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level reincarnated councillor RAW novel - Chapter 31
Book 6 Chapter 5
주상혁과 헤어진 클린트는 그 길로 저택으로 향했다.
이미 두 번째 봉인까지 풀면서 시간이 많이 소모했다.
더 이상 여유가 없었다.
“…….”
저택에 대문을 통과하고 5분쯤 정원의 중앙에 도착한 클린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들어 보고 싶군.”
저택을 지키는 집사들이 클린트를 에워쌌다.
클린트가 상황을 살피고 있자니 잠시 후 저택 쪽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노 집사 벨레스가 외눈 안경을 밀어 올리며 말했다.
“드릴 말씀이 있어서 이렇게 나왔습니다, 주인님.”
“그래, 할 말이 뭐지?”
이미 지금 상황 머리로 이해 못 한 건 아니다.
배신.
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았다.
25년간 숨죽이고 있던 놈이 무슨 이유로 이 같은 일을 벌였나 하는 것이다.
“오늘부로 저 벨레스를 비롯해 모든 집사는 클린트 저택의 집사직을 사직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제정신인가 벨레스?”
“프레가, 이제 그렇게 불러 주시죠. 사직했잖습니까? 집사명이 아닌 제 이름으로 부르셔야 합니다.”
체념한 클린트가 마나를 일으켰다.
역시 일일이 목적을 캐묻는 건 자신의 성미에 맞지 않는다.
배신자에게는 폭력을.
궁금한 게 있다면 고통을.
한동안 아쉬운 것이 있어서 주상혁에게 맞춰 주고 있었더니 가장 중요한 걸 깜빡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유감이지만 퇴직금을 챙겨 주진 못하겠구나”
“퇴직금은 주인님의 목이면 충분합니다.”
프레가의 말이 떨어지고 동시에 수십 명의 집사들이 클린트를 향해 달려들었다.
쓰윽.
클린트의 나이프가 횡으로 측면을 한 번 그었다. 측면의 집사들이 목을 잃고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나이프를 반대 손으로 움켜쥔 클린트가 또다시 반대쪽을 휘두르자 이번엔 또 다른 측면의 집사들이 토막 나 쓰러졌다.
고작 십여 초.
25년을 집사로 지내며 자신의 손으로 길렀던 A급 이상 각성자들 수십 명이 그사이 시체가 되어 드러누웠다.
전의를 상실하고 달아나는 녀석까지 확실하게 정리한 클린트가 말했다.
“이제 너만 남았구나, 프레가.”
“그거 제대로 확인하신 거 맞습니까?”
프레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였다.
프레가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클린트가 화들짝 놀라 뒤돌았다.
‘어느 틈에……?’
클린트와 녀석의 거리는 고작 5m 남짓.
이 짧은 거리까지 접근하는 데 프레가가 말하기 전까지 접근하는지조차 몰랐다는 말이었다.
이십 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청년의 비범함을 알아본 클린트의 입이 열렸다.
“그렇군, 네놈이 타이탄인가?”
“…….”
타이탄이 대답 대신 클린트에게 쇄도했다.
두 사람의 나이프가 일순간에 수십 번을 부딪치길 잠시, 클린트가 먼저 손을 빼고 훌쩍 물러났다.
클린트의 팔뚝이 베어지며 옅은 상처가 생겨났다.
타이탄이 다시 한 번 달려들었다.
방어하기 급급한 클린트와 여유로운 타이탄의 모습이 선명했다.
겨우겨우 유지되던 균형이 급격하게 무너졌다.
갈수록 클린트의 몸에만 상처가 생겨났다.
클린트의 호흡이 천둥처럼 거칠어졌을 때, 처음으로 타이탄의 입이 열렸다.
“왜 당신이 죽는지 말하지 않아도 알 겁니다.”
“네놈이 그 망령이란 놈이냐?”
클린트가 몸을 빼내기 위해 슬쩍 주변을 훑었다.
“소용없습니다. 놓치지 않을 거니까요.”
“…….”
확실히 맞는 말이다.
타이탄의 속도는 상처가 생기기 전의 클린트보다도 빠르다.
이미 기진맥진한 몸으로 등을 보이면…….
‘죽음을 앞당길…….’
상황을 파악하던 클린트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번쩍.
클린트와 타이탄의 사이로 끼어든 강아지 한 마리 때문이었다.
파지지지지직.
* * *
“눈눈누.”
주상혁은 근 두어 달 흥얼거림이 떠날 일이 없었다.
『Lv.82 청운해태.』
무럭무럭 자라는 주주의 존재 때문이었다.
‘웬일로 퀘스트도 안 생기고 말이야.’
주간 퀘스트와 일간 퀘스트 같은 걸 말하는 게 아니다.
주상혁을 사실 그간 핵심적으로 괴롭혀 왔던 건 돌발 퀘스트.
그런 돌발 퀘스트가 토마토 사건 이후로 발생하지 않고 있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요즘만 같아라.”
평화로움에 취해 주상혁이 이 같은 말을 중얼거리다가 문뜩 방구석을 보고 생각에 잠겼다.
『Lv.70 백호.』
기지개 켜고 일어나 주주의 밥을 뺏어 먹는 백호 때문이었다.
사이좋게 잘 지낸다는 건 좋은 일이었지만, 주상혁이 백호의 밥그릇에 따로 사료를 부어 주며 말했다.
“야, 근데 너 이쯤 했으면 이제 돌아가도 되는 거 아니냐?”
백호가 이곳에 머문 것도 벌써 3달째.
이쯤 됐으면 레벨도 많이 올랐다. 약속한 대로 돌아가는 게 맞아 보였다. 절대 산삼으로 만든 고오오급 사료가 아까워서는 아니었다.
냐냐냥
“안 돼 한 달 만은 무슨, 너 처음에 나랑 약속했잖아.”
주상혁이 휴대폰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너, 오늘 장민주 씨 부를 거니까 그런 줄 알아.”
백호의 시무룩한 표정을 본 주상혁이 마음 약해지지 않고 장민주를 불렀다.
3시간쯤 지났을까?
주상혁의 방문을 누군가 두드렸다.
“오, 왔나 보네.”
주상혁이 현관문을 열었다가 흠칫했다.
『Lv.125 클린트.』
거의 누더기가 된 옷을 입고 쓰러진 클린트가 보였다. 주상혁이 본능적으로 맥을 짚었다.
‘죽진 않았네?’
주상혁이 진맥을 하던 손을 놓고 일어나자 때마침 클린트의 가슴팍이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주주의 분신하나가 슉 얼굴을 내밀었다.
일전에 2단계 봉인을 풀어 주면서 혹시나 해서 감시용으로 붙여 놓은 분신이었다.
왕!
“그래, 오랜만이다.”
주상혁에게 인사한 분신이 증기가 되어 주주의 몸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무슨 일이래? 왜 이렇게 거지꼴이 된 거야?”
주주가 주상혁에게 환상을 보여 줬다.
저택에서 있었던 클린트의 모습을 환상으로 본 주상혁이 한숨 쉬었다.
“그러니까 쫄딱 망했다는 거야?”
아니, 어쩌면 망하는 정도면 다행이다.
클린트의 뒤통수를 친 녀석들은 아마도 클린트를 죽이기 위해 전 세계를 다 뒤지고 있을 게 당연했다.
“으으윽…….”
주상혁이 신음을 흘리는 클린트를 보고는 고민에 잠겼다.
“확, 목을 썰어 버려?”
지금이라면 그냥 손 하나 까닥하는 걸로도 클린트의 목을 딸 수 있었다.
또 클린트라는 거대 조직과 척을 지기는커녕 오히려 배신자들이 득세한 지금 감사 인사를 받을지도 모를 일이다.
고민하는 주상혁에게로 또 한 번의 환상이 쏘아진 건 이때였다.
눈에 이글거리던 푸른빛이 사라진 주상혁이 주주를 향해 휙 돌아섰다.
왕!
“산삼 맛을 봐서 그런가……?”
주주가 웬일로 자기 의사를 표명해왔다.
주상혁이 주주의 권유에 말했다.
“알았어, 그렇게 하면 되잖아.”
언제나 그렇듯.
* * *
30분쯤 후 주상혁의 현관문을 누가 노크했다.
주상혁이 방문을 열자 장민주가 새침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제가 뭐 오라고 하면 오고 가라고 하면 가는 사람인 줄 아세요?”
“지금 오래서 왔잖아요.”
“그건…….”
장민주의 말을 듣지도 않고 주상혁이 뒤돌아 들어갔다.
장민주가 달싹이던 입을 닫고 따라 들어왔다.
잠시 후 주상혁이 구석의 백호를 양손으로 들어 내밀었다.
백호가 한 손을 들어 보이며 장민주에게 인사했다.
냐냥.
“얘를 저한테 왜 내밀어요?”
“장민주 씨 소환수잖아요. 이제 화해하라구요.”
“됐어요. 지 좋다고 나갈 땐 언제고.”
“그럼 이 녀석 제가 다시 가져가도 돼요?”
“뭐, 뭐요?”
말은 저렇게 해도 제법 당황한 모습이다.
“제가 다시 계약해도 되냐고요. 이 녀석 식비가 상당합니다. 언제까지 무료로 길러 주는 것도 좀 그렇고 장민주 씨가 싫다면 다시 제가 맡는 게 낫겠죠.”
장민주가 백호를 와락 품에 안았다.
“싫은데요.”
“그래요. 앞으로는 싸우지 맙시다. 소환수랑 싸워서 무슨 득을 보겠다고 싸웁니까?”
주상혁이 꾸지람을 놓고 방바닥에 앉자 넌지시 물었다.
구석에 따라 앉아 무언가를 힐끗거리던 장민주가 말했다.
“근데 저 사람은 뭐예요?”
주상혁이 구석에 내려놓은 스마트폰을 다시 집어 들며 무미건조한 얼굴로 말했다.
“클린틉니다.”
“클린트요?”
침대 위에 누워 있는 남자의 분위기를 살피던 장민주가 다시금 물었다.
“제가 아는 그 클린트요?”
“네, 그 클린트요. 암흑가의 거대 조직 클린트의 보스.”
좀처럼 놀라는 기색이 없었던 장민주가 웬일로 화들짝 놀랐다. 하긴 클린트의 이름하면 그 정도인 게 당연하긴 하다.
“그, 그 사람이 대체 여기 왜 있어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으으윽…….”
주상혁이 때마침 신음과 함께 몸을 일으키는 클린트를 보고 말했다.
“마침 일어났나 보네. 잠은 잘 잤수?”
“너는…… 왜 날 구해 줬지?”
주상혁이 장민주에게 물었다.
“뭐래요?”
“왜 자기를 구해 줬냐는데요?”
“난 죽이자고 했는데 이 녀석이 살려 주재.”
주상혁이 허벅지 위에서 자고 있는 주주를 가리키며 그렇게 말하자 클린트가 장민주의 말을 듣고 말했다.
“고맙다고 하지는 않겠다. 산삼을 주지 않았나?”
‘뭐야 역시 알고 있었나?‘
주상혁이 잠시 생각해 보더니 클린트의 겉옷에서 빼뒀던 번역기를 가져와 실행했다.
“산삼을 삥땅 치는 걸 알고 있었다고?”
“내 눈썰미를 너무 무시하는군.”
“배신당한 주제에 말은.”
“…….”
클린트가 자리에서 일어나 약간 부족한 기장의 츄리닝 차림을 확인했다.
“그쪽이 갈아입혀 준 건가?”
“그런데?”
“좀 작군.”
클린트가 조용히 창문을 열었다.
주상혁이 말했다.
“어디 갈 생각이지?”
“그걸 꼭 말해야 하나?”
