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ting with 13 hidden characteristic RAW novel - Chapter (349)
‘종말’은 신의 상징물을 파괴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예상대로 불멸을 꺼트리는 힘을 지녔다.
이곳의 ‘잊힌 신’들은 대부분 이름을 잊고 퇴화되어 전성기 시절에 비하면 1,000분의 1의 힘도 제대로 쓸 쑤 없는 지경에 다다랐다.
기껏해야 ‘규칙’을 정해 그 틀 안에서 싸우는 게 전부다.
그러니, 갑자기 나타난 ‘종말’을 대처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하물며.
-인형 따위가 감히 신의 발목을 잡아?
-놔라, 놓으란 말이다!
그들이 제대로 싸울 수 없는 이유가 또 있었다.
릴리스.
저것은 시초의 인형이다.
절대로 멸망에게 넘어가서는 안 되는 그릇 중 하나였다.
영혼을 되찾고, 멸망의 권속이 되는 순간 신에 대항할 힘을 얻기 때문이다.
스아아아아!
릴리스에게서 퍼져나온 수많은 그림자가 잊힌 신들의 발목을 붙잡았다.
도망치지 못하게 만들었다.
신의 감옥.
릴리스가 각성한 절대권능!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살아남으라는 게.
-끝까지 해보자는 거냐?
-진정으로 네놈이 ‘종말’이라 할지라도, 이곳은 우리의 세계다.
-감히 나를 상대로 이딴 장난질을 해?
도망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잊힌 신들이 뭉치기 시작했다.
잊힌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정도 권능을 발휘할 수 있는 신들을 중심으로.
족히 이십이 넘어가는 숫자.
각개격파당한다면 절대로 이길 수 없을 터이나, 뭉친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에인션트!
-진짜 노망이라도 난 건가? 어째서 무릎을 꿇고 가만히 있는 거냐?
하지만 단 한 명.
에인션트라 불리는, 가장 오래된 ‘잊힌 신’은 그들의 대열에 합류하지 않았다.
아무런 저항도, 아무런 의견도 내지 않은 채.
무릎을 꿇고 가만히 ‘절망’을 바라보고 있었다.
잊힌 뒤 너무 오랜세월을 살아서일까.
기억도 나지 않는 시간 동안 고통을 받아서인지.
그는 그저.
-나의 종말이여······.
마침내 찾아온 종말을, 그저 받아들이고 싶을 따름이었다.
*
《‘잊힌 신의 상징물’을 파괴했습니다.》
《1의 멸망 포인트를 획득합니다.》
《‘잊힌 신의 상징물’을 파괴했습니다.》
《1의 멸망 포인트를 획득합니다.》
······.
《24의 멸망 포인트를 보유한 상태입니다.》
《남은 잊힌 신 : 1》
전투가 끝나고, 나는 가만히 눈앞에 꿇어 앉은 ‘잊힌 신’을 바라보았다.
이곳 세계수의 던전에서 유일하게 나를 상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신이었으니까.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이 있나?”
하여 의중을 물었다.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아서.
그러자 노인의 모습을 한 ‘잊힌 신’이 말했다.
-나를 끝내주시오. 이제 안식을 얻고 싶소.
가만히 자신의 상징물을 꺼내어, 넘기려고 했다.
그리곤.
-탐욕의 악마. 가장 오래된 악마이자······ 멸망을 변화시킨 존재여.
탐욕과 멸망.
“······.”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지금 뭐라고 한 거지?
탐욕의 악마.
멸망을 변화시킨 존재?
··· 혹시 착각한 걸까.
그의 모습을 보면 충분히 착각할 수도 있을 듯했다.
우선 노인의 모습을 한 잊힌 신의 두 눈동자는 회색빛으로 죽어있었다.
두 눈에선 고름이 나왔고, 피부는 마른 장작처럼 갈라졌으며, 백발의 머리도 풍성함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푸석푸석했으니까.
심지어 잊힌 신의 상징물 역시 관리 안 된 골동품처럼 해지고 곳곳에 균열이 간 상태였다.
이곳에서 본 어떤 잊힌 신들과 비교해도 확연하게 차이가 나는 자.
‘가장 오래된 존재.’
그건 아마도 세계수의 던전에서 가장 오래 잊힌 채 살아왔기 때문이리라.
다른 잊힌 신들이 그를 일컬어 ‘에인션트’라고 부른 것만 봐도 얼추 알 것 같았다.
그러니, 착각일 것이다.
내가 탐욕의 악마라니.
‘지금 내 모습은 란돌프다.’
7대 악마 중 한 명이 란돌프라는 건 말이 안 된다.
만약 그러했다면, 투신의 탑에서 ‘질투의 악마 산샤’를 마주했을 때 놈이 나를 알아봤을 터.
질투의 악마 역시 7대 악마 중 하나였으므로.
하지만 산샤는 란돌프를 보며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나는 탐욕이 아니다.”
탐욕스럽긴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탐욕의 악마일 수는 없다.
그러자 잊힌 신이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잘못 보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구려.
“부정하진 못하겠군.”
