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level reincarnated councillor RAW novel - Chapter 55
Book 11 Chapter 3
주상혁은 지금껏 두 가지가 의문이었다.
처음 울레니아와 양패구상하기 직전 한국에 있었던 강혜영이 어째서 죽었을까 하는 점과,
또 하나는 왜 하필 회귀 시점이 11년 전 3월 2일일까 하는 점이었다.
“그런 거였구나…….”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적어도 두 가지의 의문 중 한 가지는 해소됐다.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이제 10까지밖에 없는 손목시계.
이 녀석의 발동 조건은 강혜영의 죽음이다.
‘왜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간단히 유추할 수 있다.
강혜영의 죽음으로 발동하는 손목시계와,
3월 2일의 회귀 시점.
그리고 이날은 강혜영과 처음 만나는 날이다.
강혜영을 살릴 힌트가 이날에 존재하는 게 분명했다.
“그렇지만 대체 그 선택이 뭐지?”
이날 꽤나 많은 선택을 한다.
강태섭과의 담판을 짓기도 하고,
덕분에 괜히 강혜영의 눈에 띄어 관심을 사기도 하고,
그뿐만이 아니다.
‘그 이후에 방으로 찾아온 강혜영과 대화도 하지.’
하지만 알 수 없다.
그 어떤 것이 녀석을 살릴 수 있는 선택인지.
어느 곳에 변화를 줘야 녀석이 살아남는 미래가 찾아오는지.
‘일단 단순하게 저번이랑은 반대로만 해 볼까?’
조금 무식한 방법이긴 하지만,
본래라면 입학 이후에 강태섭과 식당에 가고,
원래라면 강혜영과 몇 번의 눈을 마주치기도 하고,
강혜영과 밤에 대화도 나눴던 과거와 딱 반대로만 행동하기로 했다.
“믿으니까.”
생모 정채연의 능력을 믿으니까.
강혜영이 살아남는 장면을 보았으니까.
정채연은 아마도 이날로 회귀 시점을 잡았을 것이다.
그런 그녀를 믿어 보기로 했다.
하우스를 주주의 분신들에게 맡기고 주주와 함께 돌아서 나갔다.
하우스에 들어가고 좀처럼 나오지 않아서 데리러 왔는지,
갑자기 문이 열리자 깜짝 놀라는 주화영이 보였다.
“미안, 늦었지?”
주화영이 도리질 쳤다.
“아니요.”
주화영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함께 차에 올랐다.
목적지는 당연히 학교.
동생들과 헤어지고 입학식이 진행되는 강당에 들어섰다.
평소라면 텅 비었을 강당인데,
오늘 보는 강당은 원래보다 10분쯤 늦었기 때문인지 사람들이 제법 존재한다.
적당히 빈자리로 가서 앉으려다가 주상혁이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다시 한 번 더 강당을 쓱 살피자니,
한 녀석이 보인다.
오늘 강혜영에게 대표를 빼앗기지 않는다면 대표였을 녀석.
조용히 단상 위로 올라가는 연습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주상혁이 돌아섰다.
“굳이 입학식을 참석할 필요가 없나?”
강혜영은 이날 신입생 대표로 등장한다.
괜히 이 안에 섞여 있다가 눈에라도 띌 가능성을 만들 이유는 없었다.
걸음을 옮겨 후면 출구에 도착했을 때였다.
마침 강당 안으로 들어오던 정지호와 딱 입구에서 마주쳤다.
“오오…… 벌써 도착해 있었구나!”
“…….”
반갑게 인사를 건네오는 정지호.
‘마침 잘됐네.’
정지호에게도 미리 부탁할 게 있었다.
“인사하거라 오른쪽부터 한혜지, 박지훈, 박상운이라고 한단다.”
“반가워, 주상혁이야.”
이름뿐이랴,
그 외에도 좋아하는 음식이라거나,
관심사,
가정사 등등.
모르는게 없을 정도였지만, 일단은 시키는 대로 인사를 나눴다.
인사를 나누고 나니 정지호가 물었다.
“근데 화장실이라도 가려던 게냐?”
“아뇨, 그건 아니고요.”
정지호만 몰래 빼내 한적한 교정 구석으로 이동했다.
정지호가 물었다.
“그래 부탁할 일이 있다고?”
“입학식을 빠지려고요.”
음…….
갑자기 입학식을 빠지겠다니,
본래 어른들이라면 못된 버릇이 들지 않게 훈계해야겠지만,
회귀의 정보를 알고 있는 정지호의 반응은 조금 달랐다.
“뭐, 그거야 네 뜻이 그렇다면야…….”
“그래서 말인데요. 오후에 있을 반 배정을 저만 따로 오전에 받을 수 있을까요?”
“무슨 바쁜 일이라도 생긴 것이냐?”
“뭐…… 비슷해요.”
정지호가 조금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부탁이니 요청은 해 보마.”
“감사합니다.”
부탁을 받은 정지호는 곧장 자리를 떠났다.
뻘쭘하게 기다리는 한혜지 일행을 이곳으로 보내고는,
이어서 강당 앞에서 안내하는 관계자에게 가서 대화를 나누는 게 보였다.
멀리서도 당황한 관계자의 얼굴이 선명하게 느껴진다.
정지호를 알아본 것이겠지.
곧이어 교장까지 모습을 드러내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다가 대화는 끝이 났다.
정지호가 이곳을 향해 온다.
“가자.”
다행히 분위기를 보니 대화는 잘된 것 같았다.
* * *
입학식이 시작될 무렵.
주상혁은 관계자를 따라서 측정실이 있는 곳으로 이동 중이었다.
물론 교장이 안내를 직접하는 건 아니었다.
입학식의 참석이 있었기에 담당하는 건 그냥 말단 교직원 정도 되어 보였다.
정지호를 대동한 채 따라 걷고 있자니 마침 강당 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입학식이 시작된 듯했다.
애국가를 연상시키는 반주가 들리는 것 같다가,
이어서 교가로 유추되는 반주가 얼핏 들려온다.
“측정을 도와줄 분들을 데리고 올 테니 이곳에서 아이들과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알겠네.”
정지호에게 말한 교직원이 안내를 마치고 급히 뛰쳐나간다.
측정이 실시되는 건물의 3층 홀은 조용했다.
오후였다면 사람으로 가득 찼겠지만 지금은 고작 5명.
상당히 휑한 느낌이 들었다.
“근데 부탁드린 건 잘됐죠?”
정지호의 귀에 대고 속삭였더니,
“필히 일러두었으니 걱정할 것 없다.”
