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me healer's hidden ending strategy RAW novel - Chapter 5
04화. 물 위로 비치는 쌍월 (4)
쭈뼛쭈뼛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등 뒤로 문이 바로 닫혔고, 금방 온기가 확 느껴졌다.
마치 담장을 사이에 두고 전혀 다른 공간이 된 느낌이었다.
전혀 겨울답지 않은 포근한 공기에 패딩을 벗자 박호승이 인상을 찌푸리며 나를 내려다봤다.
“아직 대문밖에 안 넘었는데 왜 벗어? 추위도 잘 타면서.”
“대문 닫히니까 바로 더워졌는데. 너흰 안 덥냐?”
“덥다기보다는….”
아직도 꽉꽉 싸맨 두 사람을 보면서 내가 더 덥다는 표정을 짓자 이세환이 손으로 입을 막으면서 미간을 모았다.
“숨쉬기가 좀…. 버거운 느낌이 드는데….”
“움직이는 것도 좀, 그, 뭐랄까, 물에 들어간 것 같은? 그런 느낌인데, 지금.”
넌 괜찮은 게 맞느냐는 두 사람의 눈빛에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주위를 눈으로 살폈다.
본부 건물을 중심으로 왼쪽에 있는 호수와 오른쪽을 가득 채운 꽃밭. 양쪽 다 계절과는 관계없이 싱싱한 생명력이 느껴진다.
호수 안은 보이지 않아서 확신할 수 없지만, 꽃밭의 꽃과 나무들은 전부 고농도의 아이온 속에서 자라는 귀한 품종들이었다.
저들을 위해 담장을 기준으로 삼아 안팎을 나누고 온실처럼 아이온을 유지하는 것일 테고, 덕분에 내부 아이온 농도가 짙어서 등급이 낮으면 움직이는 게 불편해지는 것 같다.
‘아이온의 기본적인 성질은 물이나 공기와 비슷하다 하더니. 체내 아이온 양에 따라 압박을 느끼는 것도 비슷한 감각인가 보네.’
협회 본부는 철저하게 바깥과 차단된 공간이라고 했으니 두 사람을 위해서라도 빨리 안으로 들어가는 게 나았다.
“그럼 안으로 들어가자. 라운지는 1층이지?”
“검사실도 1층이라고 했으니까 헤매진 않겠네.”
우리 길치 이세환 선생님을 위한 배려가 아니겠냐며 유쾌하게 코끝을 찡긋거린 박호승이 대뜸 어깨동무했다.
움직이기 조금 버겁다더니 내 쪽으로 거의 기대다시피 하고는 이세환한테는 대충 팔만 걸친 모양이다.
함께 불편함을 호소했던 이세환은 박호승이 힘들어하는 걸 느끼지 못했는지 그저 자신은 결코 길치가 아니라며 파드득 반박했고,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솔직히 대로변에서도 좌우를 헷갈려서 약속 장소를 벗어나는데 길치가 아니라고 하면 양심이 없는 거지.
“얼마 전에 우리 문제집 산다고 서점 가자고 했을 때도 혼자 삥삥 돌았었고.”
“맞아. 저 멀리 여행 코너에 가 있었잖아! 그 왜, 수학여행 갔을 때도 숙소 반대편에 가 있었고!”
내가 이전에 있었던 일화를 슬그머니 꺼내고 박호승이 한술 더 뜨자 귀가 빨갛게 달아오른 이세환이 너무한다며 투덜댔다.
그 사이에 은근슬쩍 이세환의 방향 감각에 자유의지를 빼앗아 걸은 덕분에 무사히 본부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실내가 훤히 보이는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자 호텔 카운터처럼 생긴 곳에 앉아 있던 안내원이 방긋 웃으며 일어섰다.
저고리를 기조로 한 것처럼 보이는 아무런 무늬도 없는 깔끔한 회색 블레이저. 비전투원의 유니폼이었다.
“어서 오세요, 여러분. 미리 이야기는 들었어요. 검사받으러 오신 것 맞지요?”