-확실히 나는 볼 수 없는 신이오. 하지만 그건 내가 보이는 형태에 얽매이지 않기 때문이오.
“그럼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는 말인가? 무엇을?”
-나는 영혼의 형태를 본다오.
영혼의 형태라.
영혼을 쥐고 흔드는 존재들은 몇 번 보았으나, 영혼의 형태 자체를 보고 읽는 이는 처음이었다.
그렇다면 내 영혼의 형태가 ‘탐욕의 악마’와 비슷하다는 말인데.
나는 여전히 어떠한 이해도 할 수가 없었다.
비록 내가 해왔던 행동들 모두가 명예롭다고 할 수는 없으나, 그렇다 한들 악마적인 행태를 보인 적은 맹세컨대 단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 그저 형태를 보는 것일 뿐이라면, 비슷해서 착각했을 수도 있지 않나?”
-착각할 리 없소. 탐욕의 악마는 내가 만나본 그 어떤 존재들보다도 가장 아름다운 형태를 지니고 있었기에.
잊힌 신은 확신했다.
하지만 나는 부정했다.
악마가 아름답다고?
그러나 이 노인 역시 악신이었다.
악신의 관점에서 아름답다는 말이 좋게 들리진 않았다.
결국, 세계수를 좀먹는 악자일 따름이다.
악신의 달콤한 말에 유혹되어선 안 된다.
-너무 오래 잊혔던 탓에 다른 일은 전혀 기억나지 않음에도, 유일하게 탐욕의 악마에 관해서만은 기억이 난다오.
“나는 악마가······.”
-아아, 그대는 악마가 아니오. 이는 전생의 이야기일 뿐이니. 본래 악마는 윤회할 수 없으나, 아마도 여신들이 지켜낸 것이겠지. 그대를 사랑하던 두 여신이.
“······.”
-아직도 어제의 일 같이 선명하구려. 레아, 피나······ 그리고 나는······ 나는······ 나는 누구였더라? 나, 나는, 나나나나는, 나는는는······!
그때였다.
두 여신의 이름을 입에 담은 늙은 잊힌 신이 갑자기 경기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양쪽 눈알이 미친 듯이 돌아가며, 신형이 흐릿해지고 다시 뚜렷해지길 반복했다.
‘이게 잊혀진 신의 말로······.’
잊힌 신이 소멸하기 직전에 보이는 현상인 듯싶었다.
이름을 잊혀진 신은 결국 이와 같은 결말을 맞이하는 것이다.
하지만··· 신의 최후 치고는 너무나도 비참하지 않나.
아무도 모르는 장소에서, 아무도 기억하지 않고, 기억하지 못하는 채로 영영 사라진다는 게.
그렇게 5분여 정도의 시간이 더 지났을까.
-······ 못 볼 꼴을 보였구려. 미안하오.
“괜찮다. 꽤 인상적이었으니.”
-······ 내게 안식을 주겠다 약속한다면, 내가 기억하는 전부를 말해주겠소. 탐욕의 악마와 멸망에 관해서.
“내가 직접 상징물을 파괴해주길 바라는 건가?”
-맞소. 내가 바라는 것은 그뿐이오.
과연. 손해볼 게 없는 제안이다.
그가 바라는 건 어차피 내가 하려던 행위에 불과했으니까.
멸망에 관한 이야기는 특히나 궁금하던 것.
다만, 문제는 시간이었다.
내가 란돌프로 계속해서 변신해있는다면 세계수 자체가 침식되어 폐사할 지도 모른다.
“짧게 요점만 부탁하지.”
-걱정마시오. 그리 길지는 않을 것이오.
잊힌 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탐욕의 악마는, 제정신이 아닌 놈이었소.
······ 다소 과격한 표현과 함께.
*
문명의 황금기.
신들의 힘이 가장 강력하던 시대.
모든 악마가 고래를 숙이며 하늘을 쳐다볼 수 없던 시대.
그 시대에, 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악마가 있었다.
하늘을 올려다보길 주저하지 않으며, 자신을 찾아온 신들과 매번 싸우면서도.
“너 좀 강한데? 그 기술 어떻게 쓰는 거야?”
“······.”
“좀 알려주라!”
“······ 그냥 미친놈이었군. 내 영역에서 꺼져라.”
“야, 비싼척 하지 말고 좀 알려주라!”
신들은 놈의 행동에 혀를 내둘렀다.
승리해도, 패배해도, 놈이 바라는 건 오직 싸움뿐이었으니.
심지어 누군가를 죽이지도 않는다.
불살(不殺)의 악마.
그래서 탐욕은 악마계의 이단아였다.
다른 악마들도 탐욕의 행동거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악마라면 응당 지배권역을 늘려나가며 필멸자들을 농락해야 정상이거늘.
생명체의 어두운 감정을 받아먹고 힘을 키워야 마땅하거늘.
“탐욕의 처리에 대해 슬슬 결정해야할 듯싶소만.”
“악마는 멸해야합니다.”
“하지만 탐욕은 태생이 악마일뿐, 악한 행동을 하진 않았습니다.”