“죽으러 가는 거면 괜히 살렸다 싶어서.”
클린트의 레벨은 125.
한숨 푹 자고 일어난 만큼 정상상태에 가깝겠지만, 금제는 여전하다.
다시 싸운다고 한들 결과는 뻔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주상혁이 클린트에게 천천히 걸어가서 클린트의 마지막 팔맥을 풀어 주고 물러났다.
클린트의 눈동자에 옅은 지진이 일어났다.
주상혁의 행동이 이해가 안 됐을 것이다.
‘근데 어떡해 주주가 그러자고 하는데…….’
솔직히 마지막 금제는 주주의 부탁이라도 풀어 주지 않으려고 했지만.
이미 산삼을 주상혁이 빼돌리고 있었다는 걸 클린트가 알고 있었단 것에 가산점을 주기로 했다.
주주의 분신이 클린트의 어깨에 올라타는 것을 확인하고 마지막으로 주상혁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던졌다.
“이건…….”
박지훈의 폴라나 포션은 해외에도 이미 엄청나게 유명하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게으른 주상혁 탓에 수량 부족으로 국내 수요를 채우기도 벅찬 게 현실이다.
그래서 클린트 조차도 폴라나 포션을 몇 개 들고 있는 게 고작이었다.
“처음 보는 포션이로군.”
“폴라나 포션이다. 내가 박지훈을 넘어서기 위해 개발 중인 녀석이지.”
클린트가 추리닝 저지에 챙겨 넣고 말했다.
“거스름돈이라고 생각하지.”
* * *
클린트라는 조직은 클린트와 비클린트로 나뉜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공식적으로는 전부 클린트 산하의 조직이지만, 지금의 거대 조직이 되기 전부터 조직에 속해 있었느냐 아니었느냐를 일컫는 말이다.
대표적인 예로, 한국 지부 클린트 경매장의 초창기 총괄이었던 총지배인 레온은 비클린트 출신.
반대로 레온이 죽고 후임자로 온 베르토프의 경우에는 클린트 출신.
베르토프가 레온을 경멸하던 이유도 이 때문이라 할 수 있었다.
베르토프가 물었다.
“보스의 행방은 알아봤나?”
“죄송합니다. 이미 배신자들이 유럽 대부분을 접수한 뒤입니다. 정보 수집에 차질이 있습니다.”
츳…….
“이래서 오물 새끼들이란…….”
클린트 개인의 무력은 잘 알고 있다.
자신은 눈조차 못 마주칠 정도로 고결한 분.
그런 분이 죽었을 것이라고 베르토프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건 베르토프와 마찬가지로 당시 10대였던 대부분의 현 클린트 출신 간부들도 그렇게 생각할 터였다.
“클린트파 출신들에게는 연락을 넣었나?”
“모든 분이 이곳으로 집결하겠다고 연락해 오셨습니다.”
지난 25년간 득세해 왔던 건 클린트 출신의 간부들이다.
그 숫자는 비록 전체 간부의 숫자 중에 2% 남짓이지만, 실력은 그야말로 엄청나다.
그간 98%의 간부들보다 한 계단 더 높은 위치에 득세하며 수많은 영약과 아티팩트로 무장했으니 아마 그 격차는 더 벌어졌을 터.
이들이 온전히 모인다면 유럽을 탈환하는 것도 문제는 아니었다.
딱 한 명 클린트의 소재만 파악할 수 있다면.
베르토프의 고민이 깊어질 때였다.
방문을 누군가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베르토프가 보좌하는 여성 각성자를 바라봤다.
“연락받은 게 있나?”
“확인해 보겠습니다.”
각성자가 가서 방문을 열자 주상혁이 걸어들어왔다.
“당신 클린트 찾지?”
* * *
클린트는 곧바로 유럽으로 향했다.
클린트 출신 간부들이 함께한다면 좋겠지만, 애초에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녀석들을 찾다간 한세월이다.
‘이럴 때는 더 간단한 방법이 있지.’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크게 한번 날뛰면 알아서 자신에게 찾아올 터였다.
사용 중이던 은신을 풀고 클린트가 도로변에 모습을 드러내고 서 있길 잠시.
우르르.
클린트를 에워싸는 수십 수백의 검은 양복들이 보였다.
“딱 좋은 숫자야.”
배신의 핏값을 거두러 왔다는 선전포고로 딱 좋은 숫자였다.
클린트의 나이프가 휘둘러지는 것과 동시에 피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 * *
주상혁은 클린트와 헤어지고 분주하게 움직였다.
주주의 환상에서 본 장면대로 실천하기 위함이었다.
‘주주의 감은 좋은 편이니까.’
베르토프에게 클린트의 정보를 넘긴 것도 이것 주주의 지시였다.
어쩌다 한 번씩 보여 주는 주주의 환상은 항상 결정적인 도움이 됐다.
이젠 그저 믿고 보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러고 보니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지?”
주상혁의 조언으로 손쉽게 클린트와 합류한 베르토프 일행의 싸움을 지켜보며 주상혁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전에 레온을 꼬셔서 매튜와 싸움을 붙이고 이렇게 뒤에서 구경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는 굳이 따지자면 주상혁이 응원하던 쪽이 졌었지만…….
‘지금은 그때랑은 다르지.’
이렇게 떨어져 있어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도움을 줄 수 있었다.
멀리 떨어져 상황을 지켜보던 주상혁이 손가락에 침을 걸었다.
침이 클린트 출신 간부의 목덜미에 꽂혔다. 간부의 마나가 미친 듯이 솟아올랐다.
물약 투여를 사용하셨습니다.
물약 투여를 완료한 침이 자동 회수됩니다.
수적 열세에 몰려서 위기를 맞았던 클린트 출신 간부 하나가 일순간에 적들의 목을 베어 버렸다.
주상혁이 그 뒤로도 몇 번 더 물약 투여로 싸움에 개입하자 금세 전황이 기울었다.
더 이상 볼 것도 없다 싶었는지 주상혁이 손에 걸고 있던 침을 키트로 되돌렸을 때였다.
왕!
클린트와 함께 보냈던 주주의 분신이 역할을 마치고 돌아왔다.
“그래, 고생했어.”
주상혁의 칭찬을 받은 분신이 꼬리를 신나게 흔들다가 안개가 되어 주주에게 들어갔다.
주상혁이 전투가 끝이 난 클린트 일행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환상에서 본 건 저택이었지?’
클린트 저택.
주주가 보여 준 환상에서는 그곳에서 처음 보는 놈과 클린트가 사투를 벌였다.
“그럼 그때까지만 차분하게 지켜볼까?”
주주의 환상에서 그랬듯 클린트의 나이프가 놈의 심장을 꿰뚫게 만들 생각이었다.
* * *
프레가와 타이탄은 클린트의 소식을 접했다.
“역시 이곳으로 오는 건가?”
습격을 받았다는 구역의 소식을 지도위에 그려 보면 정확하게 저택을 향하고 있었다.
저택 향해 그저 직선.
과연 클린트 다운 움직임이었다.
“이 정도 속도면 불과 3시간이면 도착하겠구나.”
“어차피 달라질 건 없습니다.”
프레가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비록 양아들이긴 했지만 아주 잘 자라 주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설령 클린트가 생각 이상으로 강해도 문제없지.’
자신들에게는 비장의 카드가 있었다.
자신에게 이것을 전해 준 인물의 정체가 의심스럽긴 했지만, 포션의 효과 하나는 그야말로 완벽했다.
클린트는 괴물이다.
하지만 괴물을 사냥하는 것에 프레가는 대책 없이 나서진 않았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갑작스럽게 솟구친 벼락에 클린트를 그만 놓쳐버렸지만, 이제 그 매듭을 끝을 시간이었다.
오싹.
클린트가 오기를 기다리던 프레가가 클린트의 마나를 느끼고 긴장감 느껴지는 미소를 지었다.
갑작스러운 변수로 놓쳤던 괴물은 그새 본모습을 되찾은 상태였다.
타이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에야말로 놈의 목을 가져오겠습니다.”
프레가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 기다리고 있겠다.”
* * *
클린트가 수하들을 물리고 단신으로 저택의 대문을 넘었다.
3분쯤 클린트가 걷자니 기다렸다는 듯 타이탄이 모습을 드러냈다.
『Lv.131 타이탄.』
“역시, 세상이 넓긴 한가 보네.”
131.
오로지 복수를 위해 한평생 숨어지낸 복수귀의 레벨답게 어마어마한 레벨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Lv.135 클린트.』
“클린트 정도는 아니지.”
S급 단계에서도 소량의 레벨 차이가 절대적이다.
SS급을 진입한 지 한참 지난 저 두사람의 경우엔 4레벨 차이는 뒤집을 수 없는 벽이나 다름없었다.
“끝났어.”
주상혁이 싸움이 시작되는 것과 동시에 일방적인 양상을 보이는 싸움을 지켜보다가 이렇게 말했을 때였다.
“포션?”
다홍색 증기와 주황색 내용물이 담긴 포션을 본 주상혁이 인상 썼다.
생긴 게 꼭 폴라나 포션 같았다.
“아니겠지?”
주상혁조차도 처음 보는 포션을 타이탄이 섭취했을 때였다.
녀석의 마나가 엄청난 속도로 끓어오르더니 그 여파로 주상혁의 얼굴에 엄청난 강풍이 몰아닥쳤다.
수백 미터는 될 법한 장소에서 구경하던 주상혁이 기가 차서 헛웃음을 들이켰다.
『Lv.140 타이탄(도핑 중).』
“이게 말이 돼?”
주상혁도 근래에 레벨이 오르면서 레벨 하나 올리는 게 얼마나 많은 스텟이 필요한지 체감하는 중이다.
그런데 고작 포션 하나 먹었다고 131이던 게 9레벨.
믿을 수 없는 성장 폭이었다. 이건 주상혁의 폴라나 포션으로도 불가능한 성과였다.
주상혁이 식었던 흥미를 다시 되찾은 듯한 눈을 떴다.
아직 이 전투를 조금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았다.
* * *
타이탄과 재회한 클린트는 솔직히 자신만만했다.
한번 겨뤄 본 타이탄은 강력했지만, 싸워 봤기에 알았다.
금제가 모두 풀린 자신보다는 약하다는걸.
그렇기에 클린트는 주상혁이 건네준 폴라나 포션을 사용하지 않았다.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이기고 싶었던 것도 있었고 무엇보다 폴라나 포션이라는 걸 몇 번 먹어 봤기 때문에 그렇게 대단한 물건이 아님을 알았다.
그 잘났다던 박지훈의 폴라나 포션도 먹어 봤다.
하지만 기적적인 효과를 부르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래서 타이탄이 포션을 꺼냈을 때 솔직히 말해 클린트는 조소했다.
차라리 저 포션을 처음부터 들이키고 자신과 싸웠다면 그래도 긴장했을지 모르나 이미 기력을 많이 소모한 이후다.
이제 와서 마셔 봐야 상황을 뒤집을 수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런데…….
쿠구구궁.
클린트의 눈이 큼지막해졌다.
고작 포션을 들이켠 것만으로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흔들리는 땅과 쩍쩍 갈라지는 지면이 자신을 불안하게 했다.
마나를 갈무리한 타이탄을 본 클린트가 식은땀을 한 방울 흘렸다.
놈의 마나가 자신보다 높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흠칫.
“크흑…….”
화들짝 놀라 팔로 측면을 방어한 클린트가 그대로 붕 떠 날아가기 시작했다.
마나를 담아 방어했는데 이 정도라니, 생각 이상으로 놈의 마나가 올라갔음을 의미했다.
‘놈은 어디지?’
