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me healer's hidden ending strategy RAW novel - Chapter 200
199화. 취하고 싶은 날
에피소드 25.
띠링띠링 연신 울리는 알림음이 요란스럽다. 재난안전문자의 유독 커다란 소리도 가끔 섞이고, 일부러 소리로 돌려놓은 탓에 수시로 오는 메신저 알림도 끊이질 않는다. 한숨이 팍팍 나왔다.
‘뭔 날씨가 이따위야….’
암막 커튼을 살짝 들추며 밖을 내다봤다. 아침부터 심상치 않게 하늘이 시커멓더니 기어이 점심을 지나서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해서는 오후 5시인 지금은 눈앞이 새하얗게 변할 정도로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눈 내리는 날을 싫어하는 터라 진눈깨비만 내려도 어지간하면 방에서 안 나가는데, 하필 오늘은 양신아와 저녁 약속이 있는 날이다.
수상쩍은 고송찬도 떠봐야 하는 날이라 마음을 단단히 먹어도 모자랄 판국에 사람 심란하게만 만드는 눈이 그칠 기미도 안 보이니까 괜히 야속하다.
‘아, 진짜 나가기 싫다.’
오늘 저녁을 위해 일찌감치 퇴근하고 숙소로 돌아와서 나갈 채비를 끝냈는데 도무지 발걸음이 떨어지지를 않는다.
다른 날로 다시 약속을 잡기엔 서로가 너무 바쁘다는 것도 알고, 창립기념 행사가 있기 전에 고송찬 일을 해치우는 게 좋다는 것도 아는데 원래 아는 것과 원하는 건 다른 법 아니던가.
미쳐버린 기상 악화로 슬슬 나서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꾸물꾸물 망설이는데, 메신저 확인을 하지 않는 걸 깨달은 양신아가 전화를 걸어왔다.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기본 벨소리에 반사적으로 통화 버튼을 누르자 양신아의 쾌활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부장님~! 오늘 저녁 먹기로 한 거 안 잊으셨죠?
“예, 물론입니다. 이제 나서려던 참입니다.”
-다행이에요. 날이 너무 궂어서 약속을 바꿔야 하는지 한참 고민했거든요. 송찬 씨도 슬슬 나선다고 하더라고요. 이 날씨에 무려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 가며 오겠다던데, 부장님은 어떤 걸로 와요? 송찬 씨처럼 대중교통?
이제 곧 퇴근하는 직장인들이 우르르 나오는 데다가 이리 악천후면 대중교통에 사람이 미어터진다. 도로 상황도 안 좋기는 매한가지여서 굼벵이 기어가는 속도로 주행하겠지만, 우산과 함께 사람들과 부대끼는 상황은 피하고 싶어서 자율주행 택시를 부를 생각이었다.
오늘이야 날씨 때문에 이런저런 이유를 붙이는 거지, 애초에 S급 감응자들은 언론 노출을 최소화해도 워낙 여기저기 얼굴이 많이 팔려서 대중교통을 포기한 지 오래다.
“아닙니다. 전 택시를 탈 생각입니다. 양신아 씨는 어떻게 오십니까?”
-저야 자차죠~! 라고 대답하고 싶지만 이미 식당이에요. 주인아저씨랑 아는 사이거든요. 이따 먹을 것도 미리 보고, 날이 이래 놓으니까 손님이 없어서 적적하시다길래 말동무 해드리고 있었죠.
제가 이런 데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지 않냐며 양신아가 너스레를 떨었다.
그야 어딜 가나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하는 사람이니까 누군가의 말벗이 되어주는 건 익숙한 일인데, 굳이 식당에 일찍 찾아갈 필요까지는 없지 않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으나 입으로는 ‘그렇습니까’하고 담담하게 대꾸해줬다.
-아 참, 이 얘기를 하려고 했던 건 아니고, 뭐 좀 물어보려고 전화했어요. 부장님 혹시 식품군에서 알레르기 있는 거 있어요? 메뉴 예약하기 전에 물어봤어야 했는데 내가 정신이 없었지 뭐예요.
“없습니다. 다 잘 먹습니다.”
-아하하, 다행이에요! 송찬 씨도 먹는 건 다 괜찮다고 그래서 한시름 놓았다니까요. 여하간 지금 출발하면 언제 도착해요?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하려나?
“그건 도로 사정에 따라 다르겠지만, 체증이 심하지 않다면 20분 정도 일찍 도착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대답하면서 사적으로 사용하는 휴대폰으로 택시를 불렀다. 제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차량으로 불렀더니 3분 만에 도착한다고 떠서 패딩 지퍼를 올리고, 우산을 쥔 채로 운동화에 발을 쑤셔 넣었다.