마찬가지로 정지호도 귀에 속삭였다.
주상혁이 부탁한 건 간단하다.
바로 반 배정의 부탁.
박지훈이야 마법 계열이 이미 확실하니까 반을 바꿀 수는 없지만,
주상혁을 비롯한 한혜지와 박상운은 아니다.
솔직히 저번 회차에서야 특질 계열로 분류됐지만,
특색이 없는 만큼 전투 계열 쪽으로 옮겨도 크게 티가 나지 않는다.
주상혁이 부탁한 부분은 이 부분이었다.
전투 계열 반인 1반으로의 배정.
강혜영을 따돌리는 거 같아서 마음이 편치는 않지만…….
‘어쩔 수 없지.’
반 역시 바꿔 봐서 나쁠 건 하나도 없다.
자리에 앉아서 교사가 돌아오길 기다린 지 10분쯤 지났다.
교사가 하얀 가운 차림의 여자와 함께 들어왔다.
측정실 안으로 들어간 여자는 곧이어 준비를 마치고 나와 말했다.
“한 분씩 들어오시면 돼요.”
정지호가 물었다.
“누구부터 들어갈 테냐?”
“박지훈부터요.”
일언반구 없다가 갑자기 지목되자 당황한 기색은 보였지만, 박지훈은 군말 없이 들어갔다.
박지훈이 마법 계열 판정을 받고 30분이 지나자 합류했다.
그다음은 박상운.
그다음은 한혜지.
마지막이 주상혁이었다.
주상혁이 들어가서 측정실 소파 위에 앉았다.
“자, 그럼 할 수 있는 건 다 했고…….”
이제 어떻게 될지 지켜보기로 했다.
* * *
주상혁은 목적대로 1반에 배정되어 생활했다.
박지훈은 마법 계열 반으로 넘어갔지만,
박상운과 한혜지는 주상혁과 함께 전투 계열 반이었다.
따라서 올해의 5반은 강혜영 1명.
그래야 했는데…….
“네가 왜 여기 있냐?”
“왜일까요?”
반 배정이 끝나고 보름쯤.
유일한 5반이었던 강혜영이 1반에 합류했다.
오전 수업이 끝이 나고 점심 시간이 되었다.
한혜지와 박상운을 데리고 기숙사로 돌아가는데 강혜영이 따라오는 게 느껴졌다.
“그러니까…… 왜 따라오는데?”
“같이 밥 먹으면서 친해질까 해서요.”
“난 밥 안 먹는데?”
“네?!”
강혜영이 깜짝 놀랐다.
“오늘 돈가스인데요?”
“그게, 뭐?”
“오빠 돈가스 좋아하잖아요.”
“안 좋아하는데?”
물론 거짓말이다.
돈가스라고 하면 주상혁이 좋아하는 음식 베스트 3위 안에 해당하는 음식이다.
“에이, 거짓말.”
진짜로 안 먹어요?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어쩌지? 벌써 기억이 상당히 돌아온 거 같은데…….’
딱히 실수한 건 없다.
지난 보름간의 생활을 되짚어 보니 그것만은 확실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과감한 반 이동부터,
지금의 반응까지.
강혜영의 기억은 거의 돌아온 듯해 보였다.
‘내가 잘못 생각했나?’
입학식 날의 선택과 관련 있는 게 아닌가?
그저 단순한 우연?
확실히 그럴 수도 있다.
어디까지나 3월 2일의 선택에서 강혜영을 살릴 힌트가 있다는 건,
그저 몇 가지 단서를 가지고 주상혁이 추측했을 뿐인 내용이었으니까.
3월 2일이 기점이 되는 게 아니라 다른 날에 일어나는 사건이 기점일 확률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는 일이었다.
깊게 생각하던 주상혁은 어느덧 돈가스가 나오는 양식을 받아 자리에 앉았다.
맞은편에 앉아서 먹는 강혜영이 눈이 마주치자 히히 웃는 게 보였다.
점심 식사 후에도 강혜영은 졸졸 따라왔다.
‘그래 이렇게 된 거.’
차라리 미리 말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어차피 계획은 물 건너간 상황.
강혜영에게 자신이 죽는 미래를 말하기로 했다.
“야, 약해영.”
“네?”
“나 좀 따라와 봐.”
한혜지와 박상운은 따로 놔두고 강혜영만 빼서는 구석으로 이동했다.
“너 나 좋아하냐?”
“티가 좀 많이 나죠?”
딱히 부정하지 않고 쑥스러운 얼굴로 슬쩍 눈만 피한다.
주상혁이 그런 녀석의 얼굴에 대고 말했다.
“나 좋아하면 죽는대도?”
“네?”
“나 좋아하면 너 반드시 죽는다고 해도 나 좋아할 거냐?”
“…….”
이건 녀석도 조금 당황스러웠는지, 표정에 여유가 사라졌다.
한참을 뜸 들이다 녀석이 입을 열었다.
“제가 싫어요?”
착각을 조금 한 것 같았다.
엉겨 붙는 게 귀찮아서 떼어 내려 한다고 생각한 듯했다.
“아니, 좋아.”
“그럼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말 그대로, 네가 죽을 테니까.”
“…….”
“농담이나 거짓말이 아니야.”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의미가 전해진 듯했다.
강혜영의 사뭇 진지해진 목소리가 증거였다.
“오빠도 기억이 있는…… 거군요?”
“그래, 그러니까 다시 물을게.”
이건 녀석에게도 상당히 중요한 일이다.
선택은 녀석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나는 네가 죽는 이유가 일단은 나를 따라다녔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중이야.”
“언제까지 떨어져 있어야 하는데요?”
“그건 몰라, 한 11년쯤?”
“제법 기네요…….”
진지하게 생각하던 강혜영이 말했다.
“그럼 그 후에는 찾아가도 돼요?”
“그때까지 네가 살아 있다면.”
“알았어요. 그럼 안 따라 다닐게요.”
강혜영이 배시시 웃는다.
평소와 같은 밝고 예쁜 미소인데,
이질적이게도 섭섭함과 아쉬움이 한껏 묻어서 보호 의식을 자극한다.
‘흔들리지 말자.’
녀석에게 일이 년도 아니고 십 년 넘는 시간 동안 기다리라 말하는 것이라도 꼭 필요한 일이다.
이쪽에서 말하고는 이쪽에서 흔들린다니 그것만큼 우스운 일이 없다.
“약속한 거다?”
고개를 끄덕이는 녀석을 보고는 돌아서는데 허리자락을 잡는 감촉이 전해져 왔다.
무슨 일인가 해서 돌아섰다.
