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level reincarnated councillor RAW novel - Chapter 24
Book 5 Chapter 3
장혜성은 근 두어 달 동안 주상혁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도 연락이 없는 게냐?”
“아무래도 혜성의 대표 자리에 관심이 없는 게 아닌지…….”
“허어…… 믿을 수가 없군.”
주상혁은 불과 약관의 청년에 불과하다.
가장 꿈 넘치고 야욕 넘치는 나이에 권력욕이나 재물욕, 명예욕 등.
인간이 쉽게 흔들릴 수 있는 욕망을 거절했다는 말이었다.
“민주 녀석은 요즘 뭐 하고 있느냐?”
“한참 바깥을 돌아다니다가 며칠 전부터는 다시 테이밍 훈련 중입니다. 아마 민주도 찾기를 포기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장혜성은 장민주가 혼자서 주상혁을 찾아다니던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말리지 않았다.
대표인 자신이 자꾸 돌아다니는 건 조금 모양새가 좋지 않으니, 차라리 장민주가 주상혁을 찾아주길 바랐던 것.
하지만 결국엔 장민주도 포기한 것 같았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다행인가?”
얼마 전 장민주가 백호를 끌어안고 자랑하러 온 적이 있었다.
물론 그때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돌려보내긴 했지만, 사실 장혜성은 그 일을 내심 만족하고 있었다.
지금에서 말하는 거지만, 장민주에게서 조금의 가능성을 엿본 것이었다.
“대표님!”
장혜성이 큰아들 장민철과 대화를 나누고 있자니 잠시 후 마루 아래에서 사람이 뛰어왔다.
장민철이 일어나 말했다.
“무슨 일입니까?”
“지금 S급 각성자를 모조리 소집하겠다는 협회의 비상령이 내려졌습니다.”
“이유가 뭐랍니까?”
“S급 던전이 브레이크 될 거라는 소식입니다.”
장민철의 표정이 금세 딱딱하게 굳어졌다.
“확실한 겁니까?”
“확실할 겁니다. 조금 전 기자회견이 있었고 그것 때문에 청주 쪽 시민들이 피난을 시작했다는 뉴스도 쏟아지고 있습니다.”
장민철이 장혜성을 바라봤다. 장혜성의 표정도 마찬가지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어찌하실 겁니까?”
“가 봐야지.”
협회장의 권한에 의한 비상시 소집이라고 해도 무조건 따를 필요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장혜성은 마냥 거부하기에는 부적합한 위치에 있었다.
’국내 최강‘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첫 번째.
가뜩이나 브레이크가 일어난 도시가 청주라면 대전에 있는 혜성길드도 남 일이 아니라는 것이 두 번째 이유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장혜성이 마나를 일으켰다. 마루 밑에 10m는 족히 될 것 같은 백호가 나타났다.
사뿐사뿐 산책하듯 걸어가 백호 위에 털썩 양반다리로 앉은 장혜성이 말했다.
“다녀오마.”
* * *
S급 던전에 대한 소식은 생각한 것보다 훨씬 파급력이 컸다.
자세히 말하자면 S급 던전도 아니고 S급 던전의 브레이크.
현대 사회에서 던전 브레이크가 미치는 손실은 그야말로 천문학적이라, 또 까딱 잘못했다가는 생명과 직결되기에.
그렇기에 일단 브레이크의 영향권 밖에 있는 사람들도 이일에 관심이 많았다.
⌙S급 소집령이면 해태좌도 오는 건가?
⌙안올 거 같은데…… 아직 라이센스도 갱신 안 했다며? 그럼 비각성자인 상태일 텐데 저길 왜 감?
⌙실망…….
⌙협회의 무능함에 치가 떨리네요. 이 쥐꼬리만 한 땅덩어리에서 던전 하나 조기에 발견 못 해서 브레이크를 만듦? 내가 E급처럼 작은 던전이면 말도 안 함. S급이면 보통 포탈 크기만 10m를 넘는다던데.
⌙ㄹㅇ 세금루팡.
⌙근데 솔직히 얼마 전까지 지들 밥그릇 챙기겠다고 싸움하기 바빴는데 제대로 돌아갔을 리 있음? 이 기회에 협회 구조 싹 다 개혁해야 함. 21세기에 내부선거 좋아하시네ㅋ.
인터넷의 반응은 극명했다.
여전히 얼마 전까지 관심거리였던 주상혁에 대한 글 소수에 대부분은 협회를 비난하는 분위기였다.
이참에 강태섭을 해임시키고 새로 협회장을 뽑자는 말도 많았다.
“근데 그나저나 진짜 왜 못 찾은 거지?”
주상혁은 이 부분이 가장 이해가 안 됐다.
사전에 구체적인 위치를 알려 줬다.
S급 던전이 보통 크기도 아니고 던전 브레이크 시점이 돼서야 찾았다는 게 의아했다.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건가?”
와와왕!
주상혁이 핸드폰을 통해 S급 던전에 대한 소식을 접하고 있을 때 뿌루루 사건 이후로 혼자서 산책을 다니던 주주가 뛰어들어왔다.
“얼레?”
주상혁이 주주가 물어온 걸 확인하고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오십 년 삼이잖아?”
* * *
주상혁이 강원도 산골에서 소소한 정보를 접했을 무렵.
국내의 대표들은 이미 대전 협회에 모여 있었다.
무거운 분위기의 회의실에 존재하는 사람은 아홉 명.
답답함을 느낀 삼십 대 여성이 말했다.
“그래서 던전에 대해서 추가로 뭐 들은 사람 없어요?”
여자의 이름은 차예설.
국내의 유일한 보조 계열 S급 각성자였다.
“알 리가 있나? 모두 너처럼 몇 시간 전에 전해 듣고 모인 사람들이야.”
조금 까칠한 톤으로 맞받아치는 삼십 대 남성.
경남을 대표하는 명성의 대표였다.
대학 선후배 사이로 유명한 두 사람의 다툼을 듣고 있던 정성호가 슬며시 한쪽 눈을 떴다.
“거, 조용히 좀 하지.”
정성호의 말에 움찔한 두 사람이 기 싸움을 그만두자 다시금 회장의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끝없는 침묵이 다시 시작됐을 때쯤 마침 회의장의 문이 열렸다.
강태섭이 사회자의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먼저 바쁘실 텐데 소집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리가 한 개가 비는데 이대로 시작할 생각입니까? 강회장?”
국내의 1류 길드 대표는 열 명.
하지만 회의장엔 강태섭을 제외하면 아홉 명뿐이었다.
“서지우 대표님은 불참의 의사를 표명해 왔습니다.”
“하…… 거참 잘나신 분이구만 누구는 여유 있어서 왔나?”
수도권의 길드 중 하나인 신화의 대표 추성현이 불만스러운 목소리를 표출했다.
눈을 감고 있던 장혜성이 슬며시 뜨며 말했다. 한 명 인원이 줄긴 했지만, 이정도 인원이면 S급 던전이어도 충분하다는 판단이었다.
“그래서 그 S급 던전은 언제쯤 브레이크 될 예정입니까? 협회장.”
“모릅니다.”
“모른다니요?”
강태섭의 말에 회장의 분위기가 묘해졌다.
대표들의 얼굴은 지금 이게 무슨 경우인가 싶은 얼굴이었다.
“백만 명이 넘는 시민을 피난시키고 이 호들갑을 떨던 사람이 브레이크가 일어날 예정 시간도 모른다?”
“그렇습니다.”
“허어…….”
기가 찼는지 정성호가 말했다.
“이유라도 들어 봅시다.”
“던전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농담할 분위기 아닙니다, 강회장님.”
“저 역시 농담은 아닙니다. 솔직히 이런 결정을 내리는 게 저라고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협회장의 자리를 걸고 한 결정이니 믿어 달라는 말밖에 드릴 수 없겠군요.”
“던전을 찾지도 못했는데 여하튼 던전 브레이크는 일어날 거다?”
“터무니없는 이야기지만 그럴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근거는?”
“그것 역시 말해 드릴 수 없습니다.”
회의장이 다시 조용해졌다.
이 어이없는 상황에 할 말을 잃은 것이었다.
삼 분쯤 별다른 말 한마디 오가지 않던 회의장에서 의자 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한데 한가롭게 장난이나 치고있을 시간은 없어서 말입니다.”
일어난 사람은 추성현이었다.
“생각들 복잡하실 텐데 제가 총대 메겠습니다. 다른 대표님들도 눈치 보지 말고 일어나시죠. 애초에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억지입니까?”
장혜성이 말했다.
“아까 서지우 대표를 비난하고서 가장 먼저 일어나는 모습이 아주 보기 좋습니다. 추 대표님.”
“하! 노인네 그새 도발 견적까지 보셨어?”
장혜성이 허허롭게 웃으며 말했다.
“도발견적이라 이 노인네는 잘 모르겠는 말을 하시는군…….”
“내가 그쪽 속을 모를 줄 압니까? 어차피 말은 그렇게 해도 강회장님의 말이 사실일 경우 피해가 두려운 거지 않습니까? 충북은 혜성의 안뜰이잖아.”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여유롭던 장혜성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날카로워졌다.
“강 회장의 말대로 상황이 발생한다면 그거참 여론이 누구를 도마 위에 올릴지 볼만하겠습니다.”
“솔직히 말해! 국내 최강이다 뭐다 해도 혼자서는 쫄리는 거잖아 영감! 아니면 간절하게 부탁이라도 해보시던가 그럼 못해줄 것도 없는데.”
“…….”
장혜성이 더 이상의 말을 하지 않자 추성현이 강태섭을 바라보며 말했다.
“전 그만 가겠습니다. 다른 대표님들도 잘 생각해 보고 괜히 시간 낭비하지 마시죠. 나, 참! 어이가 없어서 바빠 죽겠는 장난하는 거야, 뭐야.”
신화의 대표가 회장을 빠져나갔다. 눈치를 보던 두 사람이 추가로 일어났다.
“저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뵙죠.”
꾸벅 고개를 숙이고 두 사람이 자리를 떠나자 회의장에는 단숨에 일곱 명만 남게 됐다.
강태섭을 시작으로 정성호와 유정, 장혜성과 차예설, 서민준과 금강의 대표 구태민이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브레이크는 분명히 일어날 겁니다.”
“됐고, 구체적인 시기도 모릅니까?”
“2월 초라는 정보밖에 없습니다. 몬스터는 하피라더군요.”
“하피면 A급 던전의 몬스터 아닙니까? 확실히 지능이 뛰어난 녀석들이긴 하지만…….”
S급 던전이 아니라, A급 던전이라는 말이 된다.
물론 그마저도 굉장한 피해를 끼치겠지만, 지금처럼 전국의 S급을 모을 정도는 아닐 것이다.
유정이 턱 끝을 문지르며 말했다.
“엘리트 몬스터인가?”
“그렇네요. 엘리트 몬스터는 한 단계 더 높게 평가되니까”
정성호가 말했다.
“뭐, A급이든 S급이든 지켜보기나 합시다. 브레이크가 일어나면 정말로 신기한 구경하는 거고.”
* * *
밖에서 탕약을 달이고 들어온 주상혁이 샤워를 끝내고 침대에 발라당 드러누웠다.
핸드폰을 들고 누워 있자니 이불 밑에서부터 꿈틀꿈틀 주주가 올라와 둥그렇게 말았다.
주상혁이 검지로 하얀 공을 쿡 눌렀다.
“너도 낮잠 자게?”
와왕…….
또 뿌루루나 볼 일이지 웬일인가 생각해 봤더니 짚이는 게 있긴 했다.
혼자 산책 다니기 시작하고부터 부쩍 산책 시간이 늘었다.
‘체력 방전인 거야?’
어이없다는 듯 웃은 주상혁이 주주를 놔두고 핸드폰으로 시선을 옮겼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뭔 일 났나?’
인터넷이 어제 이 시각보다 훨씬 더 시끄러웠다.
기사를 대충하나 눌러 본문과 댓글을 읽은 것만으로도 대략 돌아가는 상황이 이해가 됐다.
“그러니까 대표 셋이 되돌아갔다고? 한 명은 불참했고?”
⌙아니, 이 시국에 해도 해도 너무한 거 아닌가?
⌙지들 싫다고 쏙 빠지네. 남은 사람들은 뭐가 됨?
⌙인생 그렇게 살지 마세요!
⌙우리 친오빠 신화 입사했다고 엄청 자랑했는데…… 괜히 말했네.
“이거 별일 없겠지?”
그래야 했다.
일이 커지면 괜히 주상혁이 말해서 그렇게 된 것만 같은 기분을 떨칠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어디 대표 네 명이 부재면…….’
조금 생각해 본 결과 크게 문제가 있을 거 같지는 않았다.
‘전에는 장혜성이 초반에 죽었어도 무사히 끝났잖아?’
‘장혜성’이라는 전력이 있다면 어찌어찌 되리라는 계산이 섰다.
원색적인 비난 댓글들이 줄이 이루는 기사를 뒤로 돌려서 청초길드 관련 소식을 검색하려다가 주상혁이 멈칫했다.
―네 명의 대표들, 우리 잘못 아냐, S급 던전은 추측일 뿐.
몇 분 전 올라온 기사의 제목이 조금 이상했다.
주상혁이 홀린 듯 기사를 클릭해 댓글을 확인했다.
댓글 역시 방금 막 달린 뜨끈한 것들이 빠른 속도로 늘어갔다.
⌙뭐야 던전이 없다고?
⌙????
⌙던전이 미발견인데 대피시켰단 거야?