클린트가 타이탄의 기척을 읽다가 황급히 후면에 나이프를 휘둘렀다.
“푸훕…….”
손가락에 나이프를 잡힌 클린트가 복부를 후려치는 주먹에 숨이 넘어갈 듯한 얼굴로 반대편으로 날아갔다.
복부를 부여잡으며 급히 일어난 클린트가 급히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님을 직감한 것이었다.
‘박지훈을 뛰어넘는 포션이라 했나?’
지금은 그 말에 희망을 걸 수밖에 없었다.
놈처럼 기적적인 효과는 기대도 하지 않는다.
그저 놈과 대등한 수준.
그 정도만 되면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클린트가 포션을 꺼내 마셨다.
타이탄이 포션을 확인하고 급히 막으려고 클린트의 나이프를 던졌다가 움찔 놀랐다.
포션을 마신 클린트가 한 손으로 나이프를 잡아냈기 때문이었다.
“거스름돈치고는 훌륭하군.”
기울었던 추가 다시 팽팽해졌다.
먼저 움직임을 보인 것은 클린트 쪽이었다.
타이탄도 황급히 자세를 잡고 쇄도했다.
두 사람이 충돌할 때마다 크고 작은 상처들이 양쪽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누구의 목이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접전이 5분쯤 계속될 무렵.
클린트와 타이탄이 약속이라도 한 듯 훌쩍 떨어졌다.
만신창이가 된 클린트가 나이프 끝에 마나를 끌어모았다.
일전에 주상혁에게 사용했던 그 한방이었다.
클린트가 하나의 선이 되어 타이탄을 향해 쇄도했다.
타이탄도 마찬가지로 응수했다.
서걱.
클린트의 팔이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지지 않는다!’
클린트가 포기하지 않고 남은 손에 젖 먹던 힘을 짜듯 마나를 집중했다.
타이탄의 심장을 향해 클린트의 손이 내질러졌다.
하지만…….
‘제길 늦는다.’
당연하게도 타이탄도 그냥 있지는 않았다.
이미 클린트의 목을 향해 나이프를 휘둘렀고 이대로 가면 클린트의 목이 간발의 차로 먼저 잘릴 판이었다.
클린트가 모든 걸 포기한 순간이었다.
슈슈슉.
허공을 가르는 소음과 함께 의외로 클린트의 손이 먼저 심장을 꿰뚫었다.
‘뭐였지?’
꿈틀거리던 타이탄의 숨이 끊어지는 것을 느낀 클린트가 팔을 뽑아내고는 타이탄의 어깨춤을 살폈다.
3개의 침과 검은색 피부로 변한 타이탄의 어깨춤이 보였다.
‘독인가?’
극독에 당하기라도 한 듯 피부 가죽이 끓는 모습을 살피던 클린트가 눈에 지진을 일으켰다.
침이 사라진 이유였다.
클린트가 침이 날아온 방향을 향해 고개를 급히 틀었다.
아무도 없는 허공에 대고 클린트가 중얼거렸다.
“이러면 이제 내가 거슬러 줘야 하는 건가?”
* * *
전투를 쭉 지켜보던 주상혁은 마지막 순간에 침을 던져 넣었다.
‘이러면 된 거겠지?’
주상혁의 마비 독이 타이탄을 멈춘 건 정말 한순간.
하지만 클린트와 타이탄의 숭부는 그 ‘찰나’라고 표현하기도 무색한 한 줌의 시간으로 결판이 나기에 충분했다.
주주가 보여 준 환상대로 타이탄의 심장을 꿰뚫은 클린트를 확인하고 주상혁이 자리를 떠났다.
아니, 떠나려고 했다. 그런데…….
‘저건…….’
저택 뒤편으로 홀로 도주하는 프레가가 보였다.
‘그러고 보니 궁금하긴 하네.’
거리가 워낙에 멀어서 포션의 정보창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 때문에 그게 무슨 포션인지 주상혁은 알지 못했다.
주상혁이 포션에 대한 흥미를 해소할 겸 빠르게 몸을 옮겨 프레가를 추격했다.
차에 올라탄 프레가를 확인한 주상혁이 본넷 위로 포탄처럼 착지했다.
퍼엉.
본넷이 한순간에 폭발했다.
잠시 후 운전석에서 급히 내린 프레가가 달아나기 시작했다.
주상혁이 프레가의 앞을 한순간에 가로막으며 나타났다.
프레가가 마나를 일으켜 주상혁에게 달려들었다.
‘제법이네.’
최소 S급은 거뜬해 보였다.
몇 번 공격해 보던 프레가가 주상혁이 자신보다 빼어나다는 걸 체감했는지 버럭 화를 냈다.
“어째서 날 방해하는 거지!?”
“아, 오해했나 본데, 난 그쪽 방해할 마음은 없거든?”
물론, 클린트의 마음은 어떨지 모른다.
“그럼 네놈의 목적이 뭐냐!”
“궁금한 게 있어서.”
“궁금한 거?”
“그 포션.”
포션 이야기가 나오자 프레가가 움찔했다.
역시 뭔가가 있다고 확신한 주상혁이 물었다.
“그 포션 어디서 났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만?”
주상혁이 뒷걸음질 치다가 돌연 휙 돌아 달아나려는 프레가에게 침을 뿌렸다.
프레가가 갑자기 도는 마비 기운에 바닥을 굴렀다.
급히 품에서 포션을 꺼내 마시려던 프레가를 발견한 주상혁이 일순간에 접근해 포션을 낚아채 갔다.
“아, 이거였구나?”
“내놔라!”
주상혁이 포션을 자세하게 확인했다.
다홍빛 증기에 주황색 액체.
‘글라스도 내가 쓰는 거랑 비슷하네…….’
시중에 풀린 걸 사서 쓰는 주상혁이니까, 똑같다고 해도 딱히 이상할 건 없었지만.
‘석연찮단 말이지…….’
『??????』
「????????????????」
마나 +40%
오러 +20%
??? +10%
베일에 싸인 포션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던 주상혁이 말했다.
“이거 어디서 났지? 그쪽이 만들었을 리는 없을 거 같은데?”
“내가 만들었…… 끄아악!”
주상혁이 프레가의 어깨뼈를 발로 으깨 버리고는 말했다.
“착각하나 본데, 방해할 마음이 없다고 거짓말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야.”
“알았어, 사실대로 말할게. 그러니까 일단 장소를 이동해서…….”
주상혁이 프레가의 말을 듣다가 놀란 눈을 만들어 보였다.
말을 하던 프레가의 등에 나이프가 박힌 이유였다.
‘심장을 관통당했나?’
주상혁이 날아온 방향을 바라보며 주주를 소환했다.
“추격할 수 있겠어?”
나이프를 주고 물어봤는데 주주가 냄새를 맡더니 도리질 쳤다.
하긴 주상혁도 나이프에 겨우 반응했을 정도로 실력 있는 놈이다.
아마 던지고 나서 바로 몸을 뺐다면 그새 상당한 거리까지 이동했을 것이다.
“칫, 어쩔 수 없나…….”
* * *
거대 조직 클린트의 내분으로 바깥이 며칠간 시끄러웠어도 교황청은 조용했다.
“고생하셨습니다.”
아르돈이 예쁘게 잘 관리된 정원을 거닐다가 입을 열었다.
세리나가 아르돈의 앞까지 걸어와 정중히 인사했다.
“프레가는 그들의 손에 죽었습니다.”
“그렇겠지요. 그럴 운명이었으니.”
알고 있었다. 다만 세리나를 보내 확인한 건 만에 하나를 대비한 것이었다.
아르돈이 다시 걷기 시작했다.
세리나가 반보쯤 뒤에 따라붙어 그를 경호했다.
아르돈과 세리나가 함께 걸으며 잠시간의 정적이 흐를 때쯤이었다.
작은 바람이 불었고 누군가가 왔음을 직감한 아르돈의 입이 열렸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클린트.”
비스듬히 뒤돌아선 아르돈이 5m쯤 떨어진 곳에 서 있는 클린트를 발견했다.
거적때기가 된 츄리닝 차림의 클린트는, 보아하니 상황이 정리되자, 곧바로 이곳으로 온 듯했다.
“오늘은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네놈을 죽이러 왔다.”
“그 이야기는 전에 거래하면서 끝난 것 아니었던가요?”
“너를 죽여 달라는 의뢰가 새로 들어왔거든.”
클린트의 흉흉한 기세에 급히 세리나가 앞을 가로막았다.
클린트가 잘됐다는 듯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쪽한테도 빚이 있던가?”
클린트의 강력한 마나를 그대로 마주한 세리나의 표정이 일순간에 퍼렇게 질렸다.
정상의 클린트는 세리나의 상대가 아니었다. 세리나의 안색이 점차 어두워질 때였다.
툭.
아르돈의 손이 세리나의 어깨를 치자 세리나의 안색이 돌아왔다. 세리나에게 아르돈이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클린트를 자극하지 말고 물러나라는 의미였다.
세리나가 결국 옆으로 물러났다.
방해물이 사라지고 아르돈과 클린트 사이에 마침내 5m라는 거리만 남았다.
“어떻지 오늘은 내게서 살 수 있을 것 같나?”
“말했잖습니까? 당신이 배신자와 싸우는 모습 이후로는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고.”
클린트가 일순간에 아르돈을 스치고 지나갔다.
“죽음에 초연했기에 그리스도는 구원자가 되었다고 말했던가?”
“제가 그런 말을 했었습니까?”
아르돈의 머리 위 모자가 뒤늦게 반으로 잘려 바닥으로 떨어졌다.
“내가 보기엔 죽음에 초연하지 못했더라도 네놈도 충분히 대단해 보이는군.”
놈은 그날 밤처럼 이번에도 미세한 표정 변화도 없었다.
클린트가 나이프를 갈무리하고는 말했다.
“마침 큰돈 쓸 곳이 생긴 걸 다행으로 생각해라. 백지어음이 아니었다면 죽었을 거야.”
* * *
클린트 경매장 한국 지부에서 안내원으로 일을 하던 신지은은 올 상반기에 협회 본부로 이직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날 소식을 전해들은 부모님의 격렬한 반대였다.
신지은 스스로는 임금도 빵빵하고 비번도 많은 경매장 생활이 내심 만족스러웠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몹시 만족스러운 편이라 할 수 있었다.
특히 월급은 클린트 경매장보다 적더라도 사내 복지가 공기업답게 엄청나다.
협회 아이디 카드로 웬만한 건 대부분 할인이 될뿐더러 분기마다 주어지는 보너스가 큰 장점.
물론 딱 한 가지 단점도 있다.
“이봐요, 신지은 씨, 오늘 괜찮은 각성자 안 나왔습니까?”
“제가 그런 걸 어떻게 알아요?”
각성자의 출현 소식을 노리고 협회 로비에 상주하다시피 하는 이런 기자들을 상대하는 일이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물어오는 기자의 추궁에 매뉴얼대로 신지은이 답했을 때였다.
로비 바깥에 검은색 세단 수십 대가 멈춰서는 모습이 보였다.
기자들이 화들짝 놀라 소란을 일으켰다.
“크, 클린트!”
“뭐지? 저놈들이 여긴 왜와?”
“혹시 배신자가 협회에 숨어들었다거나?”
클린트의 내부 다툼이 일어나 유럽 전역에 피바람이 불고 있다는 뉴스는 이미 유명하다.
물론 그 소식이 있고 나서 한 달쯤 지났지만, ‘클린트’라는 조직이 잔혹할 땐 얼마나 잔혹한지 잘 보여 준 사건이었기에 클린트의 갑작스러운 등장은 사람들을 공포에 빠트리기 충분했다.
차에서 내린 검은 정복의 각성자들이 일순간에 협회 외부를 봉쇄했다.