-오, 그럼 부장님도 아저씨 특제 웰컴 드링크 한 잔 마실 수 있겠어요. 송찬 씨는 아슬아슬하게 도착할 거 같다고 했거든요.
“웰컴 드링크라면?”
-아저씨가 칵테일을 정말 기가 막히게 만드시거든요. 논알콜도 엄청 맛있게 만들고요. 우리 부장님은 미성년자니까 논알콜로 제가 부탁해 놓을게요. 식전주가 입맛 돋우는 데에 최고잖아요? 사양하지 말고 쭉쭉 마셔주세요, 알았죠?
“주신다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좋은 자세에요! 그럼 기다리고 있을게요~ 조금 이따가 봐요!
평소에도 굉장한 하이텐션인 양신아지만 오늘따라 좀 더 들뜬 느낌이다. 내가 인사를 하기도 전에 뚝 끊겨버린 통화에 휴대폰을 주머니에 밀어 넣으며 아래층으로 날 듯이 달렸다.
날이 궂어서 그런지 로비에 옹기종기 모여서 수다를 떨고 있던 감응자들이 어디 나가냐며 놀라길래 대충 인사만 하고 문을 열었는데, 그 짧은 새에 눈발이 휘몰아쳐서 아우성이 쏟아졌다.
미안하다고 소리 한 번 쳐주고 재빨리 밖으로 나왔는데, 진짜 과장 하나도 안 하고 눈앞이 하얬다. 내 방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많이 내리는 눈에 약속을 취소하고 싶어졌지만, 택시가 도착했다는 알람이 들렸기에 눈 딱 감고 뛰었다. 그리고 전광판이 밝게 빛나는 택시에 간신히 탑승하고는 한숨 돌렸다.
‘어우, 이거 잠깐 뛰었다고 옷이 난리가 났네.’
목적지를 향해 출발한다는 낭랑한 안내음성을 흘려들으며 패딩에 묻은 물기를 닦아내고, 축축하게 젖은 바짓단을 꾹꾹 눌러 짰다.
눈바람을 직통으로 맞아서 얼얼한 느낌이 드는 귀도 녹이고, 감각이 없는 손도 히터를 쐬며 한참 녹이고 있으려니까 노곤해졌다.
그간 쌓인 피로가 밀려오면서 무거워지는 눈을 끔뻑거리다가 자동차로 꽉 막혀서 느릿느릿 주행하는 차 상태를 보고는 그냥 잠을 청하기로 했다.
약속은 7시이고, 이 정도의 속도로 계속 간다고 해도 지각은 안 하기에 마음 편히 정신을 놓았다.
* * *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결제는 등록하신 결제 수단인 신용카드로 진행됩니다.
또랑또랑한 안내음성에 번쩍 눈을 떴다. 반사적으로 주변을 살피고, 시계를 확인했다. 6시 30분. 예상보다 빠르게 도착해서 조금 놀랐지만, 창밖의 눈바람이 약간 줄어든 걸 보니까 이해가 됐다.
자동으로 결제가 끝나고 문이 열리자마자 양신아가 상세하게 알려줬던 식당으로 뛰어 들어갔다. 식당 주소를 찍기는 했지만, 자율주행 택시는 가장 가까운 대로변에 내려주는 게 기본이라 다소 골목에 있는 식당까지는 거리가 좀 있었다.
눈이 줄었지만 여전히 바람은 강해서 이번에도 물에 쫄딱 젖은 생쥐 마냥 축축해진 바지를 이끌고 문을 열자 식당 주인보다도 양신아가 먼저 나를 반겨줬다.
“어서 와요, 부장님! 세상에. 눈발이 좀 줄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많이 오기는 하나 봐요. 부장님 완전 젖었네요. 이러다 감기 걸리겠다, 어서 안쪽으로 가요.”
살짝 어두운 조명 아래서 반짝반짝 눈을 빛낸 양신아가 안쪽엔 난로가 있어서 따뜻하다며 나를 이끌었다.
손님이 없다던 양신아의 말마따나 카운터가 있는 테이블에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고, 안쪽에 자리 잡은 몇몇 개의 방도 하나같이 조용했다. 하긴 이런 날씨엔 보통 외출을 자제하니까 이게 당연한 걸지도 모르겠다.
“자자, 내가 예약한 방은 여기에요, 버드나무 방.”
