 묻는 그녀를 탈탈 흔들어주고 싶었다. 한 시간이 넘는 시간동안 기지 구석구석을 찾아 헤매며 그녀를 걱정했는데 왜 화가 났냐고?
태훈은 자신의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헝클어트리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저기서 뭐한 거요?”
“네? 아. 목조창고요?”
“그래.”
“어…그게, 그러니까, 아, 언니가 멸치봉지를 갖다달라고 해서 왔다가 구경하느라…..하하하.”
“뭘?”
“뭐라뇨?”
현수는 열심히 그가 질문하는 내용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젠장. 찔리는 것이 있으니 대답도 잘 안나온다. 여기서 들키념 저 안의 아기펭귄은 박제가 된다. 정신 차려. 윤현수!
“뭘 구경했냐고? 저기 구경할게 뭐가 있다고.”
태훈의 눈빛이 의심으로 빛났다. 현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번 대답이 아주 중요했다.
“사실은 구경보다는 잠이 들었어요. 아까까지는 햇빛이 좋았는데 지금은 좀 춥네요. 어서 가요. 이러다 둘 다 얼어죽겠어요.”
현수는 얼렁뚱땅 대답하고 그의 팔을 잡고 이끌었다. 하지만 태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저 안에서 잤다고? 그 말을 지금 믿으라는 거요?”
“그래요. 햇볕이 따뜻해서….엄마야!”
현수는 말을 채 끝내지도 못하고 갑자기 세차게 부는 바람에 저만치 밀려갔다. 태훈이 그녀를 잡지 않았다면 분명 땅 위로 나자빠졌으리라.
“제길. 우선 갑시다. 이러다간 진짜 둘 다 얼어 죽겠으니.”
현수는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며 가만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만약 바람만 아니었다면 그는 분명 목조창고 안으로 들어갔으리라. 그러면 아기펭귄은….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절대 그렇게 두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는 펭귄의 상처가 나을 동안 보살핀 후 무사히 그들의 무리로 돌려보내겠다는 결심을 굳게 다졌다.
“들어가요. 오늘 밤은 블리자드가 부니까 어디 돌아다닐 생각 말고 가만히 방에 있어요. 알았습니까?”
현수는 그를 지나쳐 그가 열어놓은 문 안으로 들어갔다. 블리자드가 뭔가 했더니 남극의 눈보라를 블리자드라고 한단다. 남극에서는 수시로 블리자드가 불었고 블리자드가 시작되면 짧게는 하루, 길면 일주일 내내 이어진다고 한다. 이번 블리자드는 짧고 약가게 지날 것이라 큰 걱정은 없지만 그녀처럼 월동이 처음이고 남극에 대해 특히 무지한 사람은 특별히 관리하는 듯 했다. 강태훈 박사가 친히 그녀를 숙소까지 호위하는 것을 보면.
“네.”
현수는 순순히 대답해주었다. 그녀가 저녁식사를 끝낼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그녀를 숙소까지 데려다주는 그가 고마웠다.
“잘 자요.”
무뚝뚝한 한 마다민 툭 내뱉고는 돌아서던 그가 갑자기 멈춰섰다. 그리고 그답지 않게 약간의 망설임을 보이더니 다시 돌아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요즘 허기태 씨와 함께 다니던데….”
“네?”
현수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허기태? 갑자기 그는 왜? 하지만 그는 그녀의 놀란 질문에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됐습니다. 자요.”
그리고 돌아서 성큼성큼 복도를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현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뭘 말하려고 했던 거지? 그의 다음 말이 궁금했지만 현수는 곧 궁금증을 털어버리고 목조창고의 펭귄을 떠올렸다. 혹시 춥지나 않을지, 외롭거나 않을지, 몹시 걱정이 되었다.
태훈은 방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창을 흔드는 바람소리가 거칠었다. 기지 건물 내부를 모두 살펴보았으니 이번 블리자드로 피해를 볼 일은 없을 것이다. 그는 블리자드에 신경이 가지 않고 자꾸만 며칠 전 그녀와 허기태가 함께 있던 모습이 떠올랐다.
처음부터 신경이 쓰이게 하더니 결국은 이렇게 자신의 머릿속 전체를 점령했다. 처음엔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가 뭐가 그리 당당한지 계속해서 그에게 반항을 하는 게 우스웠고, 그리고 스스로의 존재가 쓸모없는 존재가 아님을 보여주려 노력하는 점이 기특했다. 그리고 그녀의 귀여운 술주정은……좋아, 솔직히 인정하자면 사랑스러웠다.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 아니, 젠장. 더 솔직해지자면 키스하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웠다. 하긴 하마터면 펭귄마을에서 키스를 할 뻔했지. 그녀에게 키스하는 것을 막은 것은 책임감이었다. 월동대의 부대장으로서 팀의 화합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서 억지로 그녀에게 향하는 마음을 다잡고 있었다. 그런데 빌어먹게도 점점 자신이 없어졌다. 안 그래도 그녀에게 뻗어나가는 손길을 막는 것이 힘든데 이젠 위기감까지 주고 있었다.
허기태. 그가 그 여자에게 흑심을 품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안 되지. 안 되고말고. 태훈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를 원하는 마음을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었다. 눈앞에 보이면 안고 싶고, 키스하고 싶었다. 빌어먹을. 그녀와 연애를 하면 무너질지도 모를 팀워크고 뭐고 이제는 그녀밖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나중은 나중 일이고 그 여자부터 내 것으로 만들고 봐야 했다. 자신이 그녀를 현명하게 잘 이끈다면 큰 무리 없이 무사히 1년을 보낼 수 있으리라.
드디어 흡족한 결론을 내린 태훈은 눈을 감았다. 내일부터 윤현수 사수작전에 들어가려면 재충전을 해야 하리라.
그런데 그 여자가 목조창고에서 뭘 하고 있었던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