시민들은 물론이고 내부의 각성자들마저 오들오들 떨기 시작했다.
협회 내부로 클린트와 베르토프를 비롯한 몇몇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위압감이 정말이지 장난 아니었다.
안내 데스크로 다가온 클린트가 신지은에게 말했다.
“주상혁, 그놈이 여기 있다지?”
“저, 그게…….”
도움을 바라고 옆 동료를 바라봤더니 이미 사색이 된 얼굴이다. 그나마 멀쩡한 건 익숙한 정복을 1년 남짓 지켜봐 온 자신뿐인 듯했다.
‘어쩌지…….’
고민하던 신지은이 결국 매뉴얼에 따르기로 하고 대충 둘러댔다.
“주상혁 씨는 조금 전에 나가셨는데요?”
“…….”
신지은의 말에 클린트가 와락 인상을 썼을 때였다.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그곳으로 장내의 모든 시선이 집중됐다.
한 남자가 엘리베이터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주상혁이었다.
‘망했다…….’
클린트가 신지은을 바라봤다.
“왜 거짓말을 했지?”
“어, 그게…… 이게 매뉴얼인데…….”
이제 죽었구나 싶을 때였다.
로비의 분위기를 읽은 주상혁이 안내 데스크로 저벅저벅 걸어왔다.
“통역 좀 해 줘요.”
“네? 네.”
신지은이 주상혁의 말을 따라 말했다.
“우리 거래는 끝난 거 아니었나?”
“생각해 보니까 거스름돈이 남더군.”
“거스름돈이 남는다는데요?”
“거스름돈?”
주상혁이 클린트를 바라보자 함께 들어온 베르토프가 고갯짓했다.
검은 정복의 각성자 네 명이 들고 있던 가방을 각자 바닥에 펼쳤다.
네 개의 가방에는 산삼이 가득 들어 있었다.
이쯤 되니 바들바들 떨 때는 언제고 지켜보던 기자들이 특종 냄새를 맡았는지 속닥이기 시작했다.
“산삼이네?”
“뭐지? 선물 같은 건가?”
분위기가 꼭 오랜만에 어색한 동창을 만난 듯한 그런 비슷한 상황임을 딱 읽은 기자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 시작했다.
“클린트와 주상혁이라.”
그야말로 특종 냄새나는 샷이었다.
* * *
미국의 대통령 조지가 클린트와 주상혁이 함께 찍힌 한국발 기사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요즘 들어 한국에서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작년 봄쯤 갑자기 나타난 고성능의 폴라나 포션.
의문의 흙빛 게이트가 나타날 위치를 척척 예견하는 일.
‘심지어 이번에는 클린트인가?’
제아무리 근 몇 년 사이 클린트가 양지 사업에 많이 뛰어들었다지만, 직접적으로 얼굴을 드러내고 누군가와의 친분을 과시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건 어떻게 보면 앞선 일들보다 배는 더 신기한 일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다고 하면 그것도 이상하긴 하군.’
그래도 SS급이던 올리비아가 S급 두 녀석에게 당해 버린 일.
당시로도 무척이나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고 동시에 지금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사건인 건 매한가지였다.
그때 입은 손해를 떠올리고 표정을 구기던 조지의 표정이 돌연 변화했다.
“그러고 보니…….”
당시 올리비아를 죽인 범인의 이름.
헌터협회 국장에게서 전해 들었기에 알고 있었다.
“주상혁…….”
동명이인일 리는 없었다.
한국에서 ‘주’ 씨라는 성이 흔한 성씨는 아니란 상식쯤은 알고 있다.
‘조사해 볼 필요는 있겠군.’
주상혁에 대한 생각을 조지가 하고 있을 때였다.
똑똑똑.
노크 소리에 생각에서 깨어난 조지가 보좌관에게 말했다.
“안으로 들어오라고 전해 주게 자네는 잠시 자리를 비켜 주고.”
“알겠습니다.”
꾸벅 고개를 숙인 보좌관이 나가고 잠시 후 마이클이 집무실로 들어왔다.
“그래, 폴란드 쪽의 던전 브레이크는 끝이 났나?”
미국의 3번째 흙빛 게이트에 이어 4번째는 폴란드였다.
일본의 사건을 교훈 삼아 폴란드에서 도움을 요청했고 마찬가지로 상당한 액수를 보장받고 미국은 마이클을 파견했다.
“뒷수습은 좀 남았습니다만, 드릴 말씀이 있어서 먼저 돌아왔습니다.”
조지가 의외라는 듯 물었다.
“벌써부터 궁금해지는군.”
“올리비아를 죽인 장민주, 기억하십니까?”
마이클이 굳이 장민주를 언급한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폴란드의 게이트는 미국을 더불어 선진국 대부분이 참여했다.
당연히 한국의 각성자 장민주도 일본 때처럼 참석했다.
└뭐야, 이게…….
└단순히 일본 때보다 보스가 약한 이유는 아닌 거 같죠? 그냥 마나 포 크기부터 남다르던데?
└근데 뭔가 이상하지 않나? 각성자가 이렇게 빨리 성장하는 게 가능함?
└음…… 근데 그렇다기엔 장민주도 많이 당황한 거 같은데요? 그냥 우연 아닌가요?(@문자)
장민주의 활약은 그중에서 발군이었다.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백호의 급격한 성장 덕분이었다.
일본의 던전 브레이크 때와는 차원이 다른 마나 포가 50m는 족히 될 것 같은 보스의 우측 상반신을 날려 버리는 장면은 해외는 물론이고 국내에도 유명했다.
클린트와 주상혁의 만남과 더불어 아무래도 근 몇 주간은 시끄러울 사건이 또 생긴 것이다.
장민주가 폴란드에서 돌아오고 사흘.
일전에 백호를 되찾아 오면서 받아 온 사료를 챙겨 주며 장민주가 물었다.
“근데 진짜 너 말 안 할 거야?”
냐아아아.
밥을 먹던 백호가 움찔하더니 갑자기 졸린 척 하품했다.
종국에 자는 척 시치미 떼는 백호를 보고 장민주가 말했다.
“왜 말하기 싫은 건데 이유라도 좀 알자니까?”
…….
그 사건 이후로 아무리 캐물어 봤지만, 백호는 그때마다 이런 식이었다.
“혹시 그 사람이 한 건가?”
움찔.
주상혁의 이야기가 나오자 백호가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렇단 말이지?”
냐냐냥!
“아니면 아닌 거지 왜 그렇게 흥분해? 졸린 거 아니었어?”
주상혁과 관계없다고 변호하던 백호가 아차 하는 듯한 기색을 보이더니 잠시 후 눈치를 보다가 다시 자는 척을 하기 시작했다.
장민주가 그런 백호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하긴 그 사람이라면 불가능한 일은 아닐지도 모르겠네…….’
올봄에 강원도에 머물면서 주상혁의 도움으로 S급이 되었기에 더욱이 그렇게 생각했다.
주상혁이 남들은 모르는 성장 방법을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다음에 한번 물어봐야지.’
어차피 물어봐야 모른 척 시치미 뗄 확률이 높을 것 같지만…….
“돈 드는 것도 아니잖아?”
* * *
주상혁은 클린트에게 받은 산삼 덕에 요즈음 기분이 좋았다.
급하게 구하느라 그런지 오십 년 삼이 대부분이었지만…….
『기운 만땅 산삼 양갱.』
‘백이십 년짜리가 또 올 줄은 생각도 못 했었지?’
주상혁이 냉장고에서 꺼낸 산삼 양갱을 반으로 쪼개서 주주와 나눴다.
주주의 몫을 얇게 썰어 밥그릇에 놓아 줬다.
주주가 금세 다 먹고 아쉬운 표정으로 남은 양갱을 바라봤다.
‘미안하다, 주주야…… 나도 먹고살아야지’
마음 같아서는 다 주고 싶다.
하지만 이건 주상혁이 직접 먹을 필요가 있었다.
남은 양갱을 입에 넣고 삼켜 버린 주상혁이 스테이터스를 켰다.
주주의 실망한 얼굴은 애써 외면했다.
『Lv.119 주상혁.』
“그래도 제법 레벨이 많이 올랐단 말이지.”
아무래도 이번에 복용한 양갱을 비롯해서 꾸준히 초콜릿을 복용한 덕일 것이다.
”남은 초콜릿도 마저 다 먹으면 120은 넘겠네.“
불과 몇 주 전만 해도 풀 도핑을 해야 이 정도 레벨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포션을 하나도 복용하지 않고도 이 정도의 레벨이 되었다.
“이런 게 전화위복인가?”
클린트라는 화가 순전히 복으로 변했다.
든든한 레벨을 본 주상혁이 슬쩍 측면의 시계를 확인했다.
“12시면 슬슬 준비해야겠네.”
주상혁이 외출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클린트 때문에 한 달 넘게 미뤄 왔던 강혜영과의 약속이 잡혀 있었다.
외출 준비를 마친 주상혁이 만나기로 한 카페에 도착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주상혁의 눈에 낯익은 뒤통수가 보였다.
『Lv.79 강헤영.』
“레벨이 많이 올랐네.”
주상혁이 준 아티팩트로 매일같이 독을 달인다.
또 강혜영의 경우엔 독의 성능과 직결되기 때문에 보충제도 주상혁이 꼬박꼬박 챙겨 줬다.
생각해 보니 당연한 일이긴 했다.
주상혁이 강혜영의 맞은편으로 걸어가서 앉았다.
“오래 기다렸냐?”
“아뇨, 저도 방금 왔어요.”
주상혁이 강혜영의 의미심장한 입꼬리를 보고 말했다.
“무슨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냐?”
“사실 보여 줄 게 있어요.”
“보여 줄 거?”
강혜영이 가방을 뒤지다가 내밀었다.
“짜잔.”
주상혁이 자세히 읽어 보니 검정고시 합격증이었다.
“오…… 뭐야, 합격했네?”
지난겨울부터 거의 1년가량 준비하더니 결실을 본 듯했다.
‘이거 뭔가 찔리네…….’
사실 강혜영이 검정고시준비를 하게 된 건 주상혁이 고졸이라고 거짓말했던 데 있다.
주상혁이 사실대로 털어놨다.
“야, 근데 나 하나 고백할 게 있다.”
“고백? 뭔데요?”
“실은 나 전에 검정고시 패스했다는 거 거짓말이다.”
강혜영이 눈을 끔벅이다가 풉 웃었다.
“그거 알고 있었는데요?”
“아, 그래?”
뭔가 김이 확 샌다.
사실 검정고시 이야기 나올 때마다 말한다 하면서 기회를 보던 게 무색할 만큼.
“뭐, 그럼 됐고, 합격 선물이나 받아라.”
“선물이요?”
강혜영의 표정이 밝아졌다.
주상혁이 보는 사람이 없나 주변을 확인하고 인벤토리에서 초콜릿을 꺼내 책상 위에 내려놨다.
『기운 가득 산삼 초콜릿.』
“하루에 3알씩 먹어 한 번에 다 먹진 말고 8시간쯤 맞춰서.”
이번에 받은 산삼 중에서는 두 뿌리밖에 안 되던 칠십 년 삼.
그중에서도 품질이 좋아 보이는 녀석으로 만든 거였다.
“잘됐다. 보충제랑 같이 먹으면 좋겠네요.”
“너 솔직히 말해 실망했지?”
“아, 아닌데요?”
슬쩍 눈빛을 피하는 게 분명했지만, 굳이 추궁하지는 않았다.
주상혁이 각성자를 성장시킬 수 있다는 걸 알아도 초콜릿이 가지는 가치를 모르는 이상 너무나도 당연한 반응이니까.