양신아가 ‘버들’이라는 명패가 걸린 문을 활짝 열면서 활기차게 웃었다. 그러면서 주인아저씨가 식물을 좋아해서 모든 방에 식물 이름이 붙어 있다는 말을 덧붙인 양신아는 나를 먼저 안으로 들여보냈다.
내가 방 한쪽 구석에 있는 옷걸이에 외투를 걸고, 우산꽂이에 우산을 넣어두는 동안 문 바깥쪽을 기웃거리던 양신아가 아저씨가 어디 갔는지 안 보인다며 의아하게 중얼거렸다.
곧 7시니까 음식 준비를 하고 있겠거니 생각하며 탁자를 훑었다. 원형 탁자 앞에는 딱 세 개 의자가 있고, 각자의 자리에 똑같은 세팅이 되어 있었다.
예의 차리는 자리도 아니고 딱히 상석 구분을 할 필요도 없어서 핸드백이 놓인 자리를 피해 아무 자리에나 앉으려는데 문을 닫고 들어온 양신아가 기쁜 얼굴로 손뼉을 짝 맞부딪치며 하는 말에 멈칫했다.
“부장님 왔다고 내가 뛰쳐나간 사이에 웰컴 드링크를 가져다 두셨네요!”
드링크가 어디에 있다는 거지? 어리둥절하게 테이블을 다시 훑다가 물병처럼 보이는 게 두 자리에만 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전혀 칵테일이 담겨 있을 비주얼이 아니라 무심코 넘겨버렸나. 조금 떨떠름하게 물병을 가리키며 내가 물었다.
“이거 말입니까?”
“네, 그거요. 병은 그래도 맛은 진짜 좋아요! 기분 낼 겸 잔에 따라서 마시면 되는데….”
말끝을 흐리며 두리번거린 양신아가 스르륵 미끄러지듯이 내 쪽으로 다가오더니 병을 낚아챘다. 그리곤 제법 멋스러운 크리스털 잔에 음료를 따르며 키득키득 웃었다.
“오늘 저녁은 제가 대접하는 거기도 하고, 제가 초대한 거나 마찬가지니까 호스트로서 한 잔 따라드릴게요.”
술은 아니지만 자작하면 운이 안 좋다는 말을 종알거리며 양신아가 잔을 꽉꽉 채워서 내게 넘겨줬다. 그런 게 어딨냐며 양신아의 농담에 웃음으로 대꾸하고 잔을 감사히 받았다.
투명한 연둣빛의 음료는 밑바닥에 동글동글한 알갱이가 약간 깔려 있었고, 달착지근한 포도 향이 물씬 풍겼다.
잔뜩 기대 어린 양신아의 눈동자가 부담스러워서 그걸 피해 살짝 몸을 돌려 한 모금 마셨다.
‘오, 괜찮네.’
향이 달아서 맛도 달 줄 알았는데 그렇지만도 않았다. 적당히 달지 않은 디저트를 최고로 치는 한국인 입맛에 딱 맞는 디저트 음료 같은 느낌인데 마음에 들었다. 칵테일이었다면 도수 신경도 안 쓰고 마시다가 골로 갔을지도 모르겠다.
한 모금 더 마시고 잔을 내려놓자 양신아는 식당 주인도 아니면서 자기가 더 뿌듯한 얼굴로 내게 말을 붙였다.
“맛있죠? 내가 여기 아저씨랑 오래 알고 지낸 것도 있지만, 처음 아저씨가 만들어준 음료수 마시고 반했다니까요?”
“네, 입맛에 맞습니다.”
“아하하, 음료수도 그렇지만 요리도 엄청 맛있으니까 기대해요!”
핸드백이 놓인 자리에 나풀나풀 걸어가서 앉은 양신아가 발갛게 달아오른 볼을 몇 번 문지르곤 이내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냈다.
작은 가방에 어떻게 들어갔는지 도무지 짐작도 가지 않는 도톰한 서류철에서 한 뭉텅이의 종이를 뽑아낸 양신아가 그걸 내게 건네며 속닥거렸다.
“일전에 부장님한테 부탁받았던 그거예요. 송찬 씨 오기 전에 부장님이 먼저 보는 게 좋겠더라고요.”
감쪽같이 사라진 담홍도에 관해선 이미 윤혜아에게서 알찬 정보를 받았지만, 내색하지 않고 종이를 받았다. 보고서 형식으로 된 종이 뭉치의 가장 첫 장에는 대문짝만하게 제목이 붙어 있었다.
《사망 처리된 실종자 및 브로커 용의자 목록》
정부와 사이가 좋지 못한 협회에서 쉬이 얻을 수 없는 귀한 자료에 눈이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