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ver Temptation of the Iceworld RAW novel - Chapter 14
13장. 비온 뒤 맑음.
“이상이 있으면 즉각 저를 불렀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러라고 발전동 당직을 서는 것이고! 조금만 늦었으면 발전기가 폭발했을 수도 있었습니다. 윤 선생 그렇게 안 봤는데 이런 일은 우스우신가 보군요.”
현수는 발전기 담당 김수한 씨의 비난에 고개조차 들기가 힘이 들었다. 발전기가 이상한 소리를 낸지 한참 되었는데도 당직을 서던 현수는 바로 옆에 있으면서도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발전기의 이상을 모르고 있었다. 발전기 한 대가 과부하로 꾸륵거리며 탈탈거리는 등 이상신호를 계속해서 보내고 있었는데도 자신은 전혀 눈치도 못 채고 있었으니, 김수한 씨가 저렇게 화를 내는 것은 당연했다.
“죄송합니다.”
다른 할 말이 없었다. 하마터면 과열로 발전기 한 대만 잃는 것이 아니라 옆에 함께 있던 나머지 발전기도 모두 잃을 번한 일이었다. 발전기가 없으면 이 추운 남극에서 난방도 안 될 것이고 전기와 가스, 물, 모든 것이 엉망이 될 터였다. 그런 중요한 곳이기에 대원들은 일직과 당직, 야간 당직까지 서가며 발전동을 지키는 것이었다.
“죄송하다는 말로 끝날 일이 아닙니다. 정식으로 장 박사님께 사고보고를 하고 적절한 처벌을 받게 할 겁니다.”
차갑게 이어지는 그의 말에 현수는 눈물이 핑 돌았다. 이번 월동대의 제일 나이가 많은 장 박사와 같은 연배인 김수한 씨는 그녀보다 한참 어른이었고 일에 있어서 냉정하고 차갑기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세종기지에 있는 발전기 총 다섯 대가 곧 대원들의 목숨이라 생각하며 자신의 임무에 임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그런 책임감이 존재하기에 월동대원들은 기지 안에서만큼은 평안하고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현수는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힌 눈으로 고개만 숙이고 있다 발전동 입구에서 들려오는 귀에 익은 저음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이 상황에서만큼은 절대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이렇게 초라한 모습을 그에게 보이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의 상황을 그냥 넘길 생각이 없는 듯 김수한 씨와 그녀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휴…. 안 그래도 강 박사라도 부를까 하는 참이었어요.”
“무슨 일입니까?”
김수한 씨의 화난 표정 그대로 현 상황을 월동대 부대장인 강 박사에게 보고하기 시작했고 현수는 그의 얼굴조차 제대로 볼 수 없어 다른 공간을 의미 없이 바라보고 서있었다. 징계를 받아야 한다면 받을 것이고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앞에 이런 식으로 서있고 싶지는 않았다. 의무실에서 그렇게 돌아선 그는 그 후로 그녀를 본체만체했고 어쩌다 복도에서 부딪치기라도 하면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냉기로 한기가 들 정도였다.
현수는 그에게 약혼자 운운하며 거짓말을 한 것을 몇 번이고 후회했다. 아무리 화가 나고 아무리 그에게 상처를 주고 싶었어도 그런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닌데…… 하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졌고 다시 주워 담을 수는 없으니 엎질러진 물을 치우기라도 해야 했다. 그래서 몇 번이고 그에게 약혼자가 있다고 한 것은 거짓이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쉽지가 않았다. 그녀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는 남자에게 무작정 다가가 ‘약혼자가 있단 말은 거짓말이에요.’ 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는가. 게다가 그녀 또한 그에게 화가 나있었다. 사과를 하기 전에 그의 사과를 먼저 받고 싶었다.
멍청이. 약혼자가 있다는 말 한 마디 했다고 그렇게 쉽게 믿어버리고 돌아서다니. 정말 그녀를 좋아하기나 했는지 이젠 의심이 들 지경이었다. 그렇게 단번에 돌아설 수 있는 남자라면 이쪽에서도 미련을 버릴 것이다. 현수는 입술을 꼭 깨물며 그딴 남자 신경도 쓰지 않겠다고 결심했지만 그 결심대로 되지 않는 자신의 마음이 원통할 뿐이었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래요?”
“네. 제가 또 따로 주의를 주죠.”
“장 박사님께 따로 보고 하지 않아도 될까?”
“우선 김 기사님께서 발전기를 정상적으로 고치셨고 윤 선생도 반성을 했을 테니 이쯤에서 넘어가도 될 것 같습니다.”
“강 박사 생각이 정 그렇다면야…..”