“여하튼 귀한 거니까 꼭 챙겨 먹어 알았지?”
“네.”
초콜릿에 대한 이야기를 마쳤을 때였다. 테이블 위의 강혜영의 가방이 꿈틀거리다가 옆으로 푹 쓰러졌다.
“그 가방 안에서 방금 뭐가 꿈틀거린 거 같은데?”
“네?”
주상혁이 살짝 열린 지퍼 사이를 유심히 바라볼 때였다.
깜깜이가 얼굴을 ‘슉!’ 하고 내밀었다.
‘설마……?’
주상혁이 불길함을 느끼고 질끈 눈을 감을 새도 없이 테이블을 구르는 방울토마토가 보였다.
데구르르르.
“젠장…….”
띠링.
Q. 독의 강화 [돌발].
* * *
눈앞에 떠오른 퀘스트를 보며 멍 때리던 주상혁이 체념한 듯 한숨 쉬었다.
‘일부러겠지?’
이걸로 확실해졌다.
깜깜이의 행동을 보아 할 때 고의성이 다분했다.
도무지 외출할 때까지 토마토를 몰래 가지고 외출할 이유가 없었다.
“하는 수 없네.”
“네? 뭐가요?”
“그냥 혼잣말이다.”
하는 수 없이 퀘스트를 깨기로 했다.
마음 같아서는 오기라도 부려 보고 싶었지만, 지금 관계 레벨은 3레벨.
여기서 추가로 레벨이 하락하면 스킬을 또 하나 잃게 된다. 그것도…….
『Lv.13 독성 강화.』
‘이걸 잃어버리는 건 아깝지.’
주상혁은 클린트와의 전투를 돌이켜 보며 독성 강화 사용처에 대해서 깨달았다.
나이프를 휘둘러 상처를 입힌 클린트의 손에 역으로 독이 퍼진 게 독성 강화의 효과.
그런 효과를 감안하면 독초 기르기와는 다르게 독성 강화는 잃을 수 없는 스킬이었다.
“근데, 오빠.”
“왜?”
카페를 나와 영화 시간에 맞춰 이동하던 강혜영이 말했다.
“저 얘들이요.”
“아…… 그냥 무시해.”
주상혁이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말했다.
『Lv.73 주재혁.』
『Lv.72 주민혁.』
『Lv.67 주화영.』
코너를 돌면서 슬쩍 미행하는 녀석들을 확인한 주상혁이 중얼거렸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지?’
근래 외출만 했다 하면 뒤를 졸졸 따라다니고 있었다.
물론 저번 약초 살 때도 마찬가지였다.
주화영에게 준 주주의 분신 때문인지는 몰라도 전이 아티팩트로 이동해도 다를 바 없었다.
‘따라다니지 말라고 말하면 상처받으려나?’
영화관으로 걷던 주상혁이 동생들에 대한 건 접어 두고 일단 강혜영에게 하던 이야기나 마저 했다.
“근데 내일부터는 당분간 나랑 같이 독 좀 만들자.”
“네? 오빠랑 같이요?”
“왜 싫어?”
“아뇨, 완전 좋아요.”
* * *
주상혁을 미행하던 쌍둥이들이 말했다.
“영화관으로 들어갔는데 어떻게 하지?”
“별수 있나? 기다려야지.”
“둘이 사귀는 거겠지?”
높은 고층 빌딜 위에서 따로 미행하던 주화영의 목소리가 이어폰을 통해 들렸다.
―사귀긴 무슨, 딱 보면 몰라? 그냥 놀아 주는 거잖아.
“너는 형이 연애하는 게 싫냐? 난 좋은데.”
“나도, 그리고 무엇보다 예쁘잖아.”
―난…… 여하튼 용납 못 해.
주민혁이 말했다.
“그래, 용납 못 하겠다는 너의 마음은 잘 알겠으니까 주변이나 잘 살피렴.”
―알았어.
주화영의 목소리가 들리고 잠시 후였다.
―수상한 사람 발견.
“뭐? 어디?”
―우리랑 반대편이야. 모퉁이에 검은색 야구모자.
주화영의 말에 시선을 멀찍이 던진 쌍둥이가 누군가를 발견하고 말했다.
“도망친다.”
후다닥 쫓아간 쌍둥이가 도망가는 남자를 따라잡아 기절시켰다.
―이번엔 어디야?
주머니를 뒤져 라이센스를 확인한 주민혁이 말했다.
“미국인데?”
“일본에 영국에 중국에다가 이젠 미국?”
주재혁이 말했다.
“주변에 다른 사람은 없어?”
―조금 떨어진 곳이야.
주민혁과 주재혁이 주화영이 말해 준 곳으로 뛰어가며 말했다.
“근데 이러는 거 형한테는 좀 미안한데…….”
―또 뭔 소리래? 오빠들은 큰오빠가 다른 나라로 갔으면 좋겠어? 다시는 못 본다니까?
“아니, 그건 아니지…….”
―아니면 일단 달려.
* * *
결국, 퀘스트를 깨기로 한 주상혁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제한시간이 한 달밖에 안 된다.
이 기간 안에 독을 강화하고.
임상 시험을 완료해야 했기에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일주일에 거쳐 각종 독의 강화와 수량을 확보한 주상혁이 던전을 클리어하고 나왔다.
51잼을 획득하셨습니다.
A급 던전을 나온 주상혁이 잼 획득을 알리는 알람을 닫고 깊은숨을 뱉었다.
“A급 던전이 안 된다고?”
강화된 마비 독 타입: 0/1000.
강화된 출혈 독 타입: 0/1000.
강화된 수면 독 타입: 0/1000.
강화된 신경 독 타입: 0/1000.
…….
이래서야 강태섭에게 부탁해 추가로 분양받은 B급 이하 던전들은 해보나 마나였다.
당장에 A급 던전이 강화된 독을 시험할 만한 적합한 난이도가 아닌 상황에서 다른 던전은 해 볼 필요도 없었다.
‘S급 던전이어야 된다는 건데…….’
다행히 주상혁은 S급 던전을 하나 알고 있긴 하다.
얼마후에 필리핀에서 열리는 5번째 S급 던전 브레이크.
지금으로서는 그쪽에 기대는 게 퀘스트를 깰 유일한 방법이었다.
‘일본 때처럼 조용히 처리하면 별 탈 없겠지.’
* * *
다섯 번째 S급 던전 브레이크.
주상혁은 퀘스트를 위해 미리 준비를 시작했다.
올해에만 팔자에도 없는 출국을 세 번째.
절차를 밟아 필리핀에 도착한 주상혁이 이틀쯤 호텔에서 뒹굴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이걸로 준비는 대충 끝났네.”
남들이 보기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행동이다.
하지만 당연히 집돌이 주상혁이 해외까지 다녀온 이유가 없을 리 없었다.
1. 집.
2. 하우스.
3. 협회 본부.
4. 화장실.
5. 필리핀.(@문자)
전이 아티팩트에 새로운 위치가 등록됐다. 필리핀이었다.
“이참에 화장실은 지우자.”
저번에 일본에서 활동할 적에 등록해 뒀던 호텔 화장실을 지웠다.
어차피 더 이상 일본에 방문할 생각도 없었고 빈칸은 한 개쯤 항상 유지하는 편이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며칠간 평소처럼 탕약 달일 땐 달이고 쉴 땐 쉬고 주주랑 산책할 땐 산책 좀 하면서 그렇게 보냈다.
마침내 기다리던 필리핀의 던전 브레이크가 발생했다.
주상혁이 전이 아티팩트를 꺼내, 신속하게 전개했다.
주상혁이 주주에게 말했다.
“알지, 주주? 진짜 위험한 거 나오면 안 돼.”
왕!
주주의 대답까지 듣고 만전의 준비를 마친 주상혁이 아티팩트를 통해 단번에 필리핀에 도착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몬스터.
이번 몬스터는 헬하운드였다.
검은색 털을 지닌 잘빠진 사냥개 모습의 헬하운드는 꼬리 끝에 피어난 불꽃이 인상적인 몬스터였다.
Lv.88 …….
Lv.87 …….
Lv.91 …….
“일반 몬스터의 레벨치고는 좀 높네?”
대부분은 80 후반에 해당했지만, 90 초반에 해당하는 개체도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일본과 비교할 때 난이도는 한참 더 높아 보였다.
주상혁이 픽 웃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쉽지.”
불과 몇 달 전의 주상혁이라면 조금 고전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의 주상혁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이미 외부에 잘 알려진 주주의 외견 때문에 힘을 빌리지 않기로 마음먹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식은 죽 먹기였다.
주주가 전력 외로 분류된 만큼 추가로…….
『강화된 특제 야채죽 엑기스(폴라나).』
「강혜영이 만든 야채죽의 엑기스다. 폴라나가 통으로 들어가 매우 강력한 독성을 지녔다. 이전에 비해 특수한 식물의 독성분이 추가되면서 기존의 특성이 강화됐다.」
타입: 출혈
“이게 존재하거든?”
어차피 수준에 안 맞아서 S급 던전까지 찾아왔다.
주상혁으로서는 몬스터가 강해야 더 좋았다.
“그럼 시간 없으니까 슬슬 처리해 볼까?”
주상혁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거대한 소음을 만드는 거대한 헬하운드들의 사이를 누비며 독침을 뿌렸다.
약물 투여를 사용하셨습니다.
약물 투여를 완료하고 침이 자동으로 회수됩니다.
침을 맞은 녀석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주상혁을 발견하고 달려들다가 침을 맞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3초 뒤, 검은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것이전부였다
“출혈 독은 이걸로 끝났고 다른 독도 써야지.“
강화된 마비 독 타입: 0/1000.
강화된 출혈 독 타입: 1000/1000 (완료).
강화된 수면 독 타입: 0/1000.
강화된 신경 독 타입: 0/1000.
…….
독을 바꿔가며 빠른 속도로 퀘스트의 수치를 채워가던 주상혁이 우뚝 멈춰 섰다.
크르르릉!
다른 놈들에 비한다면 족히 네 배는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는 놈이 등장했다.
머리가 어지러울 수준의 포효를 하는 사냥개.
『Lv.125 케르베로스.』
케르베로스였다.
“온 김에 잼이나 챙길까?”
이놈이 보스일 게 분명했다.
번거롭더라도 이 기회에 잡아 두면 지급되는 잼이 짭짤할 터.
사냥하기로 마음먹은 주상혁이 머리 셋 달린 케르베로스를 향해 침을 던졌다.
워낙에 덩치가 큰 만큼 단번에 전신으로 효과가 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효과는 있네.”육안으로도 확인이 가능했다.
마비 독이 발에 꽂히면 그대로 쫓아오다가 바닥을 구르고 머리에 신경 독이 퍼지면 난데없이 지들끼리 머리를 부딪치는 등 재미있는 장면이 연출됐다.
주상혁이 다양한 독들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케르베로스의 머리 위에 올라가서 주먹을 강하게 쥐었다.
“어디 몇 대나 견디나 보자고.”
주상혁의 주먹질이 이어질때마다 구겨지던 케르베로스의 가운데 머리가 끝끝내 곤죽이 되었다.
바닥으로 내려선 주상혁이 머리 하나를 잃자 숨이 끊어진 케르베로스를 보고 말했다.
“뭔가 비효율적인 몬스터구만.”
* * *
당연한 말이지만, 이번 필리핀의 던전 브레이크에도 각국의 SS급 각성자들은 소집됐다.
그중엔 자타공인 세계 최강 마이클도 있었다.
기본적인 정보를 전달받고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난 방향으로 공격대와 마이클이 진입했다.
헬하운드가 공격해 왔다.