친절하게 묻는 안내원에게 대답한 건 나였다.
조금 전까지 힘들다고 축 처져 있던 두 사람이 안에 들어오자마자 공기가 달라졌다면서 정신없이 구경하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네. 어느 쪽으로 가면 됩니까?”
“검사실은 우측 복도로 가셔서 가장 안쪽 문을 여시면 돼요. 2층으로 올라가는 비상계단 바로 옆이니까 찾기 쉬울 거예요.”
“감사합니다.”
팔을 쭉 뻗어 알려주시는 분께 꾸벅 허리를 숙이자 그제야 구경이 끝났는지 박호승과 이세환도 도미노처럼 연속으로 허리를 숙였다.
그 어수룩한 모습이 재밌었는지 입매를 씰룩이는 안내원을 뒤로하고 검사실로 재게 발을 놀렸다.
“여긴가?”
“저게 비상구니까 맞나 본데.”
“검사실이라고 문패라도 걸어놨을 줄 알았는데 아니네.”
평범한 하얀 나무문 앞에서 멈춰선 우리가 주변을 휘휘 둘러보면서 두런두런 대화했다.
안내원은 문을 열어도 된다고 했지만, 다짜고짜 열고 들어가기엔 조금 어색하기도 했고, 예의가 아니기도 해서 똑똑 문을 두드리자 안쪽에서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요. 문은 열려있어요.
우리는 소리도 나지 않을 정도로 조심히 손잡이를 돌려 들어갔다.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주변을 살피자 안쪽에는 하얀 가운을 입고 있는 남성과 그 옆에서 뭔가를 쓰고 있던 정장을 입은 남성 두 명이 있었다.
‘하얀 쪽은 심초연이고, 다른 쪽은 누구지? 처음 보는데.’
빠르게 얼굴부터 확인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는 얼떨결에 셋이서 똑같이 인사를 했더니 처음 보는 남자가 사이좋아 보인다며 웃었다.
그 짤막한 문장조차도 노래하는 것처럼 독특하게 흐르는 목소리였다.
어디선가 이런 묘사를 봤던 것 같은데, 어디였더라.
기억을 되새김질하는 와중에 남자가 제 이름을 밝혔고, 난 입이 떡 벌어지려는 것을 최대한 참으며 평온한 낯을 유지하기 위해 애써야 했다.
“어서 와요. 오늘 검사를 담당하게 된 진예신이라고 해요. 이쪽은 함께 진행할 심초연이에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세 분.”
진예신.
모를 수가 없는 이름이었지만, 얼굴을 모르는 건 당연한 거였다.
왜냐하면, 진예신은 줄곧 게임 내에서 뒤통수만 본데다가 어른이 된 모습을 단 한 번도 못 본 내 플레이어 캐릭터의 기본 이름이었으니까.
* * *
검사가 어떻게 끝났는지도 모르겠다.
특별한 절차는 없었던 것 같기는 한데, 일러스트에서도 뒤통수만 나왔던 캐릭터의 얼굴을 처음 본 기쁨과 이 세계가 게임 기반으로 된 꿈도 희망도 없는 세계라는 슬픔으로 머리가 가득 차서 사고가 느려진 탓이다.
복잡한 감정들이 휘몰아쳤다가 진정하고 나니까 검사가 끝났다면서 심초연이 뭔가를 잔뜩 품에 안겨줬고, 진예신이 잘 가라며 손을 팔랑팔랑 흔들어줬다.
무슨 정신으로 협회를 나가서 장소를 이동했는지 모르겠지만, 어찌 잘 찾았는지 아까 애들이 가자고 했던 카페에 자리 잡고 있었다.
손에 들려 있는 아메리카노를 쭉 한 번 빨아 마시고 나니까 정신이 확 든다.
‘와, 아까 심초연이랑 진예신이 날 완전히 어리바리한 애로 봤겠는데.’
그래도 이상한 짓은 안 했으니까 첫인상을 완전히 말아먹은 건 아닐 거라고 굳게 믿기로 했다.