그 귀한 발전기를 소홀히 한 그녀가 괘씸해 더 심한 벌을 주지 못해 아쉬워하는 김수한 씨를 향해 강 박사의 상황종료를 알리는 말이 이어졌다.
“아무래도 오늘 하루는 발전기의 이상 유무를 살펴야 할 테니 다른 당직 근무자와 함께 김 기사님이 직접 발전기를 지켜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김수한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그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윤 선생은 나 좀 봅시다.”
그녀를 차갑게 호출한 후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현수는 비참했다.
“죄송해요. 김기사님.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할게요.”
“됐어요. 강 박사도 이만하면 됐다하니 이번 일은 그냥 묻읍시다.”
그래도 진심으로 반성하는 그녀가 기특해 조금 전과는 달리 부드러운 말이 흘러나오는 김수한이었다.
현수는 발전동을 나와 건물 뒤편에 서있는 그에게로 다가갔다. 굳은 표정으로 입술을 꼭 깨문 채 걸어가는 그녀의 걸음에는 이 상황을 얼마나 비참하게 느끼는지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그녀는 그와 약 다섯 걸음 정도를 사이에 두고 멈춰 섰다. 그리고 눈길은 바다를 향한 채 그의 입에서 쏟아질 비난을 기다렸다. 하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그는 조용했다. 현수는 마침내 눈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화난 눈길이 그대로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꼭 사람 신경을 긁어야겠습니까?”
그의 차가운 냉기에 현수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더욱 세게 깨물었다. 나쁜 자식. 나쁜 놈. 누군 좋아서 그런 건 줄 아나? 누군 그러고 싶어 그랬냐고! 누군 당신 신경 긁고 싶은 줄 아냐고!
한동안 그녀를 향한 눈길을 거두고 그가 돌아섰다. 우두커니 선 그녀를 남겨두고 돌아서는 그의 뒷모습에 그녀의 눈에서는 아까부터 참았던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졌다. 처음부터 제깟 놈 생각지도 않았어. 키스 운운하며 다가올 때도 받아줄 생각 따위는 요만큼도 없었어. 누가 저하고 키스하는 것 따위 좋았는지 알아! 그러면서도 그녀의 마음 한 편에서는 그의 미소가 떠올랐고 그의 웃음소리가 그리웠다.
거침없는 걸음으로 목조창고까지 걸어간 태훈은 순간 욕설을 뱉어내며 신경질적으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주먹을 꽉 움켜쥐며 이를 악물었다. 돌아보고 싶지 않았다. 괜히 뒤돌아보고 미련을 두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마음과는 달리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아직도 우두커니 바다를 바라보고 서있는 그녀가 보였다. 왜? 왜 저런 모습으로 쓸쓸하게 서있단 말인가? 저런 뒷모습을 보여야할 사람이 누군데!
태훈은 으득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그녀의 말이 거짓일지도 모른다는 미련이 남아 있었다. 약혼자가 있다고 하기에는 그녀의 모든 행동들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정말 약혼자가 존재한다면 두 가지 중 하나였다. 그녀가 내숭의 극을 달리는 뛰어난 연기력의 소유자이든지, 아니면 그 약혼자라는 개자식이 그녀를 건드리지도 않고 고이 모셔두기만 했든지….
그가 어떻게 생각하든 그녀에게 약혼자가 존재한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도대체가 말이 되지 않았다. 분명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길에서 다른 의미를 보았다. 자신이 착각했다고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 어떤 일에도 명확하게 상황파악을 할 자신이 있었지만 그녀에 대해서만은 아무것도 자신할 수 없었다. 이미 그녀를 이성적인 눈으로만은 볼 수 없게 된 자신의 마음 자체가 문제였으므로.
딩동대.
[통신실 유원호입니다. 기지 내에 강태훈 박사님 계시면 즉시 통신실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비상상황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현수는 들여다보고 있던 책에서 눈길을 돌려 천장에 달린 스피커를 올려다보았다. 비상상황? 무슨 비상상황. 눈 때문인가? 어젯밤 내린 눈으로 기지 주변은 온통 하얀 세상이 되었다. 1월말에 불었던 블리자드와 다르게 어젯밤 내린 눈은 조용히, 모든 사람들이 잠든 사이에 기지 전체를 뒤덮었다. 그녀는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여는 순간 눈앞에 펼쳐진 순백의 세상에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하지만 그 감탄은 얼마 후 삽을 들고 눈을 치우는 대원들과 김치를 묻어둔 장소를 파헤치고 있는 영숙 언니의 모습에서 안타까운 신음소리로 변했다. 기지의 각 동마다 입구의 눈을 쓸어내고 사람이 다니는 동선을 따라 길을 트는 작업은 무척 힘든 노동이었다. 중장비실에 있던 굴삭기까지 동원되었다. 그런데 아침 내내 눈 치우는 작업을 하고 겨우 아침식사를 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또 비상상황이라니….
