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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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며칠 전으로 회귀하자마자 나는 헌터들 앞에서 말했다.
“이번 스테이지. 제가 지휘하겠습니다.”
“…….”
헌터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그들 중엔 백작과 성기사도 있었다. 본래 25층을 공략하다가 사망해버리는 두 사람이지만, 그들이 돌입하기 전의 시간대로 내가 돌아온 것이다.
물론 당사자들은 그런 사실을 알 리 없다.
“으음….”
성기사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미안하다, 사왕. 너도 로맨스에 일가견이 있는지 미처 몰랐다.”
“아니요. 미안해하실 거 없어요. 전 로맨스에 문외한이 맞으니까요.”
“…그런데도 이번 스테이지를 담당하겠다는 것인가? 진심인가?”
“예. 꼭 지휘하고 싶습니다.”
헌터들이 수군거렸다.
나는 기세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침착하게 말했다.
“장르가 장르인 만큼 로맨스에 해박한 헌터가 뽑히면 좋겠죠. 하지만 그게 절대적인 기준은 아닙니다. 저는 무협지도 읽어본 적 없어요. 그런데도 천마실록을 잘 클리어했고요.”
“그건 그렇다만….”
“이번 스테이지에서 불길한 예감이 들어요. 안 좋은 일이 터질 거 같습니다. 제가 담당하게 해주십시오.”
흠칫.
“…상관없지 않을까? 사왕의 실력은 몇 번이나 증명됐잖아.”
“본인도 사왕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하네.”
랭킹 2위와 랭킹 1위가 내 의견에 힘을 실어주니 일이 쉬워졌다. 다른 헌터들도 굳이 우리한테 반항하려 들지 않았다. 나는 원하는 대로 지휘권을 잡았다.
“자. 이제부터 저와 같이 묵시록에 들어갈 공략조를 뽑을게요.”
내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말했다.
“이번 스테이지는 진짜 최정예 멤버로만 갑니다. 제가 뽑지 않았다고 해서 원망하진 말아주세요.”
“흐음. 최정예 멤버구나.”
마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날 흘끗거렸다.
“그래. 그럼 내가 가야겠네. 로맨스는 잘 모르겠지만 누군가 꼭 필요로 한다면 내가 가야겠어.”
“…….”
“로맨스는 이번에 처음 접했지만. 로맨틱 감수성이라고 할까? 감성이 나랑 맞는 거 같더라. 딱히 내가 로맨스물 전문가라고 주장하는 건 아니란다. 응. 만일 최정예 멤버가 가야만 한다면 내가 끼어야 하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생각할 뿐이야.”
자신을 드라마 보는 여자라고 소개했던 분의 상태가 좀 많이 안 좋았다.
“로맨스와 로맨스 판타지는 다소 다르다. 로맨스가 마카롱이라면 로판은 초콜릿 무스 케이크지. 사왕이여. 역시 전문가가 나서야 한다고 생각한다만….”
은근히 깊은 내공을 풍기는 은거고수는 성기사였다. 다만 지난 회차에서 그녀는 공략에 실패한 전적이 있다. 성기사를 데리고 가기엔 부담스럽다.
“사랑이란 결국 돈으로 치환될 수 있는 거 아닌가? 돈을 잘 내는 사람이 연애도 잘하지. 사랑은 권력이고, 권력은 돈이라네. 만고불변의 법칙이지. 여기선 내가 기용되어야 할 것일세.”
백작이 부채를 지폈다. 저 인간을 로맨스에 투입시킨 사람은 도대체 누구야?
“음.”
나는 차분히 주변을 둘러봤다. 마침, 내 시야에 들어온 인물이 한 명 있었다. 그 인물은 책갈피 메이드가 서빙해준 오렌지 주스를 쫍쫍 마시고 있었다.
“이단심문관님.”
그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예?”
“저랑 같이 로맨스물 한 판 때립시다.”
“오호?”
주위 헌터들이 경악스러운 눈으로 우리를 쳐다봤다.
이단심문관. 철혈의 학살자. 어떤 우여곡절이 있는 간에 종교적 분쟁이 생기면 무조건 고문하고 사형하는 자. 비정상인밖에 없는 우리 탑에서도 크레이지한 취급을 받는, 그야말로 순수 내츄럴본 싸이코.
