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 at the peak of wealth RAW novel - Chapter 65
66. 음흉한 마수(3)
서하나는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현재의 주식시장은 상황이 최악이었다. 금융실명제의 전격 실시로 이틀간 폭락을 기록했다. 내렸을 때 저가에 주식을 담는 것이 좋다고 한다지만 내일 또 내릴 것이 눈에 보이는 상황에서 그것은 그리 좋은 방법처럼 보이지 않았다. 일단 실명제 영향을 어느 정도 벗어난 다음에야 매수에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그녀의 속마음을 읽은 듯 유서준이 곧바로 대답했다.
“이틀간의 투매로 정부에서 증시안정화조치가 나올 겁니다. 그래서 월요일에는 반등하죠. 물론 반등은 그리 길 수 없어요. 실명제 영향에서 벗어나려면 적어도 이달은 지나야 할 겁니다. 즉 본격적인 상승은 다음 달부터 시작되겠죠.”
생각해보니 그리 무리한 전망은 아니었다. 서하나도 공감했다.
곧이어 유서준의 호언장담이 계속됐다.
“대한화섬을 생각해보세요. 92년 초 종합주가지수는 계속 하락했지만, 대한화섬은 정반대 행보를 보였죠. 기억나세요?”
“그건 테마를 탔기 때문이잖아?”
“저 PBR 혁명도 마찬가지랍니다. 저 PBR의 황제주는 만호제강, 성창기업, 선창산업, 방림 이런 종목이죠. 속칭 자산을 많이 가진 땅 부자 기업. 그럼 만호제강과 성창기업 둘 중에서 어느 것으로 고를까요?”
만호제강은 이름처럼 철강회사였고 성창기업은 목재회사였다. 둘 다 전국에 땅을 비롯하여 엄청난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는 기업이었다. 보유 자산이 회사 주식 총액을 훨씬 능가하는 기업. 예를 들자면 가치 1000원짜리 기업이 단돈 100원에 팔리고 있는 경우다.
사실상 비정상적인 주가라 볼 수 있는 이런 현상이 두 기업에 벌어지고 있었다. 그 사실을 투자자가 알아차리는 시기가 바로 지금부터였다.
“목재는 사양산업이니까 철강으로 가자.”
서하나가 단순명료하게 정리했다.
유서준이 그녀가 할 일을 설명했다.
“내일 아침 장이 시작되자마자 매수 주문을 넣으세요. 지난번 대한화섬 때처럼 상한가든 뭐든 무차별로 매수하는 겁니다. 공동계좌와 제 계좌 둘 다. 아시겠죠?”
“얼마에?”
서하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지난 주말 만호제강의 주가는 실명제의 영향을 받아 하락했다. 금요일에는 다른 종목과 마찬가지로 곧바로 하한가로 떨어져 29900원을 기록했다. 다음날 토요일에는 한차례 반등을 일으키며 상한가에 올라섰다가 다시 아래로 내리꽂았다. 사실상 하한가나 다름없는 29000원이었다.
“이 주식 역시 거래량이 그리 많지 않아요. 토요일에는 오르내리며 대량거래를 발생시켰지만 그래 봐야 얼마 안 돼요. 이젠 우리도 금액이 큰 만큼 다소 시간이 걸릴 겁니다. 월요일부터는 3만 원 아래를 보기 쉽지 않을 거예요. 9월 초까지 32000원을 한계선으로 해서 무조건 사들이는 것으로 하죠.”
대한화섬의 경험이 있었기에 서하나는 금방 이해했다. 현재 그들의 자본금은 두 계좌를 합쳐서 거의 17억에 육박했다. 주당 3만 원 부근에서 매입한다면 매입 주식 수는 56000주가량이다. 이 종목의 하루 거래량이 평균 1만주 부근임을 생각하면 매수도 쉽지 않을 성싶었다.
서하나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이건 얼마까지 보고 있어? 금융사 차리려면 꽤 올라야 할 것 같은데?”
유서준이 그녀의 눈을 똑바로 직시하며 말했다.
“저랑 내기할래요?”
“뭘?”
서하나의 눈에 호기심이 어렸다.
“몇 배 벌 건지.”
유서준의 자신만만한 제안에 서하나가 주저하는 표정을 비췄다.
“지금까지 서준이 말이 웬만하면 다 맞았으니까 내기는 좀 위험해 보이는데…….”
“에이, 약한 척하시긴.”
서하나가 웃음을 터트리며 그의 제안에 수긍했다.
“그래서 얼마까지 올라가는데?”