물론 그런다고 속이 편한 건 아니었기에 그냥 얌전히 커피나 쭉쭉 빨았다.
옆에서 휴대폰으로 뭔가를 계속 보고 있던 박호승이 그런 내 등을 툭 치면서 말을 걸었다.
“야, 정신 차렸으면 이거 좀 봐봐. 어제 영상인데 넌 못 봤지?”
“어제면 병실에 있었는데 내가 보긴 뭘 봤겠냐.”
박호승 쪽으로 고개를 슬쩍 빼려고 하자 그가 제대로 보라면서 휴대폰을 내 앞쪽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호기심이 생겼는지 야금야금 케이크를 먹고 있던 이세환도 슬그머니 내 쪽으로 붙어 앉아서 고개를 들이밀었다.
“어젯밤에 수원에 생긴 균열이래. 경보는 청색으로 울렸는데, 공략팀이 도착하기 직전에 황색으로 균열 등급이 변했대.”
“균열 등급이…. 도중에 변하기도 하는 거였어…?”
“설마. 여태 그런 적은 없었댔어. 그리고 있었으면 네가 알았겠지. 우리 중에 제일 균열에 관심이 많은 건 너잖아.”
이세환의 흔들리는 동공을 보며 박호승이 무심하게 대꾸했다.
나는 그런 두 사람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휴대폰에서 나오고 있는 영상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공식적으로 찍은 영상도, 주변 건물의 CCTV에 찍힌 영상도 아니었다.
자꾸 흔들리거나 잡음이 심하게 섞인 게 근처 주민이 대피하기 전부터 찍다가 대피소에서 제대로 각을 잡고 촬영한 현장감이 살아있는 영상이었다.
‘오프닝인가? 아냐, 그거랑은 주변 모습이 좀 달라. 이거 게임 홍보 영상이랑 너무 비슷한 상황인데.’
당연한 말이지만, 지금 보고 있는 영상과 게임 홍보 영상은 때깔 자체가 달랐다.
일반인이 주위에서 일어난 일을 그저 찍은, 그것도 휴대폰 동영상 앱을 사용했을 뿐인 영상과 모든 자본을 다 쓸어모아서 유저를 끌어들이기 위해 제작한 홍보 영상은 천지 차이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이걸 같다고 할 수 있는 건, 영상 속의 배경과 균열의 상태, 그리고 저걸 해결하기 위해 파견된 협회 감응자들이 똑같기 때문이다.
‘화질이 이렇게 안 좋은데도 이목구비 선명한 것 좀 봐라. 이러니 인기가 많지.’
청색이라고 해서 가볍게 왔더니 황색이라며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러면서도 착실하게 한 사람은 공략을 위해 안으로 냉큼 들어가고, 나머지 두 사람이 밖에서 왼손을 딱 튕기며 전투 준비를 마쳤다.
평범한 협회 전투원의 복장에서 각자 고유한 전투복으로 한순간에 바뀌는 모습이 꼭 변신하는 것처럼 보였다. 야무지게 마석으로 만들어진 무기를 쥐고 있어서 더더욱.
그사이에 더 흉흉해진 균열은 솜씨 없는 어린이가 마구 찢어놓은 종이처럼 크기를 키웠다.
-뭐야? 위험한 거 아냐?
-최이안 팀이 왔으니까 괜찮겠지!
대피소에 모여있던 사람들의 소음이 동영상에서 흘러나왔다.
웅성거리는 소리는 불안감이 가득했지만, 동시에 ‘최이안 팀’에 대한 믿음도 느껴졌다.
그리고 그들에게 화답하듯 균열이 공략되는 영상이 이어졌다.
쨍한 주황색의 카플린 모자를 눌러쓰고 멀리서도 번뜩이는 클로를 휘두르는 강하늘과 남색 마린캡을 쓰고 긴 망토를 휘날리며 곤봉을 던졌다가 받는 강바다.