세상에서 로맨스와 제일 안 어울릴 것 같은 사람이 누구냐고 설문조사를 하면 바로 저 인간이 1위를 찜 해뒀다. 그 사람이 천진난만한 소년처럼 활짝 웃었다.
“예! 알겠습니다! 아핫, 사왕의 부탁이라면 기쁘게 따르지요!”
실체를 모르는 사람이 보면 진짜로 천사 같은 미소였다.
“사왕. 미쳤니……?”
달리 말해 실체를 아는 사람이 볼 땐 악마의 미소가 따로 없었다. 마녀는 얼른 다가와서 나한테 귓속말로 소곤거렸다.
“이단심문관은 타인한테 감정이입을 못 해! 객관적으론 싸이코패스고, 주관적으로 잘 응원해줘도 쏘시오패스란다. 저런 남자를 로맨스 묵시록에 데려가서 뭘 어쩌게.”
“흑룡주.”
나도 귓속말로 답해줬다.
“제가 로맨스의 로 자도 모르지만요. 뭐가 제일 중요한지는 알아요.”
“뭐길래?”
“외모요.”
“……응?”
“외모입니다.”
“…….”
난 진지했다.
“어….”
“우선은 잘 생길 필요가 있어요.”
“아니. 조금 편견 아닐까…? 평범하게 생겼다고 묘사되는 사람도 로맨스엔 많아.”
“표지로 사기 치잖아요.”
“아아, 말하면 안 되는 걸 말했구나…… 당신……”
“자. 보세요. 우리 탑에서 순전히 외모로만 따졌을 때 제일 천사같이 생긴 사람이 누구예요? 이단심문관이에요. 저도 본성을 알기 전까지는 진짜 천사인 줄 알았다니까요.”
우리는 슬쩍 이단심문관을 쳐다봤다.
멀리서 이단심문관은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인정하시죠?”
“……응. 저 아이 외모가 깡패긴 하지. 반비례해서 인성도 깡패라 문제지만.”
“게다가 이단심문관은 유능해요. 신성마법 쓰잖아요. 웬만한 사고가 터져도 대응할 수 있을걸요? 제 말도 곧이곧대로 잘 들어주고.”
무엇보다 이단심문관은 표리(表喜)가 다르지 않다.
겉으로 말하는 것과 속으로 생각하는 것이 똑같다.
표리일체.
이것도 로맨스에선 하나의 장점이 될 수 있다고 본다.
겉모습과 속마음이 다르지 않다는 건 많은 사람한테 매력으로 다가오니까.
“—의외로 묘책일지도 모르겠군.”
우리 대화를 엿듣고 누군가가 말했다.
성기사였다.
그녀는 천천히 머리를 끄덕거리고 있었다. 감탄한 눈빛이었다.
“로판, 로맨스 판타지는 미친놈이 많이 나올수록 갓작이다. 이단심문관 정도면 로판적으로 볼 때 나쁘지 않다. 사랑에 대한집착이 없다는 건 아쉽다만 그럭저럭 광기남(男)으로 발전할 여지가 있지. 유잼의 각이 보인다. 과연 사왕…. 로맨스에서도 귀신 같은 직감을 발휘하는군….”
도서관이 조용해졌다.
“음? 내가 뭐 이상한 말을 했는가?”
거듭, 도서관은 조용했다.
다만 마녀가 무언가를 생각했다.
「일리는 있지만, 사왕처럼 좀 젊어보이는 것도 아니고 이단심문관은 진짜 너무 어려보이는데……. 어려보여도 적당히 소년스러워야지 완전 어린애 외모는 인기가 없는 게 이 바닥인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전문적인 의견이 육성으로 피력되는 일은 없었다.
덕분에 무사히 나와 이단심문관. 로맨스 2인조가 결성되었다.
결정된 공략조를 보고 도서관장은 눈을 반짝였다.
“오호라. 색다른 조합으로 공략을 시도하는구려. 좋쇠 이번엔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본좌는 무척이나 기대된다오.”
도서관장이 손을 뻗어 [소르므윈 학원 이야기]를 잡았다.
“바야흐로 사랑의 계절! 사랑을 찬양하는 것이 당연해진 시대가 되었소! 신분, 혈통, 국적, 모든 걸 뛰어넘어서 사랑을 쟁취하는 것을 이제는 아름답다 말하지!”
성좌의 옷소매가 펄럭였다.