“10만 원 선으로 하죠. 어때요? 지금부터 6개월 이내 10만 원 이상에서 매도하고 빠져나오면 제가 이기는 겁니다.”
현재가 대략 3만 원. 6개월 이내 10만 원. 불가능한 수치는 아니라도 과연 가능할까.
서하나는 자신만만하게 장담하는 유서준이 신기했다.
“좋아. 뭘 내기할 건데? 시시하게 밥 사주기 이런 것은 아니겠지?”
오히려 서하나가 의욕을 보이며 도발을 해왔다.
유서준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상대방 소원 하나를 들어주기로 하죠.”
뭔가 찜찜함을 느낀 서하나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너 설마 이상한 소원 말하는 건 아니지?”
“그건 모르죠.”
담담한 표정으로 서하나를 바라보는 유서준에게 자신감이 넘쳤다.
“흐음.”
한참 그의 표정을 보고 고민하던 서하나가 마침내 수락했다.
“알았어. 그럼 나도 엄청난 소원 준비해볼게.”
다이어리에 따르면 만호제강은 저 PBR 혁명 대표주식이었다. 외국인이 들어온 직후부터 꾸준하게 상승을 시작했던 이 주식은 93년 9월부터 본격적으로 상승을 선도했다. 그 정점은 11월 22일 시가이고 119500원에 달했다. 약 3개월간 거의 4배를 상승한 것이다.
유서준이 내기에서 이길 것은 당연했다. 그는 이미 생각해둔 소원이 있었다. 평생 그녀를 자신의 곁에 둘 수 있는. 그것은 바로 결혼 프로포즈였다.
**
월요일 아침, 출근하자마자 유서준은 이영호 대표를 만났다.
그가 아침부터 이영호 대표를 찾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그의 표정 역시 비장감이 감돌았다.
이영호는 뭔가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하고 그에게 자리를 권했다.
유서준은 자리에 앉아 호흡을 달랬다. 마치 결전을 앞둔 승부사처럼.
“자네 무슨 일인가?”
이영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유서준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물었다.
“가도건설 대부 건 벌써 집행하셨습니까?”
이영호의 눈초리가 심상찮게 돌아갔다. 유서준의 물음이 의외였던 모양이었다.
“아직 하지 않았네만 곧 집행해야겠지.”
유서준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 대부 건 취소해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이영호의 눈이 유서준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자신의 바로 앞에서 머리를 숙이며 부탁하는 사람이 유서준이 맞는지 혼란스러울 지경이었다.
가부에 대한 대답이 없자 유서준은 고개를 들었다.
그는 눈에 힘을 주고 이영호를 직시했다. 무언의 의지가 느껴졌다.
잠시 후 이영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긴말은 묻지 않겠네. 자네가 나에게 해준 것도 많고 자네를 신뢰하니 그렇게 하도록 하지. 다만 이것 하나는 묻고 싶군. 대부 집행 중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가? 그 업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아는가?”
이영호의 음성은 다소 심각해 보였다.
유서준은 곧바로 대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뭔가 생각하는 바가 있겠지. 그럼 자네는 대부 집행 중지를 원하나 아니면 가도건설의 부도를 원하나? 그 둘은 다른 거라네.”
유서준은 금방 이영호의 말의 의도를 깨달았다. 이곳에서 돈을 빌려주지 않더라도 가도건설에서는 총력을 다해 다른 곳에서 돈을 빌려 부도를 막을 것이다.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결과는 마찬가지다. 오히려 약속을 바꾸게 되면서 이곳의 신뢰만 훼손될 뿐이다.
유서준은 주먹을 꾹 쥐며 말했다.
“가도건설의 부도를 원합니다.”
단호한 그의 말에 이영호의 안면이 굳어졌다.
“가도건설이 부도나면 사장만 다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엮여 있는 많은 직원, 나아가 거기에서 일하는 노가다꾼도 다치게 된다. 그래도 괜찮나?”
유서준은 금방 대답할 수 없었다. 생각해보니 쉽게 내릴 결정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도 가도건설 사장을 용서할 수는 없었다.
유서준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그렇게 하도록 하지.”
이영호가 결심을 굳히고 토요일 전해 받은 서류를 뒤적였다.
그는 전화를 걸면서 유서준에게 말했다.
“부도를 내게 만들려면 하청을 준 시행사부터 손을 써야 해. 마침 내가 그 회사랑 인연이 조금 있지.”
전화가 걸리는 신호음이 울리고 상대방의 음성이 수화기에서 들려왔다.
이영호가 곧바로 전화기에 대고 말했다.