현수는 보던 책을 덮고 의무실을 나섰다. 무슨 일인지 궁금해 가만히 자리에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의무실을 나와 본관 건물 입구로 가니 영숙 언니가 마침 급히 지나던 승규 씨를 붙잡고 무슨 일인지 묻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중국기지 사람들이 고무보트를 타고 펭귄마을로 가다 통신이 두절되었답니다. 방금 중국기지에서 연락이 왔는데 우리 세종기지 근처에서 통신이 두절되었다고 도움을 요청했어요.”
“그래?”
그 순간 본관동 앞길을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는 강태훈 박사가 보였다.그리고 그 뒤로 몇몇 대원들이 그를 따르고 있었다. 현수는 그를 보며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럼 그가 간단 말인가? 현수는 급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다시 눈바람이라도 불려는 듯 진한 회색의 빛을 띠고 있었다. 게다가 바람의 세기 또한 심상치 않았다. 중국대원들이 탄 보트가 사고가 났다면 우리대원들이 탄 보트가 무사할 것이라는 보장이 어디 있는가? 위험했다. 이렇듯 위험한 하늘과 점점 그 세기가 강해지는 바람에 바다로 나가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었다.
현수는 급히 본관 철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뒤로 영숙이 따르고 있었다.
현수와 영숙은 연구동에 있는 통신실로 재빨리 들어섰다. 통신 무전기를 잡고 씨름하고 있는 강태훈 박사가 보였다.
그의 영어로 된 질문에 이어 얼마간의 잡음이 들렸고 곧이어 영어로 답변이 왔다.
[치익….세종기지와 펭귄마을의 중간쯤 위치다]
[총 여섯 명. 마지막 통신에서 보트의 엔진이 이상이 있다는 보고를 들었다.]
갑자기 통신실 안은 암울한 침묵이 흘렀다. 보트의 엔진에 이상이 생긴 상태에서 바람이 이런 세기로 분다면 어디로 떠내려갔을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정확한 판단을 요하는 시점이었다. 잘못하다가는 이미 사고를 당했을 수도 있는 중국대원들과 함께 그들을 구하러 떠나는 대원들까지 위험할 수도 있었다.
[치익….우리 기지에서 구조보트가 이미 떠났다. 도와 달라.]
마지막 말은 애원처럼 들렸다. 바람만 불지 않는다면 그들끼리도 얼마든지 구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보트가 어디 있는지조차 분명하지 않은 상태라면 한명이라도 더 구조에 나서줘야 했다.
“강 박사 생각은 어떤가?”
그때까지 침묵을 지키던 장 박사가 강태훈 박사를 바라보았다. 얼마간 생각에 잠겨있던 태훈이 고개를 들고 주위를 돌아보았다. 통신실에 모인 모든 대원들의 표정은 긴장으로 굳어있었다. 그의 눈길이 한순간 그녀에게 머물렀다.
‘안 돼요. 제발.’
그녀의 간절한 눈빛이 그를 향해 애원하고 있었지만 그는 결국 그녀의 바람과는 다른 대답을 했다.
“……가겠습니다.”
현수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안 돼….
“신중하게 생각해.. 이 상태라면 우리까지 위험할 수 있어.”
“그렇게 위험할 정도는 아닙니다. 조심만 한다면 가능합니다. 조금 더 시간이 지체되면 아마도 그들은 살아 돌아오기 힘들 것입니다. 예전에 진 빚을 갚을 기횝니다.”
장 박사도 알고 있었다. 몇 해 전 우리 기지의 대원들이 바다에서 길을 잃었을 때도 중국대원들이 목숨을 걸고 도와주었던 일을 잊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 해도 장 박사는 선뜻 대원들에게 바다로 나가라고 할 수 없었다. 월동대 책임자로서 대원들에게 목숨을 걸라고 강요를 할 수는 없었다.
“지원자를 받겠습니다. 보트의 엔진이 문제라면 그들이 탄 보트는 버려야합니다. 그럼 그쪽 대원들을 태워야하니 우리 대원중에서는 저를 포함한 네 명만 나가겠습니다.”
장 박사가 그 어떤 것도 명령할 수 없는 입장을 이해했기에 태훈은 지원을 받겠다고 선언했다. 시간이 촉박했다. 자신 혼자만으로는 해낼 수 없었다.
“지원합니다.”