“어쩌면 바로 그러기에 사랑이 어려워진 걸지도 모르겠구료. 사랑은 감정일 뿐만 아니라 태도이고 자세인데, 많은 사람들이 낭만에 집착하니 말이오.”
도서관장은 후후 웃었다.
“낭만적 현실인가. 현실적 낭만인가. 공자여, 그대도 균형을 잡기 퍽 어려울 것이오. 그러기에 본 관장은 그대를 위해 특별히, 클리어 특전을 준비해봤소!”
클리어 특전?
“사실 그대는 [천마실록]을 노멀 스테이지에 더하여 히든 스테이지까지 클리어한 것과 다름없소. 노멀 스테이지의 보상은 22층으로 주어졌다지만, 히든 스테이지 보상은 아직 못 받았지. 그걸 지금 선물해드리겠소.”
“어, 뭔가요?”
“이리로 오시오. 본좌의 주인공이여.”
다가섰다.
“그대에게 3장의 카드를 드리겠소.”
짜짠, 하고 도서관장은 카드를 건네줬다.
카드들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
[안면인식장애 카드] [이런 우연이? 결정적 비밀 엿듣기! 카드] [아차! 이거 말하면 안 되는데 ! 나도 모르게 그만 말실수! 카드]+
“…….”
좋아.
이름부터 불길하군.
어떤 효과가 붙은 카드들인지 몰라도 엄청 수상쩍었다.
“저기요. 이건……”
“전부 로맨스물에선 기깔나게 사용된다오. 이 카드들이 반드시 그대의 천군만마가 되어줄 것이오. 그러니 걱정 마시구려!”
걱정밖에 안 되는데요.
“선물은 이것만이 아니지. 하나 더 준비해두었소. 묵시록에 가게 되면 자연히 선물을 접하게 될 것이라오.”
“네?”
“사왕. 이단심문관.”
도서관장은 내 반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책을 펼쳤다. 화아아악! 묵시록의 페이지에서 빛이 뿜어졌다.
“이상 2인을 [소르므윈 학원 이야기]의 등장인물로 지정하오. 제군들이 눈을 뜨면, 그곳은 아직 소르므윈 학원 이야기가 불행한 연재 중단을 맞이하기 7일 전의 세계일 것이오.”
빛이 우리 두 사람을 감쌌다.
“부디 멋진 결말을 보여주시길 기대하겠소! 영애! 그리고 집사!”
영애?
집사?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어보려는 순간, 내 시야는 완전히 하얘졌다.
4.
나는 로맨스에 열중해본 적 없다.
나한테 책을 읽는 버릇이 없을뿐더러, 내 주변에 [로맨스]를 파는 친구가 없었다. 조금 더 솔직히 말하면, 그냥 친구가 없었다. 지금도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몇 명 있을까에 대해선 침묵하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로맨스 장르에서 [제일 많이 등장한 의성어]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문외한에 불과한 나조차도 쉽게 대답할 수 있다.
찰싹!!
그건 뺨따귀 후려치는 소리다.
“—천하고 무례한 것!”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천장의 상들리에까지 닿았다. 상들리에의 흔들림이 미처 멎기도 전에, 찰싸아악!! 로맨스 분야의 올타임 넘버원 사운드가 한 번 더 울려줬다.
이렇게 내가 여유롭게 사운드를 관람한다는 것에서 알 수 있겠지만, 찰싹거림을 당한 장본인은 내가 아니었다.
“……아하?”
이단심문관이었다.
이단심문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왼쪽 뺨과 오른쪽 뺨. 양쪽이 다 빨개졌는데도 이단심문관은 싱글방글 웃었다. 자신의 뺨을 때려버린 상대방을 향해서.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습니까? 손이 몹시 독하군요!”
상대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고귀한 신분의 영애인 걸까. 그녀는 은실로 백합의 문양이 수놓아진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마음속으로 편의상, 그녀에게 ‘은백합 영애’라는 이름표를 붙였다.
“감히 태연하게 굴다니……! 천한 것이! 창피한 줄도 모르고!”
“아핫.”
그리고 여기서부터 골이 때렸다.
드레스를 차려입은 사람은 은백합 영애만이 아니었다.