마이클을 노리고 달려들던 세 마리의 헬하운드의 머리가 동시에 터져 나갔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마이클의 주먹 끝에 묻은 옅은 혈흔이 말해 줬다.
간단하게 헬하운드를 처리한 조금 시끄러운 마이클이 뒤편을 바라봤다.
공격대 쪽으로도 헬하운드가 다섯쯤 쓰러져 있는 모습이었다.
“이것들 제법 센데?”
“그러게.”
공격대의 숫자는 6명.
수적 우위가 있기 때문인지 가볍게 쓰러트린 듯했다.
마이클이 무심한 시선을 공격대에서 치우고 다시금 선두에서 걷기 시작했다.
공격대가 그 뒤를 따라 걸었다.
1시간쯤 헬하운드 무리를 만나는 족족 박살 내면서 이동하던 마이클의 미간에 돌연 주름이 잡혔다.
무언가 발견한 이유였다.
“…….”
공격대도 마이클이 본 걸 발견했는지 한마디씩 남겼다.
“뭐야, 이건?”
“어때? 자고 있는 거 맞아?”
가까이 다가가 확인한 독일인 볼프만이 말했다.
“그래…… 자고 있다.”
기가 찬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늘에는 여전히 검은색 게이트가 존재하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저 높이에서 수면 상태로 떨어지는 건 이상했다.
“태평한 놈이로군.”
볼프만이 자고 있는 헬하운드를 태워 버리는 모습을 끝으로 마이클이 걸었다. 그런데…….
한둘이 아니었다.
가는 길목마다 수십 수백 마리의 자고 있는 헬하운드가 보였다.
“마이클! 이쪽으로!”
그뿐만이 아니었다.
주변을 살피던 공대원의 부름에 이동하니 피를 토하고 죽은 헬하운드를 시작으로 다양한 증세의 헬하운드들이 보였다.
마비 기운에 드러누워 온몸을 절고 있는 헬하운드 술에 취한 듯 비틀거리는 헬하운드 허공에 대고 물어뜯고 뒹구는 헬하운드등.
다양한 증상의 헬하운드들을 확인한 마이클이 중얼거렸다.
“누군가의 짓인가?”
잠시 생각하던 마이클의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이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보스는 어딨지?”
아까 던전 브레이크 밖에서 보스의 우렁찬 포효를 들었다.
물론, 그 뒤로 시간이 좀 지났다고는 해도 던전 깊숙이 들어왔는데 보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마이클이 홀로 이곳저곳 뛰어다니다가 무언가를 발견하고 터벅터벅 걸어갔다.
“역시…….”
가운데 머리가 으깨져 죽은 수십 미터 크기의 케르베로스의 사체가 보였다.
일본에서의 일을 떠올린 마이클이 옅게 웃었다.
“그자로군.”
* * *
케르베로스를 처리하고 전이 아티팩트로 귀환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주상혁이 머리를 대충 말리고 침대에 가로로 누웠다.
Q. 독의 강화 [돌발] (완료).
「제자 강혜영이 기존의 독을 더욱 강화할 만한 실마리를 찾아냈습니다. 기존의 독을 강화해 더욱 강력한 독을 개발하는 것은 새로운 지식을 정립하는 데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달성 조건: 타입별 다양한 독을 강화하고 임상 시험을 완료할 것.
실패 조건: 제한시간 내에 독의 강화를 완료하지 못하면 실패.
달성 보상: 강혜영과의 관계 레벨 1 상승, 명성 300.
실패 페널티: 강혜영의 관계 레벨 1 하락.
제한시간: 1개월.
강화된 마비 독 타입: 1000/1000.
강화된 출혈 독 타입: 1000/1000.
강화된 수면 독 타입: 1000/1000.
강화된 신경 독 타입: 1000/1000.
…….
퀘스트를 완료하시겠습니까? Yes/No.
주상혁이 그간 은근 신경 쓰이게 하던 퀘스트를 끝마쳤다.
명성이 +300 상승했습니다.
강혜영과의 관계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뭐, 독도 은근히 쓸 만한 거 같고.”
독에 대한 주상혁의 평가는 제법 후했다.
125레벨에 이르는 케르베로스에게도 제대로 효과를 본 것에서 높은 점수를 준 것이다.
“이제 당분간은 진짜 별거 없겠네.”
주상혁이 미리 겪어 본 3년.
이 기간 있었던 큼지막한 사건 중 하나인 S급 던전 브레이크는 이걸로 끝이다.
다음 사건이라 봐야 반년 뒤쯤 등장하는 최초의 SS급 던전이다.
“이 정도면 이제 어지간해서 퀘스트도 발생하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주상혁이 인벤토리에 약간 남은 독을 보다가 문뜩 일전에 획득한 의문의 포션을 꺼냈다.
『??????』
「????????????????」
+마나 40%
+오러 20%
+??? 10%
“근데 그나저나 이건 누가 만들었을까?”
주상혁의 눈으로도 보이지 않는 정보는 정말이지 오랜만이었다.
맨 처음 주주를 봤을 때 말고는 정확히 말해 ‘?’로 표기된 적은 처음이었다.
괴랄한 성능의 포션을 살펴보자니 때마침 누군가 방문을 노크했다.
똑똑똑.
고민하던 주상혁이 옆자리 주주를 안아 들고 침대에 누웠다.
“무시할래.”
복도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이 사라지길 기다리자니 잠시 후 주상혁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번호를 확인하자니 엄준식이었다.
“하긴 시간이 제법 지났지?”
엄준식과는 그날 결국 거래하기로 했다.
물론 마나메탈을 이전처럼 그냥 파는 게 아니고 조건을 내걸었다.
연구소를 청초길드 인근으로 옮기라는 조건이었다.
당시에 주상혁이 이 같은 제안을 한 건 혹여나 전이 아티팩트에 대한 정보가 외부로 새어 나가는 걸 경계해서였다.
주상혁이 전화를 받았다. 엄준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집에 안 계십니까?”
휴대폰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복도에서도 들려왔다.
주상혁이 통화를 종료하고 대답 대신 방문을 열어 줬다.
“이렇게 찾아온 거 보니 연구소가 다 지어졌나 보죠?”
각성자가 나타나면서 건축업에도 혁명이 일어났다.
대지 속성 마법을 가진 각성자들로 인해 시공 시간이 대폭 단축됐다.
덕분에 요즘 세상에 어지간한 건물들은 1달이면 완공이 긴 편에 속했다.
“네. 어떻게 연구소라도 눈으로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어차피 연구소가 들어선 곳은 청초길드의 뒤편이다.
바로 담벼락 너머에 존재하는 연구소 지나가는 길에 나중에 슬쩍 확인하면 된다.
“됐습니다. 그보다 마나메탈에 대한 거래부터 다시 확인해 보죠.”
주상혁이 질문했다.
“마나메탈로 나오는 수익률은?”
“9:1입니다.”
마나메탈이 가치를 측정할 수 없는 광석이란 게 전이 아티팩트의 사례로 밝혀졌다.
물론 이후의 연구물이 무엇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 가치를 제대로 정하기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주상혁은 그냥 발생하는 수익을 비율로 나누는 방식을 선택했다.
물론 주상혁이 9였다.
주상혁이 문을 닫고 인벤토리에서 마나메탈을 하나 챙긴 뒤 다시 문을 열었다.
마나메탈을 넘기며 주상혁이 말했다.
“그럼 고생하세요. 기대하고 있을 테니까.”
* * *
일본의 협회장 미츠오는 이번 핀란드 소식을 누구보다 빠르게 연락받았다.
일본은 여태까지 보스를 처리하고 홀연히 사라진 각성자를 찾고 있었고 비슷한 사건이 일어나자 미즈키가 정보를 넘긴 것이었다.
정보를 전달받은 미츠오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러면…….”
일본인이 아닐 확률이 올라갔다.
그간 일본인일 거라는 가정을 하고 수색했던 게 헛우물을 켜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미즈키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도대체 누구지?”
미즈키는 던전 브레이크 당시 일본에 존재하는 모든 각성자를 파악하고 있었다.
“마땅히 그런 게 가능한 사람은 없었을…….”
미즈키가 혼잣말을 멈추고 생각을 이어 가기 시작했다.
책상을 검지로 콕콕 치며 한참을 생각하던 미츠오가 인터폰을 누르고 비서를 불러 명령했다.
그리고 그날 오후 늦게 미츠오에게 정보 하나가 전달됐다.
“역시 그렇군…….”
명령한 정보는 주상혁이 핀란드에 근 1년 방문한 적이 있는가를 알아본 정보였다.
그리고 미츠오의 예상대로 역시나 주상혁은 필리핀에 방문한 내역이 있었다.
1년까지 갈 것도 없이 불과 1개월 이내였다.
‘하지만 솔직히 믿기 힘들군.’
주상혁은 기껏해 봐야 SS급에 준하는 사토 수준의 각성자.
그건 작년 이맘때쯤 한국에서 실시한 등급 심사에서 S등급 판정을 받았다는 정보가 말해 주고 있었다.
지금이야 한국 측에서 극비리에 주상혁의 등급을 감추고 있어서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크게 차이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각성을 하고 안정기에 접어들면 큰 폭으로 성장하는 각성자는 거의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데…….
“공통점이라고는…….”
주상혁밖에 없었다.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날 무렵 일본과 필리핀을 이유 없이 방문.
이게 과연 우연일 거라고는 보기 힘들었다.
“조사해 볼 필요성이 있겠군.”
* * *
미국의 대통령 조지도 주상혁에 대한 조사를 몇 달 전부터 착수하고 있었다.
“이거참, 미칠 노릇이군.”
한 달 전쯤 조사를 맡긴 주상혁에 대한 보고를 받은 조지의 표정이 곱지 못했다.
정보다운 정보라곤 캐지 못하고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복동생들이 방해는 한다는 말이지…….”
각성자 1세가 뛰어난 각성자라고 해서 각성자 2세가 뛰어난 각성자가 되란 법은 없다.
각성자가 각성자를 낳는 유전의 공식은 성립이 되지만 그 마나까지 유전이 되는 건 아닌 것이다.
그리고 이 법칙은 경우 당연히 반대로 바꿨을 때도 마찬가지다.
각성자 2세가 뛰어난 각성자라고 각성자 1세가 뛰어난 각성자란 법은 없지만…….
“그래도 보통은 납득 가능한 수준이 보통이란 말이지…….”
헌데 이건 뭐란 말인가?
A급 각성자의 자식 4명 모두가 S급 이상으로 추정?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분명 뭔가가 있다.”
그런데 문제는 도무지 그걸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SS급 각성자를 보내서 조사를 맡기고 싶다.
하지만 올리비아 사건 때 했던 약속이 발목을 잡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미련을 놓는 게 맞는 건가?”
괜히 어정쩡한 S급 몇 명 보냈다가 실패하고 다시 트러블을 엮느니 깔끔하게 물러나는 게 맞다. 그렇게 조지의 생각이 포기하는 쪽으로 기울어갈 무렵이었다.
똑똑똑.
주상혁에 대한 생각을 조지가 하고 있을 때 때마침 노크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마이클이 들어왔다.
“그래 할 말이 뭔가?”
“일본에서 있었던 일이 이번에도 일어났습니다.”
조지의 표정에 흥미로움이 피어났다.
조지도 마이클에게 앞서 일본에서의 이야기를 들었기에 의문의 각성자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고 있는 참이었다.
“의심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 그게 누군가?”
“주상혁입니다.”
마이클의 말은 이러했다.
마이클 역시 주상혁이 입국한 정보를 입수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 필리핀의 경우 며칠 전에 출국했다고 하지 않았나?”
조지의 말에 마이클이 말했다.