녀석이 물어왔다.
“우리 또 볼 수 있겠죠?”
“그래, 그때가 되도 네가 살아 있으면 보겠지.”
“…….”
새끼손가락을 내미는 강혜영을 보고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약속한 거예요?”
* * *
주상혁은 그렇게 강혜영과 떨어져서 시간을 보냈다.
강혜영이 없다고 해도 크게 변하는 건 없었다.
지리산에 가서 홀로 약초를 모아 조제술 마스터를 달성했고,
박상운과 한혜지와 의원을 운영하며 침술 마스터를 완성했다.
딱히 방으로 돌아왔을 때 매일 같이 반겨 주는 사람이 없어도 알아서 진맥 마스터도 끝마쳤다.
세 가지의 비기를 어느 때보다 일찍 모으고 나서부터는 레벨 업에 전념했다.
제법 손에 익숙해진 최후의 단약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
아직도 대부분이 실패작이었지만,
최후의 영약은 이제 만에 한 번 정도는 성공작이 나오면서 레벨 상승에 큰 도움을 주었다.
『Lv.603 주상혁.』
아직 1년 반이나 남았는데도,
포션 하나 먹지 않고 600을 넘겼다.
이 정도면 울레니아의 레벨보다 높다.
이번엔 울레니아도 손쉽게 이길 수 있으리라.
“슬슬 더워지는 거 보니까 곧 있으면 생겨나려나?”
몽골 초원에 발생하는 첫 번째 검은색 게이트.
이제 시기상 진짜 얼마 안 남았다.
안 남았을 텐데…….
“뭐지?”
어째서인지 검은색 게이트가 생겨나질 않는다.
미리 게이트에 관한 토벌권이라거나,
게이트를 토벌해 줄 사람들을 앞서서 배치한다거나,
모든 준비를 사전에 끝내 놓았음에도 검은색 게이트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처음엔 단순히 날짜를 착각한 건가 싶기도 했지만…….
‘미래가 변했어.’
얼마 지나지 않아서 확신할 수 있었다.
미래가 변했음을.
검은색 게이트는 결국 그해 여름이 갈 때까지 생겨나지 않았다.
초대형 포탈을 처리하고 반년이 지나 한겨울이 되어서야 생겨났다.
‘이러면 어떻게 되는 거지?’
울레니아가 등장하는 시간도 뒤로 미뤄지는 건지,
아니면 세 번째 게이트에서 울레니아가 등장하는 건지,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첫 번째 게이트를 처리하고,
두 번째 게이트를 수습했다.
세 번째 게이트가 생겨났다.
미국을 건너뛰고 유럽에 발생한 게이트는 크기가 엄청났다.
차례를 거듭하면서 커지던 게이트였지만 유럽 전역을 덮어 버릴 만큼 그야말로 엄청난 크기였다.
타이머가 발동되고 시간이 되었다.
모습을 드러낸 것은 두 뿔을 가진 녀석이 아니라 울레니아였다.
『Lv.630 울레니아.』
‘레벨이 또 올랐다?’
게이트가 사라진 것과 어느 정도 연관이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주상혁이 강해진 만큼 울레니아도 강해져 있었다.
하지만…….
주상혁이 울레니아를 처리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미 녀석보다 60레벨이나 더 높은 주상혁에겐 간단한 일이었다.
[크크크큭…….]죽기 직전 녀석의 웃음이 묘하게 기분 더럽다고 느껴질 무렵.
제자 강혜영과의 사제 관계가 해제됩니다.
사제 관계가 해제되었음을 알리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또…… 죽은 건가?’
도무지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어김없이 푸른빛을 내뿜는 손목시계를 보며 주상혁이 생각했다.
“다음번엔 다른 방법으로 간다.”
* * *
주상혁은 그 뒤로 갖은 방법에 방법을 시도했다.
어느 때는 곁에 두기도 하고,
어느 때는 다시 강혜영을 곁에서 떨어트려 보기도 하고,
또 어느 때는 강혜영과의 관계가 아닌 다른 곳에서 돌파구를 찾아보기도 했다.
하지만…….
‘왜지……?’
결과는 매번 같았다.
‘왜 죽는 거지?’
강혜영의 죽음과 함께 3월 2일로 되돌아왔다.
차라리 이유라도 알면 힌트를 찾을 수 있겠는데,
울레니아를 처리하고 얼마 후면 시기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강혜영은 항상 죽음을 맞이했다.
‘다음번엔 조심해야겠네…….’
주상혁이 중상을 입은 복부를 부여잡고는 숨을 헐떡였다.
매회 조금씩 강해지는 울레니아가 문제다.
주상혁도 매번 조금씩은 강해지지만, 정체기가 와 성장이 느려진 반면에 울레니아는 매번 강해지고 있었다.
12회차.
울레니아의 레벨은 무려 690이었다.
어찌어찌 울레니아를 처리하긴 했지만, 중상을 입고 말았다.
인벤토리에서 전이 아티팩트를 꺼내 발동시켰다.
위치는 전주의 청초길드.
전이를 기다리며 10분쯤 지났을 때였다. 메시지가 하나 떠올랐다.
제자 강혜영과의 사제 관계가 해제됩니다.
‘이번에도 실패인가?‘
푸른색 빛이 손목시계에서 뿜어져 나오며 역으로 감기는 걸 지켜보자니 마침 전이 아티팩트에서 음성이 들려온다.
전개가 완료되었습니다. 전이를 시작합니다.
눈앞의 풍경이 확 바뀌었다.
푸르고 구름이 둥둥 떠다니는 오후의 하늘이 아니고,
깜깜한 한밤중의 하늘이다.
“이건……?”
무엇을 본 건지 당황한 얼굴로 두리번거리다가 푸른빛에 시야를 잃어버렸다.
또다시 풍경이 바뀌었다.
3월 2일의 하우스의 풍경이었다.
“대체 그건 뭐였지? 내가 장소를 잘못 선택했을 리는 없는데?”
황무지.
잠시나마 본 장면은 충격적이었다.
청초길드가 아닌, 풀 한 포기 없는 황무지였기 때문이다.
꼭 융단 폭격이라도 맞은 듯 붉게 익은 대지가 어찌나 인상적인지 머릿속을 떠나질 않는다.
심각한 얼굴로 조금 전 상황을 생각할 때였다.
할짝
주상혁이 움찔 놀라 발아래를 확인했다.
꾸웅?
혀를 내밀고 올려다보는 주주가 보였다.
강혜영이 그렇듯 주주 역시 손목시계로 인한 회귀의 기억은 가지고 있지 않다.