“제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부디 지적해주시지요! 듣고, 지적이 합당하다면 바로 시정하겠습니다! 되도록 폭력은 사용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이단심문관 또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은백합 영애의 드레스에 비하면 한결 밋밋했다. 라임의 과일 속살을 닮은 색깔. 노란색의 천진함과 초록색의 청량함을 반씩 나누어 가진 드레스를, 이단심문관은 입었다.
천진함은 유치함으로 번지기 쉬웠다. 청량함은 무지함으로 비추기 일쑤였다. 하지만 다 필요없었다. 얼굴이 깡패였다. 내가 거의 외모만 보고 고른 헌터답게, 순수 내츄럴본 얼굴 깡패는 환히 웃었다.
“자아! 이름 모를 분. 저와 대화합시다!”
찰싹!
“네가 정녕… 정녕, 마지막까지 나를 우롱하는구나….”
은백합 영애는 말할 때 온몸을 쥐어짜는 것 같았다. 척추의 구부러진 굴곡이 목소리에 고스란히 옮았다.
때린 사람은 영애이고 맞은 사람은 이단심문관인데, 어째서인지 시간이 흐를수록 은백합 영애의 숨이 가빠졌다.
‘음.’
나는 묵시록에 돌입한 직후의 혼란을 헤치고,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했다.
‘사교회? 무도회? 아무튼 행사 도중이다.’
상들리에가 드리운 무도회장.
우리뿐만 아니라 수십 명의 사람이 드레스와 신사복을 입었다. 그들은 멀리 떨어져서 조마조마한 얼굴로 이 쪽을 보고 있었다. 당황하고 긴장한 기색들이 역력했다.
평화로운 무도회가 난장판이 되었으니 당연했다.
‘은백합 영애가 [악역 영애]고….’
나는 영애를 바라보았다.
‘황족을 제외하면 제일 신분이 높은 사람이지.’
이 묵시록의 세계를 멸망시킬 장본인이기도 하다.
“여, 보아, 라!”
은백합 영애가 비틀거리면서 말했다. 하나하나의 음절을 이빨로 씹어서 뱉어내는 듯했다. 듣기만 해도 허파가 괴로워지는 목소리였다.
“예. 영애님.”
흑색 연미복을 입은 하인들이 대답했다.
“저것들… 꼴보기 싫구나. 치워라. 어서… 내 눈앞에서, 치워라!”
“예.”
하인들이 대답하는 목소리는 결코 크지 않았다. 나지막했다. 아랫사람은 윗사람의 체질에 맞추어서 목소리의 높낮이를 조절했다. 누가 봐도 은백합 영애는 병약했다. 그녀의 귀에, 시끄러운 목소리는 독이었다.
“앗.”
그래서 이단심문관은 은백합 영애에게 상극이었다.
“혹시 어디 아프십니까? 큰일이군요! 부축해드리겠습니다!”
“어서… 어서 치우지 못하겠느냐 당장 저 주종(主從)을… 가두어라……”
이단심문관은 목소리부터 활짝 & 방긋이 기본인 내츄럴이니까.
연미복 입은 하인들이 군부대처럼 우리를 둘러쌌다.
“실례합니다.”
“잠시 저희를 따라와 주셔야겠습니다.”
말은 고풍했지만 행동은 영 아니었다. 하인들은 우리 두 사람을 억지로 끌어낸 것이다.
무도회장을 넘어서, 복도를 지나, 어느 달빛 창백한 창고로 우리는 운반되었다.
“저기요?”
나는 창고로 이송되는 와중에 말했다.
참고로 나도 하인들과 똑같이 생긴 연미복을 입고 있었다.
“저희 지금 어디로 데려가는 겁니까? 예?”
대답이 없었다.
“저기요? 공작가 하인 여러분?”
쾅.
“…….”
“…….”
이단심문관과 내가 서로 쳐다봤다. 곧이어 찰캉! 열쇠가 돌아가는 소리가 울렸다. 어딘지 모를 창고에 감금을 당한 것이었다.
내 상식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창고의 문이 열쇠로 잠가지면 그게 곧 감옥이었다.
“아핫.’’
쇠창살에서 새어나오는 달빛을 받으며, 이단심문관이 입을 열었다.
“사왕. 큰일 났습니다!”
이단심문관은 전혀 큰일이 아니라는 듯 활짝 웃고 있었다.
“아마도 제가 여자 주인공 영애가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그렇다.
그리고 나는 그 영애의 집사였다.
9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