“그에게는 전이 아티팩트가 있습니다. 이미 당시 영상은 한국정부에서 적극적으로 차단해 확인은 할 수 없지만, 한국의 던전 브레이크 당시 사용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조지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마이클의 말이 말하는 바는 잘 안다.
유능한 각성자는 미국으로 불러 모으는게 좋다. 하지만 아까도 그랬듯 그놈의 입국금지 계약이 문제였다.
어긴다면 필시 큰 손해를 입게 될 터.
‘어중이떠중이를 보내면 소란만 키울 거란 말이지…….’
혹여 들키더라도 증거를 남기지 않고 몸을 뺄 수 있을 만한 유능한 자가 좋았다.
조지가 눈앞에 있는 마이클을 보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이겠군.”
제법 긴 시간이 지나고 조지의 결정이 내려졌다.
“그렇게도 관심이 간다면 자네가 가면 되겠군. 밀입국을 해야 해서 마땅한 사람을 구하기 힘들어.”
마이클이 말했다.
“다녀오겠습니다.”
* * *
“오늘은 점심으로 뭐 먹지…….”
탕약을 달이다가 평상에 드러누운 주상혁이 한숨 쉬었다.
날이 빠르게 지나 달은 벌써 12월.
평상에 누워 있자니, 쌀쌀한 바깥바람이 주상혁의 뺨을 때렸다.
“주주는 또 화단인가?”
그때 강혜영의 하우스를 목격한 이후 주상혁은 화단에 싹을 엎어 버리려고 했다. 그런데…….
“취미가 생긴 거면 잘된 일이지.”
주주의 거센 반대로 당시에 뽑아내지 못했다.
주상혁이 옆으로 드러누워 화단을 바라보자, 뭐가 그렇게 기분 좋은지 살랑살랑 꼬리를 흔드는 주주가 보였다.
주상혁이 쪼그마한 물뿌리개로 화단에 물을 주는 주주를 보다가 못 볼 걸 본 듯 눈을 비볐다.
“어?”
주상혁이 급하게 벗어 놓은 슬리퍼를 신고 화단 앞으로 걸어갔다.
『폴라나.』
“이럴 리가…….”
주상혁이 심은 건 나팔꽃이었다.
근처 꽃집에서 사 온 씨앗을 대충 심은 거니 확실했다.
그런데 지금 화단에서 자라고 있는 건 분명히 폴라나였다.
아무리 부정해도 주상혁의 눈으로 들어오는 정보창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주주는 알고 있었던 건가?’
폴라나로 자랄 걸 알고 있었다면 전에 화단을 엎어 버리는 걸 결사반대한 것도 이해가 간다.
폴라나는 주주가 좋아하는 먹거리 중 하나였으니까.
주상혁이 옆에 쪼그려 앉아서 주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주주야 이거 나팔꽃 맞지?”
왕!
“그럼 폴라나가 된 건 주주랑 관계 있는 건가?”
왕!
그렇단다.
다행히 답하기 싫은 질문은 아니었는지 순순히 답해 줬다.
주상혁이 주주를 보며 생각에 잠겼을 때였다.
문뜩 다른 꽃도 심어볼까 생각하던 찰나.
“윽……?!”
돌연 극심한 두통이 찾아왔다.
화단을 가득 채운 큼지막한 폴라나.
화단 주변을 신이 나서 날뛰는 주주.
주주를 쓰다듬는 누군가의 손.
한바탕 몰아닥친 두통이 가시고 주상혁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주상혁의 시선이 눈앞의 걱정하는 주주를 보다 말고 급히 손목으로 향했다.
방금 전 주주를 쓰다듬던 손에 걸린 손목시계와 똑같은 시계가 보였다. 조금전 주주를 쓰다듬던 사람이 자신임을 의미했다.
‘뭐였지……?’
손목시계는 그대로 텅 빈 상태였다.
일전에 느꼈던 것처럼 손목시계와 관련된 증상인가 했지만, 아니라는 확실한 증거였다.
주상혁이 걱정하는 눈으로 손등을 핥는 주주를 쓰다듬어 주며 중얼거렸다.
“그냥 단순한 데자뷔겠지?”
* * *
일본의 SS급 각성자 미즈키는 한국에 입국했다.
올리비아 이후로 입국 절차가 까다로워져서 무려 대기 시간만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걸렸지만, 다행히 어찌저찌 들어올 수는 있었던 것이다.
미즈키가 숙소 대기가 풀리자 향한 곳은 전주였다.
미즈키가 이번에 협회장 미츠오에게 전달받은 건 주상혁의 뒷조사.
당연히 그가 사는 전주로 가는 게 맞았다.
며칠간 은밀히 주상혁을 감시하던 미즈키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정보가 틀린 건가?’
알려진바 주상혁의 각성 계열은 전투 계열.
그런데 그런 주상혁은 하루에 4시간 남짓 옥상에서 포션을 만들다가 사라지곤 했다.
그가 만드는 포션이 뭔지 알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거리가 너무 멀어서 포션을 자세히 확인할 수 없다는 게 흠이었다.
‘대충 이 정도면 특이한 점은 두 가지 정도인가?’
수수께끼의 포션을 만든다는 것과 가끔 옥상에서 포션을 만들다가 이곳을 힐끗거린다는 것이었다.
‘처음엔 혹시 들킨 건가 싶었지만…….’
솔직히 말해 지금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들켰다기에는 대처가 없었다.
‘뭐 솔직히 말해 들키는 게 더 이상하긴해.’
지금 미즈키와 주상혁의 거리는 약 400m.
높은 빌딩 위에서 기척을 숨기고 감시하고 있는데, 이 거리를 간파한다면 주상혁은 이미 자신을 아득히 뛰어넘은 존재라는 말이었다.
미즈키는 이 두 가지를 미츠오에게 전달했다.
“아…….”
무언가 추가로 말하려고 하던 미즈키가 망설였다. 미츠오가 물었다.
―추가적으로 뭔가 더 있습니까?
“그의 이복동생들에 관해섭니다.”
미즈키의 설명을 듣던 미츠오가 말했다.
―모두가 S급이라…… 자세히 확인해 보는 게 좋겠군요.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미즈키?
협회장 미츠오는 미즈키에게 주상혁의 실력을 자세히 알아볼 것을 부탁했다.
물론, 선택은 미즈키에게 맡겼다. 명령이 아닌 부탁이었으니까.
미즈키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주상혁은 자신의 동생 스즈키를 죽인 장본인.
일찍이 출가해서 애틋한 사이는 아니지만, 줄곧 주상혁이라는 자에게 순수하게 흥미가 있었다.
미즈키가 주상혁이 외출하기를 기다렸다가 따라나섰다.
다행히 이른 아침 시간대라 행인도, 방해꾼도 없었다.
“멈춰라!”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걸어가던 주상혁이 자신을 슬쩍 흘기고는 조용히 지나갔다.
“생각해 보니 말이 통하질 않나?”
어차피 처음부터 주상혁의 수준을 가늠하는 게 목적이었다.
“날은 사용하지 않으마. 크게 다치진 않겠지.”
미즈키가 허리춤에 찬 도를 칼집째 휘둘렀다.
미즈키의 칼집이 주상혁의 팔뚝을 때리기 전이었다.
“컥…….”
정체 모를 것에 얻어맞은 미즈키가 휘청였다.
미즈키가 털썩 무릎 꿇었다.
‘턱을 맞은 건가?’
무심한 얼굴로 미즈키를 바라보던 주상혁이 휙 돌아서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미즈키가 급히 일어나 마나를 일으켰다.
주상혁의 걸음이 딱 멈췄다.
“짜증 나게 하네 진짜.”
비스듬히 돌아서는 주상혁을 보고 미즈키가 옅은 미소를 그렸다. 그리고…….
파지지지직.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었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강아지……?”
* * *
주상혁은 사실 미즈키의 존재에 대해서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일부러 미즈키를 처리하지 않았다.
이제 와서 포션 만드는 걸 좀 들킨다고 전혀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근데 보자 보자 하니까.
“선 넘네.”
주상혁이 제대로 혼쭐을 내 줄 필요성이 있음을 깨닫고 주주에게 공격을 지시했다.
파지지직.
미즈키를 기절시킨 주주에게 주상혁이 말했다.
“안 되겠다. 산책은 내일 하자.”
꾸웅…….
실망한 기색의 주주를 뒤로하고 미즈키를 둘러업었다.
“마침 주변에 CCTV도 있네.”
좀 괴롭힌다고 문제 되진 않을 터였다.
주상혁이 길드의 후관 옥상으로 가서 접이식 의자에 미즈키를 앉혔다.
“어디 보자, 어디 있더라…….”
인벤토리를 켜서 살펴보던 주상혁이 밝은 표정을 지었다.
손을 쑥 넣어서 주상혁이 번역기를 꺼냈다.
하나 장만한다, 장만한다 하다가 마침내 장만한 번역기였다.
주상혁이 번역기를 실행해서 바닥에 내려놓고 장민주에게 공유받은 마나사슬을 발동시켰다.
미즈키를 꽁꽁 묶은 주상혁이 주주를 바라봤다.
바가지에 물을 받아와 대기하던 주주가 확 물을 끼얹었다.
“으윽…….”
미즈키가 눈을 떴다.
* * *
자신이 마나사슬로 결박당했음을 깨달은 미즈키가 말했다.
“잠깐 조금 오해가 있는 것 같군…….”
“오해는 그쪽이 하고 있는 거 같은데. 주제 파악이 안 되나?”
주상혁이 턱짓하자 주주가 마나사슬을 ‘앙!’ 하고 물었다.
파지지지직.
미즈키를 묶은 사슬을 타고 주주의 전류가 전해졌다.
흘러들어오는 전류에 이를 악물고 버티던 미즈키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허억…… 허억…….”
“누가 말해도 된다고 그랬지?”
“난…… 그저…….”
주주의 전류가 다시 한 번 미즈키에게 쏟아졌다.
주상혁도 주주의 전류가 사슬로 전해졌지만, 애초에 미즈키가 기절하지 않을 정도로 조절한 주주의 전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고통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던 미즈키의 호흡이 조금 더 거칠어졌다.
주상혁이 말했다.
“앞으로는 내가 물어보는 것만 대답해 살아서 가고 싶으면.”
“…….”
‘살려 주겠다는 건가?’ 하는 질문이 들려오면 곧바로 주주를 이용해 한 번더 전기의자 맛 좀 보여 주려고 했더니, 미즈키는 영리했다.
주상혁이 물었다.
“대답은?”
“그, 그렇게 하지.”
주상혁이 질문했다.
“좋아, 그럼 첫 번째 질문, 왜 일주일간 나를 감시했지?”
“그건…….”
파지직.
주주의 위협용 전류를 본 미즈키가 한숨을 푹 쉬더니 털어놓았다.
“협회장의 부탁이 있었다. 너를 조사해 달라는.”
“나를? 어째서?”
“지금 이 상황이 이유를 말해 주고 있군.”
주상혁의 표정이 조금 진지해졌다.
‘내가 S급이 아니라 SS급이라는 걸 의심하고 있다는 건가?’
주상혁은 강태섭에게 이번 간이 심사부터는 면제를 받았다.
또 그뿐만이 아니라 아버지 주재호를 비롯해 주화영, 장민주, 강혜영, 한혜지까지.
주상혁의 손이 많이 닿은 사람들은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대체 어느 부분에서?’
조금 진지하게 생각하던 주상혁의 머릿속에 한 가지가 떠올랐다.
‘혹시 필리핀 때문인가?’
이미 일본에서 한 번, 필리핀에서 한 번.
두 번에 걸쳐서 일을 만들었다.