꼭 닮은 쌍둥이는 모자로 반쯤 얼굴이 가려졌는데도 방긋 웃고 있는 입매가 훤해서 마치 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둘이서 무기를 휘두를 때마다 균열 밖으로 밀려 나오던 마수들이 픽픽 쓰러졌다.
-와아.
-저 정도는 해야 최이안이랑 팀을 할 수 있구나.
홍보 영상에서는 조명되지 않았던 일반인들의 소리는 꽤 신선했다.
균열이 나타나는 수보다 감응자 수가 훨씬 적다 보니 한 명 한 명이 슈퍼스타 수준으로 인기가 많다는 서술은 있었지만, 직접 보니까 신기한 느낌이다.
꼭 처음, 이 광고 영상이 나왔을 때, 저 둘과 균열 내부로 들어간 최이안의 전투 장면에 홀렸던 나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오, 이제 균열 닫히네.’
영상이 끝을 향해 가면서 끝나지 않을 것 같던 황색 기운이 사라지고 균열이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여전히 공간은 찢어져 있지만, 색이 사라졌다는 것은 마수가 더는 나오지 않는다는 뜻이기에 쌍둥이가 무기를 집어넣고 기지개를 쭉쭉 켰다.
이내 누군가 지우개로 지우는 것처럼 서서히 옅어지는 균열에서 다리가 쑥 나오더니 붉은 머리가 강렬한 미남이 빠져나왔다.
능력이 극단적으로 공격에만 치우친 S급 감응자 최이안이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쌍둥이들이 깔깔 웃으며 그의 등을 치고, 진저리쳤다가도 금방 환하게 웃는 모양새가 즐거워 보인다.
‘영상만 보면 더할 나위 없는 해피엔딩인데, 찝찝하단 말이지.’
동영상이 끝나고 다시 보기 버튼이 활성화됐다.
곧장 화면을 눌러서 영상의 처음 부분을 재생했다.
박호승이 또 보냐면서 인상을 찡그렸지만, 알 바 아니었다.
지금 중요한 건 균열의 색이 변하는 장면을 제대로 기억에 박아두는 것이었다.
‘이 부분은 광고에서도 못 봤던 부분인데.’
화려한 그래픽과 수려한 영상미로 입소문을 제대로 탔던 광고였지만, 길이는 퍽 짧았다.
전투에 초점을 맞췄고, 배경으로 보여주는 건 흉흉함을 강조한 균열의 모습 정도였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광고의 취지에 충실하게 우리 게임은 이 정도의 그래픽으로 전투를 할 수 있다는 자랑이었다.
그것만 보고 홀랑 낚여서 게임출시만 고대하다가 기어이 끝을 본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망한 게임이었다.
원작 소설에 대한 애정과 게임을 하면 끝을 봐야 한다는 내 신조만 아니었으면 진작 때려치웠을 정도로 일명 망한 게임.
‘도중에 균열 등급이 변동된다는 설정은 게임에만 있는 오리지널이야. 이것 때문에 개고생한 것만 생각하면 열이 뻗친다고, 진짜.’
기껏 울린 경보 등급에 맞춰서 인원을 보냈다가 난이도가 올라가서 어떻게든 모두 살려서 깨보겠다고 온갖 짓을 다 했던 기억이 주르륵 눈앞을 스쳤다.
새삼스럽게 분노가 치밀어 올라서 재빨리 동영상에 집중했다.
뒷부분은 다시 볼 필요가 없었기에 가장 앞부분만 왔다 갔다 하면서 보고 있는데, 옆에서 같이 심각하게 보던 이세환이 영상의 구석진 부분을 가리키면서 입술을 뗐다.
“여기…. 이 부분 조금….”
“왜?”
“으음…. 내 착각일 수도 있는데…. 예전 균열이랑 좀 다른 거 같아서….”
귀가 번뜩 뜨였다. 소설에서 균열과 그 전조현상에 대해 묘사가 되기는 했지만, 상상에도 한계는 있는 법이다.
특히 나처럼 상상력이 빈약한 인간은 대충 비슷한 현상에 끼워 맞춰서 그러려니 하면서 읽기 때문에 게임에서의 구현을 기대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 기대는 깔끔하게 배신당했다.