녀석의 입장에서는 갑자기 표정이 심각해졌을 테니 걱정이 되었을 것이다.
주주를 들어 올리고 복잡한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래, 진정하자.’
길드가 왜 그렇게 변했는지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일단 눈앞의 일부터 차근차근 생각하기로 했다.
‘이유가 어찌 됐든 이걸로 더 이상의 기회는 없어.’
어느덧 손목시계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시계가 의미하는 거는 마지막 기회라는 것.
신중하게 생각해서 결정해야 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던 거 같은데.’
저번 회차에 닉스와의 싸움이 한창일 때.
분명 이렇게 혼자 고민하던 때가 있었다.
그때 그 녀석은 뭐라고 했더라?
잘 떠오르지는 않는데…….
“도망갈 거라고 그랬었나……?”
가물가물한 기억이지만 분명히 그랬던 것 같다.
피식.
“그때는 그걸로 운 좋게 해결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상황이 조금 다르다.
도망칠 대상도 딱히…….
“아닌가……?”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며 하우스를 나서려던 주상혁이 문고리를 잡고 멈춰서 중얼거렸다.
“도망간다라…….”
생각해 보니까 시도해 볼 법한 방법이었다.
그도 그럴 게 아직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것이다.
살려야 할 대상인 강혜영에게서 도망친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것이다.
“해 볼만 할지도?”
애초에 주상혁은 학교로 이동해서 강혜영과의 관계에서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런 선택을 하지 않는 것도 지금 생각해 보니 하나의 방법이라면 방법.
‘이게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주상혁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네, 할아버지. 부탁이 있어서요.”
* * *
장민주는 어렸을 때부터 이성에게 유독 인기가 많았다.
가장 처음 고백을 받아 봤을 때가 혜성길드에서 운영하는 유치원에 입학했을 때였을까?
물론 그 나이 때 어린애들이 다 그렇듯,
큰 목적이 있어서 접근한 건 아니고 순수한 의도로 다가온 거라는 건 장민주도 잘 안다.
하지만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장민주는 어린 나이부터 깨달았다.
본인의 외모가 타고 났다는걸.
물론 섣부른 판단이 꼴불견이란 건 알고 있는 만큼…….
“왜?”
고백을 해 오면 초등학생 무렵까진 이유를 물어보기도 했던 것 같다.
답은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었지만, 답이 있을 땐 한결같았다.
예쁘니까.
참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럴 거면 마나나 잔뜩 주지.”
외모도 필요한 사람에게나 필요한 것.
장민주는 유감스럽지만 축복받은 외모가 그렇게 간절한 입장은 아니었다.
여느 소녀들처럼 언젠가 좋은 남자가 있으면 가정을 꾸리고 행복하게 사는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감정 없는 연애를 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이 나이 때의 평범한 여자아이라면 첫사랑 한 번쯤 해 본다던데,
유감스럽게도 장민주는 15살이 되도록 그렇다 할 상대를 만나지 못했다.
좋다고 달려드는 남자는 어쩐지 늘 성에 차지 않았고,
학교나 주변에서 보는 남자아이들은 항상 자신보다 작고 보잘것없었다.
2차 성징 이전의 시기이기에 육체적인 면도 해당하는 이야기긴 했지만,
그뿐만이 아니라 내적인 부분에 보다 핵심을 두고 있는 이야기였다.
“미안해요, 선배.”
오늘만 해도 그렇다.
허우대도 멀쩡하고,
얼굴도 분명히 요즘 잘나간다는 모 연예인의 느낌이 물씬 나는 잘생긴 얼굴인데,
좀처럼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장민주는 요즘 들어서는 그런 생각도 한다.
‘혼자 늙어 죽을 팔자일 수도?’
본인이 차일 줄은 몰랐는지 당황한 얼굴의 남자가 물어 왔다.
“왜, 왜 싫은지 물어봐도 될까? 내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나 여자애들한테 제법 인기 있는데?”
“그냥 제 스타일이 아니라서요.”
교내 식당에서 고백해 오는 선배의 고백을 거절하고 벗어나는데 친한 친구 둘이 다가왔다.
불여우라느니,
남자만 보면 꼬리부터 친다느니,
유치원 때부터 동성에게는 늘 적개심의 대상이긴 했지만,
운이 좋았는지 유치원 때부터 사귀었던 친구도 둘 정도는 있다.
“아깝다.”
“뭐가?”
“너 몰라? 저 오빠 차민우 닮았다고 인기 엄청 많잖아.”
“기대 성장치도 S급 노릴 만하다던데?”
“그래?”
기대 성장치.
100% 맞는 건 아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쌓아 온 데이터를 기반으로 성장기가 끝났을 때 기대 등급을 예상하는 시스템이다.
‘그냥 허우대만 멀쩡한 줄 알았는데.’
나름 능력도 겸비했었나 보다.
물론 이제 와서 아쉬운 기분이 드는 건 아니다.
S급 남자 친구를 사귄다고 본인 등급이 S급이 되는 것도 아니고,
딱히 없던 매력이 생길 정도는 아니었다.
‘나도 S급 되고 싶다.‘
딱 이 정도 감상일 뿐.
길드에서 거는 기대가 큰 만큼 S급을 노릴 수 있다는 것이 그저 부러울 뿐이었다.
“에이…… 몰라 밥이나 먹자. 오늘 메뉴가 뭐래?”
“한식 쪽은 비빔밥이고, 일식 쪽은 덮밥이었는데 양식은 뭐였지?”
시시껄렁한 메뉴 이야기나 하면서 식당으로 들어서던 장민주가 걸음을 딱 멈췄다.
“왜?”
“뭔데 그래?”
어딘가를 충격받은 표정으로 바라보는 장민주를 따라 친구 두 사람의 시선도 따라 움직였다.
장민주가 말했다.
“저 애, 잘생기지 않았나?”
“누구?”
“어딨는데?”
장민주가 심장병 환자처럼, 쿵쾅대는 가슴팍을 짚었다.
단연코 15년 인생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야, 어디가?”
“장민주!”
장민주는 친구들의 부름을 무시하고 그가 식사 중인 테이블에 가서 손을 쾅 내려찍었다.
* * *
3월 2일.
주상혁은 예정대로 입학식에 참석했다.
다만 그 장소가 광주가 아니고 청주의 각성자 학교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주상혁이 이 같은 선택을 한 것은 애초에 강혜영과의 만남 자체가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 컸다.
주상혁은 생모 정채연의 능력을 무척이나 신뢰한다.