당시에 주상혁을 이미 어느 정도 경계하고 있던 미츠오가 비슷한 사건에 냄새를 맡았다고 해도 그리 이상하진 않았다.
생각을 마친 주상혁이 미즈키를 바라봤다.
“어떻게 해야 비밀을 지켜 주려나?”
“…….”
가장 확실한 방법은 여기서 녀석을 죽이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야…….’
또 한동안 살인자 새끼니, 뭐니 떠들어 댈 게 뻔했다.
예전 같았으면 조금도 신경 안 썼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저번에 주화영의 보호자로 출석했다가 비슷한 소리를 듣고 동생들에게 내심 좀 미안했다.
‘특별히 이번만 살려 주기로 했다.’
주상혁이 마나사슬을 해제했다.
구속에서 풀려난 미즈키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했다.
“풀어 주는 건가?”
주상혁이 말했다.
“그냥은 아니고.”
“조건이 있다는 거군.”
주상혁이 말했다.
“반년 안에 산삼을 가져와.”
“어느 정도 수준이면 되지?”
“백이십 년 삼 이상.”
미즈키의 눈빛이 흔들렸다.
요즘 시대에 산삼이 얼마나 귀한지 그 역시 알고 있는 듯했다.
“끝인가?”
“아니, 그냥 보내면 농땡이 피울 수도 있으니까.”
주상혁이 주주를 바라보자 주주가 분신을 만들었다.
분신이 미즈키의 어깨에 올라탔다.
“당분간 이 녀석을 좀 길러 줘야겠어.”
“뭐, 허튼짓만 안 하면 공격할 리는 없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주상혁이 물었다.
“대답은?”
“그, 그렇게 하지.”
* * *
주주가 처음 분신을 깨우쳤을 때 소환할 수 있던 분신은 최대 3개.
하지만 주주의 레벨이 오르면서 상황이 많이 변했다.
주주가 다룰 수 있는 분신이 많이 늘어난 것이다.
현재 주주는 분신을 최대 10마리도 넘게 부릴 수 있었다.
주화영과 박민지 한혜지 등.
기본적으로 무력이 약했던 사람들에게 나눠 준 녀석들이나, 미행으로 붙여 준 분신을 제외해도 제법 남았다.
주주는 이런 남는 분신은 청초길드 주변에 항상 풀어 둔다.
그 덕분에 주상혁에게 보고조차 안 되고 사라진 작은 사건들이 상당하다.
박지훈을 납치하려고 하던 각성자들을 해치운 적도 있다.
박민지와 주화영을 미행하던 각성자들도 여럿 물리친 적 있다.
주주의 분신은 주주의 레벨이 오르면 자동으로 따라 오르기에 오래전부터 어지간한 잡범들은 간단하게 처리하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바둥바둥.
평소처럼 주변을 정찰하던 주주의 분신이 누군가의 손에 손쉽게 목덜미를 잡혀 들렸다.
파지지직.
주주의 분신이 전력을 다해 전류를 방출했다.
하지만 분신의 목덜미를 잡은 남자는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눈살조차 찌푸리지 않는 남자의 모습에 분신의 바둥거림이 더욱 극심해졌다.
그런 분신에게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얌전히 굴면 거칠게 굴진 않으마. 전할 말이 있어서 붙잡은 거다.”
주주가 그렇듯 주주의 분신도 영어를 알아먹는 건 아니다.
주주가 아는 건 주상혁의 영향을 받아 한글뿐.
하지만 과연 영물답게 사람의 마음을 읽는 데는 탁월한 편이다.
만능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근본적으로 악의와 선의를 구분하는 것은 능숙한 것이다.
남자를 나름의 판단으로 안전하다고 판단했는지 분신의 발버둥이 멈췄다.
남자가 분신을 놓아줬다.
왕!
남자가 주주의 분신에게 사진을 한 장 전해 줬다.
“이것만 네 주인에게 전해 주면 된다.”
넘겨받은 사진을 문 분신이 잽싸게 도망쳐 주상혁에게 향했다.
마침 옥상에서 탕약을 달이던 주상혁의 품으로 분신이 쏙 들어갔다.
“뭐야, 왜 그래.”
평소에도 애교가 많은 녀석들이긴 하지만 오늘따라 유독 떨어질 생각을 안 하자, 주상혁이 양손으로 안아 올렸을 때였다.
주주의 분신이 물고 있던 사진 하나가 떨어졌다.
탕약을 달이는 주상혁의 모습이 찍힌 사진이었다. 주상혁의 눈가가 찌푸려졌다.
“대충 저쯤인가?”
자신이 찍힌 방향을 사진을 통해 가늠하던 주상혁이 사진 후면에 쓰인 시간과 장소를 확인하고 물었다.
“이거 누가 줬어?”
주주의 분신의 모습이 흐려지더니 안개가 되어 주주에게로 들어갔다.
주주가 조금 전 있었던 일을 주상혁에게 보여 줬다.
‘누구지?’
아무리 분신이라지만, 주주의 레벨이 오르면서 이제 제일 낮은 분신의 레벨만 50대 후반에 이른다.
심지어 조금 전 분신의 레벨은 60 중반쯤으로 비교적 강한 축에 속하는 녀석이었는데 그런 분신의 공격에도 눈살 하나 찌푸리지 않는 모습이 보통 녀석은 아닌 게 분명했다.
‘근데 그러고 보니 묘하게 어디서 본 듯한데?’
주상혁이 묘하게 낯익은 남자의 얼굴을 머릿속에 그리다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마이클?”
TV나 인터넷 기사 등으로 이미 몇 차례 본 얼굴이다. 분명했다.
마이클임을 확신한 주상혁이 사진을 뚫어져라 보다가 중얼거렸다.
“어쩌지…… 나가야 하나?”
나오라는 장소나 주주의 분신을 대하던 말투를 보면 적의는 없어 보였다.
“1시간 뒤라…….”
주상혁의 얼굴에 고민이 드리워졌다.
* * *
주상혁은 결국 마이클이 말한 시간에 약속 장소로 나가기로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마이클이 적의가 없다면 안전할 것이고 반대로 적의가 있다면 그것대로 위험했다.
차라리 정면에서 상대하는 게 낫지 기습이라도 당하면 곤란했다.
주상혁이 사진에 적힌 근처 카페로 들어갔다.
범상찮은 근육질의 남성이 보였다. 나이는 대충 클린트의 또래 정도로나 보였는데 클린트와 확연히 다른 점이라면 덩치 차였다.
클린트는 늘씬한 체형과 날카로운 분위기.
하지만 마이클은 크고 듬직한 덩치가 인상적인 중년이었다.
『Lv.140 마이클.』
주상혁이 억 소리 나는 마이클의 레벨을 보고 긴장했다.
‘나랑 10차인가?’
『Lv.130 주상혁 (도핑 중).』
초콜릿을 다 먹으면 130을 넘길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주상혁의 현재 레벨은 130.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상혁이 맞은편에 가서 번역기를 내려놓자 마이클이 말했다.
“과연 클린트가 관심을 보일 만한 남자군.”
“클린트랑 친한가 보지?”
마이클이 고개를 저었다.
“한 번 만난 적이 있다. 나를 죽일 목적으로 찾아온 듯했지.”
“그런 거치고는 둘 다 멀쩡하던데?”
둘이 서로 죽이겠다며 살판을 벌였다면 둘 중 하나는 최소한 반병신이 됐을 텐데 그런 거치고는 둘 다 멀쩡하다.
마이클이 픽 웃었다.
“싸움은 하지 않았다. 녀석이 한참을 지켜보다가 내빼더군.”
마이클의 말을 듣고 주상혁이 생각했다.
‘현명한 판단이야.’
주상혁은 알고 있다.
만약 마이클과 클린트가 그날 붙었다면 90%는 클린트가 졌을 거다.
제아무리 마이클이 전투 계열이고 클린트가 대인전 최강의 암살 계열이라지만, 이들에게 5레벨은 그만큼 뒤집기 힘든 격차이기도 했다.
주상혁이 인사치레를 끝내 듯 사진을 받은 순간부터 줄곧 궁금했던 걸 말했다.
“내가 알기로 미국의 SS급 각성자는 입국이 불가능할 텐데?”
“틀린 말은 아니지.”
“지금 계약 위반한 걸 부정하지 않겠다는 건가?”
“그래.”
주상혁은 어이가 없었다.
계약 위반한 주제에 뭐가 잘났다고 자신을 불러내는 것도 모자라 이렇게 당당한가 싶었기 때문이다.
“이걸로 미국이 큰 손해를 입을 텐데?”
“상관없다. 대통령도 이해해 주겠지.”
마이클은 미국의 대들보다.
당연히 사고 좀 친다고 미국이 나무랄 리 없겠지만…….
‘열 받네…….’
꼭 꿀밤이라도 한 대 때려 주고 싶은 마음이다.
“그래서 나를 보자고 한 용무는?”
“원래라면 그쪽의 뒷조사만 하고 가려고 왔다만, 흥미가 생겨 버려서 말이지.”
“난 남자 취향은 아닌데?”
“미국에 와라.”
가뜩이나 한산한 카페 안에 정적이 흘렀다.
주상혁이 말했다.
“거절하지.”
“이유는?”
“거기 갈 이유가 없으니까.”
마이클이 말했다.
“이유라면 내가 비밀을 알고 있다는 걸론 부족한가?”
“까짓거 포션쯤이야 이제와서 들통나도 상관없는데?”
“그거 말고, 그쪽이 SS급 초입쯤은 가볍게 제압하는 괴물이라는 거 말하는 거였다.”
주상혁의 표정이 딱 굳었다.
포션이랑 달리 이쪽은 조금 의미가 달랐다.
재작년 봄 E급 각성자로 각성했던 주상혁이다.
그런데 반년 후 S급을 판정받더니, 2년이 조금 안 된 지금은 SS급이라고?
이 소식을 듣는다면 누군가는 분명 그렇게 생각할 거다.
주상혁이 등급을 올릴 수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이건 이미 제법 강해진 주상혁이라도 좀 귀찮은 일이었다.
당장에 주상혁에게 등급을 올려 달라 청탁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접촉할 것이다.
그것뿐만 아니다. 더 나아가 자칫 근래에 본 타이탄처럼 모종의 이유로 숨죽이고 있던 괴물 같은 각성자들이 목적을 가지고 생명을 위협할 수도 있었다.
“하…….”
한숨이 절로 나왔다.
표면상 전 세계 최고의 각성자로 추앙받는 마이클.
마음 같아서는 제껴버리고 싶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뻥 뚫린 장소에서 그에게 위해를 가했다간 조용히 살긴 글렀다고 봐야했다.
주상혁이 마이클을 한참을 노려보고 있자 마이클의 입이 열렸다.
“그렇게 노려보지만 말고 우리 내기를 하는건 어떤가?”
“내기?”
마이클이 검지 3개를 펴 보았다.
“3분. 나와 한판 붙어서 3분을 버티면 그쪽이 이긴 걸로 하지.”
“그쪽이 이기면 미국으로 오라는 걸 테고 내가 이기면?”
“내가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비밀을 지켜 주지. 대통령에게도 발설하지 않겠다.”
주상혁이 말했다.
“그걸 어떻게 믿고?”
“믿을지 말지는 그쪽의 자유지. 다만 내기를 회피한다면 나는 적어도 대통령에게는 반드시 말한다.”
마이클이 믿을 만한 사람인지 아닌지는 확신하지 못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마이클의 말마따나 그를 이대로 돌려보내면 녀석은 지네 대통령한테 그대로 까발릴 것이었다.
생각을 마친 주상혁이 의자에서 조용히 일어났다.
“3분? 후회할 거다, 너.”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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