⌙강태섭 전에 다쳤다더니 머리 다친 거임?
흐름이 변했다.
지금 상황 안 봐도 어떨지 알 수 있을 거 같았다.
지금쯤 협회 전화가 먹통이 될 만큼 통화량이 늘어났을 것이었다.
‘이거 괜히 미안해지는데…….’
이것도 괜히 주상혁이 말해서 벌어진 일 같아서 미안했다.
“하지만…….”
던전은 진짜로 일어난다.
어째서 S급 던전이 발견되지 않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반드시 일어날 터였다.
그게 주상혁이 겪어 본 미래였으니까.
* * *
전날 저녁 무렵부터 새벽까지 강태섭은 뼈가 가루가 되도록 비난받았다.
여론이 너무 험악해지자 강태섭은 다음 날 정오 방송국 카메라 앞에 섰다.
만약 던전 브레이크가 안 일어나면 협회장을 사퇴하겠다는 말에 다행히 여론은 조금 지켜보자는 분위기로 돌아서는 느낌이었다.
공개 발표를 마치고 강태섭이 대전 협회로 돌아와 조금 숨을 놓았을 때였다.
대전 협회의 관계자 한 명이 방 문을 급히 열고 들어왔다.
“협회장님, 급히 상황실로 좀 와 주셔야할 것 같습니다.”
“던전 브레이크입니까?”
“그건 아닙니다만, 심각…… 아니 그만큼 큰 문제입니다.”
강태섭이 황급히 일어나 상황실로 향했다.
상황실의 메인 모니터에는 사진 한 장이 떠 있었다.
“이게 뭡니까?”
“위성에서 청주를 찍은 사진이랍니다. 조금 전부터 인터넷에 떠돌기 시작했습니다.”
청주 하늘을 10%쯤 덮고 있는 검보랏빛 무언가에 강태섭이 집중하고 있을 때였다.
상황실에서 컴퓨터를 조작하던 하얀 가운의 연구원 한 명이 말했다.
“실장님 조금 전에 청주를 봉쇄하고 있던 각성자들이 보내온 사진입니다.”
“이건…….”
모니터에 떠오른 사진은 핸드폰처럼 조잡한 기기로 촬영한 것이어도 어찌나 큰지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포탈.
거대한 포탈이었다. 거무튀튀한 흙빛의 포탈 말이다.
* * *
‘청주에 난데없이 깔린 어둠.’이라는 제목으로 기사가 하나 인터넷에 뿌려졌다.
대피령이 떨어진 지가 오래전이었지만 겁도 없이 청주 인근 도시에서 대기 중이던 기자가 몰래 드론을 띄워 찍은 사진이었다.
어두컴컴한 도시 일부.
블랙홀처럼 빛마저 차단한 거대한 흙빛 포탈.
사람 하나 없는 조용한 도시는 유령이라도 나올 듯한 음침한 분위기였다.
⌙아니, S급 던전이라며? 저게 S급 던전 포탈이라고? SSSSSSSSS급은 되겠다.
⌙근데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지금 저게 터지면 청주 다 날아가는 거 아닌가요?
⌙건물주들 오열.
⌙협회에서는 뭐래요? 저거 포탈이 맞긴 하대요?
⌙헐…… 님들 지금 뉴스, 뉴스! 공중파 SCS 봐 봐요.
⌙와…… 미쳤다.
⌙저게 다 몇 마리야? 진짜 CG 아니고 전부 다 하피야?
기사를 보다가 호기심에 티비를 켠 주상혁이 사건 간의 시간차를 가늠했다.
“대략 텀을 계산하면 한 시간도 안 되지?”
거대 게이트의 존재가 기사화되고 하피들이 쏟아진 건 채 오 분 남짓의 시간.
“어째서 던전이 발견되지 않았는지 알 것 같구만…….”
저 거대한 흙빛 게이트가 나타나고 얼마 안 돼서 브레이크가 일어난 게 분명했다.
주상혁은 이제야 사건이 머릿속에서 정리가 됐다.
왜 과거에도 던전을 사전에 발견하지 못하고 던전 브레이크를 만들었는지.
왜 또 이 흙빛 게이트를 목격했다는 목격자가 없었는지.
“목격자는 아마…….“
당일 날 다 죽어 버렸을 거다.
그러니 목격자도 없다.
조금 진지하게 생각하던 주상혁이 중얼거렸다.
“근데 그럼 다른 던전 브레이크들도 비슷한 거라는 건데…….”
청주의 사건 이후에도 세계 곳곳에서 네 번 정도 더 S급 던전이 브레이크 되면서 화제가 됐던 적이 있었다.
생각한 것보다 가볍게만 여길 일은 아니라고 판단한 주상혁이 긴 생각을 마무리했다.
“이쪽도 협회장님한테 슬쩍 알려줘야겠네.”
물론, 일단 청주에 발생한 던전 브레이크가 먼저였다.
“뭐, 일단 좀 더 지켜볼까?”
* * *
비슷한 시각 며칠 전 모임이 있었던 회의실에는 S급 각성자들이 모여 있었다.
하피들이 물밀 듯이 쏟아지는 모습을 보고 장혜성이 말했다.
“저렇게 일반인들에게 보여 줘도 되는 겐가?”
“여론이 너무 좋지 못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강태섭이 그렇게 말하자 장혜성이 납득했다.
하피들이 포탈에서 계속해서 나오는 모습을 보고 이번엔 유정이 말했다.
“끝도 없이 쏟아지는군요. 몇 마리나 될 거 같습니까?”
붉은 깃털의 날개와 여성의 신체를 본뜬 야수의 모습을 한 하피는 그 눈으로 다 헤아릴 수 없는 수준이었다.
멀리서 촬영한 것이기에 조그마한 벌레 수준으로 보였지만, 바글바글 그 끝을 모르고 쏟아지는게 모두 하피라고 생각하니 소름이 다 끼칠 지경이었다.
명성의 대표 서민준과 차예설이 말했다.
“정말로 일이 나긴 났잖아?”
“솔직히 나도 반신반의했었는데.”
두사람은 강태섭의 선견지명에 마냥 신기해 하는 기색이었다.
두사람의 시선을 받고 약간 부담스러워 하는 강태섭에게 장혜성이 슬쩍 말했다.
“다른 네 명의 대표들은 뭐라고 하던가 협회장?”
“합류하겠다는 연락이 있었습니다만, 솔직히 그때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습니다.”
“답은 정해졌다는 거로군.”
강태섭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있는 분들끼리 어떻게든 보스를 처단해야 합니다. 청주는 넓습니다. 국내의 각성자들이 뒤늦게 돕겠다고 나서고는 있지만, 보스가 본격적으로 행동을 개시하면 얇고 넓게 펼쳐진 봉쇄망은 힘없게 뚫려 버리겠죠,”
다른 도시까지의 확산.
그건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됐다.
추가적인 피해가 불 보듯 뻔했으니까.
수만 아니 추가로 나오는 수까지 족히 십만은 거뜬해 보이는 하피들을 뚫고 보스를 그전에 처리해야 한다.
그 뒤에 남은 하피들을 야금야금 처리하는 게 강태섭의 작전이었다.
강태섭이 테이블 위에 여섯 개의 손목시계 형태의 물건을 내려놓았다.
“마나 카메라인가?”
“그렇습니다. 하나씩 착용해 주십시오. 상황이 어려우면 부족하더라도 바로 증원을 보내야 하니까요.”
마나 카메라.
촬영한 영상을 즉각적으로 지정된 중앙실로 자동 송출하는 장치였다.
고난이도 작전이나 던전 탐사에 사용하기 때문에 값이 비싸긴해도 A급 던전을 밥 먹듯이 출입하는 S급 각성자라면 모를 리가 없었다.
대표들이 팔찌를 착용하자 강태섭이 말했다.
“보스를 사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생존이 가장 중요합니다. 명심해 주십시오.”
* * *
협회는 모든 총력을 기울여서 청주의 모든 길목을 봉쇄하고 있었다.
지금은 상황이 터지면서 인근의 빼어난 각성자들이 하나둘씩 몰려 조금은 한가해진 상태였다.
포위망을 구성하고 있는 사람 중에는 전동욱도 있었다.
날개를 펄럭이며 바깥으로 나오려는 하피를 불로 지져 버린 전동욱이 안경을 밀어 올렸다.
“이거 참…… 정말 끝이 없군요.”
저 멀리 흐릿하게 보이는 하늘을 가득 채운 존재가 전부다 하피라고 생각하니 소름이 다 돋았다.
“저, 근데 지부장님.”
“말씀하시죠.”
전동욱의 말에 함께 현장까지 나온 박창수가 말했다.
“저거 다 잡을 수는 있는 겁니까?”
“솔직히 장기전으로 가면 문제는 없을 겁니다. 다만…….”
“다른 문제가 있다는……?”
유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스가 관건입니다. 토벌대가 최대한 빨리 보스를 처리하고 나와야 의미가 있습니다. 만약 그게 안 되고 시간이 지체된다면…….”
그새 어디선가 날아와 또다시 빠져나가려는 하피를 곁눈질로 확인하고 태워 버린 전동욱이 다시 입을 떼려고 할 때였다.
“피해가 크게 번질 거라는 말이겠지.”
전동욱의 고개가 목소리가 들려온 뒤편을 향해 휙 돌아갔다.
개량 한복을 펄럭이며 선두에서 걸어오는 장혜성이 보였다.
“한데 그거라면 우리도 잘 알고 있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네.”
전동욱이 살짝 목인사 했다.
“잘 지내셨습니까?”
“나야, 뭐 잘 지냈지, 자네 말처럼 앞으로는 어찌 될지 봐야 알겠지만.”
장혜성의 뒤편에는 정성호를 비롯한 각성자들이 있었다.
장혜성이 전동욱을 스쳐 지나가자 뒤따라 걷던 대표들이 사라졌다.
저 멀리 하늘에 번개가 치고 바람이 부는 것을 목격한 전동욱이 멍하니 있을 때였다.
“지부장님 이걸 보시죠.”
어디론가 갔던 각성자가 돌아와 박창수와 전동욱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실시간으로 송출하는 겁니까?”
“아마 그러기로 결정하신 거 같습니다. 그 워낙에 시끄러웠잖습니까?”
“그것 때문만은 아닐 겁니다.”
“예?”
“아무래도 S급 각성자라도 사람입니다. 보는 눈이 없다고 하면 극박한 상황에 무슨 짓을 할지 알 수가 없죠.”
즉, 순간에 이기심 때문에 팀워크를 그르칠 행동을 한다거나 발목 잡는 짓 못 하도록 하는 데에도 목적이 있을 것이다.
길드 대표들이 날아드는 하피 무리들을 학살하는 장면을 보다가 전동욱이 전투음이 들려오는 곳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어쩐지 묘한 불안감이 들었다.
“아무도 죽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 * *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난 시점은 평일 오후.
즉, TV로 상황을 보는 사람도 많았지만 인터넷으로 상황을 지켜보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인터넷으로 시청하는 사람들은 실시간 채팅을 하며 긴박한 상황을 전달받고 있었다.
⌙와…… 방금 마법 한 방으로 몇 마리를 처리한 거야?
⌙못해도 수백 마리는 쓸어버렸겠다. 그냥 쓸려 나가네, 쓸려 나가
서민준과 유정의 마법은 굉장했다.
날아드는 수천 마리 하피의 전열이 맥을 못 추고 바닥으로 추락할 정도로 강력했다.
물론, 아무리 마법이 강력해도 그만큼 준비 시간은 길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준비도 있었다.
구대성과 정성호였다.
날아드는 하피를 그때그때 차단하는 역할이었다.
유정과 서민준에 비해 눈에 덜 띄더라도 주먹에 걸렸다 하면 한 마리씩 골로 보내 버리는 정성호와 구대성 역시 이목을 끌기엔 충분했다.
⌙와 저 팔뚝 좀 봐, 개상남자
⌙정성호가 이 정도였음? S급 최약체 아니었나?
이름값에 비해 조금 약한 듯한 구대성과 훨씬 강한 듯한 정성호의 모습에 채팅하기 바쁘던 사람들이 한참을 떠들다가 일제히 침묵했다.
주변의 마나를 감지한 카메라가 자동으로 장혜성을 찍었기 때문이었다.
⌙와…….
⌙그저 감탄만 나온다.
어째서 국내 최강이라고 불리는지 말해 주는 것처럼 10m는 거뜬한 백호를 타고 뛰어오를 때마다 수백 마리의 하피가 시체가 되어 핏물을 뿌렸다.
백호의 꼬리가 휘둘러지면 낫의 형태로 변한 꼬리가 수백의 목을 떨어트렸고 발을 내려찍으면 솟구친 바람이 피바람을 일으켰다.
백호와 합을 맞춰 단신으로 거의 수천 마리의 하피를 도륙한 장혜성이 착지한 백호의 등 위에 살포시 내려서는 모습은, 보는 사람들로하여 절로 감탄을 뱉게 할 정도였다.
그리고 이러한 장혜성의 발군의 활약으로 토벌대의 전진 속도는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유정과 서민준만 해도 엄청난 화력을 자랑하는데 거기에 서너 배는 빠르게 하피를 쓸어버리는 장혜성까지 있으니 삼십 분이 지나지 않아서 목적지 인근에 도착한 것이었다.
⌙이제 슬슬 아까 포탈 나왔던 곳 아님?
⌙맞음, 폭발이 일어났다는 소리는 없었던데 던전 브레이크처럼 폭발을 동반한 건 아닌가?