그렇기에 그동안 힌트가 광주의 학교에 있을 것이라고 확신해, 매 회차 그 안에서 답을 찾았다.
하지만…….
이제 와서 놓치고 있던 사실이 있음을 자각했다.
정채연은 한 번도 광주의 학교에 다니라고 한 적이 없었다.
‘내가 넘겨짚어도 과하게 넘겨짚었지.’
입학식 당일 아침으로 회귀했으니 당연히 참석하는 것까지는 정해진 수순이라 생각했지만,
명확히 말하면 주상혁의 의지로 딱히 가지 않을 수 있는 일이었다.
“오늘은 한식이 괜찮겠네.”
청주의 학교에 다닌 지도 어느덧 한 달쯤.
주상혁이 여느 때처럼 청주의 교내 식당에서 식사하고 있을 때였다.
콰앙.
식탁을 강하게 내리치는 손이 보였다.
밥을 우물거리면서 손의 주인을 확인했다.
『Lv.45 장민주.』
누군가 했더니 장민주였다.
오랜만에 보니까 반갑긴 한데,
그보다 새삼스럽게 그런 생각이 든다.
언제 봐도 예쁜 얼굴이라고.
‘혜영이랑은 조금 다른 케이스긴 하네.’
강혜영의 경우엔 어릴 때도 이쁘긴 하지만 날이 갈수록 그 외모가 만개하는 케이스에 가깝다.
하지만 이쪽은 그냥 외모 면에서는 타고난 듯했다.
그나저나 장민주가 이곳에 왜 있나 싶어서 생각하던 주상혁이 스스로 답을 찾고 납득했다.
‘하긴 청주에서 다니는 게 당연하긴 하구나?’
딱히 계산이 깔려서 청주의 각성자 학교로 온 게 아니고,
그냥 광주를 제외하면 가까운 각성자 학교가 청주였기에 정한 것이라 장민주를 잊고 있었지만,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청주가 혜성길드의 앞마당인 걸 감안한다면 장민주가 재학 중이어도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근데 무슨 볼일이지?’
이 시기의 주상혁은 아직 아무것도 안 했다.
보충제는 지금 수량을 채우는 중에 불과했고,
의원을 시작하지도 않았으며,
아직 얼굴이 팔리지도 않았다.
‘알아보지도 못해야 정상 아닌가?’
딱히 접점이라 할 게 하나도 없을 장민주를 뚫어져라 바라보니,
때마침 장민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혹시 방과 후에 바쁜 일이라도 있니?”
“그건 왜요?”
그래도 일단은 1년 선배이니 공손하게 용무를 물었더니,
장민주가 난데없이 책상을 팡 치며 말했다.
“그건 알고 없고, 이따가 방과 후에 옥상으로 나와. 할 말이 있으니까.”
* * *
당연한 말이지만, 주상혁은 옥상으로 나가지 않았다.
굳이 장민주가 아니어도 할 일이 많다.
애초에 장민주에게 어울려 줄 시간이 없었다.
비기를 모으고,
레벨도 올리고,
앞으로 등장할 검은색 게이트에 대한 대비라면 매번 하는 것이니 그렇다고 하지만,
매 회차 높아지는 울레니아의 레벨은 여전한 골칫거리다.
이번엔 더욱더 강해져서 등장할 울레니아를 알고 있는 만큼 장민주의 용무에 어울릴 시간마저도 아낄 필요가 있었다.
“뭐…… 물론 그 뒤로 시간을 제법 뺏기긴 한 것 같지만 말이야.”
단호하게 잘라 냈지만,
장민주와는 그 뒤로도 왕래가 잦았다.
그때로부터 10년도 더 지난 현재 시점에서는 그러한 이유에서인지 별 이유 없이 옆에 남아 있는 사람 중 하나가 장민주였다.
아닌가?
다시 생각해 보니 이유가 없지는 않은 것 같기도 하고?
묘한 미소를 지으며 주상혁이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시간이 어느새 훌쩍 지난 만큼 세 번째 게이트의 보스인 페스파를 쓰러트린 직후다.
박지훈과 호문클루스를 만들 때가 된 것이다.
한때는 검은색 게이트의 개수가 줄어들기도 하고,
타이머가 가끔씩 말썽을 부리기도 하며,
출현하지 않게 되었던 페스파였지만,
어찌 된 일인지 손목시계를 사용하다 보니 어느덧 처음처럼 출현하게 되었다.
페스파의 뿔은 회귀의 단초라 할 수 있다.
페스파가 재등장하게 된 만큼 호문클루스를 만드는 일은 여러모로 필수였다.
무엇보다 이번에 울레니아를 쓰러트리는 데 실패하면 회귀를 하면서 기억을 잃을 수도 있다.
주주와의 계약하며 생긴 마나가 있는 이상 기억이 존재할 거라고 짐작은 하고 있지만,
확정된 사실은 아닌 만큼, 회귀에 대한 대비는 필수였다.
박지훈의 번호를 찾아서 통화를 걸려던 주상혁이 멈칫했다.
“음…….”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 던전이 있었던가?’
황무지로 변한 청초길드의 모습.
저번 회귀 직전에 목격했던 장면은 나름 충격적이어서 어느 정도 기억하고 있다.
눈으로 그 모습을 확인한 시간은 정말로 찰나라서 확실하진 않지만 호문클루스가 들어가는 초대형 포탈은 어째선지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다.
주상혁이 죽어서야 회귀와 함께 정해진 시간대로 이동해야 할 던전이 모습을 감췄다는 건…….
‘무슨 문제가 생기는 건가?’
확실하진 않지만, 찝찝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하는 수 없이 주상혁은 이번 회차엔 아무도 살지 않는 외딴섬에다가 던전을 설치했다.
* * *
울레니아는 오래전부터 차원 너머의 청소를 생각해 왔다.
지금은 오랜 싸움에서 패하고 소멸해 버린 자신의 또 다른 인격.
기나긴 사투 끝에 신체를 온전히 차지했으니
녀석이 만든 차원 너머의 존재를 지워 버림으로써 녀석의 흔적을 완전히 지울 의도였다.
그런데 언제부터일까?
크윽…….
‘또 인가?’
그런 울레니아에게 데자뷔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불안정한 기억이 밀려들기 시작한다.
기억 속에서의 자신은 차원 너머에 강림한 뒤 누군가와의 접전 끝에 쓰러진다.
‘믿기 힘들지만, 뭔가 찝찝하군.’
차원 너머의 존재들은 그저 피조물에 불과하다.
차원을 넘는 데 상당한 마나를 소모하고 약해진 자신이라 한들 그런 보잘것없는 녀석들에게 패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데…….