그때 한쪽에 서 있던 이승규가 손을 번쩍 들었다. 태훈은 승규를 향해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지원하겠습니다.”
그리고 기계설비 담당 허기태가 지원했지만 태훈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발이 완쾌되지 않은 걸로 아는데?”
“다 나았습니다.”
“의욕만으로 지원할 일이 아닙니다. 지원은 고맙지만 허기태 씨는 안 됩니다.”
태훈은 단호한 거절에 허기태의 표정은 굳어졌다.
“지원하겠습니다.”
중장비 담당 전남일과 전기설비 김승택이 동시에 지원했다. 이로써 순식간에 네 명의 인원이 꾸려졌다.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조심해.”
태훈은 지원자들을 이끌고 통신실을 벗어나기 직전 얼어붙은 표정의 현수를 보았다. 하지만 스치듯 본 그녀의 표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현수는 멀어지는 그들을 멍하니 바라보며 빠르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두려웠다. 이렇듯 두려웠던 적이 없었다. 눈앞이 깜깜했다. 그가…..그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그녀는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리가 없어. 그는 유능한 사람이야. 해상안전책임자잖아. 해병대까지 나왔다잖아. 그러니 잘못될 리 없어.그래. 그럴 리 없어. 하지만…..하지만…..
얼마 후 무전기를 통해 거친 바람소리가 묻은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킹세종. 킹세종. 강태훈. 지금 출발한다. 오버]
“강태훈.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만약 위험하다는 판단이 들면 즉시 돌아와야 해.”
[알겠습니다. 오버]
그리고 귀에 거슬리는 날카로운 잡음소리와 함께 그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현수는 순간 무거운 침묵만이 흐르는 통신실에서 빠져나와 부두가 있는 곳으로 힘껏 뛰기 시작했다. 헉헉 거리며 차가운 칼바람을 맞으며 뛰어갔지만 이미 그는 떠나고 없었다. 저 멀리 고무보트의 작은 형상만이 희미하게 보일 뿐이었다.
현수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제발, 제발….”
그저 그가 무사하기만을 바랐다. 그를 미워하지도 않을 테고 그의 차가움도 얼마든지 견딜 수 있었다. 그가 무사히 돌아오기만 한다면 그의 냉대도 상관없었고, 그가 원하는 대로 그의 눈에 띄지 않은 채 남극의 나머지 생활도 죽은 듯 지낼 수 있었다. 그가 무사히 돌아오기만 한다면.
현수는 누군가 권해준 의자에 앉아 초조한 심정으로 그들에게서 연락이 오기를 기다렸다. 조금 전 중국보트를 찾고 있다는 통신이 온 이후 그들은 연락이 없었다. 유원호 통신원이 장 박사의 명령에 몇 번이나 그를 호출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침묵뿐이었다. 피가 바짝바짝 말랐다. 아무리 침을 발라도 입술이 금방 말라버리는 탓에 그녀는 연신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고 있었다.
“자. 마셔.”
현수는 영숙이 내미는 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물이야. 좀 마셔.”
“고마워요.”
현수는 영숙이 내미는 컵을 받아들며 미소를 짓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영숙의 표정도 어두웠다. 아니 통신실에 모여 바다로 나간 대원들의 연락을 기다리는 모든 사람들의 표정이 어두웠다. 모두들 얼굴이 굳은 채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특히 장 박사는 그 정도가 심했다. 깊은 걱정을 담은 그의 얼굴은 전에 없이 초조함이 가득 묻어났다. 이번 월동대의 책임자로서 그의 고뇌의 깊이가 어떨지 조금은 짐작이 되었다.
현수는 자신의 무릎 위에 놓인 컵을 두 손으로 꼭 움켜쥐었다. 그런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아주는 또 다른 손길에 그녀는 눈길을 돌렸다.
“괜찮을 거야. 그를 믿어.”
“네…”
영숙이 왜 하필 그녀에게 그를 믿으라고 하는 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녀의 말이 현수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다. 무엇이든 명쾌한 답변에, 거침없는 성격의 영숙이 그를 믿으라고 하니 왠지 위로가 되었다. 그래. 그를 제일 잘 아는 사람이 그를 믿으라고 하잖아. 그는 무사할 거야. 무사해야 해.
1분이 100년 같았다. 똑딱, 똑딱, 흘러가는 초침 소리마저 너무나 크게 들려 마치 이 세상에 똑딱이는 소리만이 가득 찬 착각이 들 정도였다. 숨조차 크게 쉬지 못하는 영원처럼 긴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치익.
갑자기 들려오는 통신기의 잡음소리에 통신실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긴장하기 시작했다.