⌙그러고 보니 포탈 폭발하진 않은 듯 건물은 멀쩡하잖아, 도리어 전투 중에 대표들이 부수면 부쉈지.
⌙잠깐 저거 뭐임? 엄청 큰데?
⌙보스다!
대표들을 노려보는 하피들 뒤편으로 거대한 괴조 한 마리가 보였다.
크기는 족히 30m는 되어 보였고 포탈이 사라지고 빛이 다시 돌아온 도시에 혼자서 그늘을 만들 정도로 엄청난 크기였다.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건 장혜성이었다.
장혜성이 발로 가볍게 신호를 보내자, 백호가 건물 옥상까지 단번에 튀어 오르더니 한 번 더 하늘로 도약했다.
막아서는 하피를 꼬리낫으로 바꿔 다시 쓸어 버리고는 괴조를 낚아챈 백호가 그대로 땅으로 함께 추락했다.
백호가 입을 쩍 벌리더니 거기서 순도 높은 마나 입자가 덩어리지기 시작했다.
피슈웅.
백호의 입에서 발사된 마나 포가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보스를 구원하기 위해 날아들던 하피들도 폭발로 일어난 돌풍에 휘말려 도로 날아가 버릴 정도로 강력한 폭발이었다.
폭발이 가시고 난 그곳에는 가슴 위부터 흔적도 없이 사라진 괴조와 그 위에 올라타 있는 백호가 보일 뿐이었다.
* * *
⌙와…… 뭐야, 끝난 거야?
직경 수십 미터짜리의 움푹 파인 크레이터.
당황해서 제자리에서 날갯짓만 반복하는 하피들.
무심하게 흙먼지를 털어내는 장혜성.
모든 걸 순서대로 확인하고서야 멈춰 있던 시민들의 채팅은 폭발하기 시작했다.
⌙와 개쩐다…….
⌙이게 노년의 카리스마…….
⌙장혜성! 장혜성! 장혜성!
한참을 폭주하는 채팅을 지켜보던 주상혁도 한마디 흘렸다.
“아니야…….”
조금 전에 죽은 저 괴조는 주상혁이 알고 있는 기억 속의 보스가 아니었다.
사건에 대해서 관심 있게 정보를 체크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저런 괴조가 존재했는지 안 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보스는 저 새가 아닌 것만큼은 단언할 수 있었다.
어쩐지 불길함에 쌓인 주상혁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어떻게 하지 지금이라도 가야 하나?”
물론,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갈 수도 있었다.
주상혁이 가지 않아도 의외로 장혜성이 진짜 보스를 해치울 수도 있는 일이었고 상황도 딱히 다급한 상황은 아니었다.
“근데 그 반대라면?”
최악의 경우로 치닫게 되면 그건 그것대로 훨씬 더 귀찮아질 수 있었다.
주상혁이 알고 있는 과거처럼 당장에 S급 브레이크가 충청도 전역으로 확산될 거며 수많은 피해자를 낳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나겠지.”
입 닫고 있어도 상관없었던 S급 던전의 정보를 넘긴 건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함도 있었지만, 100% 선의에서 비롯된 건 아니었다.
이번 일로 인해 연쇄 작용처럼 불러올 사건들 때문이었다.
고민하던 주상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어차피 얻는 게 없는 것도 아니잖아?”
이참에 자잘하게 모이던 잼을 수급할 겸 미리 움직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별일 없으면 돌아오면 되지.”
전이 아티팩트에 저장된 1번을 클릭했다.
* * *
막상 괴조를 고깃덩어리로 만든 장혜성은 여전히 백호의 위에서 굳어 있었다.
장혜성은 여전히 백호의 발아래 짓밟힌 괴조의 시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길드 대표들이 무전을 주고 받더니 잠시후 황급히 달라붙어 말했다.
“상황실에서 철수하라는군요.”
장혜성이 주변에서 조용히 날갯짓하고 있는 하피들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뭔가 이상하군…….”
“이상하다뇨?”
“너무 침착해.”
대표들의 시선이 주변을 바라봤다. 조용히 비행하고 있는 하피들이 보였다.
“확실히 던전 안이라면 이상한 모습은 아니지만…….”
지금은 도심이다.
던전 브레이크로 범람한 몬스터는 무리 습성을 잃어버리지 않고 공격성도 여전하다.
장혜성의 말을 듣고 보니 묘하게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럼 보스가 따로 있다는 말입니까? 대체 어디?”
“그건 이제부터 찾아봐야지.”
장혜성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였다. 주변에 흐르던 기류가 미세하게 변했다.
조용히 비행하던 하피들이 조금씩 높이 날아오르기 시작하더니 공격권 밖으로 날아올랐다.
시꺼먼 그림자가 다시 일대를 덮었다.
“한 가지는 확실해졌군.”
“보스가 따로 있다는 거 말하는 거죠?“
장혜성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한 마리 정도는 맡을 수 있겠나?”
네 마리.
조금 전과 같은 붉은 괴조가 무려 네 마리나 날고 있었다.
먹잇감을 노리듯 하늘을 빙글빙글 돌고 있는 네 마리의 괴조를 본 유정이 말했다.
“일단 해 보겠습니다. 처치할 수 있다는 말씀은 못 드리겠군요.”
“시간을 버는 정도라도 충분하네.”
장혜성이 백호와 함께 건물을 타고 다시 한 번 도약했다.
괴조를 손쉽게 낚아챘던 아까와는 달리 저항이 조금 거셌다.
하피는 꼬리 낫으로 썰어 버리는 데 무리 없었지만, 그 틈에 괴조가 조금 더 높이 날아올랐다.
“츳…….”
급히 백호를 역소환하고는 장혜성이 마나를 손에 집중했다. 번쩍이는 빛과 함께 마나의 사슬이 생겨났다.
장혜성이 사슬을 던져 괴조의 다리에 걸고 원심력을 이용해 단숨에 괴조와 같은 높이까지 날아올랐다.
괴조를 향해 장혜성이 손을 내밀었다.
크르흥.
백호가 주변을 울릴 듯한 포효와 함께 재소환됐다. 괴조의 목을 물어뜯은 백호가 그대로 바닥으로 추락했다.
쿠웅.
백호의 등위로 장혜성이 살포시 착지했다.
“호야, 마나 포다.”
피슈우웅.
또 한 번의 마나 포.
이번에도 괴조 한 마리가 목을 잃고 사라졌다.
조금 전과 다르게 장혜성의 이마에 땀방울이 하나 맺혔다.
차오르는 숨을 녹일틈도 없이 장혜성이 한 손을 콰득 쥐었다.
반대편 손 위로 또 다른 괴조의 다리에 걸린 새로운 사슬이 생겨났다.
붉은색 마나의 깃털을 뿌리는 괴조의 공격을 피해 장혜성이 백호의 꼬리에 사슬을 감았다.
“당겨라.”
백호가 그대로 꼬리를 채찍처럼 휘둘렀다.
백호의 꼬리에 쥐불놀이 깡통처럼 큰 원을 그리며 날아간 괴조가 건물 벽에 박혔다.
장혜성이 백호의 다리에 손을 가져댔다. 장혜성의 마나를 받은 백호가 세 번째 마나 포를 발사했다.
피슈우웅.
수십 층짜리 건물이 괴조와 함께 통째로 소멸하는 놀라운 모습이 보였다.
“이제 두 마리.”
그중에 한 마리는 다른 대표들이 맡고 있다.
사실상 온전히 단신으로 처리해야 할 건 한 마리였다.
“어서 처리하고…….”
한층 더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고 마지막 한 마리를 처리하려던 장혜성이 급히 고개를 틀었다.
조금 전까지 아무도 없던 아스팔트 8차선 도로 위에 서 있는 여성이 보였다.
* * *
장혜성의 무쌍이 계속되는 와중에 등장한 여자를 본 네티즌들의 채팅이 빠르게 올라왔다.
⌙뭐임? 저 여자는?
⌙몬스터일 거 같은데?
⌙저렇게 인간하고 똑같은 형태의 몬스터 들어 본 적 있음? 난 없는데…….
⌙와 근데 개예쁘다. 반할 거 같음.
갈색 머리칼과 요염한 붉은 눈동자.
쭉 빠진 몸매에 가릴 것만 겨우 가린듯한 거적때기 복장.
방심하면 금방이라도 홀릴 듯한 절정의 미모까지.
넋 놓고 상황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채팅을 쳤다.
⌙어? 장혜성이 혼자서 달려드는데?
⌙거봐 몬스터라니까!
백호를 타고 여자에게로 달려드는 장혜성의 모습이 보이자 곧이어 하피들이 발작 일으키듯 막아서는 모습이 보였다.
물론, 다음 장면은 거대한 꼬리 낫에 그대로 토막 나는 하피들의 모습이었다.
⌙와 조금 전에 본 건데 또 소름 돋음…….
⌙국내 최강 맞는다니까!
단숨에 여자의 코앞까지 이동한 백호의 큼지막한 입이 벌어졌다.
사람들이 당연히 이대로 끝나겠거니 짐작했을 때였다.
찰싹.
언제 꺼낸 지 모를 채찍이 휘둘러지며 뺨을 맞은 백호가 주르르륵 밀려나는 모습이 보였다.
채찍을 꺼내든 여자와 신경전을 벌이던 장혜성이 양손에 사슬을 소환했다.
장혜성이 기다란 뱀처럼 여자를 향해 사슬을 날려 목과 한쪽 팔을 구속했다.
⌙오, 이번에야말로 끝났다.
⌙마나 포 한입 드쉴?
장혜성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피어났다.
보는 시청자도 장혜성도 이번에야말로 승리를 직감하는듯했다.
백호가 난데없이 돌연 난동을 부리기 전까지는……
⌙헉……
⌙떨어졌다!
백호의 등에서 떨어진 장혜성이 흠칫 놀라 사슬을 놓고 바닥을 굴렀다.
백호가 어째선지 장혜성을 발로 내리찍었기 때문이었다.
⌙뭐임?
⌙지금 장혜성을 공격한 것같이 보인건 나뿐이죠?
장혜성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한 게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 만큼은 분명하다고 시청자들도 생각했을 때였다.
그 예상이 맞는다는 듯 백호의 주둥이가 장혜성을 향해 벌려졌다.
⌙마나 포다.
⌙헐…… 미친.
백호의 마나 포를 완전히 피하지 못하고 휘말린 장혜성이 튕겨 나가 데굴데굴 굴렀다.
휘리릭.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빨리 일어나려는 장혜성의 목으로 때마침 여자의 채찍이 날아들어 휘휙 감겼다.
⌙아악…….
⌙안 돼!
여자의 채찍에 저항하던 장혜성의 몸이 붕 떴다.
수십 미터를 당겨 날아온 장혜성의 심장을 여자의 손이 꿰뚫는 게 보였다.
* * *
심장을 꿰뚫린 장혜성이 피를 한 모금 토해 냈다.
부르르 떨리는 눈으로 장혜성이 백호를 바라봤다.
무언가에 홀린 듯한 적개심이 느껴지는 붉은 눈으로 노려보는 백호를 눈에 담는 것을 마지막으로 장혜성의 눈이 감겼다.
“이 몸에게 쓸 만한 애완동물을 진상해 줬으니, 답례로 편히 죽여 줬느니라.”
여자가 하피와 싸우고 있는 길드 대표들에게 시선을 옮겼다.
“나의 딸들을 도륙하는 부랑자들을 처리해라.”
백호가 대표들을 향해 주둥이를 벌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서민준이 말했다.
“야, 차예설!”
“알아요!”
차예설이 백호의 마나 포에 대비해 신성력으로 거대한 방패를 만들었다.
콰르르르릉.
다행히 첫 번째 마나 포는 차예설의 방패에 막혀서 소멸하는 모습이었다.
서민준이 아스팔트 위를 피로 적시는 장혜성을 보고 말했다.
“야 아무래도 저건 못 살리겠지?”
“힐이 만능인 줄 아세요? 이미 죽은 사람은 못 살려요. 물론 지금이라면 완전 무리가 아닐 수도 있지만.”
연달아 날아오는 마나 포를 막아 내는 것도 벌써 한계였다.
“어떻게 하죠? 무슨 방법 없어요?”
“그런 방법이 있겠냐?”
두 마리의 괴조를 필두로 하피들이 쉴 새 없이 공격해온다.
회복 포션을 미리 넉넉하게 챙겨 왔음에도 한계인지 다른 길드 대표들은 입을 앙다문 채 아무런 말도 없었다.
“젠장……. 백호 새끼…….”
아군일 때는 듬직했지만, 적이 되니 재앙과 다를 게 없었다.
“우리 이렇게 된 이상. 서로 원망하기 없기 어때요?”
“산개하자는 건가?”
“저희가 죽는 거로 끝날 게 아닙니다. 누군가는 살아서 다음을 기약해야죠.”
전국적으로 사태가 확산될 가능성이 있었다.
여기서 두어 명이라도 살아가서 남은 대표들과 합류하면 그래도 아직 해 볼 만했다.
“야, 차예설 우린 왼쪽 길로 도망간다.”
“네? 방금 산개하자고…….”
“보조 계열 혼자 가면 언밸런스잖아.”
서민준이 다른 대표들을 보며 말했다.
“불만 없죠?”
“물론입니다.”
차예설이 쩌저적 금이 가는 방패를 보고 말했다.
“방패가 깨지면 도망가는 겁니다.”
“누가 될지는 모르지만, 살아서 만나지. 난 살아남을 거니까.”
다시 한 번 백호의 마나 포가 장전되는 것을 확인하고 대표들이 각자 흩어지려고 할 때였다.