균열이 열릴 때마다 영상은커녕 일러스트도 없었고, 그저 화면에 ‘청색경보가 울렸습니다.’ 하는 문구와 함께 위치 장소가 떴을 뿐이었다.
게임도 나름의 고충이 있었을 거라고 이해하고 넘어갔지만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원작가가 소설을 쓰면서 아깝게 보여주지 못했던 설정을 게임에서라도 선보일 수 있어서 만족스럽다고 했을 때부터 기대했었는데.
‘균열은 전조현상부터 중요하다고 소설에서 자주 나왔으니까. 일러스트라도 있었으면 뭐라도 실마리를 잡아봤을 텐데.’
떡하니 무대 위에 총을 올려놓고 방아쇠를 당기기는커녕 들어보지도 않았던 게임을 떠올리면서 이세환에게 집중했다.
손가락은 소심하게 영상을 가리키지만, 재잘재잘 이어지는 말은 제법 자신 있게 나왔다.
“균열이라는 거, 원래 이런 식으로 아이온이 급격하게 결집하다가 공간이 갈라지면서 생기는 거잖아? 이때, 모인 아이온의 양에 따라 등급이 결정되는 거고, 또, 경보는 그에 맞춰서 발동되잖아. 그러니까, 여기 보면 주변 공간이 푸르게 변했고, 중심 부근에 까맣게 금이 가서 청색경보가 울린 거야.”
“그래. 그건 알지.”
“원래라면 여기서 더 아이온이 모이지 않고 균열이 정착하는데, 여기 봐봐. 균열의 크기는 이미 결정이 됐는데, 마수가 나오는 게 아니라 아이온이 더 모이고 있어.”
청색과 황색이 반반 섞인 지점에서 영상을 멈춘 이세환이 흐릿한 부분을 미심쩍게 보면서 입맛을 다셨다.
하나에 꽂히면 끝을 봐야 하는 성정은 우리 셋 모두가 똑같았는데, 아까 박호승이 균열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건 얘라고 한 걸 보면 이 세계의 이세환은 여기에 꽂혔나 보다.
이세환은 마석과 계약을 해도 최대 B급이니 전투원으로는 장래 설계를 하지 않았을 테고, 아마 연구원으로 협회에서 일하지 않을까 싶다.
영상을 다시 보기 시작했을 때부터 영 지루한 얼굴로 케이크를 먹고 있는 박호승을 제쳐두고 이세환의 이어지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여기만 잘 보이면 좋겠는데, 너무 흐리다…. 그래도 이건 보이는 거 같아. 이쪽 균열 바로 옆에 이 구슬처럼 생긴 거 말이야.”
“어디에?”
“여기. 흐릿하긴 한데 이것까지 청색으로 휘감긴? 연결된? 느낌으로 있어. 누가 꼭 고정해 놓은 것처럼 움직이지도 않고. 게다가 영상이 더 진행되면 이렇게 점점 작아지다가 아예 사라지고, 균열은 완전히 황색이 됐어.”
이세환이 영상을 재생시켰다가 다시 앞으로 돌리면서 열정적으로 설명했다.
난 그가 콕 찍은 곳을 유심히 들여다보다가 작게 숨을 삼켰다.
이세환은 그런 내게 눈을 깜빡이면서 이건 느낌뿐이고, 영상도 흐려서 확신할 수 없다는 말을 붙였지만 대꾸할 여력이 없었다.
‘이게 왜 벌써 나와.’
이 게임의 최종 보스가 게임이 진행되는 동안 열과 성을 다해 연구한 끝에 만들어낸 세계 멸망 프로젝트의 핵심 도구.
끝에 가까워질 때면 어떤 루트를 타든 꼭 한 번은 봤고, 보스 쪽으로 붙는 배신 루트를 택하면 아예 제작 공정에 참여하게 되는 물건.
결코, 지금 있어서는 안 되는, 통칭 ‘간섭 구슬’이 떡하니 시작 지점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