“조디악, 조디악, 킹세종, 여기는 기지다. 응답하라. 들리면 응답하라!”
유원호 통신원이 황급히 무전기를 쥐고 소리쳐 불렀지만 더이상의 응답은 없었다.
“여기는 세종기지, 강 박사님. 들립니까?”
침묵. 여전히 돌아오는 것은 침묵뿐이었다. 피가 마를 것 같았다. 현수는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을 맞잡은 채 비틀고 있었다. 알 수 없는 두려움으로 몸은 마비라도 된 듯 손끝도 움직일 수 없었다.
‘대답해요. 제발. 대답해줘요. 제발…’
또다시 긴장된 침묵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조조한 표정의 장 박사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그들을 보낸 것을 후회라도 하듯 움직임이 없었다.
“젠장. 바람이 더 세지고 있어. 이러다간….”
발전담당 김수한 씨의 나지막한 읊조림이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치……치이….킹…..여기….기지….]갑자기 통신실의 적막을 가르고 들려오는 무전기의 잡음소리에 통신실 안의 모든 대원들의 표정이 되살아났다.
“여기는 기지다. 강 박사. 강 박사! 들리나? 강태훈!”
무전기 앞을 지키고 있던 장 박사가 순식간에 무전기를 잡고 강 박사를 소리쳐 부르고 있었다.
[치이…..무사….무사하다….돌….함께…..치이…이상.]무슨 말인지 알 수 없이 끊어지는 말이었지만 현수는 그의 목소리만으로도 기쁨에 들떴다. 단지 그의 목소리만으로도 그녀의 죽었던 숨결이 살아나는 것 같았다. 그녀는 무전기에서 들려오는, 이어지지 않는 단어를 조합하지도 못한 채 그저 그의 목소리맘으로 짐작할 뿐이었다. 그가 무사함을, 그가 돌아올 것을.
“강태훈. 들리지 않는다. 무사하단 말인가? 대답만 하라. 무사한가?”
[치이…..무사….다….모두 무…..다.이상.] 여전히 뚝, 뚝, 끊어지는 통신이었지만 이번에는 무슨 뜻인지 모두들 알아들었다. 현수도 그의 말뜻을 정확히 알아들었다. 모두들 무사했다. 그들이 무사했다. 그녀는 심장근처에 손을 대고 심장이 여전히 뛰고 있음을 확인했다. 마치 지난 몇 시간동안 자신의 심장이 뛰고 있는지조차 잊고 있었던듯.
그리고 몇 번의 통신이 더 오가고 뚝뚝 끊어지는 대화에서 중국대원들도 무사하고 우리 대원들도 모두가 무사하며 현재 돌아오고 있다는 내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마지막 통신을 끝내고 장 박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영숙 씨는 따뜻한 국물 좀 준비하고 윤 선생은 혹시 의사가 필요한 대원이 있을 수 있으니 준비하고 있어요. 그리고 김수한 씨는 발전동에 이상이 없는지 살피도록 해요. 모두들 각자 맡은 임무에 다시 돌아갑시다.”
그의 명령에 대원들은 모두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영숙은 추운 바다에서 고생했을 대원들을 위한 먹을거리를 준비하기 위해 식당으로 돌아갔고 현수는 혹시 몰라 의무실에 들러 몇가지 구급품들을 준비했다. 그리고 급히 부두를 향해 뛰어갔다. 두 눈으로 확인해야 했다. 그가 무사함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얼마 후 기지 앞바다 저 멀리서 보트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부두에 모인 대원들 모두가 환호성을 질렀다. 지난 시간의 긴장과 두려움을 모두 날릴 만큼 그들의 등장은 반가웠다. 순식간에 부두에 도착한 보트에서 대원들이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맨 마지막으로 내리는 그가 보였다. 대원들에게 둘러싸여 누군가 내미는 담요로 몸을 감싸고 장 박사의 대견하다는 손길을 받는 그가 보였다. 현수는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누구 한 사람 다친 곳 없이 무사히 돌아왔다. 그것만으로도 현수는 자신의 목 언저리가 꽉 막혔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뿌옇게 흐려지는 그의 모습에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현수는 눈에 있는 힘껏 힘을 주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툭 하고 떨어진 눈물 한 방울이 두 방울이 되고 어느덧 쉴 새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이제는 더 이상 감당하기조차 힘이 들었다.
그녀는 손을 들어 올려 눈물에 젖은 볼을 쓰윽 훔쳐내고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순간. 깊고 짙은 눈빛과 마주쳤다. 차가운 바람에 충혈 된 두 눈에 그녀를 가득 담고, 그가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매서운 바람이 부는 부두 위에서 대원들에 둘러싸인 그의 깊은 눈동자와 그녀의 물기 가득한 눈동자가 만나 얽히고 있었다.