“악마 주제에 하늘을 올려다 보는 걸 전혀 무서워하지 않소. 이는 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행위. 그 이유만으로도 죽여 마땅하외다.”
백신전의 신전.
최상위계 백 명의 신들이 기거하는 그곳에서는 연일 회의가 열렸다.
오늘의 주제는 ‘탐욕의 처리’에 관한 것.
하지만 좀처럼 결판이 나지 않는 주제였다.
악마인 그를 혐오하고, 그의 행태를 지적하는 신들도 있는 반면에.
“귀엽지 않나요? 악마인데 악마답지 않아서.”
“맞아. 어제는 시들어가는 꽃에 물도 주던데?”
“아, 그거 나도 봤어. 물 마시고 힘내라고 덕담도 해주더라.”
“견뎌 임마! 그래야 더 강해진다!”
“푸핫! 진짜 귀엽다니깐.”
그를 애정하는 신들도 상당히 많았기 때문이다.
물론, 주로 여신들이었다.
“어쩌다가 백신전의 기강이······.”
“하아아아!”
오늘도 이 주제는 흐지부지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도저히 결론이 나지 않았으니까.
특히 여신들 중에서도 가장 권위있는 두 쌍둥이 여신이 문제였다.
탐욕에 관해서라면 무조건적으로 편을 들어주는 두 쌍둥이 여신에 의해, 탐욕은 일종의 면죄부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괜찮았다.
세계는 황금기를 맞이했으며, 신들의 힘은 더할나위 없이 강하던 시대.
그런 악마 하나쯤은 있어도 전혀 상관이 없었다.
스스로의 힘에 대해서만 탐욕할뿐, 놈은 다른 해악을 끼치지 않았으므로.
설령 문제를 일으킨다해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
······ ‘멸망’이 출현하기 전까지는,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멸망’의 출현 이후.
모든 건 뒤바뀌었다.
황금기의 세계도, 백신전조차도.
화르르륵!
··· 전부 불에 타, 없어졌으니까.
“천상이여! 우리 세계를 어찌하여 불사르려 하는가?”
“우리에게 ‘멸망’의 형벌을 내리는 이유가 무엇이냐?”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 않으리라!”
필멸자들과 불멸자들이 한데 뭉쳤다.
가장 강력한 시대의 힘이 뭉치면 충분히 멸망도 이길 수 있으리라.
하지만, 현실을 깨닫는 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멸망은 너무나도 강했다.
세상 곳곳에 멸망의 탑이 솟아났고, 수많은 대지와 신들이 순식간에 힘을 잃은 채 멸망에게 지배되었다.
허나 가장 큰 문제는 착각이었다.
하나로 뭉쳤다는 착각.
서로가 너무나도 위대했기 때문일까.
겉으로는 하나인 척 하였으나, 뒤로는 모두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다.
결국 사흉과 내전으로 제국이 무너지며 인간들은 가장 큰 구실점을 잃었다.
드루이드들도 서로 반목한 탓에 제거되어갔다.
세계수는 시들었고, 하늘은 어둠에 잠겼다.
악마들은 더 이상 하늘을 올려다보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악신들의 힘은 나날이 커져 신들로서도 제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니, 신령한 신들이 악신으로 타락하는 일들마저 비일비재했다.
“끝이야.”
“결국······.”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신들은 후회했다.
자신들의 힘에 취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지난 날들을.
진즉에 모든 악을 소탕하였다면 이토록 허망하진 않았을텐데.
악마들이 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시대.
악마의 힘이 너무나도 방대해진 탓에 이제는 건들 수도 없다.
도리어 놈들은 신을 사냥하고, 타락시키고 있었다.
악신들?
차라리 악신들이 신사적일 지경이었다.
그들 역시 세상의 멸망을 바라진 않았으므로.
자신이 세계의 주도권을 쥐길 원했지, 멸망 자체를 반기진 않았다.
하지만 악마들은 아니었다.
놈들은 기다렸다는 듯 오직 자신의 배를 채우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있었다.
세계가 통합되지 못한건 악마들의 영향도 크게 한목했다.
멸망은 그런 악마들을 방관했으며, 덕분에 악마들은 나날이 강해지는 중이었다.
“악마들이 드디어 본성을 드러냈군.”
“백신전이 존재할땐 하늘 한 번 못 쳐다보던 놈들이······.”
“······ 그런데 탐욕은 어디갔지?”
“놈도 악마다. 탐욕도 힘이 생겼을테니 본성을 드러냈겠지.”
“하기야. 사실상 가장 큰 힘을 쥐었을테니. 과연 이전처럼 자신의 강함만을 욕구하겠나?”
남은 신들은 비관적이었다.
어느날 탐욕은 사라졌다.
하지만 멸망의 출현 이후 가장 큰 득을 본 건 악마들이다.
큰 힘이 주어지자, 미친 듯이 활개를 쳤다.
한데, 탐욕이라고 다를까?
도리어 탐욕은 더할 것이다.
세상이 멸망으로 치닫을수록 인간들의 ‘탐욕’은 강해져만 갔다.