번쩍.
하늘을 바글바글 채운 수만 마리의 하피 떼 중앙으로 거대한 빛기둥이 내렸다.
파지지직, 파지지지지직.
눈이 멀어 버릴 듯한 강렬한 빛이 가시고 숯덩이가 된 수천, 수만 마리의 하피들이 뒤늦게 떨어져 내렸다.
백호를 짓누르는 해태와 함께 등장한 주상혁이 뒤편의 여자를 돌아보며 말했다.
『Lv.83 하피 퀸.』
“뭐, 레벨이 그렇게 높진 않네.”
* * *
차예설의 방패가 깨지기 바로 일보 직전.
그 모습을 지켜보는 시청자들의 분위기는 암울했다.
거창하게 나섰던 첫 번째 토벌은 실패로 돌아갔음을 지켜보는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백호 저 새끼 때문에 다 망했어.
⌙이제 어쩌지? 백호면 SS급 소환수라며? 저걸 무슨 수로 막아?
⌙미국이나 중국에 손 벌리는 수밖에 딴 거 있음?
⌙주상혁은 어떤가요? 주상혁도 SS급 소환수 있다면서요? 해태좌라면서요?
⌙해태좌는 무슨 해태까지 냉큼 갖다 바칠 일 있음?
이렇게 된 거 채팅창에선 이미 한 명이라도 더 살아오길 바라는 분위기였다.
현대 사회는 이미 각성자가 곧 국력인 시대.
뛰어난 각성자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뛰어난 전략적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됐고, 이렇게 된 거 한 명이라도 더 살아서 오길 빌자.
⌙맞아요. 여기서 다 죽으면 진짜 난리 남.
⌙제발 제발 차예설은 살려 주세요. 보조 계열이 얼마나 귀한데……
모두가 이미 희망을 놓은 그 순간.
갑자기 하늘에서 벼락이 쳤다.
족히 수만 마리의 하피가 일제히 잿더미가 되어 떨어져 내리는 모습은 어안이 벙벙할 정도의 위력이었다.
⌙주상혁이다.
⌙해태좌!
하지만 기쁨도 잠시, 상황을 냉철하게 보고 있던 사람들의 비난이 쏟아졌다.
⌙아니, 시발! 니가 거길 가면 어떡하냐고!
⌙아놔!! 백호 하나도 버거워 죽겠는데 트롤짓 제대로 하네!
망했다.
다 망했다는 분위기였다.
하피퀸의 능력은 아무래도 정황상 마인드 컨트롤 쪽이 유력해 보였고 마찬가지로 해태를 빼앗기면 주상혁이 어떻게 될지 불 보듯 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백호를 빼앗긴 장혜성의 최후가 어땠는지 모두 똑똑히 지켜본 사람들이었기에 더욱 분노했다.
주상혁과 하피퀸이 서로를 바라보는 모습이 한동안 지속됐다.
⌙근데 섣불리 움직이지는 않네?
⌙어? 뭐라고 중얼거린다. 뭐라고 한 거지?
하피퀸과 기 싸움을 하던 주상혁이 뭐라고 중얼거리는 걸 봤는지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입 모양만 보고 잘 맞히는 사람 있던데 능력자 없나요?
⌙지금 뭐라고 한 거임?
⌙뭐래? 개년이. 아님?
⌙에이 설마요.
⌙어? 움직인다. 어떡해 진짜 별일 없겠죠?
짓누르던 백호를 놔두고 해태가 하피퀸을 향해 천천히 다가가기 시작했다.
하피들이 달려들었지만 접근조차 하지못하고 그대로 숯덩이가 되며 떨어져 내렸다.
천천히 해태가 걸어오는 걸 지켜보던 하피퀸이 채찍을 휘둘렀다.
채찍이 연달아 해태를 때렸다.
⌙아…… 망했다.
⌙뭐 하냐고! 싸우기로 판단한 거였으면 단숨에 처리했어야지!
지켜보는 시청자들의 머리털 빠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해태를 수십, 수백 방 채찍질하고 나서 기세등등한 하피퀸의 모습을 보자니 스트레스받지 않으면 더 이상했다. 그런데…….
채찍질이 멈추고 잠시 후였다. 하피퀸이 뭐라고 중얼거리자 해태의 앞발이 들렸다. 그리고…….
하피퀸의 머리를 사정없이 내리찍었다.
도로 위 아스팔트에 하피퀸이 못 박히듯 5분의 1쯤 박혀 들어갔다.
* * *
유감스럽지만 주상혁이 한 말은 어느 시청자의 예상대로 비문이 맞았다.
“뭐래, 개년이.”
주주를 보자마자 탐욕에 젖은 눈을 뜨더니 진상하라느니 뭐라느니 개 같은 말을 하기에 뱉은 욕이었다.
주상혁이 별말을 하지도 않았는데 기분이 나빴는지 주주가 백호를 내버려 두고 멋대로 돌아섰다.
하피퀸을 향해 걸어간 주주에게 하피퀸의 채찍이 난무했다.
“주주야 밟아 버려.”
웡!
쾅, 쾅, 쾅.
대못 박듯 앞발로 주주가 수십 번 망치질하기 시작했다.
하피퀸이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고 아스팔트 바닥 그 아래로 모습을 감췄다.
주상혁이 지켜보다가 고개를 갸웃하고 물었다.
“어때 죽은 거 같아?”
웡?
주주도 주상혁을 따라 고개를 갸웃했다.
‘잘 모르겠다는 건데……’
잠시간 주주의 위에서 생각하던 주상혁이 하피퀸은 일단 내버려 두기로 결정했는지 폴짝 뛰어내렸다.
“일단 주주는 들어가 있어.”
웡!
주주가 주상혁의 몸속으로 증기가 되어 사라지자 주상혁이 유독 시끄러운 곳을 바라봤다.
이리저리 날뛰는 백호가 보였다.
“왜 저런데?”
조금 전과는 다르게 완전히 이성이 마비되어 날뛰는 모습이었다.
다른 대표들뿐 아니라 공격할 수 있는 거리에 있으면 하피도 서슴지 않고 마구잡이로 토막 내고 있었다.
일단 백호를 진정시킬 생각으로 주상혁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주상혁이 열댓 걸음 걷자 백호가 멈칫하더니 주상혁을 바라봤다.
뚫어져라 주상혁을 바라보던 백호가 갑자기 꼬리 낫을 휘둘렀다.
가볍게 허리를 숙여 피하고는 주상혁이 낫으로 변하지 않은 중단부분을 잡고 강하게 당겼다.
백호가 붕 날아서 주상혁에게 날아왔다.
주상혁이 주먹을 콰득 쥐고는 백호의 얼굴에 주먹을 내리꽂았다.
파앙.
백호가 맥없이 날아가다가 꼬리를 팽팽하게 만들더니 바닥으로 떨어졌다.
쿠아앙!
주상혁이 백호가 일어나 포효하자 주상혁이 다시 강하게 잡아당겼다.
쿠아아앙!
파앙.
당기고 날려 버리고 당기고 날려 버리고의 반복이었다.
꾸우웅…….
주상혁이 그 짓을 한 서른 번쯤 반복했을 때였다.
붉은 눈의 백호가 혼이 난 강아지처럼 축 몸을 늘어트리고 얌전해졌다.
주상혁이 그제야 꼬리를 놓고는 백호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백호가 움찔 놀라 물러나려다가 주상혁의 얼굴이 험악해지자 도로 앉았다.
백호의 숨소리가 느껴질 만큼 가까이 간 주상혁이 손바닥을 내밀었다.
백호가 손위로 턱을 들이밀었다.
“착하네.”
주상혁이 테이밍을 사용했다. 메시지가 떠올랐다.
백호를 굴복시키셨습니다.
백호의 주인으로 인정받았습니다.
백호와 주종 계약을 하시겠습니까? Yes/No.
주주처럼 종속 계약은 친밀도가 부족하기 때문인지 역시 불가능했다.
하지만 지금으로써는 이걸로도 충분했다. 적어도 날뛰는 녀석을 잠재울 수는 있을 테니까.
주상혁이 Yes를 선택하자, 초록색 빛과 함께 백호가 조그마한 고양이로 돌아왔다.
『Lv.51 백호.』
“츳…… 생각보다 레벨이 낮잖아?”
* * *
칠흑 같은 암흑.
하피퀸은 그 속에서 눈만 멀뚱 멀뚱 감았다 뜨고 있었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정수리에서 전해지는 통증이 말해 주지만, 납득할 수가 없었다.
자신은 태어날 때부터 완벽한 존재였다.
한평생을 의미 없이 비행하다 사라지는 일반 하피들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모든 것 위에 군림하고 사육하는 하피퀸.
그야말로 엘리트 몬스터로서 모든 이의 환심을 사는 여왕이었다.
그런데 난생처음이었다.
자신의 채찍질을 맞고도 자신에게 호의를 보이지 않는 녀석은 처음이었다.
하피퀸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애완동물 주제에!”
하피퀸이 마나를 폭발시켰다.
콘크리트가 터져 나가며 커다란 크레이터가 생겨났다.
“편히 죽을 생각은 하지 마라.”
* * *
주상혁은 백호의 테이밍을 끝낸 후 역소환하고는 하늘 바라봤다.
『Lv.67…….』
『Lv.76…….』
『Lv.75…….』
『Lv.66…….』
“죽은 거 같지는 않은데.”
하늘을 비행하는 두 마리의 괴조와 수만 마리의 하피들의 눈빛이 여전히 흉흉하다.
조금이라도 당황하는 기색이 있어야 할 텐데 그런 게 전혀 없었다.
주상혁이 아스팔트 위에 생겨난 구멍을 돌아봤을 때였다.
쿠구구궁.
미약한 지진과 함께 구멍 주변의 지면이 가루도 남기지 않고 일순간에 사라졌다.
“뭐…… 당연한 건가?”
『Lv.83 하피퀸.』
다시 등장한 하피퀸의 분위기는 많이 변해 있었다.
주상혁마저 한순간이나마 홀릴 법한 고혹적인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날을 세운 기다란 손톱과 산발이 되어 흩날리는 머리칼, 맹금류의 눈동자를 빼다 박은 듯한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죽여 주마!”
주상혁이 엄청난 속도로 쇄도해 할퀴려는 손목을 잡아 세웠다.
하피퀸이 돌연 웃기 시작했다.
“크크크큭.”
“뭘 처웃고 지랄…….”
주상혁이 흠칫 놀라 몸을 옆으로 틀었다.
뒤편에 정성호가 대뜸 주먹질을 날려 왔다.
『Lv.77 정성호.』
이어지는 정성호의 주먹질에 일단 손목을 놓고 훌쩍 물러난 주상혁이 상황 파악을 했다.
붉은 눈을 한 정성호를 비롯해 적의를 풀풀 풍기는 다른 대표들이 보였다.
으호호호.
하피퀸이 오만한 목소리로 조소했다.
“왜, 채찍질을 해야만 컨트롤할 수 있다고 생각했느냐?”
“…….”
주상혁이 잠시간 생각하다가 픽 웃었다.
“재밌네. 그래서 더 보여 줄 건 없냐?”
“허, 허세가 심한 놈이로구나!”
하피퀸이 다섯 대표들에게 공격을 지시하다가 흠칫 놀랐다.
자신의 명령에 공격 태세로 들어가려던 대표들을 물고 늘어지는 조금 작은 해태들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주상혁의 뒤편에는 어느덧 커다란 주주도 서 있었다.
주상혁이 말했다.
“더 없냐니까?”
파지지직.
옴짝달싹 못 하는 대표들을 보고는 하피퀸이 입술 와락 깨물었다.
“없나 보네.”
주상혁이 한걸음 내디뎠다.
하피퀸의 명령인 건지 자의인지는 모르겠지만, 위협을 느끼고 뒷걸음질 치는 하피퀸 앞으로 거대한 괴조 두 마리가 날아들었다.
주주가 어림도 없다는 듯 단숨에 태워 버렸다.
“방해하는 놈이 있으면 처리해.”
웡!
주상혁이 천천히 걸어갔다. 하피퀸과의 거리가 점차 좁혀질 법도 한데 계속 물러나기만 하자 주상혁이 말했다.
“도망만 칠 거냐?”
주상혁이 침을 꺼내 들고는 쇄도했다.
침을 경계하고 있는 하피퀸이 반대 팔에 주먹을 얻어맞고 인상을 구겼다.
‘침이 아니야…….’
푸부북.
오른쪽 어깨 부근에 다수의 침이 박힌 건 그 뒤였다.
주상혁에게 복부를 니킥으로 얻어맞은 하피퀸이 지면에 발을 대고 주르륵 물러나서 털썩 무릎 꿇었다.
언제 꺼낸 지 모를 침들이 연달아 하피퀸의 전신에 박히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옴짝달싹 못 하는 하피퀸의 미간에 침을 던지려던 주상혁이 멈칫했다.
때마침 구석에 죽어 있는 장혜성이 보인 이유였다.
“나와 봐.”
주상혁의 말에 10m는 거뜬할 것 같은 백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Lv.85 백호.』
주상혁의 마나를 빌린 탓인지 레벨도 51에서 많이 올라가 있었다.
“옛 주인을 위해서 정리는 네가 하는 걸로 하자.”
어흥.
백호가 큼지막한 주둥이를 벌렸다.
장혜성이 쏘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큼지막한 마나 입자가 모이기 시작했다.