태훈은 그녀의 젖은 눈을 보며 확신했다. 아니 확신하지 않아도 좋았다. 약혼자가 있든 없든 상관없었다. 자신의 눈에 담긴 의미와 똑같은 의미를 지닌 그녀의 눈빛에서 그는 확신했다. 그녀 또한 그의 마음과 다름없음을.
갑자기 몸을 돌려 급한 걸음으로 멀어지는 그녀가 보였지만 태훈은 지금은 따라가지 않았다. 하지만 곧 붙잡을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기필코 그녀와 담판을 짓고 말 것이다.
현수는 정리된 의무실을 다시 한 번 휙 둘러본 후 파카를 걸쳤다. 어제 중국대원들이 탄 보트가 무사히 구조되면서 중국기지에서 진심어린 감사를 전해왔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오던 중국기지와 더욱더 돈독한 우애를 다졌다.
엔진이 고장 난 보트 위에서 구조를 기다리던 중국대원들은 제일 처음 자신들을 발견한 우리 대원들에 의해 심리적 안정을 찾았고 곧바로 나타난 중국 구조보트에 의해 다시 자신들의 기지로 돌아갔다. 어제 하루는 심신이 피곤한 하루였다. 무사히 돌아온 대원들이 혹시 별 이상이 없는지 살피느라 피곤했고 그가 나간 몇 시간을 마음 졸이며 보내느라 힘든 시간이었다.
현수는 의무실의 불을 끄고 밖으로 나왔다. 문을 잠그고 본관동을 나서기 위해 입구로 걸어가니 인기척 하나 없이 적막했다. 어제 바다로 나갔던 대원들은 무사히 살아왔다는 안도감에, 그리고 남아있던 대원들은 바다로 나간 대원들을 기다리며 애태우며 긴장했던 심신을 안정시키라는 의미로 오늘은 비공식적인 휴무였다. 월동대 대장인 장 박사는 오늘 하루 편안하게 쉬는 날로 정하자며 대원들에게 휴식을 권했다. 그래서인지 저녁시간이 훌쩍 지난 본관건물 안은 사람 그림자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현수는 파카 옷깃을 여미고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본관건물 문을 살짝 열었다. 그때였다. 문을 조금만 열어 자신의 몸 하나만 슬쩍 빠져나가려했던 현수는 순간 문이 벌컥 열리며 차가운 바람이 불어 닥치자 놀란 숨을 들이키며 고개를 들었다.
아!
차갑고 매서운 바람을 몰고 들이닥친 그가 건물로 들어온 즉시 문을 닫고 그녀를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 다짜고짜 그녀의 팔을 잡더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무슨…..?”
현수는 그가 왜 이러는지 묻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를 보기만 해도 미친 듯이 뛰는 심장병이 또다시 도졌고 지금처럼 그의 예상하지 못했던 행동에 희망이라는 작은 그림자가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의무실을 지나, 휴게실을 지나 그가 그녀를 밀어 넣은 곳은 아무도 없는 어두운 식당이었다. 얼떨결에 그에게 팔을 잡혀 식당 안으로 들어온 현수는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도록 한동한 미동도 없이 그렇게 서 있었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그녀와 약간 떨어진 곳에서 말없이 서있던 그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약혼자하고 결혼할 거요?”
현수는 순간 피식하고 웃음이 새어나올 것 같았다. 말이 안되는 질문이었다. 그럼 결혼하려고 약혼을 하는 것이지 결혼도 안 할 거면 약혼을 뭐 하러 하겠는가 말이다. 하지만 그가 질문하는 의도를 그녀는 알 것 같았다. 그는 그녀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는 것이었다. 약혼자가 있다는 것이 거짓이라면 사실을 말할 기회, 정말 약혼자가 있다면 약혼자가 아닌 그를 선택할 기회를 주는 것이었다. 그는 그 한 마디 질문에 그녀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고 있었다.
“사과부터 해요.”
그의 질문과는 전혀 연관이 없어 보이는 엉뚱한 대답을 하는 그녀의 말에 그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무슨 사과?”
“당신이 먼저 시작했잖아요. 날 아무 남자하고나 시시덕거리며 유혹하는 그런 여자로 말하며 날 먼저 화나게 한 건 당신이었다고요.”