그럼에도 어째선지 그냥 무시하기 힘든 생생함이 존재했다.
‘하는 수 없군.’
울레니아는 게이트를 줄이기로 했다.
게이트를 구성하는 에너지도,
게이트를 지휘하는 펠크스와 갈마니아 역시 모두 자신의 마나를 깎아 창조한 존재다.
패배를 경험하지 않기 위해서는 비교적 많은 힘을 보유한 채 차원을 넘을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울레니아는 회차를 거듭하던 와중에 그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우연히 하나의 기억이 떠오르면서부터였는데,
놈에게 당한 직후 자신이 다른 몸에서 부활한 기억을 엿본 이유였다.
펠크스의 신체에서 깨어나 닥치는 대로 모든 존재를 파괴하는 기억.
놈이 어째서 펠크스의 시체를 보관하고 있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그러나 울레니아에게는 이용하기 좋은 보험이었다.
설령 놈에게 당해도 다른 몸으로 옮겨 갈 수만 있다면 차원을 넘으며 소모한 힘을 되찾는 건 시간문제였다.
결국 울레니아는 놈이 펠크스의 신체를 보관하도록 게이트의 개수를 이전으로 되돌렸다.
게이트가 줄어들면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펠크스의 사체를 보관하지 않는 이유였다.
내면의 인격과 겨루느라 소모된 힘을 최대한 회복하고,
울레니아가 마침내 차원을 넘었다.
데자뷔와 같았다.
다짜고짜 달려드는 남자와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강하군.]어째서 기억 속의 자신이 남자에게 매번 당했는지 알 것 같았다.
자신이 강해질수록 남자 또한 매번 강해져 온 것이겠지.
‘하지만 기억이 확실하다면.’
남자의 기술 세 가지만 주의하면 당할 일은 전혀 없었다.
하나는 신경을 교란하는 기술.
또 하나는 마나를 하락시키는 기술.
마지막 하나는 마나를 역류시켜 내부에서부터 터트리는 기술이었다.
‘위험하군.’
싸움은 몹시 치열했다.
어느 한쪽이 먼저 쓰러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그런 전투였다.
하지만…….
‘그래도 이쪽이 살짝 유리해.’
전투를 지속할수록 승패의 추가 기울어짐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상황에서 조심해야 할 것이라면 하나.
마나를 역류시켜 내부에서 터트리는 그 기술뿐이었다.
‘온다.’
슬쩍 길을 열어 줬더니 기다렸다는 듯 남자의 손이 명치 부근을 향해 파고들었다.
타악.
[꽤나 조급했나 보구나.]낚아챘다.
그간의 정보를 종합해 보면 남자는 이 기술을 사용하는 것에 매번 신중했다.
어떨 때는 최후의 최후까지 사용하지 않고 정신을 분산시키는 용도로만 사용하기도 했고,
어떨 때는 우위를 점한 뒤에야 확실하게 사용하기도 했다.
‘왜 그럴 필요가 있었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지.’
쉴 새 없이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그런 기술을 울레니아는 지금 막아 냈다.
손끝에 응어리진 저 마나 덩어리가 증거였다.
[좋은 승부였다.]손을 휘둘러 결정타를 날리려는 찰나였다.
조용히 호선을 그리는 남자의 입꼬리가 어쩐지 불안하다 싶을 무렵.
‘설마?’
조금 전에 이 손은……?
응어리져 있던 마나가 사라진다.
어느덧 남자의 반대편 손에는 보다 선명한 새하얀 마나가 존재했다.
‘조금 전의 그건 눈속임이었나?’
부랴부랴 피해 보려고 했지만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남자의 반대 손이 마침내 몸에 닿았다.
* * *
콰앙!
『Lv.700 울레니아.』
“허억…… 허억…….”
주상혁이 점점 허물어져 가는 울레니아를 확인하고는 깊은숨을 몰아쉬었다.
이번 회차의 울레니아는 정말이지 강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회차를 거듭하며 사용했던 혈 자리도 대부분 알고 있어 상대하는데 너무나도 골치 아팠다.
마지막의 눈속임이 먹혀들지 않았다면,
패배하는 건 주상혁 쪽이었을 게 분명했다.
울레니아의 머리를 반으로 쪼개고는 전이 아티팩트를 사용했다.
“자…… 이번엔 어떻지?”
전이되길 기다리며 주상혁이 주주를 소환했다.
주상혁이 주주에게 물었다.
“어때?”
주상혁은 이번 회차 내내 주주의 분신을 통해 강혜영의 정보를 얻고 있었다.
와왕!
주주의 꼬리가 신이 나서 흔들렸다.
다행히 강혜영의 주변에는 별일이 없는 듯했다.
“그렇다는 건…….”
역시 주상혁의 예상이 옳았다는 말이었다.
강혜영의 거듭된 죽음은 초대형 포탈과 관계가 있다.
전개가 완료되었습니다. 전이를 시작합니다.
준비를 마친 아티팩트가 전개되며 눈앞의 풍경이 바뀌는 게 보였다.
주상혁이 전이한 곳은 호문클루스를 넣어 뒀던 초대형 던전이 있는 외딴섬이었다.
섬에는 바닷물이 발목까지 차서 출렁거리고,
섬 주변에는 큰 폭발이 있었던 것처럼 자욱한 안개가 끼어 한 치 앞을 분간하기 힘든 상태였다.
주상혁이 일격에 주변에 깔린 안개를 흩어 버리자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Lv.400 울레니아.』
겉모습은 주상혁이 준비한 호문클루스의 3단계인 페스파와 하나도 다르지 않았지만, 머리 위의 이름은 울레니아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런 이유였군?”
[네놈이 어떻게 벌써……!]여섯 쌍의 날개를 급히 등 뒤로 뽑아내고는 날아오르는 울레니아를 향해 주상혁이 쇄도했다.
울레니아가 지면을 채 뜨기 전에 목과 몸이 분리되어 바닥을 굴렀다.
“구질구질하게 굴지 말자고.”
[이런 기억은 없었……!]울레니아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주상혁이 머리를 쪼개 버린 이유였다.
머리가 갈라지며 동시에 울레니아의 신체가 수많은 마나 입자가 되어 흩어진다.
주상혁이 대기 중으로 사라지는 마나 입자를 보며 중얼거렸다.
“드디어 끝났네.”
재수 없는 놈.
* * *
울레니아가 죽고 일 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검은색 게이트로 유럽 대부분이 폐허가 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침체되었던 분위기가 점차 회복세로 접어들 무렵.