살벌한 한 방을 직감이라도 한 것인지 하피퀸이 돌연 50m도 넘는 괴조가 되어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주상혁이 그 모습을 보고는 픽 웃으면서 백호의 다리 한쪽을 팍 찼다.
“시원하게 향 한 번 피워 보라고.”
백호의 마나 포가 거대화한 하피퀸을 향해 쏘아졌다.
피슈우우우우우웅.
단방에 하피퀸을 녹여 버린 마나 포가 건물과 빌딩을 깡그리 지워 버린 것도 모자라 2km쯤 떨어진 산에 직격했다.
산이 마나 포와 함께 소멸했다.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산이 위치한 곳에서 뒤늦게 향을 연상시키듯 연기가 한 가닥 피어났다.
* * *
주주의 망치질에 땅으로 깊숙이 들어간 하피퀸을 보고 벙쪄 있던 채팅창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죽은…… 거임?
⌙설마 저걸로 죽었겠음? 분위기도 딱 보니 안 죽었네.
⌙죽은 거 같은데요? 해태를 역소환했잖아요.
⌙와, 해태 졸 세다.
⌙역시 다 계획이 있었던 거네요.
⌙방금까지 욕하던 사람들 표정 개 궁금함.
한창 해태와 주상혁에 대해 긍정적인 이야기를 하던 채팅창이 연이어 백호를 두들겨 팰 때는 조금 분위기가 달라졌다.
사탄도 울고 갈 법한 주상혁의 공격에 조금 전까지 욕하던 백호 편을 들 정도였다.
⌙와…… 솔직히 처음엔 좀 속 시원하긴 했는데
⌙맞아요. 이쯤 되니까 뭔가 불쌍하네요…….
⌙그만 때려 싸이코야!
⌙뭐죠? 왜 쪼그마해진 거예요? 완전 귀엽다.
⌙설마 계약한 거임? 물론 진정시킬 수 있는 방법도 저거뿐이긴 하다만…….
백호가 혜성의 건지 주상혁의 건지에 대한 토론이 시작됐다.
⌙이제 이러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백호 주상혁 거임? 혜성길드 거임?
⌙주상혁 거지 ㅋ 주운 놈이 임자임.
⌙뭐래 당연히 혜성 거지 염치가 있으면 나중에 돌려주지 않겠냐?
시청자들이 백호의 행방에 대해서 열띤 토론을 할 때였다.
등 뒤에서 큰 폭발을 일으키며 하피퀸이 재등장했다.
⌙아까 그분 맞으신가요?
⌙와, 꿈에서 나올 거 같아, 개무섭네…….
⌙어…… 어어어?
⌙정성호가 왜 주상혁을 공격하는 거임?
⌙설마……?
설마는 역시나였다.
정성호를 비롯한 모든 대표들이 눈이 획 돌아가 있었다.
⌙아니 소환수가 아니라, 사람도 조종할 수 있으면 개사기잖아!
⌙이러면 주상혁이 혼자서 처리해야 하는 거임?
⌙도, 도망쳐 해태좌!
하피퀸의 공격 지시가 마침내 떨어졌을 때였다.
⌙해태 한 마리가 아니었음?
커다란 주주 말고도 대표들을 앙 깨물고 있는 다섯 마리의 작은 해태가 보였다. 시청자들이 혼란스러워하기 시작했다.
⌙와, 뭐야! 하피퀸이 사기가 아니라 해태좌가 사기였네! SS급 소환수가 몇 마린데?
⌙이걸로 국내 원탑은 주상혁이다. 토를 다는 놈들은 오늘부터 주상혁 팬클럽에서 ‘제명’이다
⌙국내 원탑 같은 소리 하네 백호에 해태만 여섯 마리인데 세계 최강임.
⌙아…… 그건 좀…….
주상혁이 이어서 단숨에 코너까지 하피퀸을 몰아넣고 마무리하기 전에 멈칫하자 사람들의 머리에 의문이 피어났다.
⌙왜 안 끝내는 거임?
⌙그거 그냥 푝 하고 던지라고.
⌙어허…… 기다려 보셈.
결국, 침을 갈무리한 주상혁이 백호를 꺼내는 사이 하피퀸이 거대화해서 날아올랐다.
화면에 다 담아지지도 않는 거대한 모습에 사람들이 깜짝 놀랐을 때였다.
피날레를 장식하는 백호의 마나 포.
이미 몇 차례 생생하게 목격했던 마나 포와는 질적으로 다른 임팩트를 확인한 채팅창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 * *
S급 던전의 보스를 처치했습니다.
공헌도가 상승합니다.
“잼은 바로 안 주는 건가?”
던전 형식이 아니라, 던전 브레이크이다 보니 아무래도 클리어 기준이 몬스터의 박멸인가 보다.
주상혁이 떠오른 메시지를 닫고는 돌아섰다.
붉은 눈으로 노려보던 대표들의 눈에 초점이 돌아온 게 보였다.
주주와 백호를 연달아 역소환한 주상혁이 인벤토리를 켰다.
충전이 완료된 아티팩트 하나를 꺼내서 조작하다가 주상혁이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좀 남았나?”
하늘에는 아직도 수만 마리의 하피가 존재했다.
주상혁의 시선을 받은 하피가 당황해서 흠칫하는 모습이 조금 전과는 확실히 무언가 달랐다.
주상혁이 하피들을 뒤로하고 대표들을 바라봤다.
주상혁의 시선을 받은 대표들도 움찔하는 모습이 보였다.
“혹시 제가 남은 녀석들까지 처리해 줘야 합니까?”
“어차피 우리도 철수할 생각이었으니까…….”
너 나 할 것 없이 도리질 치는 고개를 보아하니 대답한 유정 말고도 생각은 비슷해 보였다.
‘몸이 좀 저릴 텐데…….’
조금 생각하던 주상혁이 말했다.
“뭐, 불편하다는데 어쩔 수 있나.”
보조 계열 각성자도 있으니 알아서 잘 대처하겠거니 싶었다.
주상혁이 2번을 클릭하고는 인사를 남겼다.
“그래요? 그럼 열심히 해 보세요.”
검은색 마나의 막이 주상혁의 위로 생겨났다. 잠시 후 주상혁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주상혁이 사라지자 유정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뭘 안도하고 그래?”
정성호였다.
“우리는 이제부터 시작이잖아.”
주상혁이 사라지자 눈치를 보던 하피들이 사방팔방 흩어지고 있었다. 공격성을 잃지는 않았겠지만, 구심점을 잃은 만큼 개인의 의사로 움직일 테니 어디로 튈지 몰라 더 골치 아팠다.
“그렇군요…… 저걸 다 처리하는 데에도 한동안 고생 좀 하겠어요.”
* * *
S급 던전의 소동이 있고 사흘이 지났다.
사흘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그렇다고 무언가 달라진 건 없었다.
여전히 청주에서는 하피의 잔당을 처리하기 위해 고위 각성자들이 고군분투하고 있었고 충북 일대로 내려진 피난령은 아직도 유효했다.
각종 언론 매체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매일같이 S급 던전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다.
목소리도 다 제각각이었다.
주주의 등급이 사실은 더 높은 게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었고, 주상혁도 S급이 아니라, SS급 아니냐 하는 글도 있었고 이번 S급 소동으로 인해서 해외에서 주상혁을 자국으로 데리고 가기 위해 거액의 계약서를 준비한다는 출처 모를 찌라시도 나돌았다.
물론 인터넷에서 시끄러운 화두들은 모두 ‘기승전주상혁’으로 끝나고는 했지만, 그 댓글 중에는 주상혁에 대한 좋은 감정만 있는 건 아니었다.
어째서 하피들을 그 자리에서 처리하지 않았냐는 책임을 묻는 목소리도 있었다.
⌙보스 때려잡아 줬으면 됐지 뭘 더?
⌙응, 다음 청주 시민.
⌙진짜 이런 댓글 보면 청주 안에다가 집어 던져 버리고 싶음.
⌙당신에겐 양심이란 것도 없습니까?
물론 이런 목소리가 나오면 금세 수십, 수백 개의 댓글질을 맞고 사라져 버렸지만, 여하튼 그랬다.
할 일이 없어서 관련 기사를 쓱 훑어보던 주상혁이 수십 개의 댓글 중에서 유독 눈에 띄는 아이디에 멈칫했다.
“이 사람은 할 일도 없나?”
주상혁을 비난하는 댓글에 가보면 항상 눈에 띄던 아이디였다.
앞에 공개된 네 자리의 아이디가 묘하게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kangxxxx.
“에이, 아니겠지.”
이 나라에 강 씨가 몇 명인데 아니겠지 싶었다.
막말로 저게 강혜영이면…….
Han1xxx.
Joo3xxxx.
자주 보이는 이 두 사람은 한혜지와 주화영이 돼도 이상할 일이 없었다.
본인이 생각하고도 어이가 없었는지 잠금 버튼을 누르고 핸드폰을 대충 던져놓은 주상혁이 회관 거실로 나왔다.
『Lv.70 주주.』
『Lv.53 백호.』
주상혁이 와구와구 밥을 먹는 두 녀석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나저나 이 녀석도 잘 먹는 게 의외였지?’
주상혁이 만든 사료를 거르지 않고 잘 먹는다.
덕분에 레벨도 그새 2레벨이나 올랐다.
원래 주주처럼 이런것만 먹는 건가 싶었지만, 그렇지도 않은 거 같았다.
어제는 주상혁이 고구마를 까먹고 있자니, 와서 받아먹던 녀석이었다.
‘주주랑 다르게 그냥 잡식인 거 같아서 마음이 편하긴 하네.’
주상혁이 백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맛있냐?”
냐아앙.
“그래? 많이 먹어라.”
주상혁이 백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핸드폰에 전화가 걸려 온 이유였다.
“네, 무슨 일이세요?”
“상혁아 잠깐 시간 되느냐?”
전화는 주재호에게 걸려 온 것이었다.
“무슨 일이신데요?”
“그 얼마 전에 돌아가신 장 대표님 있잖느냐? 오늘부터 공개조문을 시작했다는구나 조문을 가는 게 모양새가 좋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다.”
밥을 먹는데 정신없는 두 녀석을 확인한 주상혁이 일단 회관 밖으로 나가서 입을 열었다.
주상혁이 자리를 뜨자 밥을 먹고 있던 주주의 기세가 돌변했다.
주주가 백호를 향해 달려들어서 머리통을 팡팡 때리기 시작했다.
몇 대 얻어맞던 백호가 안 되겠다 싶었는지 도망치기 시작했다.
구석에 몰린 백호가 깜짝 놀라 머리를 감싸고 쭈그렸다. 주주의 망치질이 계속됐다.
주상혁이 회관으로 다시 들어온 건 주주의 구타가 계속될 때였다.
밥그릇 앞에 두 녀석이 없자 주상혁이 황급히 두 녀석을 찾았다.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는지, 주상혁이 달려가 주주를 안아 들었다.
“왜 또 싸우고 그래.”
정확히는 주주가 일방적으로 두들겨 패는 거지만 여하튼 그렇게 말했다.
엄밀히 말하면 주워 온 백호보다 주주 쪽에 애정이 더 가기 때문인 건 어쩔 수 없었다.
‘뭐, 어차피 곧 보내 줄 녀석이기도 하고.’
주상혁의 말에 주주가 답했다.
와와왕.
“백호가 째려봤다고?”
냐냐냥!
“백호는 아니라고 하는 거 같은데?”
주주가 불만스러운 기색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백호는 저기 가서 밥 먹어.”
주주의 눈치를 보다가 쏜살같이 백호가 거실로 가버리자 주상혁이 주주를 내려놓고 타이르듯 말했다.
“왜 자꾸 때리는 거야? 친구 생기면 좋은 거잖아.”
와왕와왕.
“저 녀석이 왜 친구냐고?”
“친구 하기 싫어? 너 동물 친구 좋아하잖아.”
뿌루루에는 또 그렇게 환장하면서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주주의 여전히 불만스러운 모습을 보다가 주상혁이 슬쩍 물었다.
“혹시 주주 질투하는 거야?”
와왕!
“에이, 아니긴 맞는구만.”
주상혁이 주주를 얼굴에 비비며 말했다.
“형이 되어서 동생 좀 잘 보살펴 주면 좋잖아.”
와왕.
“그래, 형. 주주는 동생이 싫어?”
주주의 처진 귀가 살짝 반응했다.
관심이 있어 보였다.
와왕앙!
“그래 우리 주주 이제 보니 완전 듬직하네?”
주상혁이 주주를 안아 들고 잔뜩 칭찬한 뒤 놓아줬다.
백호에게 걸어간 주주가 백호의 등을 토닥여 주고는 밥그릇 앞으로 가서 밥을 마저 먹었다.
주상혁이 그 모습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
“하여간 어느 놈 강아지인지 귀엽다니까.”
* * *
다음 날 아침 주상혁은 옷을 차려입고 장혜성의 공개 조문에 참석했다.
사실 아직 백호에 대한 문제도 완벽히 끝이 난 게 아니었고 보는 눈이 있다 보니 참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주상혁이 빈소에 향을 피우고 국화꽃을 옮긴 뒤 가볍게 인사하고는 나왔다.
주상혁을 기다렸다는 듯이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여태 요리조리 피해 다니던 주상혁을 마침내 만난 것이니 다들 군침 질질 흘리는 표정이었다.
“주상혁 씨 한 가지 질문드리고 싶은데 괜찮으시겠습니까?”
“…….”
여기저기 터지는 플래시.
남자의 질문이 끝나면 당장에라도 들이밀 준비를 하는 기자들.