사람이 들 때와 날 때가 다르다더니 그녀가 바로 그 경우였다. 어제 그가 바다로 나가있을 때는 분명 그가 무사히 돌아만 온다면 사과도 필요 없었고 그가 바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하겠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가 온전히 자신 앞에 서있는 지금 그녀는 그가 원하는 답을 쉽게 주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말에 그가 이제야 무슨 뜻인지 알겠다는 듯 슬쩍 미소를 띠었다. 하지막 썩 기분 좋은 미소는 아니었다.
“그게 지금 당신 약혼자 문제보다 더 중요하다는 거요?”
그의 어이없어 하는 말투에 현수는 발끈했다. 그럼 그녀의 거짓말만 중요하고 무고한 그녀를 비난한 그의 태도는 중요하지 않단 말인가?
“똑같이 중요해요. 하지만 당신 사과가 먼저라고요.”
현수는 턱을 치켜들며 그를 향해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태훈은 속으로 미소를 머금었다. 그녀는 사과를 먼저 바라지만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었다. 그가 약혼자 운운하는데도 전혀 죄책감이나 갈등의 흔적도 없이 저렇듯 사과를 하라고 떼를 쓰는 것은 분명 약혼자 따위는 있지도 않다는 말과 같았다. 태훈은 이제 그녀의 대답을 듣지 않아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에게는 약혼자 같은 것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글쎄. 난 별로 사과하고 싶지 않은데…..”
현수는 갑자기 느긋해진 태도를 보이는 그를 바라보며 무언가 상황이 잘못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그녀의 대답을 들으려고 애를 태워야할 사람은 그인데 지금 상황은 그녀가 오히려 그의 사과를 받으려 애태우는 꼴이었다.
뭐가 잘못된 거지? 아, 정말. 저 남자가 머리가 너무 좋은 거야?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둔한거야?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노려보았다. 상황이 어찌되든 상관없었다. 그녀는 지금 현재 그의 사과를 꼭 받고 싶었다.
“난 사과 받기 전에는 당신이 원하는 그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어요. 그리고 당신이 원하는 그 어떤 것도!”
태훈은 예상외로 고집스럽게 나오는 현수를 바라보며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대답은 더 이상 필요치 않았지만 그가 원하는 어떤 것도 그녀가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그건 좀 곤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당장 그가 그녀에게 원하는 것은 대륙답사를 다녀온 후로 미뤄두었던 키스를 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그녀의 협조 하에 이루어져야 했다. 그리고 사실 그녀의 말대로 그가 잘못한 부분이기도 했다. 단지 같은 월동대 대원과 아니, 환자와 의사의 관계에서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었던 것뿐인데 자신이 질투에 눈이 멀어 그녀에게 심하게 대했었다. 물론 그 상대가 그녀에게 다른 마음을 가졌음이 분명한 허기태였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의 반응은 그 정도가 심했었다. 그녀의 말도 제대로 들어보지 않고 다짜고짜 화부터 냈으니 그가 사과를 하는 것은 당연하리라.
“좋아. 당신을 그렇게 말한 건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현수는 그의 사과에 굳었던 얼굴을 폈다. 그리고 미소 비슷한 것을 지으려다 문득 그가 자신에게 반말을 한 것을 깨닫고 그를 흘겨 보았다. 밉지 않은 시선으로.
“왜 반말해요?”
그녀의 말에 그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럼 내가 나이도 많고 더구나 애인 사인데 존대하나?”
뭐! 나 참. 하여튼 뻔뻔스럽기는……그런데 가만 내가 그에게 약혼자는 거짓이었다고 대답했던가?
“누가, 누가 당신이랑 사귄데요?”
전혀 따지는 말투가 아닌 그녀의 질문에 그가 성큼 그녀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그럼 나하고 안 사귄다고?”
“아니, 그게 그렇다기보다는….”
그가 다시 한 걸음 다가섰다. 하지만 현수는 움직이지 않았다 . 이번에는 뒷걸음질 치고 싶지 않았다. 그가 다가와도 뒷걸음질 치지 않고 그 자리에 있어줌으로써 그가 원하는 대답을 주고 싶었다. 순식간에 현수의 코앞으로 다가선 그가 그녀의 얼굴을 감싸 올렸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 가까이 그의 얼굴이 내려왔다.
“그래서 나하고 사귄다고?”
그녀의 입술에 거의 겹치듯 다가온 그의 입술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지만 그녀의 떨리는 심장의 두근거림에 그에게 대답할 여력이 없었다. 그의 숨결이 그녀의 입술에 고스란히 느껴지는 지금 상황에 그의 질문을 이해하고 답을 할 여유가 없었다.
“또다시 약혼자가 있다느니 그런 거짓말 하면 그땐 정말 혼날 줄 알아.”