“아, 박사장, 나 명동 이영호요. 가도건설 말이요…….”
이영호는 당분간 가도건설에 대금 지급 중지를 요구했다. 가도건설의 자금 사정이 극히 안 좋아 사실상 기업 존속이 어려울 것이라는 사족을 달았다.
그다음 이영호는 몇 군데 대부업체에 전화를 걸었다. 가도건설 측에서 돈을 빌리기 위해 알아볼 만한 대부업체였다. 1시간이 지나지 않아 사실상 가도건설이 돈을 빌릴 수 있는 곳은 완전히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이영호는 가도건설 김사장에게 전화를 했다.
“아, 김사장. 나 이영호요. 지난 토요일 대부건 말인데…….”
전화가 길어졌다. 유서준은 유심히 전화 내용을 들었다.
“아무리 서류를 검토해봐도 대부가 어려울 것 같네. 가도건설의 부도 소문이 돌면서 사실상 자금 운용이 어렵겠더군. 우리도 떼먹힐 기업에 돈을 빌려줄 수는 없지 않나?”
이영호가 전화기에다 담담하게 말을 꺼냈다.
저쪽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영호는 단호했다. 저쪽에서 앓는 소리를 하건, 죽는 소리를 하건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잠시 후 이영호가 전화를 끊은 다음 유서준에게 말했다.
“내가 이런 대부업체를 그렇게 욕을 먹어가면서도 운영하는 이유는 부도가 날 업체가 나의 도움으로 정상화 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네. 기업 하나가 살아나면 그 기업에 연관된 많은 사람이 살아나지. 그 기업의 근로자도, 또 그 근로자에 엮인 가족도. 그래서 보람을 느끼지.”
유서준은 그의 말에 느끼는 바가 많았다. 가도건설에 속한 근로자에게 미안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김만학 사장 같은 자가 키우는 기업이 과연 정상적인 기업이라 할 수 있을까. 김사장은 그 선을 넘었다. 이번에 그냥 넘어가면 다음에는 다른 여인에게 피해가 돌아가지 않을까.
변함없는 유서준의 표정을 보며 이영호가 미소를 지었다.
“가도건설은 하청업체라 자금줄이 끊어지면 재기 불능이야. 하도급 건설업체의 특성상 모든 자산을 다 처분해도 빚 갚기가 불가능이지. 김사장 역시 재기가 쉽지는 않을 거네. 이제 되었나?”
“감사합니다.”
유서준은 다시 머리를 숙였다.
오늘은 이 정도로 복수를 해야 했다. 나중에 자신이 보다 힘을 기르면 서하나를 수렁에 빠트린 증권사 박지점장도 손을 봐줄 생각이었다.
**
가도건설 김만학 사장은 책상에 앉아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사실상 모든 자금줄이 끊어졌다.
분명히 주말까지만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자신의 계좌가 묶이긴 했지만, 명동머니에서 40억을 수혈받으면서 모든 문제는 해결되었다.
그랬던 일이 월요일 아침이 되면서 이상하게 돌아갔다.
시행사에서 당분간 자금 지급을 미룬다는 통보가 내려왔다. 실명제 때문에 시행사도 자금 사정이 어려울 것이란 짐작은 했지만, 이것은 날벼락 수준이었다. 시공사도 마찬가지였다. 가도건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큰 업체가 대금 지급을 미룬다고 했다.
김사장은 그래도 명동머니의 자금 수혈을 믿었다. 그것만 있으면 일단 당분간은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명동머니에서도 자금 지원이 어렵다는 통보가 전해졌다.
이때부터 그는 패닉에 돌입했다.
“으아아, 이게 왜 이래?”
그는 울분을 토했다. 미친 듯이 이곳저곳 전화를 돌렸다.
자금 지원은 없었다. 오히려 빌린 돈을 조기에 상환하라는 압력만 돌아왔다.
최후로 그는 증권사 지점장에게 전화했다.
지점장이라고 다른 방법이 있을 리 없었다. 거기에다 서하나가 자진해서 사표를 내고 퇴사했다는 소식마저 들려왔다.
김사장은 이를 갈았다.
뭔가 지난 주말을 계기로 주변 자금 흐름이 심각하게 엉키고 있었다.
부도는 피할 수 없었다. 그가 일군 사업이 한순간에 무너져버렸다.
그는 그 원인이 유서준, 아니 서하나였음을 짐작조차 못 하고 있었다.
당연히 그 모든 것이 자신의 행동에 따른 인과응보라는 사실도 생각 못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