청초길드의 전화벨은 여느 때보다 바쁘게 울리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전 세계를 위협할 뻔한 게이트를 이겨 내는 데 일등 공신이 주상혁이다.
당시 주상혁과 울레니아의 전투를 직접 목격한 사람들은 없었지만,
뒤늦게 주상혁과 울레니아의 전투 당시를 찍은 위성사진들이 공개되면서 절대자나 다름없는 무위를 보인 주상혁을 향한 전 세계의 관심이 쏠리기 시작한 것이다.
1년.
길다면 긴 시간이 지난 떡밥이었지만,
다시금 수면 위로 올라온 영웅에 관한 관심은 무시할 만한 게 아니었다.
취재하기 위해 국가를 불문하고 여기저기서 연락이 오는 것이 그 증거였다.
“하…… 이놈의 전화기 선을 뽑아 놓든가 해야지…….”
질릴 대로 질려 버렸다는 분위기의 주재호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 관심 모두가 자신의 아들을 향하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여기요, 커피.”
임원들부터 말단 길드원들까지 여전히 기승인 던전 탓에 바쁜 요즘.
청초길드의 안주인 조수연은 비서 역할을 자처하고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커피를 받아 들고 주재호가 물었다.
“당신한테도 연락이 없지?”
“네. 그럼요.”
대답하면서 눈가에 옅은 미소가 피어나는 걸 보니 뭔가 알고 있는 것 같기도 한데, 그렇다고 캐묻자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이 아비가 그렇게 못 미덥더냐?’
괜한 주상혁만 탓하고 있을 무렵 조수연이 쿡쿡 웃으며 말했다.
“때가 되면 돌아오겠죠, 원래 좀 특별한 아이잖아요.”
“그건 나도 알고 있는데. 다만.”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목을 축인 주재호가 투덜거렸다.
“일언반구도 없을 거면 기자들 정도는 알아서 치워 줘야 하는 거 아니냐는 거지.”
투덜거리는 게 꼭 아이 같아서 귀여웠는지 조수연이 말했다.
“두 사람 다 똑 닮았다니까.”
* * *
주상혁은 울레니아를 쓰러트리고 곧바로 잠적했다.
아닌 척했지만, 당시 주상혁의 부상도 상당했었기도 했고,
그동안 숨 쉴 틈 없이 달려온 만큼 조금 휴식을 갖기로 한 것이었다.
주상혁은 이번 회차에도 결국 강원도 산골 마을 회관에 들어와 있었다.
어찌나 깊은 마을이던지 정말로 화폐 대신 감자로 물건을 주고받을 것 같은 그런 산골 동네였다.
주상혁이 이곳에 사는 걸 아는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
계모 조수연.
쌍둥이와 주화영.
그리고…….
“어떱니까?”
오늘부로 장민주도 늘었다.
“어떻긴 뭐가 어때요? 완전 밥맛인데.”
주상혁이 오늘 장민주를 이곳으로 부른 이유는 간단하다.
옷을 좀 봐 달라는 의미였다.
1년간 요양도 좀 하고,
질리도록 휴식도 좀 했겠다.
이제 강혜영을 만나러 갈 때가 된 것이다.
이번 회차에는 처음 보는 강혜영이다.
‘아무거나 대충 입고 갈 수는 없지.’
첫인상이 중요한 만큼 장민주의 힘을 빌리기로 한 것이다.
조금 전부터 옷을 걸치고 물어보면 별로라고 반복하는 장민주를 보고 주상혁이 말했다.
“아니, 그럼 좀 거들어 봐요. 뭐가 좋은지.”
장민주가 구시렁구시렁하더니 일어나서 옷더미를 뒤지기 시작했다.
“이거 하고 바지는 이걸로.”
“정말로 제대로 봐 주는 거 맞습니까? 아무리 봐도 이상한데.”
“이상한 건 그쪽 패션 센스고요!”
한소리들은 주상혁이 안방으로 가서 갈아입고 나왔다.
“됐습니까?”
“뭐…… 봐 줄 만하네요.”
장민주가 코트를 내밀며 말했다.
“코트는 이걸로 입어요. 그쪽은 베이지색 계열이 잘 어울리더라고.”
“알겠습니다.”
코트도 받아 들어 그 자리에서 슬쩍 걸치는데 장민주가 슬쩍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차이면 어쩌려고요?”
“차이면…….”
주상혁의 표정이 딱 굳었다.
“딱히 생각 안 해 봤는데…….”
“무슨 자신감이래? 처음 보는 여자라고 안 했어요?”
장민주도 알고 있다.
그가 조금 특별한 사람이라는 건.
중학교 시절 그를 처음 본 순간부터 옆에서 쭉 지켜봐 왔으니 모를 수가 없다.
애초에 지금 생각해 봐도 한 번도 본 적 없는 여자한테 반한다는 게 가능한가 싶긴 하지만,
항상 일편단심이었던 그라면,
남들보다 조금 많은 걸 알고 있는 그라면,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 생각하고 있는 중이었다.
“뭐…… 그렇긴 한데, 그래도 설마 차일까? 걔가 얼마나 집요했는데?”
무려 실체 없는 꿈이란 단서에만 매달려서 2년 넘게 전국의 모든 학교를 돌아다녔던 녀석이다.
그 뒤로는 조용히 살고 있는 듯하지만,
시간이 지났다 한들 자신을 못 알아볼 리 없었다.
“그거야 그쪽 생각이고요. 난데없이 고백하면 당황스러워할 거라곤 생각 안 해 봤어요?”
“그런가? 난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주상혁이 생각에 잠겨 꿍해 있다가 픽 웃었다.
“뭐, 까짓거 차이면 두어 번 더 시도해 보지 뭐. 난 원래 항상 그렇게 헤쳐 왔거든.”
* * *
어릴 때부터 예지몽을 쭉 꿔 오던 강혜영이었지만,
언젠가부터 강혜영은 예지몽을 꾸지 않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중학교 2학년쯤이었던 것 같다.
당시에는 꿈에서의 설렘을 느끼기도 하고,
애절함을 느끼기도 하고,
가끔은 자신도 몰랐던 능력도 알게 되면서 신기하기까지 했었지만,
어느덧 10년이란 시간이 흐른 지금은 그냥,
그런 적도 있었지, 하는 듯한 옛 추억이 되어 있었다.
“인연이 아니었나 보지, 뭐…….”
정말로 운명이었다면 그렇게 찾아 헤맸는데 한 번 정도는 만났을 법도 하다.
하지만 아쉽게도 못 알아본 건지,
아니면 애초에 만나지 못한 건지는 몰라도.