그리고 그녀의 입술에 겹쳐진 그의 입술은 지금껏 참아왔던 열정을 그대로 풀어내기 시작했다. 그녀의 얼굴을 부여잡고 입술을 힘껏 빨아들이다 자신의 혀를 깊숙이 집어넣어 혀를 감아올렸다. 삼켜도, 삼켜도 성에 차지 않았다. 부드러운 그녀의 입속을 샅샅이 훑어내려도 그녀를 향한 갈증은 더욱 심해졌다. 그의 손이 그녀의 목선을 미끄러지듯 쓰다듬으며 내려와 그녀의 등 뒤로 돌아가서 그녀를 힘껏 끌어당겼다. 하지만 그조차도 만족스럽지 않았다. 두꺼운 파카에 가로막혀 그녀의 따뜻함조차 제대로 느낄 수가 없었다.
“젠장.”
태훈은 욕설을 내뱉으며 그녀의 허리를 붙잡고 성큼 들어 올려 가까운 식탁 위에 앉혔다. 그리고 다시 급한 동작으로 재빨리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부딪쳤다. 어느새 그의 손은 자신의 파카를 벗어던지고 그녀의 파카를 벗기고 있었다. 한쪽 팔이 그대로 매달린 채로 남겨두고 그의 성급한 손길은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하아.”
목선을 핥고 있는 입술의 감촉에 현수는 그의 어깨를 힘껏 쥐었다. 벌어진 다리 사이로 느껴지는 뜨거운 몸의 열기와, 목을 지나 쇄골을 더듬고 있는 입술의 뜨거움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다시 입술로 돌아온 그의 입술에 똑같은 정열로 키스를 되돌리던 현수는 태훈의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순간 그의 손이 그녀의 티셔츠 아래로 슬그머니 침범하기 시작했다. 그 따뜻한 감촉에 현수의 속은 다시 뜨거운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고 그의 손이 맨살에 닿는 그 짜릿함에 저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고 있었다.
“아….”
현수의 젖혀진 얼굴의 턱 선을 훑어 내리던 태훈의 입술은 그녀의 목선을 다시 부드럽게 쓸고 있었고 다른 한 손은 그녀의 등을 받친 채 서서히 그녀를 식탁 위로 눕혔다. 곧장 티셔츠를 밀어올리고 그녀의 맨가슴을 움켜쥔 그는 눕혀진 여자의 상체로 입술을 가져갔다. 그녀의 드러난 목선을 훑어 내리고 드러난 젖가슴의 깊은 계곡에 입술을 묻었다.
“훅.”
그 깊은 살냄새에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머릿속이 텅 빈듯 몽롱해지고 있었다. 그의 입술은 한쪽 가슴을 머금고 다른 손은 그녀의 가슴을 부드럽게 쓰다듬고 있었다. 그녀의 허벅지를 쓰다듬으며 그녀의 깊은 곳을 향해 전진했다.
현수는 그의 손과 입술이 자신의 가슴을 애무하는 행위에 어쩔 줄을 몰라 신음만 뱉어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그의 다른 손이 그녀의 은밀한 곳에 다다르자 놀란 숨을 들이켰다.
“안 돼.”
그녀의 손이 그의 팔을 꽉 움켜쥐자 그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활활 타오르는 불꽃이 그녀를 삼키기라도 할듯 쳐다보고 있었다.
“안 돼요. 여긴….”
그녀의 말이 옳았다. 여기서는 더 이상의 진도를 나갈 수가 없었다. 빌어먹게도 남극의 세종기지 어느 곳에서도 그들이 마음 놓구 사랑을 나눌 만한 장소는 없었다. 진정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태훈은 그녀의 목에 입술을 묻고 거친 숨을 들이켰다. 그녀를 가지고 싶었다. 그녀의 몸에 자신의 몸을 묻는 상상만으로도 몸의 일부는 격렬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더이상 강요하지 않았다. 누군가 들어올지도 모르는 식당따위에서 그녀를 급하게 가지고 싶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그녀를 가질 수는 없었다.
태훈은 몸을 일으켜 그녀의 티셔츠를 내려주었다. 누웠던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는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그는 다시 그녀의 얼굴을 부여잡고 진한 키스를 퍼부었다.
“이제 우리 연애하는 거야.”
그의 웃음기 섞인 결론에 현수는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를 향한 당부는 잊지 않았다.
“비밀연애요.”
“뭐?”
“우리 연애는 비밀연애라고요.”
태훈은 그녀가 굳이 비밀연애를 고집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우선은 그녀가 원하는대로 해주기로 했다. 이제 겨우 그녀를 마음껏 안고 키스할 권리가 생겼는데 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어떠랴하는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