탐욕에 담긴 기자들의 표정이 어쩐지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뭡니까?”
“인터넷에서 그런 소문이 돕니다. 백호를 갈취하기 위해서 주상혁 씨가 의도적으로 늦게 개입한 게 아니냐는 소문이요. 이것에 대해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 해서요.”
주상혁도 본적이 있다.
기자의 질문과는 조금 다르지만, 어째서 더 빨리 개입해서 장혜성을 살리지 않았느냐 하는 주장이었다.
적극적으로 던전 진압에 협조할 생각이었으면 처음부터 나섰으면 됐던 일 아니냐고.
하지만 당연히 기자가 지금 내뱉은 말처럼 매운맛 MSG를 잔뜩 친 자극적인 주장들은 아니었다.
기껏해 봐야 딱 아쉬움을 토로하는 수준이었다.
안 그래도 좋지 않던 기분이 팍 상했다.
더욱 자극적인 제목으로 어그로를 끌기 위한 걸 모르는 건 아니지만.
‘협조해 줄 의무는 없지.’
한참 동안 기자를 보던 주상혁이 돌연 큰 소리로 폭소하기 시작했다.
예상외의 반응에 기자들이 단체로 어리둥절한 모습이었다.
야외의 환경임에도 장소가 떠내려갈 정도의 큰 소리로 웃던 주상혁이 웃음을 뚝 멈췄다.
“여보세요, 기자님.”
“아, 네…….”
주상혁이 말했다.
“바라는 게 뭡니까?”
“네?”
카메라가 생으로 돌아가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고 주상혁이 말했다.
“제가 백호를 계획적으로 꿀꺽했다고 칩시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 하시는 거 같은데.”
“저는 그게 아니라…….”
“딱 말해요. 제가 백호까지 얻은 게 아니꼬우니까 제발 해외로 꺼져 달라는 겁니까? 정 그렇다면 못 할 것도 없는데요.”
“…….”
당황한 기자의 시선이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건…….”
주상혁이 마이크를 기자의 입에 가져다 대고 말했다.
“신중하게 생각해보고 말하는 게 좋을 겁니다. 마이크 이게 입앞으로 들이밀면 생각보다 무섭더라고요.”
얼어붙었던 기자가 말했다.
“죄송합니다. 그런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주상혁이 픽 웃고는 기자들을 바라봤다.
금방이라도 마이크를 들이밀 것 같던 기자들이 홍해 바다 갈라지듯 물러났다.
지나가면서 슬쩍 기자의 표정을 확인했지만, 곱지 못했다.
‘인성 쓰레기라고 떠벌리고 다니는 거 아닌지 몰라.’
뭔가 걱정되긴 했지만 통쾌한 기분으로 주상혁이 개의치 않고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기자의 숲을 벗어나자 주상혁의 앞으로 남녀가 다가왔다.
검은 계열의 정장을 차려입은 모습이 얼굴을 확인하게 만들었다.
남자는 모르겠지만, 여자의 얼굴은 주상혁도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Lv.66 장민주.』
“무슨 볼일이라도?”
“잠깐 대화를 하고 싶습니다.”
* * *
혜성길드와는 솔직히 할 이야기가 있다.
백호에 대한 문제는 솔직히 주상혁으로서도 그냥 넘길 일은 아니었으니까.
주주처럼 우연히 줍긴 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백호는 주주와는 매우 다르다.
‘백호’ 하면 혜성이 떠오르고 ‘혜성’ 하면 백호를 연상시킬 정도로 상징성이 깊기 때문이다.
시큼한 자몽에이드를 한 모금 마시자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자리가 너무 쓰지도 달지도 않은 딱 이 음료의 맛 같은 느낌이라고.
“그래서 하고 싶은 말씀은? 역시 백호에 관한 겁니까?”
옆자리의 장민철이라는 이름의 중년 남자와 눈짓를 주고받더니 장민주가 말했다.
“네, 그렇죠.”
주상혁이 조금 생각해 보다가 말했다.
“백호 달라고 하면 못 줄 것도 없습니다.”
“네?”
두 사람다 예상하지 못한 답변이라는 반응이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장민주가 말했다.
“뭐죠? 그 조건이란 게?”
“백호를 계약해서 데려가세요. 애초에 휘두르지도 못하는 검을 탐낸다는 거 웃기잖아요?”
“…….”
주상혁이 내친김에 말을 더했다.
“계약을 하는 건 굳이 장 대표님과 친인척 관계일 필요는 없습니다. 생판 남이라도 혜성 측에서 대리인으로 세운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 납득할 게요. 물론, 노란 머리 코쟁이면 조금 곤란하겠지만.”
외국인은 솔직히 조금 곤란했다. 주상혁이 백호를 반환하겠다는 것도 주인을 잃어버린 백호로 발생하는 문제 때문에 첫 번째.
장혜성과 다수의 S급 각성자를 잃으면서 발생하는 문제를 예방하기 위한다는 두 번째 이유까지.
이대로 가면 여러 가지로 주상혁이 감당해야 할 문제들을 피해가기 위함이 세 번째였다.
‘그런데 외국인은 곤란하지.’
혹시 백호만 꿀꺽하고 도망가 버리면 주상혁으로써는 반환하는 진짜 상황이 애매해진다.
주상혁이 마주 앉은 두 사람의 답변을 기다리자 장민철이 말했다.
“혹시 돈으로 넘기실 생각은 없습니까? 정말 큰돈을 드리겠습니다.”
“죄송하지만, 돈이 궁한 건 아니라서요.”
장민철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장민주와 시선을 주고받더니 장민철이 입을 열었다.
“아마 주상혁 씨도 알고 있는 이야기를 조금 하려고 합니다.”
“제가 알고 있는 이야기? 저 별로 발이 넓은 편은 아닌데요. 제가 알고있는 거 확실해요?”
“네, 많이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뭔데요?”
장민철의 표정이 진지하다.
“백호를 길들일 수 있는 자에게 혜성길드의 대표 자리를 양보하겠다는 소문 말입니다.”
“아…….”
주상혁도 들어보긴 했다.
혜성길드와 엮이면서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는 이야기…….
‘잠깐?’
주상혁이 아무 생각 없이 자몽에이드를 빨대로 한 모금 하다가 사레들려 켁켁 기침했다.
“설마?”
“네 맞습니다. 저희 딸 민주와 정식으로 잘해 보실 생각은 없습니까?”
혜성길드의 사위 제안.
아무래도 수십 년에 걸쳤어도 찾지 못했던 적합자를 찾는다는 가능성보다 이쪽을 선택한 듯했다.
‘그런데 듣기로는 장민주가 이 제안에 상당히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는 걸로 들었는데…….’
막상 표정을 확인해 보니 또 그렇게까지 암울한 표정은 아니다.
도축장에 끌려가는 소 정도는 아니고 폭삭 망한 성적표를 들고 귀가하는 학생의 표정 정도?
“당사자는……?”
“저는 상관없어요. 뭐 그렇게 나쁜 사람도 아닌 거 같고.”
특유의 새침한 목소리가 들리고 잠시 후였다.
주상혁이 뭐라고 입을 열려는데 주상혁의 등 뒤 테이블에서 들썩이며 일어나는 사람이 있었다.
“안 돼요!”
색 있는 선글라스와 예쁜 빵모자를 눌러쓴 강혜영이었다.
“뭐야, 너 왜 여기에.”
강혜영이 주상혁의 팔 소매를 잡아끌었다.
“뭔데, 왜 그래?”
강혜영이 주상혁이 쉽게 끌려오지 않자 장민주를 휙 노려봤다.
장민철이 말했다.
“저, 상혁 씨 이쪽 분은?”
“저, 그게…….”
강혜영이 주상혁의 옆구리를 쿡 쑤시더니 다시한번 끌었다.
주상혁이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혜영이 잡아끌고 멋대로 밖으로 나왔다.
강혜영이 이끄는 대로 끌려가길 오 분쯤, 주상혁이 어디까지 이러고 가나 싶은 의문이 들 무렵 풀이 죽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해요.”
“어?”
“중요한 상황인 건 아는데 저도 모르게 화가 나서…….”
혼이 난 고양이처럼 풀이 죽어 있는 강혜영을 보며 주상혁이 피식 웃었다.
“뭐, 대단한 거라고, 어차피 거절하려고 그랬기도 했고.”
강혜영이 잡고 있는 팔을 떼어 내며 말했다.
“이번만 봐 줄게 특별히.”
주상혁이 어딘가로 걷기 시작하자 강혜영이 따라붙으며 말했다.
“어디 가요? 아까 거기 가게요?”
“내가 미쳤냐? 집에 가야지.”
“그러지 말고 저랑 같이 점심 먹으면 안 돼요?”
걸음을 멈추고 잠시 생각하던 주상혁이 말했다.
“그러자, 그럼.”
* * *
주상혁이 퇴장한 카페에는 아직 장민주와 장민철이 앉아 있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아는 사람 같던데?”
“전에 잠깐 만난 적 있었어요.”
“전에?”
장민주가 한숨을 푹 쉬고는 말했다.
“사실 일전에 강원도에서 잠적 타고 있는 주상혁 씨를 본 적 있어요.”
“그래? 그럼 조금 전 그 아이도.”
“네. 거기서 봤죠.”
잠시 생각하던 장민철 물었다.
“둘이 깊은 관계려나?”
“아뇨,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어요. 제가 주상혁 씨를 발견했던 것도 그사람을 보름이나 미행해서 발견한 거니까. 그냥 마구잡이로 돌아다녔단 거겠죠.”
장민철이 감상을 늘어놓듯 의자에 기대며 중얼거렸다.
“짝사랑이라…….”
“…….”
장민철이 불쑥 옆자리의 장민주에게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자신은 있고?”
장민주는 지금도 여전히 주상혁에게 호감이 있는 건 아니다.
다만 이미 몇 번 만나 본 사람이다.
완전 변태 같은 사람이라거나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기에 솔직히 지금 같은 상황에 길드 유지를 위해 팔려 가는 것도 각오했던 것.
“자신이요? 제 얼굴 안 보이세요?”
하지만 조금 전 일로 자존심이 많이 상한 듯했다.
장민주가 승부욕에 불타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뭐, 이 정도면 걱정할 필요는 없겠군.’
웃긴 말이지만 장민주는 제 입으로 저런 말 하는 게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예쁘다.
성격이 조금 까칠하긴 하지만, 설마 본인이 꼬실 대상의 앞에서까지 막돼먹게 굴지는 않을 터.
“그래, 조금 힘들겠지만, 한번 잘해 보거라.”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에요.”
* * *
이번 국내의 S급 던전 브레이크는 해외에서도 화제였다.
그도 그럴 게 처음 보는 수백 미터 크기의 던전 포탈부터 범람한 몬스터의 규모도 말도 안 되게 많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던전 브레이크라면 필수적으로 나타나는 폭발까지 존재하지 않았으니 세계의 각국에서도 흥미를 끌 법했다.
무엇보다 특히 주상혁.
그 던전을 거의 홀로 소탕하다시피 한 주상혁에 대한 관심도는 세계 어디에서든 마찬가지였다.
뛰어난 각성자는 곧 국력.
전 세계 총 열다섯 명밖에 없는 SS급 각성자를 네 명이나 가지고 있는 미국의 물망에도 주상혁이 올랐다.
근래에 중국에 세 번째 SS급 각성자가 튀어나오면서 바짝 추격이 이루어진 만큼 한걸음 달아날 필요성이 있었다.
“어떤가? 확실히 데려올 자신은 있는 겐가?”
샛노란 웨이브 머리에 볼륨감 있는 몸매의 이십 대 백인 여성 올리비아가 말했다.
본래 영국 국적이었지만, 미국의 막대한 자본력에 포섭당한 만큼 말이 잘 통할 거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제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제안했다고 생각해요?”
얼마 전 주상혁이 백호 때문에 한바탕 기자와 말다툼을 한 게 한국에서 기사화됐었다.
올리비아는 정보통을 통해 벌써 그 사실을 입수한 상태였다.
올리비아가 말했다.
“그보다 약속이나 지키세요. 상혁을 데려오는 데 성공하면 그는 우리 길드에 우선 협상권을 주기로요.”
대통령이 손깍지에 턱 끝을 가져다 대며 환하게 웃었다.
“물론, 어렵지 않은 조건이네.”
* * *
일주일에 걸쳤던 하피의 잔당 처리가 끝이 났다.
신성의 대표 차예설과 명성의 대표 서민준은 마지막 회의를 앞두고 휴게실에서 담화를 나누고 있었다.
“지긋지긋하던 게 그래도 끝나긴 했네요. 선배?”
“어, 어…… 그러네.”
던전 브레이크에서 있었던 일 때문인지 차예설과 서민준은 사이가 부쩍 가까워졌다.
늦게 붙은 불이 무섭다고 근 일주일 사이 차예설과 서민준은 결혼까지 나오는 사이가 되었다.
“이참에 우리 길드부터 합치는 건 어때요?”
“벌써? 굳이 서두를 필요가 있을까?”
어디 동네 구멍가게도 아니고 국내에서 열 군데밖에 없는 일류 길드 둘을 합치는 일이다.
서민준은 서둘러서 좋을 것 없다고 생각하는 분위기였다.
차예설이 말했다.
“뭘 모르네, 신성하고 명성이 하나로 합쳐지면 국내에서는 혜성 다음 수준이잖아요. 서둘러야 주상혁이라는 사람한테 쓱 명함이라도 한번 찔러볼 거 아니에요.”
“그런가?”