강혜영은 그가 없는 삶을 지내고 있었다.
“근데 신기하단 말이지?”
참 대단하다면 대단하다.
“그 사람은 그걸 어떻게 먹었지?”
잘 기억나진 않아도,
그 사실 하나는 알고 있다.
자신이 그를 위해 열심히 요리하고,
저녁이 되면 돌아온 그가 맛있게 음식을 먹던 일.
지금은 생동감이 느껴지는 장면이 아니라.
그냥 그런 일도 있었구나 하는 사건에 가까운 일이지만,
여하튼 신기한 건 마찬가지다.
“강철 위장이라도 가지고 있었나?”
시꺼먼 맹독을 먹는다는 건 보통 사람이면 불가능하다.
깊게 생각하던 강혜영이 중얼거렸다.
‘오늘은 돈가스나 튀겨 먹을까?’
강혜영은 요즘도 심심할 때 요리를 하곤 한다.
딱히 해 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거나,
먹어 줄 사람이 있는 건 아니지만.
스스로 만든 요리를 먹는 것뿐이더라도 어째선지 즐겁다.
돈가스는 그 사람이 좋아하는 음식이다.
마침 오랜만에 그 사람 생각도 난 만큼 돈가스가 당겼다.
“재료가 없네?”
냉장고를 열어 봤더니 돈가스를 튀길 고기도,
튀김가루도 다 떨어져 있었다.
“장을 좀 봐 와야 하려나?”
하는 수 없이 저택을 나섰다.
마트로 향하려는데 1층에 대기 중이던 경호원이 말했다.
“마트까지 태워다 드리겠습니다.”
“아니에요, 그냥 걸어갈래요.”
“그럼 저도 걸어서 동행…….”
“그냥 이 앞 마트 가는 건데요, 뭘.”
괜찮다는 데도 거듭 따라붙으려는 경호원을 떼어 놓는 데만 한세월 걸렸다.
마트에 도착해서 괜찮아 보이는 고기도 등심으로 사고,
튀김가루도 사고,
온 김에 식용유도 사려는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돈가스 만들려고?”
허우대도 제법 괜찮고 피부도 멀끔한 남자였다.
“네 뭐…… 그렇긴 한데 어떻게 알았어요?”
“그냥 재료가 그렇길래.”
고기랑 튀김가루가 담긴 장바구니를 슬쩍 확인하고는 말했다.
“요리 좋아해요?”
“그건 아닌데, 필요하면 직접 하기도 하지, 돈가스는 특히 좋아하고.“
“그래요…….”
묘한 분위기의 남자라고 생각하고는 다른 매대로 향했다.
마트에 들른 김에 자주 쓰는 재료를 조금 더 구매하고 쇼핑을 끝마쳤다.
마트를 나오는데 조금 전 남자가 따라오는 게 느껴졌다.
보통 일반인이면 무서울 법한 상황임에도 강혜영은 일단 각성자다보니 용감했다.
아주 혼쭐을 내주려고 휙 돌아섰다.
“아까부터 뭐예요? 왜 따라오죠?”
“그냥 할 말이 있어서…….”
의외로 고분고분한 남자를 보고 강혜영이 물었다.
“할 말이 뭔데요?”
“나 기억 못 하려나…….”
남자가 선글라스를 벗는다.
눈, 코, 입을 시작으로 쓱 얼굴을 훑어봤지만…….
장담할 수 있다.
단연코 처음 보는 남자였다.
“우리가 언제 본 적 있다고요?”
“기억 못 하나 보네.”
조금 퉁명스럽게 말했더니 남자의 입가에 쓴웃음이 비친다.
“할 말은 끝난 거예요?”
“아니, 근데 솔직히 지금 말해야 할까, 조금 고민되긴 하네.”
“말할 거면 빨리해 줘요.”
망설이던 남자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을 하려나 싶었는데 난데없는 고백이 들려왔다.
“좋아한다, 약해영.”
“약해영이 아니라 강혜영인…….”
말을 하다말고 느낌이 묘해서 얼굴을 재차 확인해 보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진짜로 어디서 본 적이 있나?’
갑자기 묘하게 낯이 익은 기분이다.
분명히 기억에는 없는데 분위기가 어렴풋이 아른거린달까.
본인도 모르게 어느새 하나하나 얼굴을 뜯어보고 있는 자신을 자각하고 강혜영이 얼굴을 붉혔다.
“그…… 여하튼 제 이상형은 아니라서요. 할 말은 끝난 거죠?”
그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하고는 돌아서 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따라오지는 않나 보네.’
학창 시절에도 그렇고,
성인이 돼서도 그렇고,
고백이라면 질리도록 받아 봤을 텐데…….
걸음을 옮기던 강혜영이 콩닥거리는 심장을 확인하고 걸음을 멈췄다.
‘왜 이러지?’
조금 전 이상형이 아니란 말은 거짓이 아니다.
평소 자신이 이상형으로 그리던 모습과 대조해 보면 피부색과 목소리를 빼면 들어맞는 구석이 하나도 없는 그런 사람이었다.
“잠깐 목소리?”
그러고 보니 묘하게 들어본 듯한 분위기의 목소리다 싶을 때였다.
갑자기 밀려오는 두통에 관자놀이를 짚은 강혜영이 휙 돌아섰다.
익숙한 누군가의 모습과 겹쳐 보이는 뒷모습이 보였다.
강혜영이 장바구니도 내던지고 다급히 달리기 시작했다.
“저기요!”
부르면 들릴 것 같았는데,
좀처럼 멈출 생각을 안 한다.
“아니, 왜 갑자기 빨리 걷는데!”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게 분명하다.
“아…… 진짜, 뭐 하자는 건데…….”
그냥 빠르게 걸을 뿐인데,
좀처럼 남자와의 거리가 가까워질 생각을 안 한다.
강혜영이 화가 나서 이름을 크게 불렀다.
“야! 주상혁!”
주상혁의 걸음이 탁 멈췄다.
겨우 등 뒤까지 걸어간 강혜영이 드디어 허리를 붙잡고는 숨을 헐떡였다.
“이씨…… 떠올리기 쉽게…… 다른 것 좀 말해 주면… 좋잖아요.”
“기억 못 한다며, 다음에 또 오려고 했지.”
“…….”
드디어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분명히 같은 얼굴인데 왜 못 알아봤을까, 이해가 안 될 정도다.
“그보다 너 우냐?”
“아뇨.”
강혜영이 눈가를 훔치고는 젖은 얼굴로 배시시 웃었다.
“돈가스 좋아한다면서요, 먹고 가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