재벌은 망해도 삼대는 걱정 없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듯.
오랫동안 최고 길드의 길을 걸어왔던 혜성이 하루아침에 폭삭 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확실히 이번에 헤성은 조직이 굴러가는 구심점을 잃은 것도 사실이다.
만약 신성과 명성이 합쳐질 수만 있다면 국내 최고의 길드로 금세 떠오를 것이었다. 주상혁의 스카우트도 괜한 망상은 아니었다.
휴게실 자판기에서 캔 음료를 뽑으며 이야기를 듣고 있던 유정이 말했다.
“그거라면 이미 늦지 않았겠습니까? 듣기로는 이미 혜성이 접선한 거 같더군요.”
“어머? 저는 그래도 승산 있을 거 같은데요? 어차피 백호라는 가장 큰 미끼를 잃어버렸는데 주상혁이 그곳에 갈 이유가 없다고 봐요.”
유정이 캔을 따서 가볍게 목을 축이고는 픽 웃었다.
“요즘 부쩍 말이 많아지긴 했어도 혜성입니다. 더군다나 주상혁의 협조를 얻어 내지 못하면 몰락은 기정사실이죠. 저는 이런 혜성이 협상 카드로 뭘 내놓을지 벌써부터 무섭기까지 합니다만, 차 대표님은 안 그러신가 보죠?”
혜성이 쌓아 놓은 부와 명성은 보통이 아니다.
실제로도 혜성은 상당히 매력적인 조직이다.
장혜성의 자리를 대신해 줄 구심점만 갖춘다면 별탈 없이 잘 굴러갈 만한 길드.
정말 일반인은 떠올릴 수조차 없는 천문학적인 금액을 제시한다면 황금성이나 다를 바 없는 혜성의 제안을 주상혁이 덥석 물지 말라는 법 없었다.
바깥이 시끄러웠던지 슬쩍 정성호와 구대성이 나왔다. 정성호가 슬쩍 말을 꺼냈다.
“근데 듣기로는 싸가지가 좀 없다던데 그 이야기 아는 사람은 없으려나?”
흰머리가 드문드문 난 구대성이 말했다.
“거, 싸가지 좀 없으면 어떤가? 우리가 먹물 장사를 하나 봇짐 장사를 하나.”
유정이 거들었다.
“저도 그건 문제가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궁금하네요. 일단 어디서든 모셔 가려고 하긴 할 텐데 무슨 선택을 할지.”
휴게실 안에 묘한 기류가 맴돌았다.
지금부터 서로 라이벌이란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 * *
S급 던전의 소동이 무사히 지나갔다. 주상혁의 생활은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필요한 탕약을 달일 때 달이고 보낼 때 보내고 쉴 때 쉬면서 그렇게 보냈다.
강원도 생활도 여전히 계속됐다.
이번 사건으로 다시 관심을 받게 되면서 불가피한 일이 되었다.
“아…… 이걸로 대충 다 채웠네.”
바쁘게 뒷정리를 시작했다. 작업 시간이 길어지면서 허기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아침에 먹다 남은 밑반찬으로 대충 때워야 하나…….”
분주하게 정리를 하고 있자니 등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다행히 아직 여기 머물고 계셨군요?”
햇볕에 닿아 와인색으로 예쁘게 빛나는 생머리.
주먹만 한 얼굴과 깨끗하고 청초한 분위기의 이목구비.
강혜영이 청조하고 고혹적인 느낌의 미녀라면 장민주는 청순 가련한 느낌의 미녀였다.
‘얼씨구…… 이젠 눈웃음도 치네.’
한 번 보면 잊을 수가 없는 그런 얼굴로 대놓고 눈웃음치는 장민주를 주상혁이 바라보며 이같은 생각을 하고있자 멋대로 오해한 징민주가 픽 웃더니 입을 열었다.
“왜요?”
“의외네 싶어서 말이죠.”
“뭐가요?”
“솔직히 그날 그렇게 쫑 났는데, 자존심 있으면 안 올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대놓고 꼬리 치던 장민주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대놓고 꼽을 주는 주상혁의 말을 듣자 어지간히 쪽팔렸나 보다.
장민주가 달아오른 얼굴로 버럭 화를 냈다.
“하…… 진짜 어이없어서, 언제는 백호 테이밍해서 데려가라면서요!”
“뭐, 그렇긴 한데…….”
“백호는 어디 있어요!”
주상혁이 성질을 부리는 장민주에게 안으로 들어가 보라는 듯 몸짓했다.
장민주가 괜한 땅만 하이힐로 쾅쾅 찍으며 회관 안으로 들어갔다.
“거짓말이 서투시구만.”
픽 웃고는 뒷정리를 마저 끝냈다.
10분쯤 지나 주상혁이 회관 안으로 들어갔다.
장민주는 아직도 현관 근처에서 주주와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무섭게 왜 그래, 오늘은 너한테 관심 없다니까?”
와와왕!
백호에게로 가는 길목을 막고서 주주는 장민주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날 형 노릇 좀 하면서 사이좋게 지내 달라던 주상혁의 부탁 때문에 주주와 백호의 사이도 부쩍 좋아졌다.
“저기요, 얘 좀 어떻게 해 봐요!”
“…….”
주상혁이 약탕기를 구석에 내려놓고는 말했다.
“주주야, 괜찮으니까 이리와.”
주상혁이 주주가 가까이 다가오자 안아 들고 상황을 조용히 지켜봤다.
“먹을 걸로 구워삶겠다는 겁니까?”
“왜요? 그럼 안 돼요?”
장민주의 손에는 쇠고기 팩이 들려있었다.
처음 주주의 밥을 주던 때가 생각나서 피식 웃음이 지어졌다.
“아뇨, 뭐, 잘해 보세요.”
아야…….
TV를 보면서 장민주가 애쓰는 걸 힐끗힐끗 지켜봤다.
일이 잘 풀리지 않는지 잊을 만하면 장민주의 앓는 소릭 들려왔다.
“아야…….”
결국, 장민주의 울분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왜 때리는 거야? 전엔 만지게 해 줬잖아.”
“…….”
백호가 별 반응이 없자, 결국 장민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관으로 걸어가는 장민주를 보고 주상혁이 말했다.
“아, 포기하게요?”
장민주가 걸음을 멈추고 움찔하더니 주상혁을 휙 노려봤다.
“다음엔 성공할 거예요!”
“네네, 꼭 좀 그래 주세요.”
그편이 주상혁에게도 더 좋다.
주상혁이 기달려 주는 것도 다섯 달 뒤쯤이면 한계니까.
장민주가 휙 가 버렸다.
소고기가 담긴 쇼핑백 안으로 들어가서 편히 소고기를 먹기 시작하는 백호를 보다가 주상혁이 주주에게 물었다.
“우리도 밥이나 먹을까?”
왕!
* * *
한 달쯤 시간이 흘러 3월 중순이 되었다.
쌀쌀한 아침 바람을 맞고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쿵, 쿵, 쿵.
현관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난 주상혁이 익숙한 일인마냥 투덜거리며 이불 속을 나왔다.
현관으로 걸어간 주상혁이 문을 열어 줬다.
“왜 이렇게 문을 늦게 열어요!”
시계를 확인했다.
오전 8시가 막 지나 있었다.
“저는 잠도 못 잡니까? 시간이 몇 신데.”
그 뒤로도 장민주는 사흘 간격으로 종종 들르곤 했다.
장민주의 차림새를 유심히 살피던 주상혁이 말했다.
“근데 전부터 느끼는 건데 요즘 무슨 선이라도 보러 다닙니까?”
“왜요? 이제 와서 아쉬운가?”
“아쉽다니 뭐가 말입니까?”
“그날 카페에서 제안 거절한 거요.”
이건 무슨 봉창 두들기는 소린가 싶어서 그만 픽 웃어 버렸다.
“아쉽긴 무슨 테이밍하겠다는 여자가 날이 갈수록 옷이 화려해지니 해 본 말이었습니다.”
장민주의 표정이 구겨졌다.
저렇게 이마에 주름을 잡으면 얼굴이 망가질 법도 한데 요건 또 요것대로 예쁜 게 신기할 따름이다.
장민주가 특유의 도도한 목소리로 말했다.
“맞아요, 선 보러 다녀요.”
“예? 진짜로요?”
“그럼 길드 무너지는 거 가만히 지켜 보고 있을 순 없잖아요.”
하긴 맞는 말이다. 앞서 약속했듯이 굳이 백호를 본인이 데려가라고 제안하지는 않았으니까.
또 한 번 얼굴을 훑는 시선이 느껴진 직후였다.
조용히 주상혁을 바라보던 장민주가 뜬금없는 말을 뱉었다.
“무슨 할 말 없어요?”
“할 말……?”
조금 생각해 보니 할 말이 떠오르긴 한다.
“화이팅!”
장민주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꼭 잡아먹기라도 할 것 같은 눈초리다.
무슨 말을 할 것처럼 달싹이던 입을 다물고 입술을 깨문 장민주가 휙 돌아섰다.
“이, 씨…….”
“어디 가요? 테이밍하러 온 거 아닙니까?”
“몰라요! 짜증 나서 갈 거예요.”
장민주를 보고 있으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백호의 테이밍을 위해서 오는 거 같다가도 지금의 저런 모습을 보면 카페에서 주고받던 대화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린 거 같기도 하고 여하튼 속내를 알 수가 없었다.
“저렇게 까탈스럽게 구는 거 보면 꼬시려는 건 아닌 거 같긴 한데…….”
장민주의 등을 바라보다가 주상혁이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고 도로 침대로 드러누웠다.
아침 바람부터 찬바람을 맞았더니 잠이 안 온다.
주상혁이 휴대폰을 들었다.
“어디 보자…….”
주상혁이 자기와 관련된 기사를 보다가 표정을 와락 구겼다.
“이 사람이 왜 벌써…….”
주상혁이 아는 상황보다 흐름이 빠르다. 본래라면 올해 늦여름쯤 되어야 벌어졌을 사건이 벌써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침대에서 주주랑 나란히 잠을 자는 백호가 보인다.
‘어쩔 수 없이 티 안 나게 손 좀 써야 하나……?’
장민주를 가능한 한 빨리 성장시킬 필요성이 있을 것 같았다.
* * *
삼십 분쯤 후 주상혁이 식사를 하고 있자니 장민주가 들어왔다.
“오해하지 마요. 백호 테이밍 때문에 돌아온 거니까.”
“누가 뭐래요? 백호는 안방에 있습니다.”
잠에서 깨어나 맛있게 아침을 먹는 주주랑은 다르게 백호는 아직도 안방에서 자고 있었다.
몇 숟갈 뜨던 주상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째선지 자신을 조용히 응시하는 장민주의 시선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백호 안방에 있다니까요?”
“알고 있거든요?!”
말과는 다르게 그 뒤로도 한참 주상혁을 바라보던 장민주가 결국 안방으로 걸어갔다.
이번엔 무슨 짜증을 부리려고 저렇게 무섭게 노려보나 싶었는데 다행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주상혁이 TV를 켰다.
1시간 전쯤 휴대폰으로 봤던 기사와 같은 주제의 뉴스가 흘러나왔다.
주상혁의 표정이 딱 굳어졌다.
‘지금 물어나 볼까?’
안방에는 아직도 백호에게 두들겨 맞고 있는 장민주가 있었다.
“장민주 씨.”
“뭐요!”
“백호 그냥 포기할 마음은 없습니까?”
“없어요.”
“그렇게까지 고집을 부릴 필요가 있는 겁니까?”
주상혁을 노려보는 장민주의 눈썹 한쪽이 살짝 꿈틀거렸다.
“저는 원래 가지고 싶은 건 다 가져야 마음이 편해져요. 그게 돈이든 뭐든.”
장민주의 답변을 듣고 조금 깊게 생각하던 주상혁이 십 분쯤 지나 입을 열었다.
“장민주 씨.”
“또 뭐요!”
“오늘부터 석 달간만 여기 계셔야겠네요.”
장민주의 표정이 구겨졌다.
“싫은데요?”
그러면 그렇지 처음 만났을 때랑은 다르게 까칠한 장민주라면 이렇게 반응할 줄 알았다.
“대신 제 부탁을 들어주면 백호를 드리겠습니다.”
“…….”
“거기다 덤으로 백호도 테이밍할 수 있도록 해 드리죠.”
장민주도 두 번째 제안은 솔깃했는지 흥미를 보였다.
“전에는 방법이 없다면서요?”
“물론, 거짓말이었습니다. 수준이 너무 허접해서 손봐야 할 곳이 한둘이 아니라 거짓말 좀 했습니다.”
“허접…… 지금 말 다 했……!”
하려던 말을 삼키고 장민주가 물었다.
“확실한 방법인 거죠?”
“확실합니다. 제가 사용해 본 방법이니까.”
장민주가 특유의 새침한 표정으로 생각하다 말했다.
“뭐, 좋아요. 대신 약속하세요.”
“무슨 약속을 해 드리면 됩니까?”
“3개월 후에도 성공 못 하면 혜성의 사위로 오세요.”
주상혁이 픽 웃었다. 그럴일은 없었으니까.
“그렇게 하시죠.”
* * *
주상혁이 본 기사는 간단했다.
미국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세 개의 길드 중 하나인 유니콘.
그곳의 대표인 올리비아가 한국에 방문했다는 내용이었다.
본래라면 지금으로부터 오 개월 뒤쯤에야 있어야 할 미래가 앞당겨서 찾아왔다.
‘이번에도 백호를 노리고?’
과거에는 장혜성이 죽고 남은 백호를 혜성이 관리 중이었다.
‘관리’라는 게 혜성의 관계자 중에 계약을 맺은 사람이 있었던 게 아니라 그냥 애물단지처럼 묵혀 놨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게 올리비아의 귀에 들어갔겠지.’
길드의 이름이 그렇듯 올리비아도 소환수를 부린다. 그것도 환수종인 유니콘을.
마법 계열인 SS급의 피지컬에 소환수까지 더해지는 뽕을 맛봤으니 그녀가 백호를 탐내는 것도 무리는 아닐 터였다.
‘과거에 혜성의 관계자 몇을 살해하면서까지 무리하게 백호를 취했던 걸 보면…….’
백호에 대한 올리비아의 탐욕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걸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주상혁은 차라리 장민주에게 백호를 양도할 것을 처음부터 구상하고 있었다.
주인이 없는 틈을 타서 주상혁이 냉큼 주운 게 아니라 정당한 후계자인 장민주가 이어받은 그림이 된다면?
올리비아가 물러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물론, 그게 아닐 수도 있지만…….’
처음부터 이유야 어찌 됐든 백호를 강탈할 생각이었을 수도 있고
과거가 바뀐 만큼 올리비아의 목적이 백호에서 다른 걸로 바뀌었을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뉴스에서 말하는 것처럼 주상혁에게 옮겨 갔다든지 그도 아니면 주상혁의 가족이나 다름없는 주주에게로 옮겨 갔을 수도 있는 일이다.
‘물론, 그 경우엔…….’
솔직히 원하지는 않지만, 올리비아와 무력 충돌이 발생할 가능성도 있었다.
그건 올리비아가 강경한 방법을 선택했을 때의 일이 되겠지만 말이다.
드르륵.
“그래서 뭐부터 하면 돼요?”
주상혁이 넘겨준 추리닝으로 갈아입은 장민주가 나왔다.
평소의 세련된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단풍이 그려진 추리닝 차림도 제법 잘 어울렸다.
“이 녀석들 산책 좀 시켜 주세요.”
장민주의 표정이 팍 구겨졌다.
“산책이요?”
“네, 산책이라고 해도 이 녀석들 뒤를 졸졸 쫓아다니는 게 다겠지만, 다녀오세요.”
장민주가 주주랑 백호를 바라봤다.
주주랑 백호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있었다.
주주랑 백호에게 관심을 받는 건 난생처음이었는지 장민주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산책만 다녀오면 된다는 거죠?”
“네, 일단은요.”
“혹시나 해서 묻는데 이것도 테이밍에 관련된 거 맞는 거죠?”
“물론입니다.”
“알았어요.”
장민주가 현관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가자 백호와 주주가 뛰라 나섰다
주상혁이 뒷산 방향으로 향하는 장민주를 보고는 픽 웃었다.
“어디 땀 좀 빼 보라지.”
* * *
아침에 나간 장민주가 돌아온 것은 오후 2시가 넘어서였다.
꼴이 말이 아닌 장민주를 보고 주상혁이 나오려는 웃음을 참고는 태연하게 말했다.
“어땠습니까? 길이 조금 험했죠?”
현관 앞에서 숨을 고르던 장민주가 휙 노려봤다
“조금 험하죠? 이, 씨…… 눈도 안 녹았잖아요!”
날아오는 신발 한 짝을 여유롭게 잡아낸 주상혁이 장민주를 향해 조용히 손짓했다.
“뭐요.”
“…….”
“던진 건 미안해요.”
주상혁이 여전히 와 보라는 듯 손짓하자 장민주가 결국 슬리퍼를 벗고 슬금슬금 다가왔다.
주상혁이 장민주를 향해 손을 뻗었다.
장민주가 움찔 눈을 감았다가 눈을 떴다.
머리에 붙은 거미줄을 떼어 준 걸 확인한 장민주가 슬쩍 시선을 피했다.
장민주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내일부터는 주주에게 눈 녹을 때까지는 넓은 길로 다니라고 말해 주겠습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장민주가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내일도 또 가라구요?”
“앞으로 석 달 동안은 매일 가야 합니다.”
장민주가 따지듯 물었다.
“솔직히 말해요 지금 앙심 푸는 거죠? 제가 싸가지 없게 했다고.”
“싸가지 없는 건 아시네요?”
장민주의 표정이 확 구겨졌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장민주 씨 원래 이렇게 까칠하십니까? 처음 봤을 땐 제멋대로긴 해도 이정도는 아니었던 거 같은데.”
“네 맞아요. 저 원래 싸가지 없어요. 팔려 가기 싫어서 마음 가는 대로 행동했더니 이게 진짜 제 성격이 되더라고요.”
어쩐지 한두 번 짜증 내 본 솜씨가 아닌 거 같더라니, 이런 이유가 있는 줄은 몰랐다.
‘근데 그건 그거고 계속 이대로면 좀 귀찮긴 하겠네.’
주상혁이 내친김에 목줄 좀 채울 생각으로 입을 열었다.
“장민주 씨.”
“뭐요.”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한마디만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뭔데요.”
“매사에 그렇게 까칠하게 굴어서는 S급이 못 될 수도 있습니다.”
“언제는 장담한다면서요!”
“그건 농땡이 안 부렸을 때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말끝마다 까칠하게 반응하면 저로서도 결국 한계가 찾아오겠죠.”
“…….”
장민주가 노려보다가 휙 고개를 틀어 버렸다.
주상혁이 타이르듯 말했다.
“다른 사람이 되라는 게 아닙니다. 제가 무슨 학교 선생님도 아니고 뭐라고 할 마음도 없습니다. 근데……”
장민주의 시선이 힐끔 자신을 향하자 주상혁이 눈동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석 달 동안 제 말은 듣도록 해요. 그러면 S급 만들어 드릴 테니까.”
* * *
“…….”
침묵은 한참을 계속됐다.
장민주가 조용히 바라볼 뿐 별말이 없자 주상혁이 잠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요?”
“…….”
장민주가 부엌으로 가는 주상혁을 지켜보다가 결국, 거실에 대자로 누웠다.
주상혁이 잠시 후 거실로 돌아와서 물이 담긴 머그컵을 내밀었다.
“드세요. 많이 쓰겠지만,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주상혁에게 컵을 받아 든 장민주가 한 모금 입에 넣자마자 얼굴이 퍼렇게 질렸다.
주상혁이 장민주의 입을 틀어막았다.
“뱉지 말고 삼켜요.”
“읍으읍…….”
꿀꺽.
주상혁이 장민주가 목 끝으로 넘기는 걸 확인하고 손을 뗐다.
“이, 이게 뭐예요? 뭐 공업폐수 그런 거 아니죠?”
평소라면 다짜고짜 짜증을 내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그것보다 내용물이 상상 이상이었는지 사색이 된 얼굴이었다.
“솔직히 그 정도는 아닐 겁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이 시꺼먼거 봐. 이걸 어떻게 마셔요!”
“제가 몇명 먹여 봤는데 지금 장민주 씨가 제일 호들갑입니다.”
“거짓말하지 마요.”
“거짓말 아닙니다. 보시다시피 저도 이렇게 마시고 있고 혜영이도 마셨고 그 외에도…….”
장민주의 눈이 강혜영 이야기에 조금 매서워졌다.
“혜영? 설마 그때 카페에서 그 여자요?”
“네, 일전에 같이 펜션에서 머물 일이 있었죠.”
장민주도 알고 있다.
주상혁이 펜션에서 작년 여름에 강태섭의 딸과 함께 지냈다는 사실.
장민주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협회 쪽 사람이었단 거지?’
장민주가 머그컵을 비장하게 바라보더니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했다.
장민주가 빈 머그컵을 주상혁에게 넘기며 말했다.
“저도 부탁 하나만 해요.”
“뭡니까?”
“저는 다른 사람하고 비교하는 걸 싫어 해요. 그건 하지 마세요.”
주상혁이 픽 웃었다.
“참고하겠습니다만, 애초에 협조적으로 나왔다면 저 역시 비교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주상혁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앞으로 석 달간은 물 대신 이걸 마실 거니까 익숙해지세요. 나가죠.”
“어디 가는데요? 저 이제 막 들어왔거든요?”
주상혁이 이빨을 보이며 웃었다.
“훈련해야 할 거 아닙니까?”
* * *
장민주와 함께 회관 뒤편 공터로 이동한 주상혁이 돌무더기에 대충 앉으며 말했다.
“부탁할게.”
와왕!
『Lv.51 청운해태.』
주주의 본체는 지금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다.
눈앞에 주주는 현재 주주의 분신 중에 강함 순위로 세 번째쯤 되는 분신.
장민주가 주주의 분신을 보며 말했다.
“어떻게 하면 돼요?”
“어떻게 하긴요. 테이밍해 봐요. 물론 분신이니까 계약이 될 리는 없을 테고 양손으로 이렇게 잡으면 성공인 걸로 하고요.”
주상혁이 주주의 분신을 보란 듯이 안아 들었다가 내려 줬다.
장민주의 눈이 승부욕으로 불타올랐다.
“자, 그럼 시작하세요.”
“안 그래도 그럴 거예요!”
휙. 휙.
“이, 씨…….”
주주의 분신과 장민주의 승부는 미세하지만, 주주가 유리했다.
장민주의 손을 쳐 낼 땐 꼬리로 쳐 내고 궁지에 몰리면 팔을 타고 뒤로 넘어가 버린다거나 작은 체구를 이용해서 도망 다니고 있었다.
“완전 아깝네.”
장민주가 한참을 해 보고는 주상혁을 바라봤다.
“이거 효과 있는 거 맞죠?”
“나중에 감격의 눈물 흘리지 말고 훈련이나 마저 하세요.”
『Lv.65 장민주.』
‘탕약을 마셔서 1레벨이 올랐는데도 이 정도란 말이지?’
예상외로 주주의 분신도 레벨 이상의 힘을 보이고 있었다.
조금 지켜보던 주상혁이 엉덩이를 떼고 말했다.
“해질 때까지 하다가 들어와요. 저는 추워서 먼저 들어가 볼 테니까.“
* * *
한국에 입국한 올리비아는 며칠째 호텔에 머물고 있었다.
일단 한국에 오긴 했지만, 주상혁에 대한 위치를 알 수가 없어서 발이 묶인 것이었다.
호텔 소파에 앉아서 테블릿 PC를 들여다보는 올리비아의 눈에는 벌써 수십 번도 더 본 영상이 비치고 있었다.
“대단해 아름다워…….”
PC 속 영상을 바라보는 올리비아의 시선은 오로지 한곳을 향하고 있었다.
수만 마리의 하피를 구워 버리는 해태.
수백 미터의 전류 기둥을 구사하는 해태의 강함에 매료되어 있었다.
백호?
물론 몹시 매력적이라고 느끼고 있긴 하다.
반경 2km 밖에 있는 산을 저격할 수 있을 만한 정밀하고 강력한 마나 포는 물론, 꼬리를 이용해 섬세한 전투 방식도 구사할 수 있는 만큼 백호도 마음에 몹시 들었다. 하지만…….
당연한 말이지만 해태에 비할 수준은 아니었다.
백호는 그저 취하는 김에 같이 취하는 덤.
엑스트라에 불과했지 주목적은 어디까지나 해태였다.
‘물론 이 녀석에 비하면 해태든 백호든 동양의 작은 국가에 갇혀 있기에는 너무 아쉽긴 하지.’
올리비아의 환수종 소환수 유니콘.
녀석에 비한다면 해태와 백호는 선녀였다.
어릴 때는 그렇게 말을 잘 듣던 녀석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자주 자신의 말을 거스르기 일쑤였고 근래에는 소환에 불응할 때도 종종 있었다.
그것이 쌓이고 쌓이다 보니 올리비아는 유니콘에게 상당히 불만이 많았다.
오랫동안 자신과 호흡을 맞춰 오던 녀석이었지만, 기회가 된다면 언제든 다른 녀석을 찾고 싶을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그런 방황하던 그녀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백호가 때마침 사용자를 잃고 옮겨 간 상태였으며 해태도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 기회에 두 마리의 환수종을 얻으면 그야말로 자신은 무적이었다.
모든 게, 모든 게 완벽하다.
딱 한 가지.
주상혁의 위치만 찾을 수 있다면 말이다.
물론 주상혁을 미국으로 끌어들이는 것에 대해서는 그리 고민하지도 않고 있었다.
‘제깟 놈이 돈으로 꾀면 안 넘어오겠어?’
자신이 그랬듯 수천억이 아니라 수십조의 돈을 약속받는다면 눈 뒤집혀 따라올 게 불 보듯 뻔했다.
올리비아의 입가에 미소가 피었다.
‘뭐 데리고 간 다음엔 간단하지.’
은근슬쩍 주상혁을 곤경에 빠트려 죽인 뒤 백호와 해태를 동시에 꿀꺽하면 될 일이었다.
해태와 백호를 손에 넣은 미래를 구상하던 올리비아가 핸드폰을 들었다.
“어때 주상혁에 대한 정보 얻은 게 있어?”
“생각 이상으로 정보가 너무 없습니다. 몇 달째 거주지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도 하고……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십시오.”
“오래 기다릴 마음 없어, 잘리고 싶지 않으면 빨리 찾아!”
“일주일 안에 연락 드리겠습니다.”
통화를 종료하고 휴대폰을 대충 테이블 위에 던져 놓은 올리비아가 눈을 감고 다시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쟁쟁한 경쟁자를 따돌리고 황금길을 걷는 자신을 떠올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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